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정진/위빳사나 수행과 알아차림

심념처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우 떼자니야 사야도의 가르침 (도경 스님) Book

담마마-마까 2016. 2. 25. 20:12



* 심념처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도경스님

 

나는 여러 해 동안 남방에서 수행했습니다. 이런 저런 수행들을 전전하면서 언제나 무엇이 바른 수행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이렇게 찾고 고민한 끝에 내가 마침내 진심으로 귀의한 수행법은 미얀마 쉐우민 수행센터의 수행법입니다. 흔히들 심념처라고 부르는 수행방법입니다.

 

쉐우민에서 수행지도를 하시는 우 떼자니야 사야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세하게 가르치시는 스타일이 아니십니다. 수행의 기본을 가르쳐주시고는 제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길을 찾아가도록 하십니다. 이런 지도방법이 더 깊은 이해를 가져오는 한 측면이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오랫동안 길을 찾지 못하는 문제도 있음을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수행방법을 정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왜 수행을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를 합니다. 수행도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는 활동입니다. 보통의 우리는 우리의 삶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외적 조건을 바꾸는 것으로 향상시키려 합니다. 수행은 우리의 삶을 우리의 내적 조건, 즉 마음을 바꿈으로써 향상시키려 합니다.

 

어느 비구가 붓다에게 물었습니다. ‘붓다는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붓다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고통과 고통의 해방을 가르친다.’

 

붓다는 삶의 모든 문제를 고통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시는 고통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느낌으로써의 고통과는 다릅니다. 삶의 모든 불완전, 불만족을 고통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존재의 고통을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런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이렇게 하면 삶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시며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고통은 우리의 삶에서 옵니다.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현재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는 여기입니다. 우리는 오직 여기 이 순간에 존재합니다. 이 순간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작용들입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며 이 순간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붓다께서 세상을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으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붓다는 세상의 모든 진리를 말씀하시고자 하신 분이 아닙니다. 붓다는 삶의 문제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상을 설명하시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하고자 하신 분입니다. , , , , , 마음에서 고통의 문제가 생기고 또한 거기에 그 문제의 해결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붓다는 세상을 6감각기관과 그 작용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세상을 봅니다. 우리는 내 밖에 있는 세상을 본다 라고 믿으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가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우리 밖에 있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볼 때 우리 눈에서 무엇이 나가서 그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밖에서 무엇이 눈에 올 때 그 온 것을 해석해서 그것이 무엇이다 라고 압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의 해석과 밖에 있는 그것 자체가 같다고 믿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아는 것과 실재의 그것이 같을까요?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해석해서 그것이 무엇이다 라고 아는 것은 그것에 대한 정보를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보는 삶의 경험으로부터 옵니다. 그런데 각자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경험은 다릅니다. 이렇게 정보가 다르게 되면 이 해석도 달라집니다.

 

닭소리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수탉이 울면 그 소리를 꼬끼오라고 듣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다 비슷하게 듣습니다. 이렇게 비슷하게 들으면서 우리는 똑같이 듣는다 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비슷하게 듣는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동일한 문화권에 살고 있고 같은 말을 쓰고 비슷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수탉소리에 대한 정보가 비슷하고 이 정보에 따라서 비슷하게 듣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다른 정보를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들을까요? 미국사람들은 수탉소리를 칵커두들두(cock-a-doodle-doo)’라고 듣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수탉소리에 대해서 그런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듣는 것입니다. ‘꼬끼오칵커두들두는 다릅니다. 그러나 이런 다름을 가져온 소리는 한 소리였습니다. 하나의 동일한 소리를 듣고 한국인은 꼬끼오라고 알고 미국인은 칵커두들두라고 아는 것입니다. 정보가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실재하는 소리를 알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에 따라서 행하는 해석을 알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석한 세상, 우리가 만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언가에 대한 해석이 있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해석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가 투영됩니다. 좋다, 나쁘다, 아름답다, 추하다 등의 가치가 그 해석에 부여되게 됩니다. 좋다 라는 가치가 부여되면 좋아하게 되고, 나쁘다 라는 가치가 부여되면 싫어하게 되고, 아름답다 라는 가치가 부여되면 가지고 싶어하고, 추하다 라는 가치가 부여되면 없애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부여한 가치에 따라서 좋아하고 싫어하며 우리 마음은 반응합니다. 이런 마음의 반응으로 인해서 우리는 고통 받게 됩니다.

 

실재하는 것에 대한 각자의 해석에 삶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해석에 대한 가치부여에서 삶의 문제, 고통의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데 실재는 그 생각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 생각은 고통스러운 생각이라는 우리의 견해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어느 수행자가 수행홀에서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평화롭고 활기차서 수행을 아주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수행홀 밖에서 개 두 마리가 싸우기 시작합니다. 싸우는 소리가 아주 시끄럽습니다. 수행자는 순간 화가 납니다. 개들 싸우는 소리가 수행에 방해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쉽게 화가 약해졌습니다. ‘개들을 어떻게 하겠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마음이 평화롭고 활기차게 되면서 수행을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서 수행홀 뒤쪽에서 수행자 두 사람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합니다. 그 소리가 아주 작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수행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납니다. 일어나서 그 사람들에게 가서 따져야 했습니다. 그는 소리가 수행에 방해되었기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큰 소리가 수행에 더 많이 방해되고 작은 소리가 수행에 적게 방해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재로는 아주 큰 소리가 수행에 적게 방해되었고 아주 작은 소리가 수행에 더 크게 방해되었습니다. 그는 큰 소리에 작은 화를 내었고 작은 소리에 큰 화를 내었습니다. 그는 왜 화를 내었습니까? 그는 소리 때문에 화를 내었습니까? 그는 소리 때문에 화를 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소리에 대해서 갖고 있던 가치, 견해 때문에 화를 낸 것입니다. 개소리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다 란 견해를 가지고 있고 수행홀에서 떠드는 것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견해에 따라서 마음이 반응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도 마찬가지 입니다. 문제는 삶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삶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견해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견해는 고정적인 것일까요? 견해는 전혀 고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견해가 나와 남이 다르고 나 개인에 있어서도 오늘과 내일이 다릅니다. 이렇게 견해는 가변적입니다. 견해가 가변적이란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삶의 문제, 고통의 문제는 견해에서 생깁니다. 그런데 이 견해는 가변적입니다. 이런 가변적인 견해를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바꾸어갈 수 있습니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붓다께서 발견하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견해를 바르게 함으로써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견해를 바르게 바꾸어가고자 하는 활동을 우리는 수행이라고 부릅니다.

 

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이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바른 견해를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수행의 결과도 바른 견해이지만 수행의 시작도 바른 견해입니다. 수행하는 마음에 바른 견해가 있을 때 수행하는 것이고 바른 견해가 없을 때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견해의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 떼자니야 사야도께서는 일어나는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다.’ ‘대상은 대상일 뿐이다.’라는 바른 견해를 이야기하십니다. 이런 바른 견해를 가지고 수행하라고 항상 강조하십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복잡한 삶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더라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따져 들어가면 결국 남는 것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맛보고, 냄새 맡는 것입니다. 이 여섯 가지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여섯 가지의 일어남은 다 자연의 이치입니다. 조건 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일어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내가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바닥에 손을 대면 느낌이 일어납니다. 느끼지 않겠다고 해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느끼는 것은 마음입니다. 느끼는 마음이 닿음이라는 조건이 형성되면 느끼는 작용을 자기 스스로 합니다. 나와 아무 상관없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연의 이치로 일어난 것입니다.

 

눈을 뜨면 봅니다. 보지 않겠다 라고 노력하더라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는 것은 마음입니다. 볼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면 보는 작용을 마음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이치로 일어난 것입니다.

 

소리 있으면 듣습니다. 듣지 않겠다 라고 생각하더라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리 듣는 마음이 들을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면 듣는 작용을 나와 상관없이 스스로 합니다. 자연의 이치로 일어난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수 십 년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에 대한 정보가 한 순간 마음에 떠오릅니다. 마음이 한 순간 생각해 낸 것입니다. 그 생각을 여러분이 통제할 수 있습니까? 통제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생각할 조건이 되니까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이치로 일어난 것입니다.

 

냄새 나는 것이 코 가까이 오면 코가 냄새를 맡고 입에 무엇을 넣으면 혀가 맛을 느낍니다. 다 조건 되니까 마음 스스로가 스스로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다 자연의 이치로 일어난 것입니다.

 

경전에서도 붓다께서 ’ ‘나의 것’ ‘나의 진아가 아닌 것으로 일어나는 것을 보라라고 무수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대상은 대상일 뿐이다>

 

대상은 알아지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등이 다 대상입니다.

 

눈에 무수한 것이 보입니다. 다양한 색깔, 다양한 모양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양, 색깔은 모두 우리 마음의 해석이라는 것을 앞에서 알아보았습니다. 해석은 실재가 아닙니다. 실재는 다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보인다는 것으로 동일한 가치를 가집니다. 모양, 색깔 등 각각이 가지는 개별적 가치는 모두 내가 해석하고 부여한 것입니다. 진짜가 아닙니다. 단지 보이는 것이다, 눈의 대상일 뿐이다 라고 아셔야 합니다.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는 단지 소리일 뿐입니다. 다양한 소리, 좋은 소리, 싫은 소리라는 것은 모두 내가 해석하고 가치 부여한 것입니다. 실재가 아닙니다. 실재는 들린다는 사실입니다. 들린다는 것으로써 동일합니다. 대상으로써 모두 동일한 가치를 가집니다. 단지 대상으로 아십시오.

 

모든 느낌, 모든 냄새, 모든 맛, 모든 생각들을 단지 대상으로 아십시오. 단지 감각기관의 대상일 뿐입니다. 알아지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좋아할 것도 싫어할 것도 아닙니다.

 

수행을 하면서 항상 자연의 이치다’ ‘대상이다란 바른 견해를 가지고 수행을 하셔야 합니다. 일어나는 것을 알아가면서 이런 바른 견해를 자주 일깨워주십시오. 그럼 조금씩 왜 자연의 이치인지, 왜 대상인지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이해가 생겨나갈 것입니다. 이렇게 바른 견해에 대한 이해가 생기게 되며 이런 바른 견해는 자연스럽게 여러분의 수행하는 마음에 작용하게 됩니다. 수행하는 마음에 바른 견해가 있게 되면 수행하는 마음이 대상으로부터 좀 물러난 듯이 느껴지고 부드러워진 듯이 느껴지고 자유로워진 듯이 느껴집니다. 좀 더 객관적으로 대상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바른 견해를 가지고 보았을 때 좀 더 깊은 이해가 생길 수 있는 마음의 조건이 된 것입니다. 깊은 이해는 특별한 체험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하는 마음에 지혜가 있을 때 깊은 이해가 생깁니다. 이렇게 바른 견해의 지혜를 일으킴으로써 수행하는 마음에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수행은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이해함을 통해서 나의 삶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관찰해야 합니다. 자신을 알아가야 합니다. 나는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입니다. 이렇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아십시오. 그것이 알아차림입니다.

 

보면 본다고 아십시오.

들으면 듣는다고 아십시오.

느끼면 느낀다고 아십시오.

생각하면 생각한다고 아십시오.

냄새 맡으면 냄새 맡는다고 아십시오.

맛 보면 맛 본다고 아십시오.

