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HGrVHlOq564?si=B-rcYtQc406hvELL
* 반응하지 않는 것(20251206)
오늘이 올해 마지막 법회입니다. 이번에는 태국에도 가지만은 원래는 계획에 없던 스리랑카까지 좀 갔다 와야 될 것 같아요. 이번에 물난리가 좀 나가지고 좀 돌아보고 도움 줄 수 있으면 좀 도와주고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는 날은 똑같이 3월 11일 비행기 티켓은 돼 있는데, 아마 변경은 안 할 것 같은데, 모르겠어요. 좋으면 거기서 더 있다 오지.
오늘 프린트물이 "반응하지 않는 것"이라고 써있습니다.
왜 '반응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느냐면 얼마 전에 싸리 빗자루가 몽당 빗자루가 돼가지고 그거 좀 하나 살려고 밑에 내려갔어. 내려갔는데 주인 아주머니하고 어느 아주머니하고 둘이 대판 싸우고 있는 거라. 그래서 싸리 빗자루를 주라 소리도 못하고 싸움이 끝나야 주인도 뭐 이렇게 스님이 왔으니까 ‘스님 뭐 필요합니까?’ 해가지고 할 건데, 싸운다고 보기는 봤는데 뭐 정신이 없어. 그냥 한마디 하면 또 손님인 아주머니도 또 한마디 하고, 이쪽에서 한마디 하면 또 한마디 하고, 내내 그러고 있는 거라.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어. 하다가 나중에는 그 주인 아주머니가 그러더라고. “스님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이러는 거라. 그래서 내가 뭐 때문에 싸우는지도 모르고 핑퐁 게임만 둘이서 하고 있는데, 누가 뭘 잘못했는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래서 또 물건 사려고 온 아주머니도 막 불만을 막 털어놓더라고요.
가만히 있다가는 내가 그냥 괜히 거기에 휘말릴 것 같아가지고, 그냥 싸리 빗자루 하나만 주이소. 난 누가 잘못했는지는 모르겠고, 두 분이 알아서 하고, 싸리 빗자루만 주이소. 하니까 아까도 스님이 옆에서 내내 들었다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거기서 얘기한 것이 누가 그냥 뭔 말을 하든지 간에 반응만 안 하면 안 싸울 건데, 뭐 하러 그냥 그 반응한다고 서로 싸웁니까? 싸운다고 좋습니까? 이러니까 그래도 자기 잘한 것만 자꾸 얘기해. 그래서 말이 통하지도 않겠고 그냥 싸리 빗자루나 사갈련다 싶어가지고 싸리빗자루만 얼른 사가지고 들어온 적이 있어요.
부처님도 제도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그럽니다.
한참 감정이 격해져 있는 사람한테는 뭔 말을 해도 귀에 안 들어와. 그걸 경전에서는 까마귀에 비유를 해놔 놨거든. 까마귀가 되게 부리가 세잖아요. 그래서 뭐 쓰레기봉투나 이런 걸 막 쪼아가지고, 뜯어가지고 거기 걸 꺼내 먹고 이렇게 하는데, 그런데 그물 같은 것도 뽀사가지고, 이렇게 그 속에 있는 걸 갖다가 꺼내 먹는 모양이라. 그런데 한참 꺼내 먹다가 보면 자기가 그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려요.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물을 쪼아가지고 그 속까지 안으로 들어갔으니까 나올 때도 그물을 쪼아갖고 나오면 되는데, 까마귀는 그걸 못한다고 그럽니다. 그물에 안으로 쏙 들어가고 나면은 쪼을 생각을 안 하고 날갯짓만 한다고 합니다. 발버둥만 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 속에서 그냥 갇혀버려서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그런다고 하는 게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그게 "그물에 갇힌 까마귀"라는 건데, 그 주인 아주머니하고 그 손님 아주머니하고 계속 말다툼하는 걸 보면서 계속 마음속에 자극만 가해지고 있는 것들이 보여지는 거라. 자극에 갇혀가지고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그냥 그 속에서 파다닥 파다닥 파다닥 하는 것처럼 보여. 오히려 자극만 계속 요구하게 돼. 저기에서 말을 안 하면 상대방이 또 뭔가를 말을 해야 돼. 그럼 또 이쪽에서도 그걸 또 말을 해야 되는 거라. 뭐 그렇게 이기는 게 중요해?
