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담마와나선원 안거해제법회 수행문답 20241013

담마마-마까 2024. 10. 15. 16:43

https://youtu.be/2tzD9FRkhk8?si=ywSd-0UAFghUAseF

 

(※ 법문 녹취와 필사 과정에 잘못이 있을 수 있음을 항상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 떼짓사라 스님 법문 】

 

아직까지는 이제 안거 기간이고, 요즘에 안거 기간에는 이제 수행하는 데 집중을 하고 해야 되는데 요즘 스님이 좀 바빠졌습니다.

요즘에 여러 가지 일들이 좀 있지만은 지금 한국테라와다 불교에 뭐가 한 가지 더 빠진 게 있죠. 뭔지 아세요? 시마홀이 하나 빠졌잖아요. 그래서 스님이 지금 아무 얘기가 없어요. 그동안에 교단에 이렇게 들어오면서 과거에는 모르겠어요. 그 시마홀 얘기가 나왔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스님이 요번에 교단 차원 이름으로 해서 교단 이름으로 해서 시마홀 건립 불사를 할까 시작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재가자님들도 시마홀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겠다고 그렇게 판단됩니다.

 

중요한 부분이고, 또 시마홀 없이는 계를 줄 수가 없어요. 또 시마홀 없이는 출가를 할 수 없습니다. 결계당 없이는 이제 계를 줄 수 없는 거죠. 지금 한국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지금 시마홀이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또 '시마홀'의 뜻 아시죠?

간단하게 얘기해서 '상가 모임' 또 '화합의 장소'죠 그러니까. 그리고 스님들이 자자를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래서 대중 스님들 상가 스님들이 모여서 우리가 화합을 하면서 수행할 수 있는 곳, 또 또 수행을 하면서 참회를 하는 거죠. 그러면서 참회가 곧 바로 그 화합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부처님 당시에 시마홀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 하신 부분들이 있죠. 화합이 옛날에 부처님 당시에 --스님과 --스님 두 분의 언쟁 때문에 파가 갈라지고 논쟁이 생기고 이게 분열이 난 거예요. 상가와 상가뿐만 아니라 재가자들까지 파가 막 갈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상가깜마를 해가지고 시마홀 해가지고 자자를 해라, 포살을 해라 해가지고 그것 때문에 생긴 겁니다.

지금 미얀마나 태국 같은 데는 뭐 말할 것도 없어요. 그냥 여기저기에 시마홀을 많이, 얘기했다고 그러면 바로 그냥 시마홀이 바로 일어서죠.

 

근데 한국에는 아직은 없습니다. 한국 테라와다 불교에는. 이 스님도 지금 이렇게 경주에 우리 수행자님들 덕분에 자리해서 열심히 수행하고 있지마는 지금 화합의 장소가 없어요. 각기 따로 있습니다.

수행을 한다 하지만은 그런데 이제 화합의 장소가 없다 보니까, 또 포살을 할 자리가 없다 보니까, 그러다 보니까 이제 여러 가지 어려운 부분이 있는 거죠. 스님이 요번에 좀 이것저것 다 깨버리고 포살을 우리가 시마홀 불사를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또 어제도 꼭 경주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일단 경주를 조금 둘러보긴 했는데 거리가 멀어요. 오기가 불편합니다. 그리고 상가 모임 장소라 하더라도 상가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재가자들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수행처를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와서 장기수행도 하고 포살하는 걸 옆에서 스님들 포살하는 것도 옆에서 지켜보고, 그리고 이제 재가자들도 힘을 내고 화합하는 거를 그 장소로 만들려고 하는 거죠.

 

근데 어제 이렇게 또 불국사 아랫동네가 유스호스텔인가 그 마을에 한 바퀴 돌았어요. 한 2시간 반 정도 걸리더라고요 한바퀴 도는데. 근데 돌다 이렇게 경행하면서 그 유스호스텔도 보고 빈 건물들도 좀 보고, 크더라구요 건물들이.

 

또 오는데 한낮 꿈속에 헤맨다고 그런 마음들이 일어나더라구요.

일어나는 마음들은 꼭 꺼지고 또 꺼지면서 또 일어나고 일어나면서 또 꺼지고 물거품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그런 마음들이 자꾸 생겨나는 거예요.

그래도 일단은 이제 스님이 스님이 개인적으로 한 일이 아닙니다. 한국 테라와다 불교에 길을 열기 위해서 마음을 낸 겁니다. 상가라는 것은 그냥 상가가 아닙니다. 화합입니다. 화합의 뜻입니다. 그래서 모여서 스님들끼리도 불사를 하고 참회도 하고 또 매달 한 번이라도 모여서 모든 스님들이 같이 생활을 해야 됩니다.