 

이렇게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을 알아 가시면 됩니다. 왜 이런 것을 알아가야 합니까? 이것들이 실재로 이 순간 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대상들을 알아 가실 때 한 대상을 자세하게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한 대상을 자세하게 보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 분이 아는 대상은 이미 관념화된 것입니다. 관념화된 대상을 자세하게 본다고 하더라도 실재에 대한 이해는 생기지 않습니다. 대상을 가볍게 보십시오. 그런 것이 일어났다라고 가볍게 인지해주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힘주어서 애써서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볍게 아십시오.

 

한 대상을 가볍게 아시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은 다른 대상을 압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마음의 작용입니다. 내가 한 소리를 듣고 있어도 마음은 또 다른 소리를 듣습니다. 각각의 대상에 각각의 마음이 따로 따로 반응합니다. 대상이 다르면 마음도 다릅니다. 이 소리를 듣는 마음과 저 소리를 듣는 마음은 다른 마음입니다.

엉덩이에 느낌이 있으면 가볍게 느낌있다고 아십시오. 그렇게 가볍게 느낌을 알면 다른 마음이 일어나서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면 가볍게 소리있다고 아십시오. 그러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또 다른 느낌을 압니다. 그러면 그 느낌을 아시면 됩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마음이 대상을 알아가는 대로 아시면 됩니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법의 이치를 이해하고자 합니다. 자연스러운 법의 이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동적으로 알아차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알아지는 대상이 끊임없이 바뀌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알아야 할 것은 실재의 일어남입니다. 관념적 해석은 우리의 관심이 아닙니다. 일어남 그 자체를 아십시오. 뒷 차가 내 차를 빵빵거리며 지나갔습니다. 보통의 사람은 뒤차가 내차를 빵빵거리면서 지나갔다고 압니다. 그렇지만 수행자는 이러한 관념적 해석에 관심이 없습니다. 수행자는 실재로 일어난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들었다는 것과 보았다는 것이 수행자의 관심이고 알아차림의 대상입니다. 수행자는 봤다고 알아야 하고 들었다라고 알아차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좌선을 할 때와 경행을 할 때가 모두 같습니다. 좌선, 경행 일상의 삶에서 항상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십시오.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입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것을 가볍게 알아 가십시오. 알아차림에 힘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마음이 계속적으로 알게 되면 마음은 그것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

 

좌선을 하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마음이 멍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의 활발함이 약해지고 대상도 분명하지 않게 됩니다. 이럴 때는 마음의 활발함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지?’라고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마음에 일어나는 것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활발함이 생길 것입니다.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조사하는 것도 마음의 활발함을 키웁니다. ‘보는 것이 무엇이지?’, ‘어떻게 듣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십시오. 마음에 관심이 생기면서 마음의 힘이 좋아집니다. 이렇게 해도 마음이 깨어나지 않는다면 일어나서 걸으십시오. 걷게 되면 몸이 활발하게 되고 몸이 활발하게 되면 마음도 자연스럽게 활발하게 됩니다.

 

가볍게 알아가기 때문에 수행하는데 큰 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능숙해지면 계속 이어지게 알아가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자신에게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알아가는 것을 이어지게 하십시오. 자신에 대한 관심이 계속 있으면 알아차림도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대상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 없이 일어나는 대로 가볍게 알아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은 대상으로부터 물러나게 됩니다. 일어나는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줄어들기 때문에 대상에 대해 좋아함의 반응, 싫어함의 반응을 하지 않게 되고 이런 반응이 줄어들기 때문에 마음은 대상으로부터 물러납니다. 이렇게 마음이 대상으로부터 물러나고 알아차림의 힘이 좋아지면 마음은 한 순간 여러 가지 대상을 한꺼번에 알 수 있습니다. 느낌과 소리를 한꺼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순간 여러 가지 대상을 한꺼번에 아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운전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 순간 여러 가지 것을 한꺼번에 알 수 있어야 운전을 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여러 가지 것을 아는 것을 나는 단지 관찰하기만 합니다. 대상을 바꾸어가면서 아실 때, 마음이 가볍고 활기찰 때 가끔 한 번씩 알겠다는 생각을 멈추어보십시오. 알겠다는 생각을 멈추어도 앎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마음이 자연스럽게 스스로 여러 가지 것을 한꺼번에 알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알려고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대상들을 한꺼번에 알아가는 알아차림의 상태가 이 수행에서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알아차림의 방식입니다.

 

대상을 알고자 하는 마음 없이도 한 순간 여러 가지 대상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때, 마음의 힘이 좋다고 생각될 때 가끔 스스로에게 알고 있나?’라고 물어보십시오. 마음의 힘이 좋을 때 알고 있나?’ 라고 물으면 알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수긍될 것입니다. 알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알고 있다는 것이 수긍된다면 그것은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마음은 어느 곳에 고정적으로 있어서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작용하기 때문에 있다고 말하고 대상과 더불어 일어나기 때문에 있다고 말합니다. 작용 그 자체가 마음입니다.

 

작용한다고 알면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안다고 알면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본다고 알면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듣는다고 알면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생각한다고 알면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은 단지 아는 구나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직관적으로 마음에서 안다는 것이 이해됩니다.

 

우리의 지혜 수준에서는 한 순간 아주 많은 마음이 일어나서 아주 많은 작용을 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마음의 작용이 아는 작용입니다. 안다는 것이 알아지면 자주 자주 아는가?’라고 물으면서 아는 마음을 확인하십시오. 그렇게 아는 마음을 알아가면서 대상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서 마음을 중심으로 한 수행으로 수행의 기본 패턴이 변하게 됩니다.

 

대상을 아는 것과 마음을 아는 것이 무엇이 다를까요? 여러분이 아는 대상은 어떤 모양, 어떤 리듬,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모양, 색깔, 길이, 내용, 장소 등은 모두 관념화의 도구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아는 모든 것은 관념화된 것입니다. 관념화되었다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실재가 아니라는 말은 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법이 아닌 것을 아무리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법에 대한 이해는 생기지 않습니다.

 

마음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에게 엉덩이 느낌이 있습니까? 느낌이 있습니다. 어떻게 느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알기 때문에 느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마음의 아는 작용이 있습니다. 그럼 그 아는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모양입니까? 얼마나 큽니까? 어떤 색깔입니까? 우리는 이런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없습니까? 아닙니다. 분명이 있습니다. 분명이 있지만 그것을 모양, 색깔, 위치, 크기로 관념화시켜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 작용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관념화되지 않으면서 고유하게 자신의 성질대로 자신의 작용을 하는 것을 법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관념화시켜서 알 수 없습니다. 마음을 안다면 법으로써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아는가?’라고 물으면서 아는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 바로 법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법을 계속 알아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법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게 됩니다. 법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자신에 대한 이해입니다. 앞에서 대상은 대상일 뿐이다란 말을 하면서 보이는 것은 관념적으로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보인다는 성질로써 하나다 라고 했습니다. 보인다는 성질이 바로 대상의 성질이고 그것이 법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자신을 이해할 것인가?

 

이렇게 아는 마음의 작용을 계속 알아 가십시오. 계속 이해가 된다면 자주 자주 아는 마음에 대해 물으십시오. 제가 아는 마음에 대해 알아갈 때 하루 종일 5초에 한 번씩 아는가라고 물으면서 아는 마음을 확인했습니다. 아는 마음을 보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을 때 마음이 더 이상 물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묻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 이였습니다. 이렇게 수행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에 대해서 조금씩 더 깊이 이해해갈 것입니다.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저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대상과 더불어서 일어납니다. 안다는 것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아진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됩니다. 안다는 것은 마음이고 알아진다는 것은 대상의 작용입니다. 이 둘은 톱니의 양축과 같습니다. 한 쪽을 이해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다른 쪽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을 이해해감으로써 더불어 대상을 이해해가게 됩니다. 마음과 대상, 이것이 우리 존재의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순간 일어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입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는 실재로 모두 대상과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눈에서는 보고 보이는 것의 작용이 일어나고 있고 귀에서는 듣고 들리는 것의 작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과 대상을 이해해 감에 따라서 이 둘의 관계성도 이해해 가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해가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해해가면 이해해갈수록 우리 삶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 조금씩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게 됩니다.

 

수행에 방해되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수행을 하면서 수행에 방해된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소리, 아픔, 졸림, 생각 등이 그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일어나면 수행자는 이것들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이런 것들에 대해서 바르게 대처하는 것일까요?

 

좌선을 하는데 소리가 들립니다. 쉽게 소음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시끄러워서 수행을 할 수 없다고 한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소리 들림은 자연스러운 우리 존재의 활동입니다. 내가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소리는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모두 법의 일어남입니다. 우리가 알아야할 대상입니다. 소리가 있으면 소리 있다고 아십시오. 내가 화를 내야할 대상이 아닙니다.

이해해야할 대상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소리일 때 많은 경우 우리는 화로써 그 소리에 반응합니다. 마음에 화가 일어나면 화가 일어났다고 아십시오. 대상에 대해서 내 마음에 어떤 반응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알아차려야할 것은 대상에 대해 반응하고 있는 마음입니다. 반응하고 있다고 아셔야 합니다.

 

좌선을 오래하게 되면 다리가 아픕니다. 아픔은 보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마음은 아픔을 압니다. 싫어하는 마음으로, 없애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압니다. 아픔을 보면서 마음은 아픔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은 바른 마음가짐이 아닙니다. 대상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는 것은 모두 바른 수행의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상을 바꾸고자 하지 않습니다. 단지 바르게 보고자 할 뿐입니다. 아픔도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법의 일어남입니다. 있으면 있다고 아셔야 합니다.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보지 마십시오. 우리는 아픔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단지 아픔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단지 지켜볼 뿐입니다.

대상이다, 자연의 이치다.’ 라는 바른 견해를 가지고 아픔이 있음을 가볍게 알아 가십시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물론 그렇게 지켜보다가 아픔이 너무 커져서 더 이상 바르게 지켜볼 수가 없으면 자세를 바꾸어주십시오. 자세를 바꾸어주면서 계속 알아차림을 하신다면 아주 바르게 수행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의 힘이 좋아지면 아픔이 크더라도 무덤덤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좌선을 하게 되면 쉽게 마음이 멍하게 되면서 졸립니다. 조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조는 마음의 작용도 마음의 여러 작용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졸리면 졸린다 라고 아십시오. 나쁜 것이다, 없어져야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알아야 할 것이다, 이해해야 할 것이다 라고 아셔야 합니다. 조는 마음에 관심을 가져보십시오. 이렇게 졸림을 알아차려도 마음이 깨어나지 않는다면 일어나서 걸으십시오. 자세를 바꾸기 전에 항상 그 대상을 바르게 보려는 노력을 먼저 해 보셔야 합니다.

 

수행 중에 많은 생각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흔히들 망상이라고 부르면서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릇된 마음가짐입니다. 생각은 우리의 존재의 진행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없으면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생각도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을 하면 생각한다 라고 아십시오. 알 수 있는 만큼 생각할 때 마다 생각한다 라고 아십시오.

