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xX9-Egf8nm4?si=n5LDGo7eALq9kQAU
* 2024 담마와나 선원 빵수꿀라(paṁsukūla, 분소의) 가사공양 법회_계율과 수행에 대한 이야기_빤냐와로스님 법문(241117)
올해 마지막 법문인 것 같은데, '법이 막 나를 부르는 거' 경험해 본 사람 있어요? ‘빨리 와. 이리 와가지고 빨리 확인해 봐’ 이러는 거. 산딧티꼬 에히빳시꼬 그러죠? 직접 확인해봐라! 이런 얘기를 들읍니다.
오늘은 계율과 수행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코띠카 장로하고 사리뿟따 장로 두 분이 대화한 경전이 있습니다.
"계율을 잘 지키고, 대상에 대해서 마음을 잘 기울이는 요니소마나시까라가 되는 범부 수행자들이 예류과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고 물어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가 거기에 대한 답을 해줍니다.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계율을 잘 지키고, 그다음에 일어나는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그것을 알아차리는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manasikāra)라고 하는 선한 마음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경우에, 그럴 경우에 대상을 뭘 대상으로 할 것이냐? 하는 것들입니다."
조금 전에 막 “부르는 소리 들었느냐” 하고 그랬죠? "오온의 생멸을 가지고 수행을 하라" 하고 얘기를 하는데 혹시 다리가 이렇게 아플 경우에 다리 통증이라는 느낌이 ‘야 빨리 와봐. 이거 생멸하는 거 한번 봐봐’ 하고 부르는 거 들었어요?
실제로는 대상들은 우리들을 막 부릅니다. ‘이거 빨리 와서 관찰하라’ 하는 거라. 그러면 생멸하는 것도 분명하게 보기 때문에, 빨리 예류과에 이를 조건들이 된다는 거라.
그래서 계율을 가지고도 그런 생멸하는 것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간편한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아까 막 이게 복잡해서 스님들 옆으로 비켜주기도 하고, 괜히 시간 끌어 법문 들어야 되는데 법문도 듣지도 못하고, 짜증이 탁 일어났을 때, 짜증 그게 항상 일어나 있는 건 아니잖아. 그것도 생멸하는 것인데.
그걸 탁 관찰을 했으면은 내가 분명히 짜증이 일어나는 걸 보고 짜증이 사라지는 걸 봤을 거라. 그럼 수행이 참 잘 됐을 건데, 근데 어떤 사람들은 그냥 편안하게 그걸 즐기고 보고 있거든요.
차이점이 뭘까? 두 사람의 차이점. 한 사람은 금방 그것으로 인해서 짜증이 일어나는데, 한 사람은 그냥 편안하게 그걸 바라보고 있는 거라.
그게 가장 대표적인 게 마음이 안정돼 있느냐 아니냐 하는 차이입니다.
그냥 대상을 그냥 대상으로서만 보기만 하면 참 좋은데, 그렇게 못보고 자기 생각이나 '나'라고 하는 것들을 딱 거기다 덧씌워 버리니까 그게 탐진치가 일어나는 작용을 하게 되는 거라. 그것만 안 하면 참 좋은데. 그렇죠?
그게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manasikāra)라고 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냥 바라보고 관찰하는 것. 그러면 그거는 어떤 경우든 쉽게 그냥 흘러가는 성질입니다. 그냥 생멸의 성질일 뿐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현상일 뿐이다 하는 얘기라.
그런데 왜 그런 요니소마나시까라가 항상 일상생활에서도 일어나져야 되는데 일어나지 못하는 걸까?
오늘 여기 앉아 있으면서도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모든 것을 관찰해 온 사람 있어요? 스님이 항상 그런 얘기를 했죠. "자애를 지니지 않고는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아라." 그러죠? 그런데 왜 자애도 지니지 않고 그렇게들 있어? 항상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모든 것들을 행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근거가 뭐냐 하면, 자애를 지니고 있으면 적어도 계는 지키거든. 자연스럽게 지킵니다. 계를 지킨다는 거는 그냥 죽이는 걸 안 죽이고, 거짓말하는 걸 거짓말을 안 하고, 이런 거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작용들이 일어나지질 않는다는 거라. 죽일려는 마음이 일어나지질 않는다는 거라. 거짓말을 할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질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살다 보면은 어쩔 수 없이 뭐 사람들은 거짓말을 해야 될 때가 있고 또 죽여야 될 때도 있고 그렇습니다. 옆에 빤냐완따 스님한테는 죄송하지만 어제 우리 선원의 식구 중에 한 분이 “빤냐완따 스님한테 공양물을 올려야 되는데 어떤 게 낫겠습니까?” 하면서 2개 중에 하나를 선택하래요 내보고. 내가 먹을 것도 아닌데.