 

혼자 있는 그 시마홀은 존재하지 않아요. 여러 스님들이 모여 살아야 돼요.

그곳에 와서 또 재가자들도 와서 수행도 하고 또 재가자들끼리 또 참회도 하고 그러면서 법의 힘을 키워나갑니다. 부처님 가르침 대로. 그리고 경전 독송도 하고. 늘 수행 수행 얘기는 많이 하지만 실제적인 거는 화합도 중요합니다. 화합이 가장 중요합니다. 화합을 하면서 수행을 해야 됩니다.

수행 잘한다고 해서 이기주의적으로 생활을 하고, 자신만 아는 실제적인 자신만 아는 거니까, 그러나 타인에 대한 배려심 이해관계 존중하는 마음 등 그리고 수행자들 몫입니다. 아시겠죠? 시간 관계상 여기까지 하고, 모두 좋은 결과 함께 성취하길 바랍니다.

 

 

【 아짠 빤냐와로 스님과 함께하는 수행문답 】

(9:30초부터 시작됩니다.)

 

Q.수행자 질문 : 스님께 부끄러워서 참 질문을 못 드리겠는데요.

스님하고 인연은 참 오래됐지만, 항상 스님 법문이 너무 좋고 스님 밑에서 수행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참 많았는데, 제가 하는 수행이 아나빠나사띠 수행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이게 제가 봤을 때는 꾸준히 집중적으로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욕심이 항상 더 앞서는 것 같고, 그리고 내가 오장애가 어느 정도 좀 가라앉아져야 이게 될 건데 참 잘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아, 진짜 아나빠나 사띠하지 말고 지금 진용 스님은 항상 수념처를 그때 하신다고 하셨는데 "호흡수행을 하면 변화를 알아차려야 된다" 하셨는데 너무 저는 그게 어렵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아나빠나사띠만 하고 있는데 잘 안 되거든요.

근데 제가 지금 이러면은 어느 정도 집중력이 생기고 아나빠나사띠가 한 근접삼매 정도 갔을 때 스님께서 하신 그 방법으로 들어가야 됩니까?

 

A.스님 : 지금 아나빠나사띠를 쭉 하셨다고 그랬는데 아직 삼매는 체험을 못 해봤고? (수행자 : 예) 그럼 아나빠나사띠 하면서 뭘 체험해 봤어요?

Q.수행자 : 고요하고 내 마음이 편안하고 그거는 일시적으로 자꾸 인제 생기고, 그런 거죠 편안한 거는. 근데 스님께서 “수행을 그냥 편안한 상태에서 탁 머물려고 한다” 그렇게 하셨잖아요. 근데 저는 아나빠나사띠니까 자꾸 이제 삼매로 들어가려고 하는 그런 욕심이 많은 거예요.

A.스님 : 근데 삼매는 체험 못 해봤다면서.

Q.수행자 : 그러니까 자꾸 욕심이 생기는 거예요. 근데 이게 어느 정도 돼야 스님께서 하시는 수행을 배워도 진도가 나갈 수 있을까? 자꾸 이런 의심이 있는 거죠.

 

A.스님 답변 : 답이 없다. 본인이 그거는 계속 하고 싶고, 체험한 건 없는데 그렇다고 바꾸기도 싫고, 스님이 답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거 같아서 그래요.

근데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를 체험한 상태에서 그냥 거기 머물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은 그렇게 해가지고 죽을 때까지 있을 수 있으면 해. 근데 그럴 수 없잖아. 아나빠나 사띠하면서 이런 생활은 못할 거고, 죽을 때 그렇게 고요한 상태에서 아나빠나 사띠를 한다는 보장도 못하잖아. 근데 왜 그렇게 고집을 해?

 

삼매를 개발하는 사마디 수행을 하는 거는 그게 사띠의 힘을 키우기 위한 것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사띠의 힘이 커지면은 당연히 장애들이 안 일어나고 바로 도와 과 쪽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상태기 때문에 대부분 위빳사나 수행하는 분들은 사마타 수행을 하더라도 힘을 키우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을 하는 경우들이 많아요.

특히 출가한 스님들은. 물론 사마타 수행만 열심히 또 닦아가는 스님은 따로 있지만 그거는 극히 소수입니다.