 

처음에는 생각이 완전히 끝이 나고 나서야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아십시오. 그렇게 계속 알 수 있는 만큼 알아 가시다보면 조금씩 생각하면서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능숙해지면 생각한다고 알면서 생각을 계속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알면서 생각을 하게 되면 생각이 우리에게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알면 아는 만큼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이 외에도 수행 중에 부정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일어납니다. 화가 날 수도 있고, 초조할 수도 있고, 두려울 수도 있고, 머리가 멍할 수도 있고, 몸이 무거울 수도 있습니다.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던 수행에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스런 우리 존재의 진행의 한 단면이고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조건 되어 일어나는 법의 일어남입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없애야 할 것이 아닙니다. 있으면 있다고 알면 됩니다. 단지 그런 것을 알면서 자연의 이치다’ ‘대상이다란 바른 견해만 일으켜 주시면 됩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것들까지도 모두 수행의 대상이란 것을 이해하시게 되면 수행하지 못할 시간과 상황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언제나 수행할 수 있습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특정시간과 장소에서 특정목적을 얻기 위해서 하는 특별한 활동이 아닙니다. 붓다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라 라고 하신 삶의 방식입니다. 붓다께서는 우리에게 알면서 살아라.’ 라고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지혜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많은 수행자들이 어떤 특별한 체험이나 보통의 마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때 특별한 지혜가 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이 순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도 봄, 들음, 느낌, , 냄새, 생각입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도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일어나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도 이러한 일어남을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의 체험은 우리에게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알기 위해서 특별히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런 일어남에 대해서 자연의 이치다’ ‘대상이다란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과 이런 일어남을 계속적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견해가 바르고 알아차림이 이어진다면 우리에게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일어남에 대한 이해가 생길 것입니다.

 

저의 스승께서 당신에게 특별한 지혜가 생긴 이야기를 가끔 해 주십니다. 한 번은 사야도께서 샤워를 하기 위해서 목욕탕에 들어가셨습니다. 물을 몸에 부으시고 비누칠을 하려고 비누를 잡아서 가까이 가져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비누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사야도에게 이런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왜 냄새는 코로만 맡을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비누를 들고 계속 냄새를 관찰하셨습니다. 마음에는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순간 마음에 아주 분명한 지혜가 생겼습니다. ‘진짜 냄새는 코로만 맡을 수 있구나라는 이해가 마음에 불현듯 생겨났습니다. 그 지혜로 인해서 마음은 아주 맑고 깨끗해졌고 아주 행복해졌습니다. 목욕을 마치고 밖에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도 냄새는 코로만 맡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야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야도께서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각각 고유한 성질이 있어서 조건이 되면 각각 고유한 작용을 스스로 한다는 깊은 무아에 대한 지혜을 얻으신 것입니다. 이런 깊은 지혜를 얻기 위한 사야도의 체험이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단지 냄새를 맡으신 것이였습니다. 어떻게 사야도에게 이런 지혜가 생겼을까요? 체험이 특별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체험은 보통의 체험이였습니다. 특별한 것은 그 체험을 아는 마음이였습니다. 그 마음에 바른 견해의 지혜와 일어나는 것에 대한 관심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냄새 맡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통찰이 생겼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법의 일어남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통찰해야할 것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경험하지 못하는 것에 통찰의 지혜가 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믿는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음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좋다라고 말을 하면서 살지만 실제로 우리는 마음을 잘 모릅니다. 단지 막연히 마음을 라고 생각합니다.

 

내게 마음이 있습니까? , 내게 마음이 있습니다. 보는 것이 마음이고 듣는 것이 마음이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본다 라고 알지 않고 내가 본다 라고 알고 있습니다. 마음이 듣는다 라고 알지 않고 내가 듣는다 라고 알고 있습니다. 마음이 곧 나라고 믿으며 살고 있습니다. 과연 마음이 나일까요?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하는 존재입니다. 마음이 나라면 그 마음은 당연히 나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할 것입니다. 나 스스로가 나의 불행을 원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과연 나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지 한 번 봅시다.

 

건강상의 목적이나 다양한 사회적 목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를 합니다. 기본적으로 적게 먹는 것이 다이어트의 방법입니다. 안 먹어 봤습니다. 배가 고픕니다. 배가 고프면 마음이 반응하며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대화체로 일어나는 생각을 마음이 말한다 라고 표현합니다. 마음이 이런 말을 합니다. ‘좀 먹자’ ‘조금 먹는건 괜찮아‘ ’오늘 아침 몸무게가 2kg 줄었더라!‘ 이런 말들을 하면서 나로 하여금 먹기를 권합니다. 그렇게 먹기를 원하는 마음을 나의 마음이라고 알고 마음을 따라서 먹었습니다. 먹고 난 뒤에 마음이 행복할까요? 절대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참한 기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족 가운데 누군가에게 강하게 화가 났습니다. 화의 마음이 상대에게 이렇게 말해라 이렇게 행동하라고 자꾸 충동합니다. 화의 마음을 나의 마음이라고 믿고 내가 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며 화가 시키는 대로 화의 말을 하고 화의 행동을 했습니다. 하고 난 뒤에 마음이 개운할까요? 마음이 더 비참해질 것이 자명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나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한 행동의 결과가 나의 고통이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은 나를 위해서 일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단지 마음일 뿐입니다. 자신의 고유한 성질이 있어서 조건이 형성되면 자신의 고유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화의 마음은 화낼 조건이 되면 화를 내고 욕심의 마음은 욕심낼 조건이 되면 욕심내는 작용을 합니다. 그런 작용에 전혀 나의 행복은 고려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일만을 해나갈 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마음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지혜있는 사람은 마음을 믿지 않습니다. 마음이 일어나면 일어난 줄 알고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고 옳다고 알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하고 옳지 않다고 알면 그 마음이 시키는 것을 행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믿지 마십시오.

 

좋은 마음이란?

 

수행을 가장 광범위하게 정의한다면 좋은 마음을 기르기 위한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다양한 좋은 마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4여의족, 5, 5, 7각지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합니다. 이 마음들을 좋은 마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마음이 있을 때 마음에 좋은 느낌이 생겨나고 우리가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수행에서는 주로 5력으로 좋은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신심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마음은 굳건해집니다. 마음에 확신이 생기면서 좋은 느낌을 가져옵니다. 모든 종교에서 이런 믿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사람 신심이 좋다 라고 말을 하면 그 사람을 종교인으로써 칭찬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이것과 약간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 수행에서 좋은 마음이라는 것은 균형을 이룬 마음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균형이 맞을 때 더 깊은 이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심은 지혜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지혜는 아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고서 믿을 때 바른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알지 못하고 믿는 맹목적 믿음을 우리는 어리석음이라고 말합니다.

 

깔라마경에는 믿음에 대한 붓다의 독특한 가르침이 실려 있습니다. 케사풋타에 사는 칼라마 사람들이 그 곳을 방문한 붓다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붓다여! 많은 수행자들이 케사풋타에 옵니다. 와서는 자신들의 가르침을 이야기하고 다른 이의 가르침을 비난합니다. 다시 다른 수행자가 와서 먼저 온 수행자의 가르침을 비난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알지 못해 혼란스럽습니다. 붓다께서 이 문제를 좀 해결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들으시고 붓다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전승되어온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믿지 말아라. 다른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을 믿지 말아라. 경전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믿지 말아라.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그럴 것이다 라고 생각되더라도 그것을 믿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너의 스승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믿지 말아라. 그럼 어떤 것을 믿어야 하는가? 그것을 너 스스로 취해서 행해보고 그것이 너에게 행복과 복됨을 가져온다고 스스로 분명하게 알았을 때 그것을 믿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알고서 믿어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믿지 말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알면 믿을 필요가 있을까요? 무엇이 무엇이라고 알면 무엇이 무엇이라고 믿을 필요가 있을까요?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알면 믿음의 마음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아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믿음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이렇게 앎과 믿음은 연결되어 있고 수행을 바르게 하면 자연스럽게 두 가지 마음이 균형을 이루며 함께 힘을 키워가게 됩니다.

 

새로운 종교가 처음 태동할 때는 언제나 기존의 가치, 사회 환경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면서 나타납니다. 자신들의 이상을 가지고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노력합니다. 아주 진취적이고 활동적이며 자기실현적입니다. 그 종교가 개인의 삶을 좀 더 행복하게 하는 역할을 하면 자연스럽게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종교를 따르고 그 종교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향상시켜나갑니다. 그렇게 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교단이 커지게 되면 처음 가졌던 가치를 가지고는 교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가 힘들어집니다. 각자 자신의 이상을 가지고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이상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이 한 무리를 이룰 때 그 무리 안에는 많은 주장과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조직이 커지게 되고 초기에 가졌던 자유주의적 경향이 교단을 불안정하게 만들면 교단을 이끄는 사람들이 그 종교가 가지고 있는 여러 좋은 가치들 가운데 믿음을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스스로 길을 찾으려 하지 말고 단지 믿기만 하면 된다 라고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문제를 진취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길을 버리고 점점 믿고 따르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믿는 사람은 따르는 사람이고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루기가 아주 쉽습니다. 쉽게 지배되는 피지배인이 됩니다. 진취적이고 자기실현적 가치가 중시되던 종교 초기에는 대체로 정치권력이 이런 종교를 탄압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길을 스스로 가는 사람들은 지배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종교가 커지고 믿음이 그 종교의 우선적 가치가 되면 정치권력이 그 종교를 지원합니다.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아주 지배하기 쉬운 사람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어리석음의 경향을 띠기가 쉽습니다. 여러분은 믿지 마십시오. 믿음은 붓다의 가르침에서 큰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붓다는 믿어라 라고 말씀하시기보다 의심해라 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알지 못하는 것을 알기위해서 관찰하고 조사하고 의심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스스로 무언가를 이해했을 때 믿음은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이렇게 알고서 믿는 것을 바른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노력


우리는 삶을 살면서 많은 노력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정한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부단히 애쓰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노력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삶에서 우리가 하는 노력을 바른 노력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삶에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노력할 때 그 노력의 기본적 에너지가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나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있을 때 우리에게 괴로움을 줍니다. 욕심으로 노력하기 때문에 삶에서 무엇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때 그 노력의 과정은 괴롭습니다. 노력의 과정은 괴롭지만 결과만 이루고 나면 나는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라는 환상을 가지고 지금의 괴로움을 정당화시킵니다.

 

수행도 이런 태도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행하는 지금은 설령 괴롭더라도 수행을 다 이루고 나면 나는 진정 행복해질 거야 라는 환상을 가지고 수행합니다. 그릇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지금 괴로우면 괴로움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하는 존재입니다. 과거와 미래라는 것은 환상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이고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시간도 지금 이 순간이고 수행이 완성되는 것도 지금 이 순간입니다. 우리는 미래의 수행의 완성을 위해서 수행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바르게 수행하고자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삶을 바르게 바라보고자 합니다. 지금 바르게 수행하는 것, 지금 바르게 사는 것 그것이 우리 수행의 목적입니다. 미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수행하지 마십시오. 지금 단지 수행하려고 하십시오. 지금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바른 견해를 일으키면서 자신에게 실재로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고 있다면 충분합니다. 여러분의 수행은 여러분의 지혜의 수준에서 지금 이 순간 완성된 것입니다.

 

경전에서 붓다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느 사람이 붓다에게 물었습니다. ‘붓다는 어떻게 이 고통의 강물을 건넜습니까?’ 붓다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강물을 건너면서 중간에 멈추지도 않았고 애써 강물을 헤쳐 나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럼으로써 나는 이 고통의 강물을 건넜다.’ 중간에 멈추는 것은 수행을 포기하는 것을 말하고 애써 강물을 헤쳐 나가려는 것은 욕심으로 수행하는 노력을 말합니다. 붓다는 이 두 극단을 버리시고 중도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너무 애써서 수행하지 마십시오. 저의 스승께서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한국인이 수행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 겁이 난다. 모두 욕심으로 열심히 하기 때문이다.’ 수행을 해서 차라리 수행을 하지 않은 것만 못한 마음의 상태가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욕심으로 인한 과도한 노력입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것은 단지 바른 견해를 일으키고 알아차림을 이어지게 하려는 노력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지혜


경전에서 붓다께서는 문혜, 사혜, 수혜를 말씀하십니다.

