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vL-Ok2xSndY?si=8neT1L3RY0tZfs2A
* 갈애(taṇhā)는 강력한 자석이다.(241116)
오늘은 "갈애라는 딴하(taṇhā)는 강력한 자석이다." 하는 얘기를 하겠습니다.
얼마 전 교단법회에서 '욕망은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니다.' 뭐 이런 얘기가 나왔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걸 조금 짚고 넘어가야 될 거 같애서. 빨리어 용어로 그때 욕망을 뭐 어떤 빨리어 용어를 썼는지는 스님도 몰라요. 그땐 법문을 스님은 아예 안 들었어요. 그냥 앉아서 좌선해갖고 있어가지고 뭔 얘기했는지를 하나도 기억을 못 해요.
근데 아마 거기서 말한 욕망은 이런 딴하-(taṇhā) 같은 것들이나 까-마(kāma) 같은 거나 로-바(lobha) 같은 거나 이런 걸 얘기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그렇겠죠? 성인들한테는 그게 없잖아. 부처님한테는 그게 없잖아. 그러면 욕망을 의미하는 단어 중에 부처님한테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뭐가 있어요? (수행자 : 찬다가 있습니다.) 그렇지.
부처님은 행하는 것이 법에 맞게끔 법에 맞는 그 법을 설할 때를 찾고 법을 설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걸 인제 '담마 찬다(dhamma chada)'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분명히 부처님한테는 찬다가 있죠.
그다음에 또 뭐가 있을까? 부처님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성인일 때, 성인이 아꾸살라(akusala)를 짓지는 못하겠죠? 그래서 꾸살라(kusala)만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은 '꾸살라 찬다(kusala chanda)'가 있을 거고.
그래서 찬다(chanda)의 영역에서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듯이 그게 애착이나 집착이나 감각적인 욕망과 결합한 찬다일 경우에는 나쁘게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빨리어 용어 아마 '욕망'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마 한 20가지는 될 겁니다. 근데 그게 좋고 나쁨의 판단이 아니고 그것을 어쨌든 발견해서 그것을 제거하라고 돼 있지, ‘좋으니까 잘 활용해 봐’ 이렇게 한 적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런데 찬다(chanda)도 가만히 보면 나쁜 데 연결될 수 있는 거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좋게 연결되는 것들이 불교에서 가르치는 것이지 나쁘게 연결된 걸 불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없습니다.
대표적인 게 찬다가 나오는 게 뭐가 있어요? 사여의족 같은 거! 신통을 개발하는 거지만 수행을 계속적으로 지속하게 하는 힘이 되는 것들이 이 사여의족 입니다. 그때 맨 처음에 찬다가 먼저 있어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냥 가까운 예를 들어봅시다. ‘수행하고 싶다’하는 마음이 들어야 수행을 할 거 아니라. 그러니까 수행을 하고 싶다 하는 마음이 쉽게 말하면 찬다라고 보시면 됩니다. 오늘 같은 경우도 ‘스님한테 와서 보시하고 싶다’ 하는 마음이 들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일으키는 것들이죠. 선한 마음들을 일으켜주고 하는 그런 것들. 부처님이 그런 것들을 권장했지 아꾸살라하고 연결되는 것들하고 권장을 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볼 거 같으면은 '욕망'이란 단어는 부정적인 것으로써 부처님이 쓴 것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좀 이해를 해 주십사 하고 스님이 얘기를 드리겠습니다. 그냥 맹목적으로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니까 잘 활용하라’ 이렇게 얘기를 해버리면 그건 부처님 말씀하고는 완전히 벗어날 수도 있는 경우가 되니까.
오늘은 그걸 얘기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딴하(taṇhā)라고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딴하가 뭐죠? (수행자 : 갈애) 갈애라고 얘기하죠. 왜 갈애라고 할까? 갈애는 뭐라? (수행자 : 갈망) 뭔가 원하는 거지. 막 갈망하는 것.
철이 있으면 철이 한 극으로만 이렇게 일렬로 배열이 되면 그게 뭐가 되죠? 자석이 되죠. 그럼 자석이 되면 자석은 모든 다른 철들을 갖다가 끌어당깁니다. 거기에는 끌어당기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까? 자석이 세면은 많이 끌어당기게 될 거고 약하면은 적게 끌어 당기기는 할 겁니다.
