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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하타 차크라(중단전)의 개화

담마마-마까 2017. 8. 7. 21:30


아나하타 차크라(중단전)가 개화되지 않은 범부 수행자들의 육체적인 증상과 정신적인 상태...

아나하타 차크라가 막히면 명치끝부터 목 부위까지 젖은 담요를 덮은 듯 답답하다.

가슴의 횡격막이 막히면 음식이 쉬이 체하고 머리가 띵하며 숨이 막히고 호흡이 단전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아나하타 차크라가 닫힌 수행자는 가슴통증을 호소하며 답답증으로 불면이 많고 깊은 잠을 자지 못한다. 목 부위가 막혀 표현에 있어서 생각이 너무 많고 위장은 굳어서 지나치게 급히 먹거나 거식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사랑에 대해 불신이 크고, 부모의 빗나간 사랑을 무작위로 받은 이에게 이러한 증상이 나타나며, 형제자매간에 시기질투가 많은 환경에서 자란 이에게서도 많이 드러난다.

가슴에 거북이 등가죽을 매단듯이 거북하고 호흡이 시원스레 통과되지 않으며 폐쇄공포증이 있고 집중력이 떨어지게 된다. 심장부위가 뻐근하기도 하여 압박감이 오고 권위적인 부모나 직장상사 또는 격식을 차리는 환경에서 자란 이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심장의 하트 차크라가 막혀있으면 두뇌만 발달되어 상기증세가 오거나 앵무새 수행자가 되어 남을 가르치려고만 들고 에고가 머리로 쏠려 자만이 높다.

더 불행한 일은 아나하타가 막히면 하단전으로 흐르는 기가 통하지 않아 원초적 물라다라에서 오는 천진한 본능이 억압되어 인위적인 자존심이 강한 자가 된다. 거짓자아를 형성하여 대인관계가 정직하지 못하게 되고 억눌린 성욕은 공격성을 잉태하게 된다.

 

 

수행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곳이 아나하타이다.

아나하타 차크라가 가장 먼저 열려 개화되어야 하고 다른 차크라는 그 다음이다.

심장차크라가 개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즈나 즉 제3의 눈이 열리면 미치거나 아니면 자만적 에고로 악귀의 노리개로 전락하여 세상을 오염시킨다.

아나하타가 막힌 상태에서 하단전 즉 물라다라만 개화되면 끓어오르는 성충동으로 색정령에 포제션되거나 성적환영으로 광인이 된다. 소위 쿤달리니를 연다고 무리하게 기공수련을 하는 수행인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나하타는 사랑과 연민, 자애와 더불어 기뻐함과 평온을 관장하는 사무량심의 거처이다.

지성만 발달하고 지혜가 나지 않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교학은 박사수준인데 선정수행은 도저히 되지 않는 수행인들이 많다. 지성으로 하는 수행과 감성으로 하는 수행의 방편도 다 다르나 이 두 가지가 쌍수겹장으로 접목되어야만 통찰지혜로 경계를 넘을 수 있다. 구루의 은총으로 눈빛만 바라보거나 스승의 곁에서 거하기만 하여도 깨어나는 이들은 사실 그 전생부터 공부하고 수행한 업이 무르익어 때가 당도했기 때문이다.

 

몇 십년 수행을 해온 수행자들에게도 아나하타가 철갑옷을 입은 듯 꽉막힌 이들을 많이 보게 된다. 방편으로는 몸수련과 참회와 용서가 함께 병행되어 수련 수행되어야 한다.

 

사랑을 바르게 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아나하타가 막히면 남녀사랑에 있어서도 문제와 불화가 많다. 소통이 안되며, 불신하고, 시기질투로 의심하며, 애증으로 와전되기 십상이다.

대부분의 인류와 수행자들은 이 아나하타에 카르마가 무더기로 걸려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음을 우리는 현실에서 볼 수 있다. 이는 넘쳐나는 금전으로도 명예로도 남녀사랑으로도 개화할 수 없다. 자칫 그 순간은 남녀사랑으로 다 열린 듯 하나 그것은 개화가 아닌 뇌호르몬의 분비 때문이다. 집착이 있는 남녀사랑은 오히려 아나하타를 상처내며 닫힌 곳에 더욱 못질을 하게 된다.