문혜는 들어서, 읽어서 아는 지혜입니다.

사혜는 생각해서 이해한 지혜입니다.

수혜는 수행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통찰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많이 읽고 많이 들어야 합니다. 많이 알아야 수행을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행의 정보는 여러분의 수행하는 마음에 자연스럽게 작용합니다. 경전의 경우는 어느 것이나 붓다께서 직접 설한 경전을 읽으면 됩니다. 그 가운데 샹윳다 니까야에 우리가 하는 수행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수행과 관련된 정보는 선택해서 취하셔야 합니다. 붓다께서 빠리닙바나에 드신 지가 2500년이 되었습니다. 비구승가가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전승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여러 가지 오류가 생긴 것은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붓다 사후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어왔고 그 해석에 따른 다양한 수행법들이 행해졌습니다. 지금도 미얀마 등지에 가보면 여러 스승들이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방법의 수행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상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러한 방법들이 그 가는 길은 설령 다르더라도 도착점은 같을 것이다 라는 것을 믿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양한 스승들은 다양한 방법을 가르치고 계시고 서로 다른 결과를 이야기하십니다.

 

여러분이 쉐우민에서 행해지고 있는 심념처 수행을 하시고자 한다면 다른 수행법에 대한 정보는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쉐우민 수행과 관련한 정보를 얻으십시오. 우리가 함께 하는 [쉐우민 숲속]이라는 카페가 다음에 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시면 여러 가지 쉐우민 수행과 관련된 정보가 있습니다. 그 곳에 있는 법문을 들으시고 책을 읽으십시오.

 

그렇게 얻은 정보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수행에서 생각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풍토가 있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7가지 길 가운데 하나가 법에 대한 조사입니다. 법과 수행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셔야 하고 그 생각을 통해서 사유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해하셔야 합니다. 수행을 시작하면서 수행에 대한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얻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은 스스로 그 정보들을 생각을 통해서 소화시키려 합니다. 수행 초기에 앉거나 걸으면서 마음이 알아서 수행과 법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생각을 진행시켜 나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생각을 통해서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알고자하는 에너지로 남아있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의 내용들에 대해서 직접 수행을 통해서 실재로 이해하게 되면 그런 생각을 하고자 하는 마음의 에너지가 약해집니다. 알고자 하는 에너지는 알아차림의 과정에서 새로운 이해가 생길 수 있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수행에 대한 바른 정보가 있고 그것을 생각으로 이해하고서 실재하는 몸과 마음의 일어남을 알아차림 해 나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수혜가 생겨납니다. 수혜를 통찰지라고도 부릅니다. 통찰지는 실재하는 것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바른 견해를 일으키면서 대상을 가볍게 봐 나갑니다.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줄어들기 때문에 대상으로부터 마음이 조금씩 멀어집니다. 이렇게 대상으로부터 수행하는 마음이 멀어지면 한 순간 여러 개의 대상을 한꺼번에 알 수 있습니다. 여러 개의 대상을 한꺼번에 알 수 있을 때 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는 작용은 어떤 모양, 위치, 크기로 관념화시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이해할 수 있는 실재하는 법, 빠라마타입니다. 안다는 것이 이해되면 자주 자주 아는가?’라고 물으면서 아는 마음을 확인합니다.

 

수혜는 두 가지 패턴으로 생겨납니다. 실재하는 법을 계속해서 알아차림 하게 되면 조금씩 마음에 실재하는 법에 대한 이해가 생깁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생기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상당시간이 지난 뒤에 내게 이런 이해가 생겼다 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의 경우는 마음의 조건이 아주 좋을 때입니다. 좋은 마음의 힘이 아주 좋고 마음의 균형이 맞을 때 한 순간 폭발적인 이해가 생기게 됩니다. 예를 든다면 화를 지켜보면서 화가 단지 마음이구나라는 이해가 한 순간 마음에 알아집니다. 이런 이해가 생겼을 때 내가 이 지혜의 내용에 대해서 100%안다고 스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온통 지혜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 순간 마음에 번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난 순간 마음은 전혀 다른 차원의 상태로 바뀌어 집니다. 아주 깨끗하고 밝고 행복한 상태가 됩니다.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계속적으로 알아차림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아는 마음, 실재하는 법의 특성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갑니다. 하나의 대상을 알 때도 그 아는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이해가 생깁니다. 고정된 것 같은 벽을 보면서도 그 벽을 바라보고 있는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음을 이해합니다.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마음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무상에 대한 이해입니다. 보는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보이고 있는 대상의 직용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대상을 이해합니다. 손바닥을 서로 문지르면 느낌의 변화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주먹을 쥐고 있으면 느낌의 변화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안다는 것을 계속 알아가게 되면 그런 경우에도 느끼는 마음의 끊임없는 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새싹이 무상합니까? 새싹은 무상하지 않습니다. 새싹은 관념이고 관념은 불변합니다. 그럼 그 때 무엇이 무상입니까? 새싹이 계속 끊임없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 무상합니다. 흔히들 시간의 경과 안에서 무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무상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이 아닙니다. 불교의 진리는 오직 실재하는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상도 이 순간의 무상을 말하고 찰라의 무상을 이야기합니다. 현재 이 순간 인식의 진행과정에서 각각의 역할을 하는 실재하는 작용들이 무상한 것입니다. 눈과 보이는 것의 작용, 귀와 들리는 것의 작용, 느낌과 느낌 아는 것의 작용 등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내 존재가 한 순간도 멈춰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무상에 대한 이해가 생기면 이런 이해는 새롭게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는 수행하는 마음의 바른 견해가 됩니다. 무상하다란 시각으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림 해 나갑니다. 이렇게 알아차림 해 나가다보면 어느 순간 이러한 일어남의 진행에 나는 그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하는 구나 라는 이해가 마음에 분명해집니다. 일어나는 것은 나와 상관없이 자신들의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자신들의 작용을 스스로 해 나간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조건이 갖추어지면 눈은 보고 귀는 듣고 마음은 생각한다는 이해가 생깁니다. 이것이 무아에 대한 이해입니다.

 

일어나는 것들이 나의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싫어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끊임없이 알아차림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알아차림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이러한 일어남이 계속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존재가 계속되는 것은 원할 바가 아니다란 것을 통찰하게 됩니다. 이것이 고에 대한 이해입니다. 고에 대한 이해가 다른 지혜보다 더 수승한 지혜인 것 같습니다. 붓다도 경전 여러 부분에서 고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수행한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돌아가신 쉐우민 사야도께서는 존재의 고를 완전히 이해했을 때 진정 마음은 열반을 향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존재에 대한 집착이 있는 우리가 고에 대한 지혜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의 경우를 통해서 고에 대한 이해가 무엇인지 한 번 알아봅시다.

 

저는 미얀마에서 수행하면서 무상과 무아에 대한 이해가 어렵지 않게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고에 대한 이해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저의 스승께서는 지혜가 약해서 그렇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계속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에 혼자 야외에서 경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어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알아지고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계속적으로 알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단지 아는 것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 마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 지겹다!’ 이러한 계속된 존재의 이어짐이란 것이 참으로 지겨운 것이다란 것이 한 순간 알아졌습니다. ‘지겹다.’ 라고 하는 마음은 일반적으로 화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때는 화가 그것을 안 것이 아니라 지혜가 그것을 알았습니다. 일어나는 것, 존재하는 것이 전혀 바랄 바가 아니다 라는 것이 마음에 아주 명확했습니다. 그런 앎으로 인해서 마음이 밝아지고 깨끗해졌고 행복해졌습니다. 지혜로써 존재하는 것이 지겹다라고 깨달은 순간 존재하는 것에 대한 모든 집착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절대의 평화, 절대의 자유가 느껴졌습니다. 그 때 존재가 지겹다 라고 이해한 마음이 바로 고에 대한 이해의 마음입니다. 고에 대한 지혜가 있을 때 존재하는 것에 대한 모든 집착을 놓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이해가 완전해졌을 때 우리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그 자신의 원인과 결과로 인해 열반을 향해 간다라고 스승들은 이야기 합니다. 붓다께서도 경전에서 존재에 대한 열정이 모두 식은 마음이 고통의 끝, 열반을 향해간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고요함


흔히들 사마디를 집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마디는 집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디는 마음의 고요한 성질입니다. 그러한 고요함을 가져오는 원인은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집중명상을 통한 고요함이고 또 하나는 지혜명상을 통한 고요함입니다. 집중명상은 하나의 대상에 끊임없이 마음을 두어가는 수행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대상에 계속적으로 마음을 두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은 그 대상과 밀착합니다. 밀착의 밀도가 점점 높아지면 이 마음은 다른 마음작용들을 누르게 됩니다. 생각하는 마음작용, 느낌 아는 마음작용이 잘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들어오는 정보가 줄어들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은 고요해집니다. 이런 고요함을 아빠나 사마디, 집중명상을 통한 고요함이라고 말합니다.

 

지혜명상에서는 바른 견해를 가지고 대상을 봅니다. 꽃과 오물이라는 시각적 대상이 있을 때 꽃과 오물이라는 것은 관념적 해석일 뿐이고 실재는 보일 뿐이란 것을 이해해갑니다. 이 두 가지가 보인다는 실재하는 성질로써는 같다는 이해가 생깁니다. 보인다는 실재하는 성질은 같다 라는 이해를 가지고 꽃과 오물을 보게 되면 꽃에 대해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오물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마음과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은 동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마음은 고요해집니다. 이런 고요함을 까니카 사마디, 지혜명상을 통한 고요함이라고 합니다.

 

대상을 바르게 보기 때문에 생기는 고요함입니다. 이런 고요함이 있을 때는 그 고요함과 더불어 마음의 활발함도 함께 있습니다. 대상을 자유롭고 가볍고 활기차게 알아가지만 대상에 대한 견해가 바르기 때문에 마음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대상을 단지 대상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마음은 고요합니다. 이렇게 고요함과 활발함이 함께 균형있게 개발되어갑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진정 좋은 마음은 균형이 맞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균형을 이룬 마음에서 지혜가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고요함은 수행에서 큰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수행자가 수행 중에 마음이 고요해지고 편안해지면 대체로 그 상태를 좋아합니다. 그런 상태를 반복적으로 체험하고 반복적으로 좋아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에는 고요함을 추구하는 내적 경향이 생겨납니다. 마음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내적 경향이 있고 조건이 형성되면 마음이 스스로 그런 고요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미얀마에 있을 때 비가 오면 수행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비가 왔고 수행상태가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때 내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비가 오니까 수행이 안 되는구나. 공기가 습하면 마음이 약해지는 모양이다.’ 비가 우기 동안 계속 왔고 이런 생각을 반복적으로 계속 했을 것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그 생각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오면 수행이 안 된다는 것이 내 마음에 굳게 프로그램된 것입니다. 10월이 되었고 비가 그치고 해가 떴습니다. 마음이 가벼워지고 밝아져서 수행이 아주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에 법당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데 수행상태가 아주 좋았습니다. 그 때 천정에서 ,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음이 그 순간 비가 오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아는 순간 마음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비가 온다고 안 순간 마음이 자신에게 프로그램된 대로 자신이 알아서 마음의 상태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마음은 내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성질에 따라 조건이 되면 자신의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 중 마음이 고요하다 라고 생각되면 그것을 경계하십시오. 그리고 고요함의 반대되는 힘인 마음의 활발함을 체크해주십시오. 마음이 얼마나 깨어있는지, 마음이 얼마나 활발한지, 대상을 얼마나 많이, 분명히 알고 있는지를 확인해 주십시오. 마음의 활발함이 약하다 라고 생각되면 질문과 조사를 통해서 마음의 활발함을 키워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마음의 활발함이 키워지지 않으면 일어나서 걸으십시오. 걸으면 몸이 활발해지고 몸이 활발해지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활발해집니다. 몸과 마음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수행센터에서의 수행 시간표에 좌선과 경행을 교대로 두는 것은 바로 마음의 활발함과 고요함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좌선 중 고요하다라고 느껴졌다면 이미 마음의 균형은 무너졌습니다. 수행 중 좋은 마음의 성질들이 함께 균형 있게 개발되면 어느 한 가지 성질이 두드러지게 알아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활발함의 힘이 커지면 고요함의 힘도 함께 커져서 서로를 제어해서 어느 하나가 두드러지지 않게 합니다. 지혜의 힘이 커지면 신심의 힘도 함께 커져서 어느 하나가 두드러지지 않게 합니다. 통찰의 지혜가 날 때의 마음을 살펴보면 그 당시에는 마음의 상태가 아주 평범한 것 같이 느껴집니다. 물론 그 때 마음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마음의 요소들, 신심, 노력, 지혜, 고요함, 알아차림의 힘들이 함께 균형 있게 개발되어 어느 하나도 두드러지지 않아서 평범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가 더 깊은 통찰지가 생길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미얀마에서 스승과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고요하다, 평화롭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저는 수행하면서 고요하다 라고 느낀 적이 거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승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 지혜가 작용하고 있는데 어떻게 고요하다 라고 느낄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이 고요하다 라고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고요해도 고요한 줄 알지 못한다.’