이 딴하(taṇhā)라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냥 끌어당기는 힘이라고 보면 되는 거라. 끌어당기는 힘인데, 뭘 끌어 당길까? 보통 3가지 얘기하죠. 까마, 바와 그다음에 뭐? (수행자 : 위바와) 까마(kāma), 바와(bhava), 위바와(vibhava) 그렇게 3개가 있죠.
그런데 인제 잘못 이해하는 게 까마(kāma)를 '감각적인 욕망'으로만 자꾸 이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제 수행하시니까 대표적으로,
수행하는 분들에게 까마 딴하(kāma taṇhā)가 일어나는 경우가 어떤 경우가 있느냐?
편하게 수행할려고 하는 것!
그냥 일반적인 재가 생활하는 사람이면 ‘좀 시끄럽고 떠들고 하는 거 싫어. 좀 평화롭게 좀 지내고 싶어’ 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거하고 꼭 마찬가지 패턴입니다.
수행을 그렇게 하면은 그 마음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까마 딴하가 일어나게 됩니다.
또 수행할 때 많이 일어나는 게 뭐가 있을까? 보통 까마는 뭐로 일어나요?
맛보고 뭔가 이렇게 접촉하고 그다음에 냄새 맡고 이런 데서 일어난다는 거라.
그런데 대부분은 보면 수행하는 사람이 공양할 때도 그 맛을 그냥 느낍니다. ‘음 맛있어’ 하고 합나다. 꽃이 피면 꽃 냄새 맡으려고 그러고, 뭔가 수행할 때 불편하다 할 것 같으면 그런 불편한 감촉이 있을 거 같으면 그거 피하려고 하게 되고, 전부 감각적인 갈애들이 일어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근데 어떻게 ‘성적인 욕망’만 자꾸 생각을 하느냐는 거라. 일상적으로 계속적으로 수행할 때 여러분들 패턴을 보면 그런 것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보통 그것을 잘 모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왜 모를까?
이 갈애라는 놈 딴하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잠재적인 성향을 지닙니다. 언젠가는 튀어나올 준비를 항상 하고 있는 거라. 그리고 이놈은 어떠한 경우든지 '즐겁고 기쁜 쪽으로만 자꾸 갈려고' 합니다. 또 하나는 '계속적으로 변할려고' 그럽니다. 이 '끝나지 않을려고' 자꾸 하는 경향을 지닌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해서 이런 감각적인 갈애들이 일어나면은 본인이 분명히 알아차려야 됩니다. 감각적인 것들이 일어났다는 걸.
가장 대표적인 게 '편하게 수행할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면은 딱 그것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다음에 수행을 좀 잘하는 사람들한테 일어나는 게 뭘까?
수행 잘하는 사람들은, '삼매에 자꾸 빠지려고' 하는 거라. 삼매에 들려고 그러는 거라. 그것도 실제로는 감각적인 욕망인데! 감각적인 갈애인데!
그래서 그런 분들은 보면 소리나 보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합니다.
아주 예리해져 있기 때문에, 조그만 소리도 금방 싫은 마음들이 일어나게 돼서 탐·진하고 연결이 돼버립니다.
본인이 선정을 원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뭐가 보통 일어나느냐 하면은 '법문 자꾸 들을려고'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이나 스님에 대한 걸 자꾸 회상할려고' 그럽니다. '고요함에 머물려고' 하는 거라.
계속적으로 그렇게 가면은 나중에는 소리 듣고 보이고 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장애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탐·진하고 연결되는 장애만이 장애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눈이나 귀라고 하는 것들이 장애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본인이 감각적인 욕망에 빠져있다는, 감각적인 갈애에 빠져있다는 생각을 못 한다는 거라. 선정이 개발됐든 아니면 개발되지 않았든 그런 데에 대개 조심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또 어디에 빠질까? '담마만 계속 찾는' 거라. 담마만.
그 담마 그게 뭐라고, 그거 그냥 그것만 계속적으로 하는 거라. 그런데 죽을 때까지 계속적으로 담마만 알고 담마만 실천할려고 하면 좋지. 근데 그런 사람들은 이중적입니다. 뭐가 이중적이냐 하면, '죽기 전에 담마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은 의미가 없어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마음 하나만 싹 바꾸어버리면 '죽기 전에 그냥 즐기자' 하고 생각을 해버리는 거라.
그래서 테라와다 좋아가지고 막 담마 공부하다가 한순간에 마음이 탁 변하면은 그냥 '니나노' 하게 되는 거라. '니나노' 하게 되는 거라.