 

아나하타 개화의 여러 방편 중에 하나는 자연을 상대로 교감을 나누어 본다. 그리고 음악이나 그림 조각 영화 등을 오래 감상해 본다. 대자연 속에서 단식을 하거나 아쉬람에서 오로지 만트라 수련을 해보는 것도 방편이다. 사람의 유전적 기질과 타고난 수행근기에 따라서 바른 스승은 제각각의 방편을 쓰게 된다.

 

아나하타가 막히면 조급하고 말이 빠르며 눈동자가 좌우로 산만하며 타인의 말에 귀기울이지 못한다. 이미 자신이 해야할 말들이 머리에 포화상태로 누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기 말을 쏟느라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질 못하고 소통이 되지 않는다. 사랑은 소통의 시작에서부터 교감된다. 빛이 소통은 언어보다 느낌이 더 빨리 전달된다.

지혜의 경계가 증득된 수행자는 처음 보는 이에게 말로 많은 소통을 나누지 않아도 곁에서 눈인사 만으로도 상대의 심장에 빛이 닿아 온유한 친밀감이 스며들게 만든다.

 

 

아는 것과 앎이 되어 본 자는 다르다. 아나하타 심장에는 코잘체가 있어 그 빛이 방사되는 수행자는 그 곁에만 있어도 옆사람들이 카타르시스의 눈물이 흐르거나 깊이 이완되어 선정에 들기도 한다. 코잘체에서 방사되는 그 광휘는 그가 거한 공간장을 맑게 정화시켜준다.

 

코잘체에서 빛이 방사되는 수행자는 아주 드물지만 그들을 만난다면 마음으로 전달하는 소통만으로도 만족을 누리게 된다. 수많은 준비된 말들이 사라지게 되고 그저 시원한 바람처럼 그저 통하여 해원이 된다.

아나하타가 개화된 자들끼리의 만남에는 많은 말들이 오가지 않는다. 다만 선과 정의 느낌으로 고요한 생기체 속에서 해맑고 순수한 공간장이 형성된다. 코잘체 빛이 강하게 방사되는 자와 인연닿게 되면 카르마에 가속이 붙게 된다. 각 차크라 안에 숨겨져있던 무의식과 잠재성향이 올라와 대부분 황당한 일들이 발생하기도 하며 분노가 강하게 올라오는 이도 있고 성욕이 두드러지는 이도 있으며 고삐가 풀린 야생마처럼 카르마 해원이 현현된다. 아나하타의 코잘체가 빛나는 수행자 곁에서 거하면 인생변환이 오게 되고 사는 동안 감춰져있던 잠재성향이 쉽게 표출되며 무의식이 건드려진다.

 

한마디로 카르마가 속도감이 붙어 해원되는 긍정적 과정이며 축복이고 고통 또한 따르나 무사히 통과하게 되면 알을 깨고 나온 자의 거듭난 인격이 되어 재생된다. 이때에 세포들이 재배열되며, 죽은 혈관속의 어혈이 빠지거나 녹고, 빙의된 자들은 얌전하게 잠복되어 있던 빙의가 드러나 빛이 방사되는 코잘체의 수행자를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게 되거나, 반대로 강하게 집착하여 애증을 퍼붓기도 한다.

대체로 잠복된 포제션 빙의자들은 육감으로 이미 코잘체 빛을 느끼고 그런자를 아무도 모르게 중상모략 하거나 자신도 모르게 너무도 싫어하며 얼굴도 모르는 이임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심하게 불안정 해진다. 잠복된 빙의자들은 싸이트 상으로도 글에너지에서 벌써 빛을 거부하게 되어 이유없이 시비를 걸고 미움을 투사한다.