알아차림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세상을 알고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도 물론 알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관념적인 것만을 알고 있습니다. 해석, 정의, 묘사, 이야기를 알면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앎이 수행에서 말하는 바른 알아차림은 아닙니다. 수행에서 말하는 바른 알아차림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른 견해입니다. 맨 처음 수행하는 수행자에게는 자연의 이치다.’ ‘대상이다.’란 바른 견해가 주어집니다. 자연의 이치다, 대상이다란 바른 견해를 일으키면서 알아차림을 해 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연의 이치가 무엇인지,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마음에 생겨나갑니다. 이런 지혜는 바른 견해를 일으킬 때 자연스럽게 수행하는 마음에 작용합니다. 이 지혜의 작용으로 인해 수행하는 마음이 대상으로부터 좀 물러난 듯이 느껴지고 좀 가벼워진 듯이 느껴집니다. 대상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이 줄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생겨납니다. 수행하는 마음이 좀 더 바르게 된 것입니다.

 

수행에서 어떤 것을 보고 어떤 체험을 하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는가 입니다. 붓다께서는 수행방법을 이야기하시면서 항상 그것을 그것 자체로 알아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연의 이치다, 대상이다.’란 것을 이해한 마음은 일어나는 것을 그것 자체로 알아차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바른 견해를 가지고 알아차림 수행을 하게 되면 조금씩 대상에 대한 이해가 생깁니다. 이렇게 생긴 대상에 대한 이해는 자연스럽게 이 후 그 대상을 알아차림 할 때의 바른 견해가 됩니다.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대상을 좀 더 바르게 알아차림 하게 됩니다. 대상을 바르게 보면 볼수록 우리는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갑니다.

 

바른 알아차림의 대상은 실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싶은 것은 실재하는 법의 특성입니다. 실재하는 법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재하는 법을 대상으로 알아차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수행하면서 우선 6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을 각각 따로 따로 알아갑니다. 가볍고 자유롭게 알아갑니다. 마음의 힘이 좋아지고 능숙해지면 한 순간 많은 것을 한꺼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알 때 나는 각각 하나 하나의 대상을 알려는 마음을 전혀 내지 않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되었을 때 마음의 아는 작용이 이해됩니다. 우리는 아는가라고 물으면서 안다는 것이 이해되는지를 체크해봅니다. 안다고 수긍되면 바로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는 마음의 작용은 어떤 모양, 형태, 위치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작용만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관념화되지 않으면서 고유한 성질과 작용으로 존재하는 것을 법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수행의 점차에서는 아는 마음의 작용을 이해했을 때 실재하는 법을 대상으로 알아차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실재하는 법은 아는 마음 이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많은 실재하는 법 가운데 모든 마음의 작용들과 언제나 함께 작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의 작용이 아는 작용이여서 우리는 이 마음의 아는 작용을 기본적인 수행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렇게 신심, 노력, 지혜, 마음의 고요함, 알아차림이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개발해가는 좋은 마음들입니다. 이런 마음들은 개별적으로 개발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수행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의해 균형 있게 개발되어갑니다. 우리가 가장 주체적으로 해가는 것은 알아차림입니다. 무엇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은 대상과 거리가 생기게 됩니다. 화가 났을 때 화를 알게 되면 화와 화를 아는 마음 사이는 자연스럽게 떨어집니다. 이렇게 멀어지게 되면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약해지고 집착하는 마음이 약해지면 동요하는 마음이 약해집니다. 마음이 동요하지 않으면 고요해집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바르게 하면 자연스럽게 마음의 고요함의 힘이 커집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됩니다. 실재하는 법인 마음의 아는 작용을 좀 더 분명히 알아차림 하게 되고 그것에 대한 이해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고요하면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지혜가 생겨나고 지혜의 작용을 이해하면서 정말 좋은 마음이 생기는 구나, 이것을 통해서 행복해지는 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로인해 신심이 생깁니다. 지혜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신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심이 생기면 더 하고자 하는 마음의 에너지가 생깁니다. 신심으로 인해서 노력의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노력의 힘이 생기면 더 알아차림을 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5가지 좋은 마음은 서로 원인과 결과로 묶여 있습니다. 바르게 수행하면 서로 균형있게 5가지 좋은 마음의 요소가 함께 개발되어 갑니다.

 

나쁜 마음이란?

 

그 마음이 있을 때 괴로운 느낌을 가져오는 마음을 나쁜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 마음들은 크게 욕심, , 어리석음으로 설명합니다. 물론 이 마음들도 고유한 성질이 있어서 조건이 되니까 자연스러운 자신의 작용을 하면서 일어난 법입니다. 마음의 느낌이 좋지 않고 괴로움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나쁜 마음이라고 합니다.

 


세 가지 마음 가운데 가장 나 자신과의 동일시가 약한 마음이 화입니다. 나와 동일시가 약하기 때문에 이 마음을 아는 것은 다른 것에 비해서 쉽습니다.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쉽게 자신이 화가 났을 때 화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가 있을 때 마음이 괴롭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고 그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던 마음입니다.

 

화의 기본적인 성질은 피하려는 성질, 없애려는 성질, 괴롭히려는 성질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화가 났을 때 화가 어떤 작용을 하는 지 보십시오. 그 사람 욕을 계속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괴롭힐 수 있을 지를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실패해서 망해가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합니다. 화가 나빠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자신의 고유한 성질이기 때문에 자신의 고유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눈에서 일어난 마음이 보는 작용을 하듯이 화는 일어나면 부수고 괴롭히고 없애려고 합니다.

 

화는 항상 스스로 더 커지려고 하고 다른 이에게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화가 났을 때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지 한 번 보십시오. 화가 났을 때 화의 마음은 화가 난 상황에 대해서 더 안 좋게 해석합니다. 그 상황을 더 안 좋게 해석하면서 더욱 크게 화를 냅니다. 어떤 사람에게 화가 났을 때 화의 마음은 그 사람을 실재보다 더 안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내고는 더 크게 화를 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괴롭도록 생각하는데 아주 능숙합니다. 화는 자신이 다른 이에게 전파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에게 화가 났을 때 화의 마음은 제 3자에게 가서 내가 화난 사람의 험담을 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화난 사람을 주제로 3자와 이야기하면서 그 사람 험담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입이 근질근질 합니다. 결국에는 험담을 하게 됩니다. 이것도 화의 성질입니다.

 

이런 화는 우리에게 쉽게 알아지는 화입니다. 실재 화는 이런 것들보다 훨씬 우리 마음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제가 화의 뿌리가 깊다는 것을 안 일화가 있습니다. 미얀마에서 남방스님으로 살고 있을 때 어느 날 아침 대중스님들과 탁발을 나갔습니다. 맨 뒤쪽에서 따라가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탁발하는 스님들이 앞줄과 뒷줄로 나누어졌습니다. 그 때 내가 왜 뒷줄 맨 앞의 스님이 앞줄을 빨리 따라가지 않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을 알고 그 생각이 화가 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걸 알고 나니까 일상에서 수많은 화를 내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낮에 법당에 들어오니 불이 켜져 있습니다. ‘왜 불이 켜져있지?’ 라고 생각합니다. 화가 생각한 것입니다. 신발이 서로 삐뚤게 놓여 있습니다. ‘왜 저렇게 놓여 있지?’ 화가 한 생각입니다. 내가 정해놓은 것과 상황이 조금만 달라도 마음은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그것이 화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화는 다양한 형제군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려움, 불안, 초조, 슬픔, 우울과 같은 마음들은 모두 다 화와 같은 성질의 마음들입니다.

 

수행을 하면서 더 깊이 잠재된 화에 대한 이해를 한 일이 있습니다. 마음이 활짝 깨어있고 알아차림이 계속 이어지면서 새로운 이해를 계속 해 나갈 때였습니다. 하루는 알아차림의 힘이 아주 좋아져서 어떤 대상을 접했을 때 일어나는 첫 마음의 반응을 알 수 있었습니다. 법당에서 경행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 나무, 새소리 등에는 마음이 계속 평온하게 반응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대상으로 했을 때는 달랐습니다. 법당으로 올라오는 수행자를 봐도 첫 마음은 화로써 반응하고 나와 같이 경행하고 있는 수행자를 봐도 첫 반응은 화의 반응 이였습니다. 심지어 좌선하면서 가만히 앉아있는 수행자를 봐도 첫 마음의 반응은 화였습니다. 마음이 좋지 않은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마음은 깨어있고 밝고 깨끗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을 대상으로 했을 때는 항상 화로써 반응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 인간이라는 존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을 경계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살아오면서 다른 인간들로부터 수많은 고통을 받아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른 인간을 경계하는 마음의 경향이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마음에 화가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알았고 그것을 극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도 더불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화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아리야 성인들이 얼마나 위대한 분들인가에 대한 이해도 생겼습니다.

 

욕심


욕심은 화보다도 더 나 자신과 동일시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욕심을 보는 것은 화를 보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욕심은 기본적으로 나로 하여금 가지게 하고 먹게 만들려고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반찬으로 햄 구이가 나왔다고 해 봅시다. 젓가락을 가지고 집으러 갑니다. 그리고 항상 가장 맛있게 보이는 것을 집습니다. 욕심이 그렇게 시킵니다. 젓가락이 출발하기 전에 햄을 보면서 마음은 무엇을 집을지 이미 정해놓고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그것을 집으려는 마음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저거라고 말하는 마음의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너무 미세해서 보통의 사람들은 들을 수 없습니다. 의식표면에서는 이런 말을 듣지 못하지만 의식 깊은 곳에서는 마음이 그 말을 듣고 그 말대로 행동합니다.