 

대부분은 위빳사나 수행의 보조적인 수단으로서 하는 게 아나빠나사띠라는 거라. 그래서 뭐 아나빠나사띠를 하든지 아니면 불수념을 하든지 자애 수행을 하든지 그거는 본인이 선택하는 거라.

 

그런데 중요한 거는 아직 삼매를 그렇게 했는데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거는 본인이 지금 아나빠나 사띠를 돌아봐야 돼. 제대로 하고 있는 게 아니란 뜻이거든.

그냥 고요함을 즐기고 머물고 있지,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걸 관찰하는 상태는 아닌 것 같애.

 

그러면 계속 그 방법으로 해서 그냥 그 시간 동안만큼만 편안하게 있다가 그냥 나올 건지, 그렇지 않으면은 좀 다른 사마타 수행이라도 다른 방법으로 접근을 할지 본인이 한번 결정을 해보라는 거라. 그러면 봤을 때는 사마타 수행을 하더라도 아나빠나사띠가 아니라도 자애수행을 하든지 아니면 불수념을 하든지 이런 방법으로 충분히 그거는 가능하기 때문에, 한번 방법을 조금 바꿔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바꾸더라도 그것은 내가 대상에 집중하는 힘을 키우기 위한 거라고 마음을 먹어야 되는 거지, 다르게 자꾸 마음먹지 말아라는 거라. 그리고 중요한 거는 지금 이생에서 남아있는 기간 동안 어쨌든 죽음에 이르러 가지고 다른 것들로 인해서 현혹되진 않도록은 해야 될 거 아니라? 그게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근데 지금 현재 상태는 그걸 보장을 못하면은 바꾸라는 거라.

현혹되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현혹될 만한 대상들이 별 의미가 없어야 돼요.

그러면 그것들을 평소에 수행하면서 경험을 해봐가지고 ‘아! 이거 별 거 아니네’ 하고 알고 있어야만이 마지막 순간에도 거기에 현혹되지 않는 것들이라.

 

우리 모친이 그런 적이 있어요. 모친이 스님이 태국에 있을 때부터 스님이 배우는 거니까 나도 한번 해보겠다 해가지고 가르쳐 달라 해가지고 아나빠나사띠를 가르쳐줬어요. 근데 나이가 있으니까 (질문자와) 마찬가지로 느낌에 대한 관찰을 처음엔 잘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이렇게 하는 상태에 있었는데, 그러다가 인제 어느 날 암에 걸려있었어요. 죽음이 멀지 않았거든. 그런데 호흡 아나빠나 사띠만 쭉 이렇게 하는데도 두려움이 자꾸 일어나는 거라. 그러니까 그럴 때마다 “스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래요. 그래서 매몰차게 스님이 그렇게 얘기했어요.

 

“어차피 죽어야 되는데 무서워한다고 안 죽어?” 그랬어요. 근데 그 소리가 좀 매몰차게 들렸을지 몰라도 가슴이 탁 박혔던 거라. ‘어차피 나는 죽게 돼 있다’는 거라. 그걸 이제 받아들이는 순간에 그다음부터는 아나빠나사띠 하더라도 두려움이나 이런 것들 없이 그냥 호흡을 할 수 있다는 거라.

그러다가 얼마 있다가 내가 보는 앞에서 임종을 했는데 임종을 할 때도 암이니깐 그게 통증이 있는 데도 통증하고 관계없이 호흡을 그렇게 하시더라구요. 편안하게 돌아가셨는데.

 

본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도 아나빠나 사띠를 계속해가지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할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리하더라도 어쨌든 한계는 지니고 있다는 거라. 삼매를 내가 경험을 해봤든 해보지 않았든 아니면 마지막 순간에 그 두려움이 없이 그냥 호흡을 관찰하면서 죽음에 이르르든 안 이르든 어쨌든 한계는 있다는 거라. 좀 더 좋은 데 태어나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거라.

 

그걸 만족한다 할 것 같으면 그렇게 해도 돼요.

그렇지 않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빨리 호흡의 느낌을 볼려고 해야 되는 거라.

호흡의 느낌을 보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는 변하는 게 안 보여.

그래서 그렇게 빨리 전환을 시켜줘야 돼요. 사마타에서 위빳사나로 전환을 시켜 주듯이 전환을 시켜 줘야만이 내가 집착하는 것들이 없어지게 되는 거라.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바른 방법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인제는 오랜 시간 누구한테 그 지도를 받았는지 몰라도 해온 거는 잘한 건데 잘했더라도 계속 그렇게 해가지고 죽음에 이르지는 말아라는 거라.