그걸 보면서 자극에 대한 반응하는 것들이 반응하지 않으면 그냥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왜 저렇게 반응을 계속하게 될까? 하는 거라. 왜 그럴 것 같아요? 왜 그렇게 계속 반응할 것 같아요?
반응하는 대상이 자꾸 바뀌기 때문에! 그 아주머니도 아까는 '아'라고 얘기했는데 그 뒤에는 '어'라고 얘기를 하거든. 반응하는 대상이 바뀐 거라. 여러분들은 안 그럴 것 같아요? 여러분들 좋아하는 것들이 있죠. 젊었을 때 좋아하는 거 하고 나이 들어서 좋아하는 거 하고는 대상이 이미 바뀌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 들어서는 젊었을 때 좋아한 거 별로 흥미가 없어. 그런데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젊었을 때 좋아하는 것이든 나이 들어서 좋아하는 것이든 그거 다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좋아했던 것들입니다.
밖에 있는 꽃이 피었다. 꽃이 ‘나 예뻐?’하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보고 ‘예쁘다’고 하고, 오늘 먹는 음식이 ‘나 맛있는 음식이야’ 하고 얘기한 적은 없는데 나는 먹으면서 ‘맛있다. 맛없다’ 하고 있는 거라.
육근을 통하는 것들은 그것은 대상일 뿐인 것이고, 그것이 ‘맛있다, 맛없다, 아름답다, 추하다’ 하고 얘기하는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거라. 그냥 그대로 있는 것뿐이라. 그것도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뿐인 것이고. 그런데 내 마음이 그걸 ‘좋다’하고 ‘예쁘다’고 하고 ‘싫다’고 하고 있다는 거라. 자극을 받았는데 자극에 대해서 마음이 반응을 해서 뭔가 또 다른 자극을 추구하게끔 되는 거라.
그래도 여러분들은 수행을 하기 때문에 그래도 소리 들리면 ‘소리 들린다’고 알아차리고, 뭔가 보이면 ‘보인다’고 알아차리고 그렇게는 합니다.
그런데 수행자들도 참 잘 안되는 게 '뜻',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
소리는 들렸는데 ‘소리들림’하고 알아차렸으면 딱 끝나면 되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지를 알거든.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마음속에서 뭔가의 생각이 탁 일어나는 거라. 그럼 거기에 대해서 반응을 해야 되는 거라. 참 안 되는 게 그런 뜻을 내세우는 일이 생길 때가 참 안 됩니다. 대부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 뜻으로 인한 것들이 다툼이 일어납니다.
니하고 나하고 주장하는 것이 틀리고 견해가 틀리고 생각하는 것이 틀리고, 틀린 걸 틀린갑다 하고 인정해주면 되는데, 대부분은 그걸 인정 안 해줍니다. 내 것이 맞다는 거라. 니는 틀렸다는 거라. 견해에 나라고 하는 것이 탁 결합을 해버리면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어요. 그냥 다툼이 일어나는 거라.
밑에 게송 한번 봅시다.
"마치 부서진 징처럼
스스로 침묵하고 있다면(반응하지 않는다면)
너는 이미 닙바나를 얻은 자.
너에게 더 이상 분노(다툼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하는 겁니다.
부서진 징처럼 좀 할 수 없을까? 뭔가 자극이 탁 와도 그것으로 인해서 울리지 않도록만 하면 좋은데, 한번 훈련들을 해보십시오.
일체 반응하지 않는 것. 일체 대꾸하지 않는 것.
누가 나하고 생각이 틀리다 하더라도 내 생각을 내세우지 말고 대꾸하지 말아보라는 거라. 쉬울 것 같죠? 굉장히 어렵습니다.
(수행자 :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거 같아요.)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거는 없어요. 지가 반응하고 싶으니까 반응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반응을 안 합니다. 그냥 그 소리 들리는 것으로 탁 알아차리면 반응을 안 하는데, 소리 들리는 걸 생각하고 하니까 반응이 나오는 거라.
그래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견해가 틀린 것들에 대한 것들, 또 생각이 틀린 것에 대한 것들, 쉽게 말하면 이런 '뜻'으로 인한 것들이 다툼의 원인이 되는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일상생활에서.
그냥 딱 한 차례만이라도 반응하지 말아 봐봐. 그럼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 ‘왜 반응 안 하지?’ 내가 이렇게 했으면 당연히 반응이 나와야 내가 또 반응을 할 건데 반응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돼요? “너 왜 말을 안 해?” 이렇게 하겠지. “왜 대꾸 안 해?” 그리 하든 말든 간에 일절 반응하지 마라 보라는 거라.