 

저녁 9시가 되었습니다. 배가 고픕니다. 같이 사는 누가 라면을 끓여왔습니다.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먹고 싶은 마음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좀 먹자.’ ‘한 젓가락은 괜찮아.’ ‘내일은 휴일이야.’ ‘알아차림 하면서 먹으면 돼.’ ‘이게 내 인생 마지막 라면이야이런 말들을 하면서 자신을 유혹합니다. 별의 별 이유를 대면서 먹기를 유도합니다. 그 때 먹고 싶어 하는 마음은 그 라면 맛이 지상 최고의 맛인 것처럼 여깁니다. 너무 맛있을 것 같아서 한 젓가락을 먹었습니다. 라면을 입에 넣는 순간 그 맛이 아주 평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욕심도 화와 같이 욕심날 상황을 과장합니다. 더 맛있게 생각하고 더 좋은 것으로 해석합니다. 사소한 나의 약점을 어떻게든 찾아내어 나로 하여금 하도록 만듭니다. 이런 체험을 계속 해 보십시오. 계속 욕심의 말을 듣고 욕심의 결과를 알아가게 되면 마음이 조금씩 욕심에 대해서 이해하게 됩니다. 욕심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면 욕심이 하는 말을 안 믿게 됩니다.

 

이런 욕심보다 더 깊이 존재하는 것은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심, 나의 영역을 지키고자 하는 욕심, 나의 믿음이 실현되기를 원하는 욕심입니다. 새벽에 가장 먼저 도서관에 도착한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도서관에 도착해서 한 쪽 구석에 앉았습니다. 이 도서관은 1시간이 지나면 만석이 되는 도서관입니다. 두 번째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자신 근처에 앉으면 화가 일어납니다. 그 사람이 생각하기에 두 번째 사람이 마땅히 앉아야할 자리는 도서관을 반 잘라서 저 건너편의 자리입니다. 그는 그의 영역이 침범당했다 라고 생각하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가 사유해서 결론을 내리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스스로 상황을 바로 해석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과 관련된 상황에서 어떠한 판단을 할 때 가장 기본적인 판단기준은 욕심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따지면서 판단합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판단합니다.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실재 이성보다는 감정에 더 많이 좌우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와서 나와 관련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그 내용이 내 욕심을 충족시키면 마음이 기뻐하며 들뜹니다. 그 내용이 내 욕심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불만족스럽고 화가 납니다. 어떨 때는 이성적으로 그 이야기의 유불리를 쉽게 알 수 없는 경우에도 마음은 아주 빠르게 마음의 느낌으로 자신의 판단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뿌리 깊은 욕심의 마음의 작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어리석음


어리석음은 그릇되게 아는 마음입니다.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을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것으로 알아줍니다. 어리석은 마음은 나와 가장 강하게 동일시되는 마음이기 때문에 다른 마음보다 훨씬 알기가 힘듭니다. 어느 수행자가 저의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어리석음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스승이 대답하기를 지금 너의 마음이 어리석은 마음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공기 속에 살면서 공기를 모르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기본적으로 어리석기 때문에 어리석음을 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나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세상으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렇게 받아들인 정보를 내가 가진 자료로 해석해서 그것들을 압니다. 그렇게 내게 알아지는 모든 것은 관념화된 해석들입니다. 그런 관념적 해석에 그것이 그것일 수 있는 실재하는 성품이 있다고 믿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어리석음입니다. 내가 아는 벽이 벽일 수 있는 고유한 성품이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아는 저 사람이 저 사람일 수 있는 고유한 성품이 있다고 믿습니다. 컵이 컵일 수 있는 고유한 성품이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실재하는 성품이 있다고 믿습니다. 실재 이런 것들은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대상들일 뿐이고 내가 아는 것은 나의 관념화된 해석일 뿐입니다. 이런 어리석음 때문에 그것을 좋아할 수 있고 그것을 싫어할 수 있습니다. 나의 영역을 지키려 하고 영역이 침범당하면 반발합니다.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욕심과 화의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욕심, , 어리석음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이런 마음들이 있을 때 내 마음은 괴롭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야 할까요? 이런 마음을 일어나지 않도록 수행해야 할까요? 이런 마음을 없애고자 하는 마음은 무슨 마음일까요? 이 마음이 바로 화입니다. 화로써 화를 없앨 수 있을까요? 불로써 불을 끄려는 것과 같습니다. 화로써 화를 없앨 수가 없습니다. 번뇌도 조건 속에서 자연스러운 자신의 작용을 하면서 일어난 것입니다. 일어날 만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일어난 번뇌를 그것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바르게 지켜보는 것입니다. 바르게 지켜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것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고 이렇게 생긴 이해가 그 번뇌를 줄입니다. 지혜가 일어나면 그 지혜는 그런 번뇌들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바꿉니다. 이것이 지혜의 고유한 작용입니다.

 

지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한 번 봅시다.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입니다. 그 아이 앞에 촛불이 켜져 있습니다. 아이에게 촛불에 손을 대보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촛불에 손을 대었습니다. 뜨거워서 울었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촛불에 손을 대면 아프다 라는 확실한 지혜가 생겼습니다. 이런 지혜가 있는 그 아이에게 다음에 다시 촛불에 손을 대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런 생각이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손을 대면 아프다 라는 이해가 손을 대고 싶다란 생각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번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번뇌를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번뇌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한 지혜가 스스로 자신의 작용을 하면서 번뇌를 줄일 것입니다.

 

수행은 지혜가 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지혜가 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붓다는 우리 존재를 어떻게 설명하시는가? (오온)

 

붓다는 우리 존재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십니다. 5가지 무더기,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 등으로 설명하시지만 그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붓다가 사용하는 방법은 다섯 가지 무더기로 설명하는 방법입니다. 붓다께서 우리 존재를 이렇게 5가지로 해체해서 설명하시는 것은 나라고 하는 관념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붓다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존재를 설명하셨는지를 아셔야 합니다. 붓다는 불변하는 진리를 세상에 펴고자 하신 분이 아닙니다. 붓다는 우리 존재의 문제, 고통을 직시하셨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붓다가 하고자 하신 말씀도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행의 길을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존재와 세상을 해석하면서 고통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패턴으로 이것을 설명하셨습니다. 고통은 마음이 대상과 반응해가는 과정에서 생겨납니다. 그래서 붓다는 어떻게 알아지는가, 어떻게 아는가의 기준으로 세상을 설명하셨습니다. 붓다가 안, , , , , 의와 색, , , , , 법으로 세상을 설명하신 것이 이런 이유였습니다.

과학에서 다루는 물질과 불교에서 말하는 물질의 차이를 보면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과학에서는 물질 자체로 물질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컵이 있다고 해 봅시다. 과학에서는 이 컵의 질량, 밀도, 부피, 무게로 이것을 설명합니다. 불교는 이런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고통의 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컵을 눈으로 볼 때 보이는 것으로(),

부딪혀서 소리를 낸다면 들리는 것으로(),

어떤 냄새가 난다면 냄새나는 것으로(),

혀를 대어서 맛이 난다면 맛 나는 것으로(),

닿으면 느껴지는 것으로(),

생각해서 마음에 형상이 나타나면 알아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물질을 각각의 감각기관에 어떻게 알아 지는가에 따라서 다르게 정의합니다. 왜냐하면 붓다의 목적이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한 것이고 이렇게 인식하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물질을 설명하는 것이 고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온은 물질(), 느낌(), 인식작용(), 다양한 의지작용(), 아는 작용()입니다.

 

물질()


붓다는 가장 기본적인 물질로 흙의 요소, 불의 요소, 물의 요소, 바람의 요소를 말씀하십니다.

 

흙의 요소는 딱딱하고 부드럽게 느끼게 하는 성질,

불의 요소는 뜨겁고 차갑게 느끼게 하는 성질,

물의 요소는 응집성을 느끼게 하는 성질,

바람의 요소는 움직임을 느끼게 하는 성질입니다.

 

붓다께서는 눈에 보이는 물질의 경우에는 빨갛게 보이는 성질, 파랗게 보이는 성질, 노랗게 보이는 성질 등을 구분하기 않고 단지 보이는 성질() 한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몸에서 느끼는 마음과 함께 작용하는 물질을 흙의 요소, 불의 요소, 물의 요소, 바람의 요소 이렇게 4가지로 설명하십니다. 왜 이럴까요? 단지 느껴지는 성질 한 가지로 말씀하셔도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붓다께서 존재를 설명하시면서 가장 먼저 고려하신 것은 나라는 개체성의 해체였습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을 나라고 믿고 살고 있습니다. 몸은 느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몸이 나라는 믿음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몸을 해체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딱딱하고 부드럽다고 느끼게 하는 물질을 흙의 요소로 구분하고,

따뜻하고 차갑게 느끼게 하는 물질을 불의 요소로 구분하고,

응집성을 느끼게 하는 물질을 물의 요소로 구분하고,

움직임을 느끼게 하는 물질을 바람의 요소로 구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몸을 기본적으로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물질로 이 4가지 물질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물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과학적 이해와 같은 시각에서 불교의 물질을 이해하는 오류가 많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의 물질도 미세하게 쪼개어 들어갔을 때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미세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그러지만 실재하는 물질은 실재하는 마음과 같이 어느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모양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단지 고유한 성질이 있어서 조건 되면 고유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아는 성질이 없기 때문에 물질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뜨겁고 차가운 것을 아는 것으로 불의 요소를 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뜨겁게 느끼게 하고 차갑게 느끼게 하는 성질을 이해했을 때 불의 요소를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재하는 물질도 이해되는 지혜의 대상입니다. 뜨겁게 느끼게 하는 성질과 차갑게 느끼게 하는 성질은 하나의 성질입니다. 하나의 성질이기 때문에 불변하는 법이고 불의 요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차가운 물과 미지근한 물과 뜨거운 물이 있습니다. 미지근한 물은 차가운 물에 비해 뜨겁고 뜨거운 물에 비해 차갑습니다. 한 번은 미지근한 물을 차갑다라고 표현했고 한 번은 뜨겁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차갑다라고 표현하게 했던 성질과 뜨겁다라고 표현하게 했던 성질이 두 가지 성질입니까? 아닙니다. 하나의 성질입니다. 하나의 성질을 접해서 내 마음의 가치기준에 따라서 차갑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뜨겁다라고 표현하기도 한 것입니다. 뜨겁고 차가운 것은 관념적 해석입니다. 실재는 그렇게 느끼게 하는 성질입니다. 이 성질은 어디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성질을 이해했을 때 불의 요소를 이해한 것입니다.

 

실재하는 법은 모두 유동하고 반응하고 진행되는 것입니다.

 

몸을 구성하는 4가지 물질 이외에도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냄새나는 것(), 맛 나는 것(), 몸으로 느껴지는 것(, , 바람의 요소) 등의 물질이 있습니다. 이렇게 물질을 우리를 구성하는 하나의 무더기로 말씀하셨습니다.