되도록이면은 적어도 사마타 수행을 아나빠나사띠를 하더라도 집착함이 없이 두려움이 없이 호흡을 보면서 죽음에 이를 수가 있도록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은 무상·고·무아를 자꾸 보는 훈련들을 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마지막 순간에 호흡을 보더라도 변하는 걸 보면서 죽으면, 그것같이 좋은 게 어디 있어요? 어차피 이 몸도 변해가지고 다음에 어떤 식으로든 바뀔 건데. 그러면 대상에다 마음을 집중하는 훈련들을 그런 식으로 해야 되지, 하나에다가 자꾸 집중하는 훈련만으로 만족해 하지 말아라는 거라.

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고요하고 평온한 것을 즐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을 오히려 게으르게 만들어요. 그래서 그냥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생각하고 해보십시요. 그렇게 한번 해보십시요.

 

Q.수행자 질문 : 질문이 있는데요, 제가 평상시에 어떤 바라밀이 부족한가에 대해서 좀 분석하고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데, 그중에 저는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딧타나 빠라미가 부족하다’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A.스님 : 아딧타나?

Q.수행자 : 네. 근데 다른 바라밀에 비해서 그 바라밀은 어떻게 하면 쌓을 수 있는지 찾아봐도 좀 내용이 없어가지고요, 물론 당연히 수행을 하면은 뭐 쌓아지는 거는 몇 가지 바라밀들은 다 있지만 일상에서 아딧타나나 빠라미를 좀 강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알고 싶구요.

 

A.스님 답변 : 일상보다는 아딧타나는 수행을 통해가지고 결정심을 내는 것이 바른 방법인데, 일상에서 결정심을 내는 거는 그건 습관적인 것밖에는 늘지를 않습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봅시다. "이번에 1시간 동안 수행할 동안에 절대 움직이지 않고 수행하겠다." 그것도 결정심에 들어가집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수행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거는 일상에서 지금은 내는 거죠? 근데 실제로 1시간 동안 안 움직이는지 어떨지는 본인도 모릅니다. 그런 마음이 물론 강하면은 그 결정심으로 인해가지고 1시간 동안 안 움직이고 할 수는 있겠죠. 근데 1시간 동안 앉아가지고 움직이지 않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 그 속에서 내가 얼마만큼 사띠가 굳건하게 유지가 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거라. 그래서 일상에서 할 것 같으면 결정심은 조금씩 커질지 몰라도 그것이 꼭 선한 열매를 가져오는 결정심이 된다고는 보장을 못합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수행에서 어느 정도의 과정을 이렇게 쭉 겪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결정심이 올라옵니다. 자기도 모르게.

삼매를 경험해 보고 나서 ‘아! 내가 왜 이렇게 내 맘대로 삼매에 들지 못하지?’ 그러면 그때 인제 수행에서 인제 결정심이 일어나지게 되는 거지. 위빳사나 수행을 하더라도 꼭 마찬가지라. 호흡을 관찰하는데 느낌이 변하는 것들이 보이는데 그게 빨리 변하는 것들이 안 보이면 ‘아, 내가 왜 이렇게 뭐가 부족하지?’ 하면서 돌아보게 되는 것도 결정심이라.

 

그렇게 수행에서 결정심을 내야만이 진척이 빠르지, 일상에서는 그냥 습관적인 것밖에는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결정심은 물론 부처님 당시 때는 ‘내가 부처님 시대 때 태어나게 해 주소서’하고 그렇게 결정심을 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시기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그냥 수행할 때 결정심을 내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결정심이 있어야만이 다른 바라밀들이 성숙이 되는 거라.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요.

 

Q.수행자 : 그러면은 제가 결정 아딧타나빠라미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게 바른 판단인지 좀 잘 모르겠는 게요, 그러니까 저의 경우에는 ‘하겠다’ 라고 마음먹으면 100에서 120프로를 하거든요. 근데 힘들기 때문에 ‘하겠다’라는 마음 자체를 잘 먹지를 않아요. 그렇기 땜에 전 아딧타나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건데

A.스님 : 아니 그건 아니고. 그거는 일상 때 결정심을 강하게 내는 것들은 충분히 하고 있으니까,

Q.수행자 : 그러니까 수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거든요. 1시간이건 3시간이건 만약 움직이지 않겠다라고 결정을 하면 3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할 수 있구요, 그걸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은 있는데요.

A.스님 : 그러니까 그거는 결정심하고는 관계없이 수행의 힘인 거지.