그래서 뭐냐 하니까 “하나는 장어 엑기스를 만들어가지고 스님한테 공양 올리려고 합니다.” 하는 거라. 나는 몰랐어. 장어 엑기스가 어떻게 만드는지. 근데 살아있는 장어를 가지고 한다면서요? 장어 엑기스 만들기 그렇게 한대요. 그냥 대충 씻어갖고 그냥 큰 기계에다가 살아 있는 채로 그냥 집어넣어 버린다네. 그렇게 해가지고 장어 엑기스를 만든대. 그래서 “야, 그거는 스님한테 올리면 안 되겠다야. 다른 걸 드려라.” 그랬어요. 그래서 죄송한데 맛있는 걸 스님이 못 드시게 됐어.
스님이 태국에서 인제 그런 적이 있습니다.
태국의 남쪽에는 보면 이슬람들이 많아 가지고 막 테러를 많이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테러를 하니까 군인들이 막 쫓아올 거 아니라? 그 이슬람 사람이 어느 집으로 탁 숨어 들었어요. 주인이 보고 그 사람을 숨겨줬어요. 군인이 당연히 쫓아와가지고 “그 사람 내놔라.” 하니까 그 사람이 뭐라 했을까?
내주면 이 사람은 끌려가가지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안 내줄라고 하니까 내가 거짓말을 해야 되겠고. 어떻게 해요? 거짓말을 해서도 안 되고 죽이는 건 더 안 되는데.
근데 어떤 게 비중이 클까? 사람들은 이렇게 따집니다. 죽이는 게 더 클까?
근데 불교적으로는 보면은 거짓말하는 게 큽니다.
'거짓말 하는 것이 모든 죄를 만드는 원인이다'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범죄의 제왕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럴 정도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용납이 안 돼요. 그래서 스님들의 사바라이 죄에도 반드시 그것이 포함이 됩니다. 죽이는 거는 사람을 죽이는 경우는 예외로 하고 크게 치는데, 그 외의 것들은 거짓말하는 것보다는 더 크게 치지 않아. 재판하는 판례들을 보면 그렇게 나옵니다. 태국 같은 경우에 특히 이 상가 재판이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그때 판례들을 보면 그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이제 이분이 가만히 생각을 해 봅니다. '내가 거짓말을 해야 될 경우에는 왜 해야 될까? 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은 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바른 말을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들을 비교를 해 봅니다.
거기서 나온 결론이, ‘내 마음에는 이게 거짓말이라는 생각을 하질 않고 아무 소리 안 하고 그냥 모른다 하고, 그냥 말을 안 하고 있을 것 같으면은 적어도 그 군인들이 이 집에 와서 찾다가 못 찾으면 그냥 가버릴 거고, 그리고 나는 거짓말을 하는 죄로부터도 벗어날 것이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냥 입을 딱 다물어 버립니다. 결국 군인들은 그냥 대충 보다가 그냥 다른 데 간 것 같아가지고 가버리게 됩니다.
그때 인제 장로 스님들이 그 일화를 얘기하면서 그런 얘길 합니다.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사람들이나 생명들을 해치는 것들을 직접 눈으로 봤을 때, 자애의 마음이 없으면은 적어도 그 사람에게 내가 “여기 있다” 하고 얘기해 줄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근데 자애의 마음이 강하면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거라. 그러면서 그것을 정당화해 주게 되는 거라.
맨 처음 얘기할 때 ‘나 여기 있으니까 날 찾아봐’ 하고 담마가 분명히 부른다고 했죠?
여러분이 생멸하는 법을 보려고 하는 마음이 강하면 생멸하는 대상들은 어디든지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부릅니다. 특히 몸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감각적인 작용들이 굉장히 자주 일어납니다. 근데 그 감각적인 작용들, 실제로 보면은 ‘나 느낌이 일어났으니까 니 한번 생멸을 한번 관찰해 봐’ 하고 부릅니다.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서 그대로 그냥 느낌이 일어나는 대로 갑니다.
그러면 이 느낌은 지 성품대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게 됩니다.
