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동요는 마음의 본성 (20250920)

담마마-마까 2025. 9. 21. 08:19

* 동요는 마음의 본성 (20250920)

 

Phandanaṁ capalaṁ cittaṁ

Durakkhaṁ dunnivārayaṁ

Ujuṁ karoti medhāvī

Usukārova tejanaṁ

마음은 동요하고, 소란스럽고, 보호받기 어렵고, 통제하기 어렵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바로잡는다.

활과 화살 장인이 화살촉을 고치듯이.

 

마음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몸이 망가져 죽어도 정신은 계속 이어진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이 있기에 사람들은 사후세계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종교의 역할은 사라집니다. 세속의 규칙과 법을 지키며 살아가면 충분합니다.

종교의 세계에서는 영원불멸의 영혼의 존재를 믿습니다. 현대적 사고에서는 영혼이 곧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를 믿고 그 초월적 존재가 시키는 대로 살면 영혼이 사후에 영원한 안식에 도달한다'라고 종교계는 생각합니다. 초월적 존재를 거스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영원한 지옥도 설정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론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영원불멸해야 할 영혼이 초월적 존재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일까요?

세상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고 해서 영혼이 변하는 것일까요?

단순한 행위로 영혼이 바뀐다면 '영원불멸'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론의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육체보다 영혼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마음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는 것만으로는 사람이 행복해지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죽고 나면 모두 사라져 허무해지더라도 살아 있는 동안은 충만감을 가지고 즐겁게 지내고 싶다"라며 밝은 마음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마음과 정신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마음

 

부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마음은 소중한 보물이 아니라 믿을 수 없는, 거의 관리할 수 없는 작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겨나서 변화하고 흘러가는 작용입니다. 몸이라면 짧은 시간이라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몸은 멈출 수 있지만 마음은 멈출 수 없습니다.

 

마음과 정신을 생명의 영혼으로 보는 사상은 죽음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욕망에 근거한 망상일 뿐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마음만큼 빨리 변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몸을 믿고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웁니다. '이 일은 한 시간이면 끝난다.', '세 시간 정도 걸린다.' 등의 말을 하는 것은 체력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일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단 1분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을 안정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1분만 있으면 쉽게 많은 생각과 망상을 할 수 있습니다. 몸처럼 마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마음은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동요(phandana)는 마음의 본질

 

마음은 동요합니다. 흔들리는 것입니다. 안정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음은 신비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마음은 '앎'이라는 작용입니다. 물질에는 '아는' 작용이 없습니다. 몸은 아는 작용이 없는 물체이지만, 거기에 '앎'의 작용이라는 마음이 있기에 '생명'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마음이 있다'라고도 합니다. 한 물체가 다른 물체를 만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한 물체가 만진 것을 알았다면 그 물체는 생명입니다. 또 다른 물체도 만졌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물체도 생명입니다. 몸에 바람이 닿으면 몸은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앎'을 더 확장해서 '춥다'' 또는 '따뜻하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몸에는 24시간 동안 수많은 것들이 닿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일단 옷을 입었으면 사람은 매번 자신이 옷을 입고 있는지 알몸인지 아닌지 확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옷이라는 물체가 끊임없이 몸에 닿고 있고, 마음으로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24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물건이 몸에 닿는지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손가락을 생각해 봅시다.

손가락이 할 수 있는 일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만지고, 느끼고, 아는 흐름입니다. '아는 것'이 마음의 작용이라면, 몸으로 '아는 것'만을 생각한다면 마음은 편안하지도, 안정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만지는 것을 항상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지는 것은 신체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귀에 진동하는 공기가 닿습니다. 눈에 빛이라는 전자파가 닿습니다. 코는 공기의 성분을 향기로 알고, 혀가 닿는 것을 맛으로 압니다. '아는' 세계는 무궁무진하게 넓을 것입니다. 문제는 '모른 채로 있을 수는 없다'라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있다면 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눈을 감아도 어둠이 보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휴식이 없는 것입니다. 만지는 대상에 따라 동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에 마음은 맞춰져 있습니다. 눈, 귀, 코, 혀, 몸에 끊임없이 색, 소리, 향, 맛, 촉감이 닿아 흔들리는데도, 마음대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거나 망상하면서 마음이 더 심하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동요는 마음의 본질입니다.