근데 그게 있다고 해가지고 3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한다고 해가지고 어떤 이익들이 있었느냐는 거라. 그걸 보라는 거라. 그래서 그런 이익이 없을 것 같으면은 내가 3시간 동안 앉아서 좌선하겠다 하고 마음을 먹어본들 그런 결정심이 성숙되도록 만들어주질 못한다는 거라. 결정심은 수행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지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마음을 먹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Q.수행자 질문 : 스님 제가 초보라서, 그 '유랑극단' 말씀하셨고 '생중계' 말씀하셨잖아요. "생중계 하는 것처럼 사띠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생중계 할 때 예를 들어서 제가 손을 씻으면 제가 조그마해져 가지구 이 손잡이 앞에 제가 앉아서 저를 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경행할 때도 제가 이만해져가지고 왼발 오른발 해서 오른발을 이렇게 상상을 하면서 하니까, 바깥에서 저를 보고 있는 것처럼 느낌이 드니까 잘 됐었거든요. 그렇게 하면 안 되나요?

A.스님 : 상상을 왜 해?

Q.수행자 질문 : 저를 봐야 되는데 그냥 그게 안 돼서 제가 작아져가지고 그냥 저를 이렇게 옆에서 보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공중에 떠서 위에서 보고 일상생활 할 때 손 씻을 때 보고 걸을 때도 왼발 오른발 깡총깡총 막 이러면서 제가 저를 마치 이렇게 바깥에 나가가지고 '작은 내'가 되고, 그렇게 하면 안 되죠?

A.스님 : 본인이 그렇게 보인다는 거지, 그렇게 보여요?
Q.수행자 : 그렇게 하니까 좀 바깥에서 저를 보는 느낌이 드니까 좀 집중이 돼서

 

A.스님 답변 : 편하고 집중이 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은 그거는 ''라고 하는 아()가 강하기 때문에 그런 망상들을 하는 거라.

Q.수행자 : 그럼 하면 안되는 거죠?

A.스님 : 안 돼요. 어떠한 경우든지 망상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차라리 자! 그냥 편안하게 수행을 하는데 수행 대상에 사띠를 둔다고 먹어야지 그걸 자꾸 경전이나 논문 등을 통해서 누구가 뭘 봤더라 뭘 봤더라는 그걸 볼려고 자꾸 마음먹으면 안돼요. 그거는 전혀 수행에 도움이 안 되니까.

그냥 내가 하는 거는 그냥 대상을 사띠하는 것밖에 없다. 그게 어떻게 보이든 아니면 어떻게 바뀌든 그것은 나에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나는 사띠만 하고 있으면 돼. 그렇게 마음을 먹도록 하십시요. ‘밖에서 대상이 보이니, 안에서 내가 뭐 바껴지고 있니’ 그거 중요한 거 아니라. 본질을 잊어버리면 안돼.

 

현재 지금 대상에다가 마음을 사띠를 두는 것 그거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게 생중계라. 실황중계이기 때문에 고것만 마음에 두면 됩니다.

가끔씩 그 우리 선원에서도 그런 게 있습니다. 그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으면은 본인이 호흡 속에 들어가가지고 막 이렇게 커지고 하는 게 보이는 경우들이 있어요.

틀림없이 있을 수 있는 얘기입니다.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근데 그런 것들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사띠하는 거를 놓치고 쫓아가버립니다. 그래서 본질을 자꾸 잊어버린다는 거라.

 

내가 해야 되는 거는 그냥 호흡에 사띠하는 것뿐이라. 그것만 하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게 변하는 것들이 보여지고 지가 사라지게끔 되는데, 지가 그 속에 들어가 버리게 되면은 이건 지가 그걸 키우게 되는 거라.

그럼 수행이 그러면은 방향이 어긋나져버리는 거라.

그냥 대상에다가 사띠를 두고 있는 것! 그게 무상한 성품으로 보이는 것이든 아니면 그냥 오롯하게 그냥 보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라. 대상에 마음을 두고 있느냐 아니냐만 자꾸 체크를 하면은 수행은 되어지니까 그렇게만 한번 해보십시요.

 

특별한 경험하려고 하지 말고, 그리고 특별한 경지에 오르려고 생각도 하지 말고, 오히려 대상에다가 마음을 그냥 계속적으로 사띠만 하고 있으면 세상에 이같이 수월한 게 없고 이같이 재미있는 게 없다는 걸 알게 되는 거라. 세상 사는 맛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도록 해보십시요.