 

느낌()


몸에 무언가가 부딪치면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몸에서만 느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부딪쳐도 느낌이 일어나고 귀에 들리는 것이 부딪쳐도 느낌이 일어납니다. 코와 냄새나는 것, 혀와 맛나는 것이 부딪쳐도 느낌이 일어납니다. 마음과 마음이 부딪쳐도 느낌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화가 났을 때 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의 마음과 화를 아는 마음은 다릅니다. 화의 마음과 화를 아는 마음이 부딪치면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 느낌으로 인해서 화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부딪칠 때 어떤 것은 파랗게 알고 어떤 것은 빨갛게 알게 되는 것은 부딪침으로 인해 일어나는 느낌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식작용()


이렇게 6가지 감각기관에서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느낌이 일어나면 그 느낌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통해 해석해서 그것이 무엇이라고 압니다. 그렇게 무엇이라고 아는 마음의 작용을 상이라고 합니다. 상의 작용은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세상을 알아오면서 끊임없이 훈련해서 너무나 능숙하게 진행됩니다. 책을 읽을 때 눈이 책 위를 한 번 지나가면 마음이 무슨 내용인지를 이해합니다. 그렇게 책의 내용을 해석하는 마음이 상의 마음의 작용입니다. 머리를 빗을 때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알아서 머리를 빗습니다. 머리의 모양을 생각하고 빗의 각도를 생각하는 마음이 모두 상의 마음입니다. 계단을 올라갈 때 계단 높이를 생각하고 발을 얼마나 들것인가를 결정하는 마음도 상의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상의 마음작용은 너무나 능숙해서 자신의 일을 순식간에 스스로 합니다. 우리 존재의 진행에서 오온은 언제나 함께 일어납니다. 상의 마음은 우리 마음작용에 항상 있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알았다라고 하면 상의 마음을 통해서 안 것입니다. 상의 마음을 통해서 알았다는 것은 그것이 관념이라는 말입니다. 해석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아지는 모든 것은 관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관념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양한 마음의 의지작용()


아비담마에서는 마음부수로 52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느낌과 상의 마음작용을 제외한 50가지를 행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행에는 다양한 마음의 작용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주요한 마음의 작용은 마음의 의지 작용들입니다.

 

접촉, 의도, 노력, 결정, 신심, 알아차림, 걱정, 졸림, 아만 등의 마음의 의지 작용들이 여기에 속해 있습니다. 상의 마음작용으로 인한 관념적 해석에 대해서 내 마음에 있는 가치정보가 투영되면서 생겨나는 욕심, , 어리석음의 마음작용도 행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관념적 해석에 대해 실재하지 않은 실존성을 부여하고 그걸 믿으면서 스스로 좋다, 싫다의 반응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을 바르게 보지 못함으로써 계속적으로 욕심과 화와 어리석음의 굴레 속에서 고통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아는 작용()


마음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작용이 아는 작용입니다. 알기 때문에 마음이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아는 마음의 작용을 식이라고 하고 외부 정보를 받아드리는 5문을 인연해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대상으로 한 아는 마음이 의식입니다.

 

이 아는 마음들은 이름이 아는 마음이지만 대상이 무엇인지, 어떤 이름인지, 어떤 모양인지를 알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 마음은 단지 처음 대상을 접해서 대상과 반응하는 마음이고 순수하게 대상을 인지하고 대상으로부터 정보를 취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 수행을 하면서 아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확인하는 마음이 바로 이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실재하는 것은 모양도 위치도 없기 때문에 인식되지 않습니다. 단지 마음의 힘이 좋을 때 아는가?’라고 물으면 안다는 것이 마음에 수긍됩니다. 그렇게 아는 작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붓다가 가르쳐주신 길- 8정도

 

붓다는 당신의 제자들이 걸어 가야할 길을 그 사람의 성향에 맞추어서 아주 다양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양한 방법을 대표해서 말할 때는 항상 8정도를 이야기합니다. 8정도는 8가지 바른 길,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알아차림, 바른 마음의 고요함입니다. 8가지 길을 돌아서 새롭게 도착하는 곳은 다시 바른 견해입니다. 처음의 바른 견해와 마지막의 바른 견해가 말로 표현하면 같은 말로 표현되겠지만 지혜의 깊이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깊이를 가지는 것입니다.

 

바른 견해


수행의 시작입니다. 바르게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을 그릇되게 보아왔고 그런 것이 아주 고착화되어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어떤 생각을 볼 때 불안한 생각이라는 시각으로 보아서 불안감을 느끼고 두려운 생각이라는 시각으로 보아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아름답다는 시각으로 보아서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기고 추하다하는 시각으로 보아서 없애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가 그러하듯이 이렇게 일어나는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생각은 생각이 일어날 만 했으니까 생각이 일어난 것이고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자신의 작용으로 보였을 뿐입니다. 생각과 보이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견해입니다. 내가 그릇된 견해로 보았기 때문에 내게 고통이 생겼던 것입니다. 고통이 생겼다는 것이 그릇되게 보았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수행은 나 자신을 바르게 봄으로써 내게 일어나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바르게 보십시오 라고 해도 우리는 자신을 바르게 볼 수 없습니다. 무엇이 바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바른지 알기 위해서 자신을 관찰하고 이해해가야 합니다. 진실한 자신에 대한 이해가 생겼을 때 그 이해가 자신을 바르게 바라보는 바른 견해가 됩니다.

 

바른 견해는 수행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수행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수행은 무엇을 체험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삶의 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체험을 매 순간 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체험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눈 뜨면 본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체험입니까? 소리 있으면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체험입니까? 존재의 진실된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체험은 이것으로 충분하고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이러한 체험을 쉼 없이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체험이 아니라 그 체험을 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수행하는 마음이 바르다 라고 하는 것은 수행하는 마음에 지혜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하는 마음에 지혜가 생기게 하기 위해서 알아차림을 해가면서 바른 견해를 일으켜줍니다. 우리가 대상이다’ ‘자연의 이치다라는 바른 견해를 일으켜 주는 것은 바로 수행하는 마음에 지혜가 있어서 수행하는 마음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런 바른 견해가 있을 때 수행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바른 견해가 없을 때 수행을 바르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계속적으로 알아차림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에 대한 이해가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런 이해는 수행이 계속됨에 따라서 점점 깊어지게 됩니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새로운 깊은 이해를 하게 되면 이 이해는 다음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더 깊은 바른 견해가 됩니다. 내가 화를 알아차림 하면서 화에 대해 새롭게 어떤 이해가 생겼다면 다음 순간 이런 이해의 견해를 가지고 화를 보게 됩니다. 그 이해가 새로운 화에 대한 바른 견해가 된 것입니다. 수행의 과정이라는 것은 자신을 좀 더 바르게 보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른 사유


수행에 대해서, 법에 대해서, 옳은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바른 사유라고 합니다. 수행은 우선 많이 듣고 읽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렇게 많은 정보가 생겨나면 내 마음은 스스로 이것들을 소화시키기 위해서 생각합니다. 수행을 해 가면서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수행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모두 바른 사유에 들어갑니다. 알아차림을 해가면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에 대한 실재의 이해들이 조금씩 생겨나게 됩니다. 조금 알게 되면 모르는 것이 더 많이 생기게 되고 자신이 깊이 알지 못한다는 것도 분명해집니다. 자연스럽게 마음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생각이 무엇인지, 실재가 무엇인지, 법이 무엇인지, 조건이란 것이 무엇인지,

일어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존재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들은 생각을 통해서 분명한 결론에 이를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들은 내 마음 안에 알고자 하는 마음의 에너지를 생성합니다. 이런 힘은 내가 알든지 모르든지 수행하는 가운데 작용하고 수행하는 마음의 조건이 아주 좋았을 때 분명한 통찰의 지혜로 그 답을 우리에게 보여주게 됩니다.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알아차림을 바르게 해 가게 되면 알아차리는 마음이 가벼워지고 빨라지고 힘이 있어집니다.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바르게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뒤따라서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고 적당한지 적당하지 않은지를 판단하는 마음이 따라 오게 됩니다.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알아차림 하면 마음의 자연스런 진행으로 이런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 지혜가 삼빠쟈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지혜입니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줄을 서서 밥을 배식 받고 있습니다. 준비된 반찬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 있습니다. 한 스푼 떠서 담았습니다. 그리고 곧 마음에서 한 스푼 더 뜨고 싶은 마음의 힘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일어나는 마음의 힘을 바르게 알아차림 했습니다. 그러면 바로 뒤 이어서 그렇게 더 뜨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판단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바로 마음이 옳은지 그른지를 마음의 느낌으로 가르쳐줍니다. 그리고는 좀 더 입체적으로 사유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내 뒤에 몇 명이 남았고 반찬이 얼마 남았으니까 얼마를 뜨는 것이 적당한지를 판단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 마음들은 지혜의 마음입니다. 지혜의 마음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적당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항상 옳다는 대로 살지 못합니다. 옳다고 아는 마음도 있지만 더 먹고 싶은 욕심의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욕심의 힘이 더 커서 더 떠서 담았다고 해 봅시다. 내 스스로 그릇된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마음을 잘못 쓰게 되면 마음이 스스로 그릇되었다는 것을 좋지 않은 마음의 느낌으로 보여줍니다. 그릇을 들고 자리게 들어가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업의 과보를 바로 받은 것입니다. 자리에 앉아서도 내 뒤에 남은 사람이 그 반찬을 먹는지 가끔 확인하게 됩니다. 계속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괴롭습니다.

 

알아차림이 계속 있게 되면 이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고 그 경험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배우게 됩니다. 처음에는 욕심의 힘이 강해서 욕심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되지만 조금씩 지혜의 힘이 커지면서 지혜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욕심의 결과가 고통이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씩 마음이 옳다고 하는 것을 행하게 되고 마음이 적당하다고 하는 것을 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있고 지혜의 힘이 좋아지게 되면 무엇을 할 때 옳은지 그른지, 적당한지 적당하지 않은지를 판단하고 하게 됩니다. 말을 할 때 자연스럽게 옳은 말을 하고, 행동을 할 때 옳은 행동을 하고, 삶을 살아갈 때 바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의 힘이 좋아지면 지혜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혜의 옳음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바른 노력


바른 노력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마음에는 욕심의 마음이 함께하기 쉽습니다. 수행에서 필요한 노력은 꾸준하게 해 나가려는 노력입니다. 이 순간 바른 견해를 일으켜주는 노력을 해야 하고 이 순간 바르게 알려는 노력을 하셔야합니다.

 

우리에게 실제로 있는 시간과 장소는 여기 이 순간뿐입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것도 여기 이 순간입니다. 우리의 수행의 완성도 여기 이 순간에 있습니다. 미래의 완성된 수행을 바라면서 지금 힘들게 수행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 바르게 하고 있다면 충분합니다. 지금 이 순간 바른 견해가 있고 일어나는 것을 바르게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바른 알아차림


바른 알아차림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수행하는 마음에 바른 견해가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알아차림의 대상이 실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수행하는 마음에 바른 견해가 있기 위해서 우리는 알아차림을 하면서 자연의 이치다’ ‘대상이다란 바른 견해를 일으켜줍니다. 실재하는 것을 알아차림 하기 위해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을 따로 따로 알아갑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이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을 알아차림 한다고 하더라도 실재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실재하는 법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을 알아차림 할 때 실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해석한 관념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 때 보이는 대상, 들리는 소리, 느껴지는 느낌이 알아차림의 대상이 됩니다. 이것들은 이미 마음에 인식된 것이고 관념화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볍게 보라고 합니다. 자유롭게 대상을 옮겨 다니면서 알라고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 하게 되면 마음이 대상으로부터 많이 물러나게 되고 알아차리는 마음이 가벼워지고 나중에는 내가 알려고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아차림이 저절로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할 수 있을 때 아는가라고 물으면서 아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체크합니다. 마음의 힘이 좋을 때 안다는 것이 이해됩니다. 그렇지만 이 안다는 것은 어떤 모양으로, 어느 곳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관념화되지 않는 순수한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린 이렇게 관념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고유한 성질로써 존재하는 것을 실재하는 것, 빠라마타, 법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수행에서 아는 마음을 이해했을 때 진정 실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진짜 위빠사나를 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른 마음의 고요함


집중명상을 통해서도 마음의 고요함이 생기고 지혜명상을 통해서도 마음의 고요함이 생깁니다. 지혜명상에서는 견해가 바르고 지혜가 있기 때문에 마음이 대상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고요함이 생깁니다. 이것을 까니카 사마디라고 말합니다. 이 사마디는 여러 대상을 자유롭게 알고 깨어있고 활기차지만 고요합니다. 마음의 활발함과 마음의 고요함이 균형을 이룬 그런 고요함입니다.