 

변덕(capala)

 

만지는 것을 알고 흔들리는 마음은 그때부터 <지>로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집, 꽃, 노래, 춥다, 덥다, 딱딱하다 등 무수한 판단이 일어납니다. 더 나아가 좋아한다, 싫어한다, 둘 다 아니다 등의 판단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욕심, 분노, 질투, 두려움, 불안 등의 감정들도 만들어 냅니다. 불교 용어로는 감정을 '번뇌'라고 합니다. 그리고 만지고, 느끼고, 알고라는 흐름을 감정이 가로채고 지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번뇌의 세계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어떤 때는 미워하게 됩니다. 좋아하는 것이 싫어집니다.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음악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 음악이 재미없어지고, 철학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신앙을 가지기도 하고, 나중에 그 신앙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을 바르게 판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마음은 변덕스러운 것입니다.

 

지키기 어렵고(durakkhaṁ), 제압하기 어렵다(dunnivārayaṁ)

 

'만지는 것'을 '아는 것'이 마음의 일입니다. 색·성·향·미·촉은 외부 세계의 에너지의 흐름입니다. 사람은 그것을 관리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접촉됩니다. 세상으로부터 정보가 닿지 않게 하여 마음을 보호하고 평온을 경험하려고 해도 실현 불가능합니다. 방음실에서 빛을 끄고 가만히 있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몸에 무언가가 닿습니다. 간혹 그것을 없앤다고 해도 마음속에 개념(법)이 닿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은 지키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durakkhaṁ), 정보를 관리하여 통제하는 것도 어렵습니다(dunnivārayaṁ).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의 본래 모습을 알면, '마음의 관리는 불가능하다.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쓰나미가 온다는 것을 알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쓰나미 도달까지 3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찔 수 없지. 여기 남아서 쓰나미에 쓸려 죽을 수밖에 없다'라고 포기할 것인가요? 아니요, 그 3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활용해 높은 곳을 향해 달려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을 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쓰나미는 내가 관리할 수 없는 무서운 현상이지만, 그런 현상 앞에서도 이성과 올바른 판단과 노력이 있다면 활로를 열 수 있습니다.

불교가 마음의 본모습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도움이 되는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패배를 선언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불교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성

 

흔들리는 마음을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키우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이성과 올바른 판단과 실행력입니다. 마음이 흔들리는데도 그 흔들림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반인들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라고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마음은 왜 흔들리는가?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객관적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안온한 마음에 대한 가설 정도는 세울 수 있습니다. 이성과 올바른 판단력과 실행력을 갖춘 사람을 메다위(medhāvī) 현자라고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사냥하거나 적과 싸우기 위해 활과 화살을 사용했습니다. 화살은 나무로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자연계에는 수직으로 곧게 뻗은 나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 꼬불꼬불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설령 나무 일부가 곧게 뻗은 부분이 있다고 해도 무게가 균등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무로 화살을 만들려는 시도는 헛수고로 끝날 것 같지만, 사람들은 사냥과 전투에 적합한 화살을 만들었습니다. 구부러진 나무를 여러 공정을 거쳐 곧게 펴서 무게와 길이의 균형이 잘 잡힌 화살로 만든 것입니다. 화살을 만드는 장인들은 나무의 본래 모습에 대한 이해(이성)가 있었습니다. 그 이해를 바탕으로 '이렇게 하면 된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부처님은 “화살 장인이 곧은 화살을 만드는 것처럼 마음을 다스리고 기르는 것이다”라고 설하셨습니다.

올바른 마음(이성)으로 항상 사떠(판단)를 지니고 대상을 알아차리는 실천자(실행력)가 현자입니다.

 

◉ 이번 포인트

정신은 영원불멸이 아니다.

마음은 무한히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접촉함으로써 마음이 흔들리고 더러워지고 번뇌가 생긴다.

그래도 현자는 사띠하며 마음을 다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