아! 재미없습니까? 사띠하면? (수행자 : 재밌어요.) 재미있잖아! 이같이 재밌는 게 어디있어? 내가 확 깨어나는 느낌이 드는데, 그거 같이 좋은 게 어딨어! 일부러 다른 것들을 만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Q.수행자 질문 : 스님, 경행을 할 때요 그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가고 닿고 다시 들어올리고 하는데 그 나아갈 때는 이게 길거든요.

‘나아감’ 하는데 그 안에서 여러 가지가 느껴지거든요. 그러면 거기에다가 다 명칭을 붙여야 됩니까? 아니면은 그냥 ‘나아감’ 하면서 느낌이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구나 하고 알면 됩니까?

 

A.스님 답변 : 나아가는 것만 분명하게 볼 수 있으면은 나아감한 번 붙여도 되고, 나아가는 동안에 망상이 자꾸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 나아감을 쪼개라!

‘나아감, 나아감, 나아감’ 하면서 쪼개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은 ‘나아감’ 하면서 실제로는 발은 나아가고 있을지 몰라도 마음은 거기게 안 가있고 망상이 가득해있는 거라. 그러면 안되는 거라. 그럴 때는 ‘나아감’을 쪼개줘라!

그게 쪼개지는 것이 자꾸 많아지다 보면은 보통 뭐 여러 개로 이렇게 ‘나아감’의 단계들을 갖다 설정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하는 것이 좋고, 중요한 거는 대상에다 마음을 갖다 붙이기 위해서 명칭을 붙이는 것인데, 그 명칭을 붙이는 동안에는, 명칭을 붙이는 거는 망상하지 말고 대상에 집중하라는 거잖아. 그런데도 망상이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 그 명칭 자체를 갖다가 조금 더 망상이 일어나지 않을 만큼 여러 가지로 붙이라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하라는 거라.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도 마찬가지라.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는 ‘불러옴’ 하고 있는 동안에 배가 불러올 동안에 망상이 툭툭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그러면은 어떻게 해? ‘불러옴’을 갖다가 여러 개로 나누어야 되는 거라. 그 수밖에는 없어.

호흡을 할 때도 수행을 하다 보면 잘 안 되잖아. 들이쉬고 내쉬고 하고 있는 것들을 관찰하다가 망상이 일어나고 할 거 같으면 들이쉬고 내쉬고 하다가 앉아있고 닿아있고 하는 걸 관찰을 하라는 거라. 일어남이 끝나는 상태에서, 그다음에 사라짐이 끝나는 상태에서 앉음, 닿음을 관찰하라는 거라. 그마만큼 마음이 빨리 움직이고 바삐 움직이도록 하라는 거라. 그래야 망상을 안 할 거 아니라.

근데 망상을 계속적으로 하는 상태가 될 것 같으면 그거는 나아갈 때 스무스하게 움직이는 것 같으니까 망상은 크게 일어나지는 않겠지. 그리 하더라도 망상이 일어난 것은 일어난 거라. 그러면 대상을 분명하게 보지 못하는 거라.

 

? 지금 수행하고 있는 거는 변하는 것이 보여야 되거든. 근데 안 변하는 거라. 그냥 나아가는 것 뿐인 거라. 발을 들어올려도 변하는 게 안 보여. 처음 들 때나 중간에 들 때나 마지막에 들 때나 드는 게 똑같애.

근데 아니잖아. 실제로는 바뀌고 있는 건데, 그 바뀌고 있는 거를 봐야 되는 거라. 그래야 위빳사나 수행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명칭을 나누어라는 거라. 나눠 가지고 보도록 자꾸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망상이 일어났을 때는 망상을 그칠 수 있는 조건들을 자꾸 만드는 것들이 좋습니다.

 

Q.수행자 질문 : 스님, 망상과 조금 아까 말한 아딧타나 결정심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어요. 제가 제 수행을 초기에는 아무리 내가 이러리라 저러리라 해도 망상이 지가 올라오는 거를 제어할 수가 없이 올라오잖아요.

근데 지금은 제가 경행할 때 좀 여러 가지 ‘지금 뭘 해야 되나’ 그런 해야 할 일에 대한 망상이 올라오는 걸 알고 ‘아, 내가 적어도 요 갔다 왔다 하면 요만큼에는 절대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게 하리라’ 이렇게 마음을 먹으면 실제로 마음이 이제 움직이는 모습에 오로지 더 있게 되기 때문에 망상이 안 올라오는구나 하는 거를 제가 최근에 좀 여러 번 경험을 했거든요. 그래서 그것이 진짜 되는구나 이런 것을 알게 됩니다.