 

수행이 어떻게 삶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는가?

 

살아오면서 많은 삶의 문제를 만나고 나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많은 노력을 했지만 우리의 삶의 문제는 조금도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가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삶의 문제는 화입니다. 화가 나면 마음이 괴롭습니다. 화가 나면 우리는 그렇게 일어난 화를 해결하려고 해 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화가 나면 그 사람과 관계된 상황의 인과를 따져봅니다. 그 사람이 그런 말과 행동을 할 만한 상황인가?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원인을 제공했는가? 이런 것을 따져보면서 그럴 수 있겠다 라는 수긍이 생기면 화는 줄어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화를 해결하는 방식 이였습니다. 우리는 철이 들면서부터 이렇게 화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에게 화는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인과을 통해 화를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내일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화가 일어나면 새롭게 인과를 따져봐야 합니다. 계속 새로운 상황과 이야기가 생겨나고 새롭게 화가 나면 또 새롭게 따져봐야 합니다. 이렇게 관념적 이야기를 통해서 화를 해결하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수행은 어떻게 화를 해결합니까? 수행은 그런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수행은 화 그 자체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화를 수용하고 바르게 관찰하면서 화가 나의 것이 아니라 조건 따라 일어난 자연의 이치라고 이해하고자 하고 알아지는 대상이라고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런 이해가 생겨나면 화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집니다. 다음날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다시 화가 일어났습니다. 다음날 일어난 화가 전날 일어난 화와 다를까요? 화는 다를 수가 없습니다. 전날 화에 대해 이해한 지혜가 다음날 화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 이해가 화를 좀 더 바르게 관찰할 수 있게 하고 더 깊은 이해가 생길 수 있게 합니다. 10년 뒤에 일어난 화는 다를까요? 죽기 직전에 일어난 화는 다를까요? 모든 화의 성질은 동일합니다.

 

수행은 동일한 것, 변할 수 없는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삶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변할 수 없는 고유한 성질을 가진 것을 법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알아차림의 대상은 화, 욕심, 보는 작용, 듣는 작용, 생각하는 작용, 느끼는 작용 등입니다. 이것들의 성질은 영원히 변할 수 없습니다. 한 생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경험해야 하는 것이고 반복적으로 알아차림 하는 대상들입니다. 한 번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가 생기면 다음에 그 이해의 견해로 그것을 다시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더 깊은 이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수행을 계속하게 되면 이런 일어남에 대한 이해가 자연스럽게 깊어지고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자유로워집니다. 변할 수 없는 것을 관찰하고 이해함으로써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서 삶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괴롭히는가? (펜줄럼 규칙)

 

저의 스승이 당신의 스승인 고 쉐우민 사야도와 함께 수행하고 계셨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사야도께서 법당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좌선이 끝나는 시간 정도에 큰 사야도께서 법당에 들어오셔서 바른 견해에 대한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사야도는 그 법문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그 날은 수행 상태가 아주 좋아서 가볍고 행복한 마음으로 큰 사야도의 법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때 법당 밖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발을 씻는다고 물을 아주 세게 틀었습니다. 물소리가 너무 크게 나는 바람에 사야도는 큰 사야도의 법문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순간 사야도의 마음에 화가 아주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화의 마음이 물소리 나는 곳으로 달려가면서 거친 말들을 내 뱉고 있었습니다. 사야도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왜 조금 전까지는 마음이 그렇게 편하고 좋았는데 이렇게 금방 마음이 괴로워졌는가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일어난 생각, 마음의 움직임, 느낌의 변화 등을 관찰하시고는 왜 그렇게 마음이 안 좋아졌는지를 깨달으셨습니다. 당신이 큰 사야도의 법문을 소리라고 알지 못하고 스승의 법문이라는 생각에 좋아하는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으로 그 법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듣지 못하게 되니까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화가 났던 것입니다. 30만큼 좋아하면 얻지 못했을 때 30만큼 화가 나고 100만큼 좋아하면 얻지 못했을 때 100만큼 화가 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좋아하는 그 만큼 화가 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을 사야도께서는 펜줄럼 규칙이라고 부르십니다.

 

붓다에게 어느 날 누가 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소 있는 사람은 소 때문에 행복하고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아들 때문에 즐거워합니다.’ 이 말에 대해서 붓다는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소 있는 사람은 소 때문에 슬퍼하고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아들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누구를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 분의 배우자, 아들, 딸을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누구 때문에 가장 참기 힘든 괴로움을 겪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 분의 배우자, 아들, 딸 때문에 가장 큰 괴로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더 좋아하기 때문에 더 큰 괴로움을 겪는 것입니다. 그 좋아함이 집착의 좋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의 아들, , 배우자 보다 더 좋아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배우자, 아들, 딸도 나의 배우자, 나의 아들, 나의 딸이기 때문에 가치를 가집니다. 붓다께서도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기 자신을 가장 존귀하게 생각한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사랑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 때문에 진정 가장 큰 고통을 받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 때문에 가장 큰 고통을 받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에 대해서 집착하는 만큼 우리는 고통 받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자신을 알아보십시오. 그런 삶의 고통, 삶의 문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고통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고통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입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을 알아보십시오. 우리는 있는 것을 없애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있는 것을 받아드리고 인정하고 관찰합니다. 그런 관찰을 통해 그것에 대해서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있는 것을 없애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관찰하면서 자신에 대해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져 갈 것입니다.

 

 

수행하는 사람과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수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장면 장면에서 무엇을 봐야하고 어떻게 봐야하고 어디를 향해야 하는 지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의 감옥에 갇혀서 마음의 변화에 따라 이리 저리 흘러가는 사람입니다.

 

삶의 한 장면을 생각해봅시다. 수행하지 않는 사람이 출근시간에 만원지하철을 탔습니다. 사람들과 부딪힙니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립니다. 그에게는 화가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과 부딪히면서 일어나는 느낌을 그는 불쾌한 느낌이라고 압니다. 마음에서는 화가 여러 가지 불평을 하지 시작합니다. ‘이 지하철은 왜 이렇게 흔들려’ ‘이 여자 핸드백은 왜 이렇게 커’ ‘저 할머니는 잘 걷지도 못하면서 왜 이 시간에 지하철을 타! 무슨 할 일이 있다고.’ 그의 마음은 끝없이 바깥의 조건들에 대해서 화를 냅니다. 그는 그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는 그렇게 온전히 고통 받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없습니다.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같은 상황입니다. 지하철 안에서 이리 저리 밀리며 부딪힙니다. 성인이 아니니 그에게도 화가 일어납니다. 그는 그 화를 압니다. 그는 자연의 이치다라는 바른 견해를 일으켜주면서 화를 바르게 보려고 합니다. 화는 대상이 되면서 더 이상 커지지 않습니다. 마음은 부딪히는 느낌을 불쾌한 느낌이라고 압니다. ‘왜 불쾌하지! 느낌일 뿐인데.’ 그는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보고자 합니다. 화를 대상으로 보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느낌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을 보면서 그의 마음에는 기쁨이 일어납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밖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원인을 자기 안에서 찾고 자신 안에 머물면서 만족합니다. 그는 그 때 무엇을 봐야하고 어떻게 봐야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삶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현재를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의 삶의 질이 얼마나 다릅니까?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진정한 우리 존재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많은 세월이 지났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40, 어떤 이에게는 50, 어떤 이에게는 60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보면 정말 긴 세월을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시간들의 존재감이 지금 있습니까? 생각해보면 긴 시간을 살아온 것 같은데 그 시간들의 존재감이 지금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과거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어서 지금 이 순간 내게 알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나의 삶은 이것이 있어서 진정 가치 있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분명한 자신의 답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이 계속 흘러서 어느 순간 죽음 앞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도 한 번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볼 것입니다. 지금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때도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디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죽음 앞에서도 중요할까요? 죽음은 가식이 통하지 않는 진실한 삶의 순간입니다. 죽음 앞에서 가족이 중요할까요? 죽음 앞에서 내가 지금 고생하며 얻으려고 하는 사회적 지위, 재산이 소중할까요? 건강은 어떻습니까? 죽음 앞에서 이미 건강한 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런 것들이 가치를 가질 수 없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 절대적 가치를 가질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의 존재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저의 큰 스승께서는 사람은 죽어도 지혜는 죽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스승께서는 삶의 목적은 지혜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붓다 당시 붓다의 제자들 가운데 지혜가 수승한 제자들은 자신들이 죽을 때를 알고 있었습니다. 죽을 날이 가까이 다가오면 붓다에게 가서 언제 빠리닙바나에 들겠다 라고 붓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붓다는 죽음을 앞둔 제자에게 이런 요구를 하십니다. ‘제자야! 내게 법문을 해 다오.’ 그럼 제자는 자신이 수행을 하면서 깨달은 6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에 대해서, 대상과 마음의 작용에 대해서, 일어나는 것들의 연기성에 대해서 법문을 합니다. 그 법문의 내용은 그가 읽고 들어서 안 것들이 아닙니다. 그가 수행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붓다는 죽음을 앞 둔 제자에게 자신이 수행을 통해서 깨달은 지혜를 다시 한 번 떠올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 앞에는 진정 가치 있는 것은 지혜뿐이기 때문입니다.

 

죽을 때의 상황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몸이 아픕니다.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합니다. 머리도 멍합니다. 이런 상태를 무방비로 받아드리며 죽어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아픔, 불안은 점점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는 고문 받으며 죽어가는 것처럼 죽어갑니다. 그가 오랜 기간 수행을 해서 수행의 지혜를 개발해 왔다면 어떨까요? 그는 아픔을 봅니다. 아픔을 대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은 아픔과 떨어져서 자유롭습니다. 자유로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작용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지혜로 인해 자유로운 자신을 보면서 기쁜 마음이 일어납니다.

불안합니다. 불안하다고 압니다. 불안한 것이 마음일 뿐이다 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상관없이 일어난 마음의 일어남이라고 이해할 수 있고 그런 지혜로 인해 자유로운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멍합니다. 멍하다 라고 압니다. 멍한 것이 자연스러운 마음의 작용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픔과 불안함과 멍함 때문에 동요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의 이어짐으로 인해 나타나는 존재의 한 단면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평화롭습니다. 그렇게 평화롭고 자유로운 자신을 보면서 자신이 살아온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있어서 그의 삶은 진정 의미 있었다고 스스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진실은 이 순간에 있는 것이고 지혜가 의미가 있는 것도 이 순간 지혜의 작용과 지혜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알 수 없는 것은 진정 의미 있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진정 의미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있는 것입니다. 수행을 해 가면서 자신에 관심을 가지고 바른 견해로 자신을 관찰해가면서 자신을 이해해갑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이해가 분명해 지면 매 순간 알아차림을 하면서 이 지혜를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혜가 이 순간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지혜를 확인하면서, 지혜로 인한 자신의 자유로움을 확인하면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알아서 기쁩니다.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삶의 굳건함이 느껴집니다.

 

수행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바르게 수행하고 꾸준히 수행하면 반드시 수행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 자신을 알고서 삶을 이해하면서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수행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