그게 욕계 색계 무색계에 태어나는 자이고, 욕계 색계 무색계에 공통적으로 감각적인 욕망이 그렇게 일어나는 거라. 감각적인 갈애들이 일어나는 거라. 그래서 갈애가 있을 경우에는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갈애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되게 조심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대부분은 보면 이 감각적인 갈애라고 하는 까마 딴하에 전부 묶여있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수행을 하든 안하든.
그다음에 두 번째는 뭐가 있다고 그랬죠? 바와 딴하(bhava taṇhā)라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왜 살죠? 왜 안 죽고 싶죠? 대답할 사람 있어요? 이유를 모릅니다. 물론 나름대로 이유를 대겠지. 근데 그건 왜 죽지 않으려고 하는지 왜 살려고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가 되지 않고 핑계거리 밖에는 안되는 거라. 뭐 가족 먹여 살리고 뭐 내가 죽으면 안 되니까. 그거는 정확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차라리 정확한 이유는 차를 샀다, 왜 너 이 차 샀어? 그거는 정확한 이유를 댈 수 있는데, 존재욕이라고 하는 바와 딴하는 본인도 잘 모른다는 거라.
그런데 실제로는 보면은 감각적인 것도 존재욕에 연결이 됩니다. 존재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으면은 감각적인 거 안 일어납니다.
부처님은 그러면 왜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는 존재욕구라고 하는 이 딴하는 사라졌을 건데 왜 45년간 법을 설하셨을까? 존재욕이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겠지. 존재욕이 없어도 충분히 45년 가깝게 사셨듯이 우리들도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라. 근데 사실은 ‘존재욕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살아?’ 하고 사람들이 자꾸 생각을 하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마음 자체를 갖다가 바꾸어야 되는 거라.
법이 소중한 줄 알 것 같으면 그 법을 지키고 그 법을 전하기 위해서 부처님도 법을 설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라는 거라. 법이 소중한 줄 알 것 같으면 법을 지키라는 거라. 법에 맞게끔 살아라는 거라.
그렇게만 살아도 존재욕은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엷게 만들어 나갈 수는 있다는 거라. 수행이 얼마만큼 진척이 됐느냐 하는 것은 이 바와 딴하라고 하는 존재욕이라고 하는 갈애가 얼마만큼 엷어졌느냐로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지금 당장 죽어도 후회 없어요?" "음. 후회없어!"
그런 마음이 들 때까지 계속적으로 훈련해나가야 됩니다.
그다음에 위바와 딴하(vibhava taṇhā) 라고 하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회피할려고 합니다.
수행할 때도 회피하려다 보니까 자꾸 선정 삼매에 들려고 하고, 거기 머물르고 하게 되고, 뭔가를 보더라도 그것들에 대해서 혐오스러운 마음들이 자꾸 일어나게 되고, 그런 것들이 수행에서는 장애가 됩니다. 마음이 좋고 싫음으로부터 떠나 있지 않으면은 수행은 올곧게 나아가지질 못한다는 얘깁니다.
우짜면 좋을까? 이 딴하를?
근데 딴하가 뭘 만들어내죠? 집착! 번뇌라고 하는 집착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끌어당길 때는 끌어당길 수는 있어. 근데 와서 착 붙는 거는 이 끌어당기는 놈만 잘못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거라. 와서 지가 붙는 게 문제라. 지가 좋으니까 와서 붙는 거라. 쉽게 말하면. 같은 극이니까 붙는 거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좋아하니까 달라붙게 되는 거라.
그런데 집착은 뭐로 가지고 알 수 있어요?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오계를 받았습니다. 계를 지키라고 하니까 앞에 뭐 벌레가 탁 기어가는데 요걸 다른 때 같으면 탁 잡았을 건데, 계를 지켜야 되는 것 때문에 ‘멈칫’하는 거라. 이때 마음을 보라는 거라! 죽이고자 하는, 혐오스러워하고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들이 보인다는 거라. 그리고 본인은 즐겁고 기쁜 것들만 자꾸 볼려고 하고 이거는 싫다는 거라.
계행을 지켜나갈 때 집착하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계를 지키지 않으면 마음이 고요해지질 않아. 고요해진다는 것은 좋고 싫음으로부터 떠난다는 얘기라. 무슨 지혜가 일어날 거라?
그다음에 그래서 계행은 뭐 잘 지켜나가고 있다고 칩시다.