 

A.스님 답변 : 되는 것처럼 보이겠지. 그건 되는 건 아니고, 망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아라한에 이르기 전에는 일어납니다.

단지 그게 잠재돼가지고 잘 드러나지 않는 것뿐인 것이지,

그래서 망상을 그칠려고 자꾸 하면 안 돼요. 망상이 아니라 자아가 무상하다는 걸 갖다가 알면은 망상은 줄어들고 나중에는 결국에는 없어지게 돼요.

그렇게 자꾸 만들어야 되지, 망상을 피하기 위해서 자기가 판단을 해가지고 물론 되지. 되긴 하겠지만 의미가 없다는 거라.

 

Q.수행자 : 약간 시험적으로 좀 마음이 어떻게 작용을 하나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실험적으로 해봤더니, 그게 조금 되는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A.스님 : 그렇긴 하지. 마음은 그래서 참 묘해가지고 내가 결정한 것에 따라서 그렇게 움직인다고 이렇게 하기는 합니다. 그래서 내가 딱 결정해버리고 나면 그것에 따라 마음이 따라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렇긴 하는데 수행에서는 크게 도움이 안 돼요.

Q.수행자 : 알겠습니다.

 

Q.수행자 질문 : 스님, 이게 올라감이 있고 나아감이 있고 나아감이 있어야지 내려감이 있고 내려가면 또 어느 정도 닿음이 있고 이런 것들이, 경행하면서 계속 그것도 망상이죠?

A.스님 : 생각을 왜 해? 그냥 그대로 그냥 보면 되지.

Q.수행자 : 보이는데, 그런 느낌이 자꾸 그런 ...

A.스님 : 마음이 든다고?

Q.수행자 : 그런 마음이 들어요.

A.스님 : 하지마! 어떠한 경우든지 그냥 그대로 보면 돼. 물론 그게 맞아. 틀린게 아니야. 당연히 나아감이 있으면은 돌아오는 게 있는 거고, 내려놓는 게 있으면 닿음이 있는 거고, 그거 ‘어 그렇네’ 하고 그 이치를 갖다가 곰곰이 생각한다 해가지고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어? 그 시간 동안 오히려 지금 현재를 자꾸 놓쳐버리게 되거든.

Q.수행자 : 현재를 놓쳐버리면 안되니까

A.스님 : 그럼. 그건 하지 말아라는 거라. 하지 말고 그건 니가 있으니까 그런 망상을 하는 거라. 수행에서 자꾸 나를 개입을 시키지 말아라는 거라. 개입시키지 말고 쪼개. 나아감, 내려놓음, 닿음 이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쪼개라는 거라.

쪼개버리면 닿음에는 '나'라는 것이 없어.

Q.수행자 : 계속 ‘나아감, 나아감, 나아감’ 이렇게?

A.스님 :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 그렇게 하도록 하고, 망상은 금물! 하지마! 수행에 도움이 안 된다는 거라.

 

Q.수행자 : 생각을 하지 말아라는 거죠?

A.스님 : . 생각을 하지 말아라. 생각은 아라한이 돼도 일어나지기는 합니다. 근데 그거는 사고하기 위한 것이지, 다른 망상을 위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할 일이 뭐다 할 것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준비를 하고 만약에 스님 법문할 게 있으면 법문 준비를 하고 요렇게 해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고 있는 거, 이런 것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근데 그거는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가지고 나는 그걸 하더라도 마음을 항상 고요함이 있고 대상을 놓치지 않은 상태가 되기 때문에 그건 문제가 되진 않는데, 그래서 현재를 놓치질 않는다는 얘기라. 어떠한 경우든지.

 

근데 망상이란 놈은 현재를 다 까먹게 하는 거라. 그거는 안된다는 거라. 집에 금송아지 10개를 만들어 놔봐야 니 게 아니라는 거라. 그렇게 마음 먹으십시요.

그것 가지고 괜히 마음 편안하게 만들려고 하지마. 알았죠?

일부가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수행이 잘 안되면 억지로 막 지어내가지고 수행 잘하고 ‘아! 너무 좋다’ 하고 이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수행 초기에는 스님도 그래봤어. 그랬는데 그거 별 의미도 없어. 고통스러운 게 찾아올 때는 안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또 찾아와. 정도가 문제지, 정도가 크면은 아무리 망상부릴려고 해도 망상 부릴 수가 없어. "망상은 의미가 없다" 하고 마음을 먹으시기 바랍니다.