결국은 그 사람은 자기 혼자서 내 얘기하다가 제풀에 지쳐서 가버립니다. 반응을 안 하면. 그래서 부처님은 "마치 부서진 징처럼 침묵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스님들도 그런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뭘 하나를 보면은 그걸 꼭 트집을 잡습니다. 트집을 잡아 갖고 얘기를 해요. 얘기를 안 하면 답답한 모양이라.
그런데 그걸 이제 저한테 얘기하니까 이제 아우 좀 힘들어 어떨 때는. 그래서 그냥 들어주긴 하는데 듣고 나면, 별거 아닌데 왜 그러지? 왜 자꾸 그걸 가지고 반응을 할까? 또는 거기에다 자기 생각을 보태가지고 그걸 얘기하는 것이 보여. 그래서 그냥 “알았어. 내가 얘기해 볼게” 하고 나서는 그냥 끝이라. 별거 아니다 싶을 때는 그것으로 인해서 다툼을 만들지 않는 것이 오히려 현명하기 때문에 그냥 어떨 때는 그냥 내 선에서 끝내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이제 출가한 스님들이 주의해야 되는 것이 뭐냐면 세속적인 일과 같은 것들, 얼마 전에도 누가 뭐 상을 받았는데, “스님, 그거 모임이라도 좀 가져가지고, 해야 안 되겠습니까?”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때는 좀 뭐라 했어요. “스님이 왜 그거 나서는데?” 출가했으면은 출가자의 길을 걸어가야지, 세속적으로 칭찬받는 거, 상 받는 거 그거 관여해서 뭐 할 건데? 재가자들이 안 하니까 그런다는 거라.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놔줘라. 니가 왜 답답해 갖고 그러느냐? 니는 니 할 일만 해라.”
관여하지 말아야 되는 건데 관여를 하려고 하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은 안 그럴 것 같아요? 여러분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별 의미도 없는 것들을 가지고 괜히 다툼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은 본인은 두렵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을 끊임없이 자극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들이 있는 반면에, 그런 자극이 없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거라. 죽은 시체는 자극이 없죠. 아, 자극에 대한 반응이 없죠? 본인이 거기에 반응하지 않으면 죽는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라. 두려움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자극이 없는 것이,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는 것이 두려운 거라. 그래서 그런 자극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죽음의 공포가 더 커지는 거라. 나중에 나이 들면 점점 더 그런 자극들이 줄어들어 갑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자극이 없으니까 마음이 평온한 것 같죠? 그런데 그건 묻혀져 있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죽음에 탁 이르러서는 두려운 거라. 그런 자극이 없으면은 죽음과 같기 때문에, 죽음의 순간에 이르르면 두려움이 탁 일어납니다. 그래서 살려고 하는 거라.
자극이 있어도 문제고 자극이 없어도 문제고,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자극이 문제라? 자극은 문제가 없습니다. 저 꽃이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꽃을 ‘아름답다’ 생각하는 내 마음이 문제인 거라.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는 마음들이. 그냥 아무런 반응 없이 평온하게 딱 마음이 중립의 상태로 딱 유지되어 있으면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자극이 있든 없든 수행을 해보면 딱 드러나집니다. 좋고 싫은 것들이 일어나면 금방 그거 캐치해냅니다. 수행을 하면서.
‘기쁨이 일어나네’ ‘괴로움이 일어나네’ 왜? 살아온 습관이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들을 잘 해왔기 때문에, 수행에서도 금방 그런 것들을 캐치를 해서 그게 변해가는 것들을 봅니다.
그런데 자극이 없으면 대부분 ‘어? 이 뭐 수행이 잘못됐는 것 같다.’
수행이 왜 잘못돼? 자극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겁니다.
자극이 없으면 자극이 없는 대로 그냥 알아차리면 됩니다. 내 마음이 있는 곳, 사띠를 하고 있는 것들을 보면 됩니다. 그러면 설혹 자극이 없어도 없는 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유지하게 되는 거고, 자극이 있으면 있는 대로 알아차림을 유지를 해나갑니다.
그래서 그게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든지, 아니면 좋은 현상들이 일어나든지, 별 신경 안 쓰고 그냥 그걸 갖다가 알아차리면 금방 사라져 버립니다. 자극이 없으면 자극이 없는 대로 마음이 고요함에 머물러 있으면 고요함에 머물러 있다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이 뭔가 대상을 알아차리는데 그게 변하는 것이 없이 그냥 고요하게 머물러 있더라도 그냥 그것들을 알아차려 나갑니다.