 

 

* 수승한 수행자는 이미 알아 어느 정도 상대의 상태를 기도해주고 빙의에고를 조금만 건드려 주고는 다가올 인연이 아니면 스스로 해원시키도록 기원해주고 무심히 넘어간다. 카르마 가속이 붙은 이들은 때론 광적으로 변하기도 하여 가족들과 그동안 곪아온 일들이 터지게 되며, 직장을 옮기게 되거나 평탄했던 인생과 생활이 뒤흔들리고 걷잡을수 없는 내면의 소용돌이를 겪기도 한다. 노련한 코잘체의 깨우침을 주는 수행자는 그런 상태를 다 알면서도 조용히 기다리며, 상대의 카르마를 방해하거나 쉽게 도와주어서 업을 스스로 갚을 기회를 놓치게 만들거나, 드물게 다가오는 소중한 기회를 망쳐놓지 않는다.

멀리서 지켜보며 과정을 점검하고 인연이 닿을 때에 그때 자연스럽게 갈무리 해준다. 스스로 알에서 껍질을 깨지 못한자는 다시 그 업을 반복해야 함을 구루는 알기 때문이다.

 

서투른 교사는 상대가 나를 원망하고 분노하고 혼돈속에서 방황하고 고통받는 행자의 상황을 보다못해 도움을 준답시고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둘 다 그 카르마를 뒤집어쓰며 사이도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 직접체험이 없는 자만한 교사는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역할을 와전시켜 교주병이 걸려 혼돈의 과정을 넘어 경계넘기에 성공할 수도 있는 수행자들을 망쳐놓는 일이 수두룩하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간접지식으로 힐링을 하고 사명자의식의 비젼을 제시하고 금전을 챙긴다. 또는 신의 대리자라는 망령된 말로 유혹하며 단체를 끌어 모으고, 시와 때를 모르고 선원이나 센터를 차려 사람들을 영성으로 깨어나게 한다고 안간힘을 쓰면 사방으로 사람을 찾아 싸돌아 다닌다.

자기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카르마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서 허우적거리면서도 빠져나올 방편지혜는 찾지 않고 자기수행을 뒤로 하고 다 증득하여 남들을 이끈다고 나서는 혹세무민한 자들 때문에 역사에서 교주들이 횡횡하는 일들이 빈번하다.

자기인생도 산란한 수행자들이 남을 일으킨다고 나서며 조급해하는 이들을 볼 때 영적인 첫맛을 겨우 본 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선민의식으로 광분하여 들떠서 자기자신을 잃어버리기 일쑤이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치유를 한답시고 신봉자들이 꼬이면 그때부터는 신성의 교주가 되어 어릿광대 유명세에 정신이 없다. 이들은 중간체험을 겨우 겪고서는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특별의식에 빠져 몇 년을 허비하다가 결국 빙의되어 중언부언 설법을 늘어놓으며 인터넷 수련단체에서 교만을 떨다가 강퇴당한 행자들을 몇 알고 있다.

그들은 결국 과정을 겪으며 빙의되었어도 빠져나올 수 있음에도 그 상태에서 낙오자가 되고만다. 수행과정을 넘기는 경계에서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게 다 설익은 자들의 수행과정 중에 오는 마장이고 자기시험에 든 자의 고비이다. 진실로 다 된자는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람이 몰려든다. 자발적으로 사람들이 찾는다.

 

 

아나하타가 뚫릴때에 인생변환이 가장 크고 많다. 또는 오랜 기질적 성격이 변하게 되며 취향과 분위기도 바뀌는 일이 많다. 아나하타가 완전히 개화되는 일은 잉태의 출산과도 같은 비유를 할 수가 있다. 그만큼 고통스럽지만 숭고한 일이기 때문이다. 개화된 자는 그후로 다른 세상을 살게 된다.