그래서 점점 무르익으면은 그 계행이 억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워집니다. 자연스럽게 그 미물을 보더라도 자애의 마음이 일어나는 거라. 죽일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자애의 마음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래서 계행이 자연스럽게 되면은 그다음에 대부분 마음이 어디로 향하느냐면,
'내가 지금 행동하고 있는 것들에' 향하게 됩니다. 마음이 크게 탐·진·치에 오염되질 않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보이는 거라 대상이.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
집착을 하는 것들이 보이는 것이 명확하게 보이는 것은 이때 보이기 시작합니다.
계행을 지킬 때는 그게 명확하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계행이 아무리 자연스러워졌다고 하더라도.
근데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을 하다 보면 집착하는 것이 탁 보입니다.
수행할 때 의도 보이죠. 언제 보여요? 처음에 시작 탁 할 때든지 탁 끝나고 나면은 그다음에 의도가 보여진다는 거라. 멈추는 게 있을 때 보여진다는 거라. 멈춰져서 시작을 하기 전이나 행위 자체가 탁 끝나서 탁 멈춰질 때 그 의도들이 보인다는 거라 수행자들은. 그래서 그 멈추는 게 보이고 나면 그다음에는 수행이 조금 더 수월해집니다.
멈춰서 가지고 그냥 그대로 계속 멈춰서 버리면 어떻게 돼요? 사마타 수행으로 빠져버립니다. 그런데 대상이 변하는 것들로 보이게 되면은 위빳사나 수행으로 딱 전환돼버립니다.
수행에서 "집착이 보인다"는 것은 '그 멈추는 게 보였을 때 내가 마음이 향하는 것들이 어디로 향하는가' 하는 것들이 보입니다.
마음은 틀림없이 사마타로 빠지려고 그럽니다. 거기에 집착할려고 그럽니다. 고요하고 편한데 왜 변하는 걸 볼려고 할 거라. 난 아직 아라한이 되기 전이라서 존재욕이 있는데. 존재욕이 있을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머물려고 하고 영원하길 바라게 됩니다.
마음이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을 갖다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상황이 될 것 같으면은 집착하는 것이 탁 보인다는 거라. 마음이 집착하는 게 보이면 ‘아 이게 집착이구나’ 하고 분명히 탁 알게 됩니다.
뭐로 가지고 알아질까? 느낌! 집착할 때의 느낌들을 딱 보라는 거라.
콱 막혀있는 느낌들! 콱 붙잡고 있는 느낌들!
그래서 '우빠다나(upādāna)'라는 것은 '움켜쥠'이라고 합니다. 이거 안 놓으려고 그래요. 마음은 뛰쳐나오고 싶은데, 그러기 싫어가지고 그걸 꼭 쥐고 있는 거라. 그게 가슴이나 느낌을 통해서 분명하게 보이는 거라. 그러면 탁 놔버리게 된다는 거라!
집착이 끊어지면은 갈애는 당연히 탁 끊어져 버립니다.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이 포인트지, 다른 포인트에서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갈애라는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를 자꾸 하도록 해야 됩니다.
꼭 그게 까마든 바와든 위바와든 꼭 필요한 게 아니면 그냥 놔줘. 놔주면 지 혼자서 있다가 사르르 사라집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은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윤회를 하게 되는 거라. 고통 속에서 힘들어해야 돼되는 거라.
한번 생활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냥 죽자살자 일하고 그게 가족을 위한 것이든 무엇이든, 나중에는 ‘내가 뭐 했지’ 이러고 있는 거라. 조금 더 잘 살려고 할 것 같으면 그거 없어도 가족을 위해서 일할 수 있고, 본인이 마음을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에서 생활을 해나갈 수가 있다는 얘기라. 그러면서 법에 맞게끔 살게끔 되는 거라.
그 좋은 길을 놔두고 자꾸 힘든 길을 가려고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갈애에 대해서 간단하게 얘기를 했고,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으면은 바로잡아서 어떠한 경우든지 욕망이라고 하는 것들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고,
그래서 경전에는 이렇게 나오는 게 있기 때문에 자꾸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욕망은 욕망으로 다스린다." 그걸 잘못 이해하면은 내가 마약 하니깐 기분이 좋다. 그럼 마약을 계속 하라는 얘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바보 같은 해석을 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 그래서 그게 욕망이 중립적인 것이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부처님이 그 얘기를 한 것은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알게 되면 욕망이 제거된다"는 의미이지, 그것을 계속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게 중립적이란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는 거라.
경전을 해석을 할 때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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