자극이 있든 없든 수행을 그렇게 해나가야 됩니다. 그리해야만이 그다음에 내가 열반을 볼 수가 있는 것이지, 자극에 대해서 자꾸 반응하는 것, 자극이 없다고 두려워하는 것, 그것으로는 수행을 해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 경지를 뛰어넘어야 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부서진 징처럼 반응하지 않는 것, 그것이 닙바나를 얻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도 살아가면서 특히 요즘은 SNS하고 각각의 정보들로 인해서 굉장한 자극들이 많습니다. 그거 좀 안 하면 안 돼? 그런데 스님은 안 해보니까, 스님은 카톡도 안 해, SNS도 안 해, 아무것도 안 해. 그런데 너무 좋아.
특히 이제 외국 갔을 때는 전화기조차도 없어. 전화 올 일도 없고, 그 신경 쓸 일도 없으니까 더 좋아. 그런데 사람들은 그거 없으면 뭔가 잘못되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 거라. 왜 그렇게 자극을 자꾸 쫓아야 되느냐는 거라.
수행을 하는 분들이라면은 자극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좋고, 자극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극을 '부서진 징'처럼 거기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는 마음들을 일으키도록 해야 됩니다.
아까 스님 얘기를 하면서 그거 뭐 하러 그렇게 스님이 쓸데 없는 걸 하느냐고 그렇게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일반 재가자들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반응하는 것들은 큰 의미를 지니지를 않습니다. 대부분 반응할 때는 거기에는 견해가 들어가게 되고, 나라고 하는 것이 들어가게끔 됩니다.
부처님과 성자들은 그런 반응이 없습니다. 왜?
나를 내세울 만한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에. 견해라고 하는 것들이 없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해야 될 일을 하는 것뿐이라. 여러분들도 '요니소마나시까라'라고 합니다. 모든 현상들은 원인 결과에 인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거기 때문에, 그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을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무상하지 않는 것이 있어요? 거기에 나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어디 있어요?
내 것도 아니고 항상 하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거기에다가 견해를 내세워? 거기다 왜 탐·진·치의 마음을 실어서 반응을 해야 되느냐는 거라. 본인의 마음이 수행을 하면 할수록 본인의 마음은 점점 더 탐진치가 없이 모든 일들을 행해 나가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지속해 나가면 바라밀들을 쌓기도 쉬워지는 거고, 수행하기도 쉬워집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을 할 때도 항상 선한 마음을 자꾸 지니고 뭔가를 하려고 하고, 말을 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수행하는 데 그게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하는데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이때까지 내가 집착했던 것들이 점점 더 엷어집니다. 집착하는 품목들이 뭐가 떨어지느냐에 따라서 수행의 정도는 깊어지는 거라. 견해를 내세우는 것이 떨어졌는지, 나를 내세우는 것이 떨어졌는지, 점점 하면서 집착할 만한 대상들이 점점 없어져 버립니다.
자기가 해야 될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밥을 먹고, 가족이 있으면 가족을 돌보고, 돈을 벌어야 될 때는 돈을 벌고, 하지만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할 만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압니다.
살아가는 게 그렇게 복잡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살아가는 것들을 갖다가 뭐라고 정의했냐면, "앉고, 서고, 일어서고, 눕고 하는 움직임 외에 뭐가 있느냐?" 하고 얘기합니다.
그냥 그 움직이면 움직인다고 분명히 알아차리면 되는 건데, 움직이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는 거라. 내가 돈을 버는 것들은 돈을 버는 것뿐인 건데, 거기에 무슨 큰 의미들을 부여할 이유가 뭐가 있느냐는 거라. 거기에 뭘 집착할 것들이 있느냐는 거라. 내 가족으로 만들어졌으니까 가족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냥 해야 될 일인데, 그것에 대해서 애착할 이유가 뭐 있느냐는 거라.
반응하지 않는 연습들을 자꾸 하도록 해서, 수행해서
'이번 겨울에는 적어도 그래도 내가 한번 열반을 체험해 보겠다.'
'이번 겨울에는 적어도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들을 목표로 해보겠다.' 하는 것들을 잘 훈련해서 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내년에 스님 왔을 때 수행들이 좀 무르익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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