 

Q.수행자 질문 : 수행을 이제 호흡수행을 하다가 보면은 인제 호흡들이 변하는 것을 계속 보다가 보니까요, 제 마음이 자유롭고 고요하고 몸이 굉장히 가벼워지면서 행복한 느낌이 이 상태로 있더라구요. 계속 호흡을 놓치지 않고 보니깐요.

그런데 갑자기 제가 자애수행을 할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기쁘고 행복한 그 마음으로 자애수행으로 자동적으로 이렇게 전환이 되더라구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끝까지 그렇게 가야 되는지 전환하면 하는 대로 알아차리면서...

A.스님 : 하고 나서 어떻게 했어요?

Q.수행자 : 하고 나서 너무 행복하죠.

A.스님 : 너무 행복했는데 그러고 나선 어떻게 했느냐는 거라.

Q.수행자 : 그 자애의 마음이 계속 생긴

A.스님 : 상태에서 일상생활을 했어요?

Q.수행자 : 예예. 그렇게 생활이 되더라구요.

A.스님 : 뭐 하루 정도는 행복했구만.

 

Q.수행자 질문 : 1주일 정도 행복했어요. 나가 없는 이 상태로 요렇게 계속 바라보니까 그냥 담마만 보이고 그 사람의 잘못한 거나 이런 건 아무 지장이 없고 그런 식으로 보이더라구요.

이게 자동 전환이 되는 게 제가 이렇게 망상을 해서 되는 건지...

A.스님 답변 : 전환이 된 게 평소에 마음을 넓게 자꾸 쓰는 훈련들을 해가지고 남에게 자애의 마음들을 자꾸 가지게 되고 그런 사람들이 훈련할 때 그런 자애의 마음을 지닌 채 위빳사나 수행을 하게 되거든. 그러면 위빳사나 수행 대상이 희미해진다든지 뭐 이러면 자동적으로 마음이 자애 쪽으로 넘어가진다는 거라.

그러면 자애의 마음은 또 키우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위빳사나에서 사마타로 넘어갔다가 또 사마타에서 빠져나오고 이런 상태가 되는 거기 때문에 나쁜 거는 아닙니다.

잘 했는데 일주일 행복했으면 됐습니다.

 

그 대신에 마음을 항상 둬야 되는 거는 수행에는 어떠한 수행을 한다는 건 선한 마음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 선한 마음이 되도록이면 자애의 마음인 것도 좋다는 거라. 그런 마음을 지니고 수행을 하는 습관을 자꾸 가질려고 마음을 먹으면 됩니다. 그러면 전환이 잘 되게 됩니다. 그러면 사마타 수행을 해도 금방 빠져들게 되고, 또 전환할 줄 알기 때문에 다시 또 위빳사나로 전환할 수가 있고 하니까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끝

 

Q.수행자 질문 : 간단한 질문인데요.

그 몸을 관찰하거나 할 때는 이제 사띠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차리고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그거는 있는데, 궁금한게 사고한다던가 생각, 공부 이런 걸 거 할 때는 가끔 독서할 때나 이럴 때 사띠가 있는가, 마음을 어디다 둬야 되는가, 이거를 집중하고 있으면은 그 집중은 사띠가 없다고 봐야 되는 건지 그게 좀 궁금하더라구요.

A.스님 : 책을 보고 있을 때?

Q.수행자 : 네. 또 사고할 때에는 사띠 알아차림이 있다고 하는 거, 그러니까 생각하고 그런 사고를 하거나 책을 읽을 때는 나중에 지나고 나서 어 알아차림이 없었다거나 거기에 제가 몰입이 되니까 그렇게 생각이 되어지는데

A.스님 : 알아차림이 없었으면 책을 읽고 있으면 책 내용이 머리에 들어와 있지는 않을 거고

Q.수행자 : 예. 계속적으로 마음을 거기에 기울인 건 제가 알면서 계속 보면서 하거든요.

A.스님 답변 : 그리하더라도 내용을 모른다고 할 것 같으면 사띠가 없었지. 사띠가 약했든지. 그러면서 책을 분명하게 기억을 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리고 책을 기억하고 있는 동안에 망상이 없었다고 할 것 같으면 최고 잘 사띠를 하고 있었던 상태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은 망상을 하든지 아니면 대상에 묶여있는 상태라. 나에 대한 생각으로 내가 딱 묶여있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래서 대상을 분명하게 기억을 한다 할 것 같으면 사띠하고 있었다고 판단하면 됩니다.

 

자. 인제 그만하고 11월달에 까티나죠? 까티나 때 와서, 아마 그러고 나면 올해는 마지막이 될 거 같애요.

(수행자 :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요. 수행들 열심히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