 

아나하타가 완전히 개화된 수행자와 인연이 닿으면 내 인생도 변환이 온다. 그들 곁에서 같이 차크라가 돌아 발맞추게 되면 업장소멸이 빠르게 전환되어진다. 그러나 그 방편지식을 모르는 자는 그 인연을 강제로 잡으려 원망하고 강하게 괴롭히며 결국 아나하타가 열린 자를 떠나게 하거나 스스로 떠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긴다. 카르마가 건드려저 돌때에 직관이 총명하고 겸손한 수행자는 바로 알아차려 변환과정이 옴을 기쁘게 여기며 카르마 해원에 두려움 없이 내어맡기고 순복하여 카르마의 승자가 된다. 변환의 과정이 마무리 될 즈음이면 그 삶은 달라져 있고 지혜있는 수행자는 그를 예전의 그 자로 대하지 않는다. 때론 스승보다 더 높은 영격으로 변모된 제자도 많이 나온다.

 

아나하타가 개화된 수행자와 인연되면 여러 가지로 이득이다. 하지만 무리한 인연엮음은 집착욕심이기에 내어맡김이 가장 좋다 하겠다. 심장차크라 개화는 가장 중요한 수행자의 덕목이요 목표이기도 하다. 사하스라라의 차크라는 다시 갈무리되어져 마지막에는 심장 코잘체에서 마무리 되기 때문이다. 그후로는 심장의 빛이 방사되어 막히고 뚫림이 썰물밀물처럼 저절로 일고지고, 해와 달처럼 검고 희다가 늘 한자리에서 참나 안에 머물게 된다.

선정삼매 들 때 의식은 이 심장의 코잘체 안에서 깊이 들어앉아 있으며 슌야타()가 된다.

 

아나하타가 두터운 자는 욕심이 많고 소유욕이 강하며 짙은 슬픔과 분노가 교차하며 사랑에 늘 목말라 하고 좋은 인연이 빗겨가게 된다. 욕심으로 집착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하트차크라가 열리면 가족불화가 녹고, 만나지 않더라도 악연이 선연으로 변환되며, 용서가 쉽게 되고, 사과와 화해에 먼저 손내밀게 되고, 겸손해지며 고요하고 총명해진다.

 

아나하타-하트 차크라에 대한 개화의 방편은 그 수행자의 카르마 무게와 일치한다. 카르마가 많이 남은 자는 아나하타가 많이 막혀서 아픈 줄도 모르고 욕망이 축복인줄 알고 산다. 그 다음 덜 막힌 자는 아픔을 느끼고 괴롭기에 수행을 하게 되거나 심오한 내면세계로 인도된다.

개화의 과정이 순조롭거나 전생업이 덕있는 자. 상근기의 수행자는 아나하타가 건드려지는 즉시 빠르게 변화되는 고통속으로 몸과 마음을 맡기고 폭풍속에서도 진리를 잡고 헤쳐나간다. 그 폭풍 카르마를 통과한 자는 결코 전처럼 살 수가 없다. 이미 그는 영적인 맛을 알아 해탈의 방편들로 발을 들여놓아 스스로 지혜를 찾고, 담마를 소중히 여기며 보시하고 배움터를 찾는다.

 

세상에는... 아나하타가 꽉 막혀 그저 본능대로 살아가는 자와, 덜 막혀 고뇌하며 생의 의구심을 가지고 사는 자와, 조금 열려서 봉사하고 나누려하고 마음고통을 줄이려 하는자와, 완전히개화되어 막 사는 사람처럼 보이나 존재 자체로 빛이요 등불이 되는 자들이 산다.

모두가 다 그 과정을 걷고 있다. 누구나 다 거치고 넘는 과도기의 과정을...!

 

앞선 자나 뒤에 선자는 모두 하나의 우주계단에서 달팽이 계단에 다같이 올라서 있는 행렬이다. 가장 앞에 선 자는 자랑하지 않지만, 그 두 번째 부터는 유신견 자만 욕심으로 과정이 떠들썩하다. 두 번째 세 번째 흔들리고 자만하는 과정을 걷는자를 따르는 자들은 조금 더 시간이 지체될 뿐 큰 걱정은 할 것이 없다. 다 괜찮다. 넘어지고 사잇길로 빠졌다가도 다시 다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위빠사나붓다선원카페에서 시니님의 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