나는 그것을 사띠(sati)하는 것 뿐이라. 산냐(saññā)는 안 그렇고, 째따나(cetanā)는 안 그렇고, 여러분 몸은 안 그럴 것 같아요? 여러분을 부르고 있는 거라. 이 법을 관찰해서 예류과까지 이를 수 있는 조건을 니가 가지고 있으니까, 니가 빨리 이걸 발견하라는 거라.
법은 항상 우리 곁에 존재를 하게끔 됩니다.
그런데 그 존재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꾸 놓쳐버리면 영원히 법을 아는 단계까지는 못 가고 항상 그 자리에서 맴돌게 됩니다.
스님들은 계율을 227계를 지닙니다.
그러면 어떨 때는 이 계율이 여기에 툭 튀어나오고, 어떨 때는 저 계율이 여기에 툭 튀어나옵니다. 그걸 봐주라고 그럽니다. ‘니가 이 부분을 어기지 않고 있는가?’
어떨 때는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을 관찰하기에도 바빠.
재가자들 예를 들어봅시다. "살생하지 마라"는 계율, 그냥 죽이지 않는 계를 받아지니는 것, 그건 숙제거든. 부처님이 여러분들한테 내준 숙제입니다. 그런데 숙제 다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안 한 사람들도 있어요. 100% 하는 경우도 있고 뭐 50프로 하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한테는, 재가자에게는. 어쨌든 내준 숙제이기 때문에,
그러면 살생하지 마라는 계율이 탁 있으면, 살생 하기 전에는 어떤 마음들이 일어나요? 죽이겠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 의도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럼 죽일 때 그런 분노들은 분명히 일어나게 됩니다. 해치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야 해치게 되는 거라. 그냥 해칠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그냥 있다 해가지고 모기라고 해서 탁 아무 감정없이 잡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관찰해야 되는 것은 죽일려고 하는 의도들이나,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혐오감들이나, 그런 것들이 마음속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을 관찰을 해야 된다는 거라. 관찰하는 그것도 생멸의 현상일 뿐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그러면 해칠려는 마음은 금방 사라져 버리고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계속적으로 이 경우 저 경우에 하다 보면은 마음은 대상을 보면 인제는 해칠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게 아니고 감싸주고 이해해줄려는 마음이 생기는 거라. 그전까지는 나의 이익이나 나라고 하는 생각이 지배를 했지만은, 이제는 다른 사람의 이익이나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존중하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마음은 어디에다 두고 그것을 관찰하느냐에 따라서 180도 이렇게 바뀌어 버리게 됩니다.
똑같은 현상인데 부처님이 여러분들한테 오계를 준 숙제는 그걸 하라는 거라.
계를 지키고,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manasikāra)를 해서 생멸하는 것들을 봐야만이 부처님이 약속한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가 있다는 거라.
조그마한 것 하나도 자꾸 어기려고 하면 안 됩니다.
스님들 같은 경우에는 되게 많죠. 227계. 다 못할 거 같거든. 그래서 그때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꼭 한 가지만 니가 해라.”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출가한 스님들에게 1가지를 하라는 거는 뭘 해라고 했을까? 그걸 하면 227계를 다 지킨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딱 하나!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마음을 지켜라는 거라!
마음이 하고 있는 것들을 마음을 잘 지키면은 적어도 악한 일은 안 하게 되는 거라. 내가 마음을 지키고 있는데, 어느 누가 악한 행위의 뒤에 올 결과들을 뻔히 아는데 그 악한 것들을 할려고 할 거라? 자기 마음을 지키라는 거라.
"자기 마음을 잘 지키면은 적어도 계를 지키는 행위와 마찬가지다." 라는 거라.
여러분 마음은 뭐로 지킬 거라? 대상에 대한 사띠입니다.
사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살아있을 동안에는 항상 사띠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만이 계를 지키게 되는 거고, 대상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거고, 깨달음을 향해서 생멸하는 현상을 봐서 나아가게 되는 거라.
그걸 잊지 않도록 하고, 계율 하나도 허투루 자꾸 생각하지 말고, 부처님이 분명하게 손짓하면서 와서 보라고 한 것들을 갖다가 여러분들이 볼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대상은 여러분을 부르고 있습니다. 부르는데 그것들을 보지 않고, 그 숙제를 하지 않으면 그건 직무유기하는 거라.
항상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살아가면서 건강하고 행복하면서 깨달음에 이를 조건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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