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정진/위빳사나 수행과 알아차림

수념처..느낌 알아차림

담마마-마까 2013. 5. 9. 14:04



  ** 수념처 **

                                                       

1.느낌의 정의


우리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나'의 실재는 오온이다. 

오온은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 무더기인데, 그 중 색(色)은 물질이고 수상행식은 정신이다.

식(識)은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받아들여 아는 기능을 가진다.

수(受)는 대상과 촉할 때 일어나는 느낌으로,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의 정신 작용이다.

상(想)은 기억하고 인식하고 표상작용을 하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측면의 정신작용이다.

행(行)은 심리 현상들의 무더기이며 실제 행위를 일으키는 의지적 측면의 정신작용이다.


즉 정신 중에서 수상행(受想行)은 마음의 부수(附隨)로서 식(識)의 기능을 도와주는 참모역할을 하고,

식은 이들의 보고를 받고 그대로 대상을 아는 기능만 한다.

그러나 오온을 이끄는 것은 식이다.

주석서에는 식은 왕이고 수상행은 왕을 수행하는 신하로 비유한다.

 

오늘은 마음의 附隨인 受想行 중에서 수(受.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의 확립,

수념처( 受念處)에 대해 알아본다.

오온 중에서 수온(수蘊)은 느낌의 무더기를 말하며 수념처는 수온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이다.


1) 일체지(一切知)는 느낌이다. 즉 무엇이든지 안다는 것은 느낌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느낌(감각)이 있기 때문에 느낌을 통해서 그것을  마음(식)이 안다는 것이다.

만일 느낌이 없다면 마음이 대상을 알 수 없다.

또한 살아있다는 것은 느낌이 있다는 것이며, 살아있는 동안 느낌이 없는 순간은 한 순간도 없다.


우리가 손을 뒤로하고 뒷짐을 지고 있을 때 마음이 손의 뒷짐진 모습을 분명하게 알수 있다.

그 순간에 마음이 손에 있을 경우에 눈으로 또는 거울로 비쳐보지 않아도 어떻게 손을 잡고 있는지 알수 있다.

이것은 손과 손이 닿아있는 느낌을 통해서 마음이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상을 안다는 것은 대상과 촉할 때 일어나는 느낌을 통해서 마음이 느낌의 정보를 받아들여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즉 마음이 활동하는 동안 느낌이 없는 순간은 한 순간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손을 뒷짐진 경우의 느낌은 맨 느낌이지만, 때로는 6경의 대상에 따라 좋은 느낌이나 싫은 느낌을 마음이 받아들인다.

그래서 느낌은 크게 좋고, 싫고, 덤덤한 느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2)  우리는 매 순간 느낌의 지배를 받고 산다.

즉 느낌이 시키는 대로 습관적인 행동을 한다. 

그 안에는 '나'라는 유신견이 조건에 의해 일어난 느낌을 '나의 느낌'으로 알게 하는 무명이 바탕이 된다. 

감각기관인 6근이 6경을 만날 때 대상을 아는 마음과 동시에 함께 느낌이 일어난다.

만일 그 순간의 대상이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적이고, 유혹적이면 좋은 느낌이 일어나고,

곧바로 이 느낌을 추구하는 갈애와 집착이 일어나 신구의(身口意) 3업으로 표출된다.


 좋은 느낌이 일어났을 때 알아차림이 없으면 즉시 탐심에 의한 행위를 한다.

그 결과로 원하는 것을 얻으면 내 것이라고 더욱 집착하게 되고, 한 단계 더 좋은 느낌을 향해서 나아간다.

만일 이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화를 낸다.

그래서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이 없으면 얻고자하는 것을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괴로움의 원인이 될 뿐이다.


 때로는 대상을 인식할 때 일어난 느낌이 싫으면

대상을 없애려는 욕망이 일어나 싫어하고 미워하며 화를 내는 진심(嗔心)을 일으킨다.

 이것 또한 내 마음대로 없앨 수 없어 괴롭고, 또한 없어지거나 없어지지 않거나 간에

알아차림이 없으면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또한 대상을 인식할 때 일어난 느낌이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닌 덤덤한  느낌이면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덤덤한 느낌에 안주하여, 느낌이 있음을 알아차리려고 하지도 않고,

 덤덤한 느낌을 평온한 나의 느낌이라고 집착하는 치심을 일으킨다.


 우리들이 세속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들은, 예를 들면 오욕락( 재물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이나,

담배나 술을 즐기는 것. 스포츠, 취미활동 등은 모두 그 행위를 통해서 느끼는 즐거운 느낌 때문에 추구한다.

그리고 그들을 좋아한 만큼 괴로울 원인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또 남을 도와주는 봉사활동조차도 알아차림이 없으면,

자기가 한 선한 행위의 가볍고 즐거운 느낌을 좋아하여 마음이 들뜨고,

또한 내가 선한 행위를 했다고 생각하여, 선한 행위에 대한 보상을 바란다.

이것은 알아차림이 없는데서 오는 괴로움이다.

 

 결국 수념처는 현재의 좋은 느낌이나 싫은 느낌이나 모두 알아차릴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느낌이나 싫은 느낌에 넘어가지 않는다.

즉 느낌에 휘둘려 행위를 하지 않으며, 알아차림으로 지혜에 의한 행위를 하게 된다.

즉 괴로움의 원인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알아차림으로 행한 선한 행위의 가벼운 느낌도 알아차려서가볍고 평온한 느낌조차도

나의 느낌이라고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디에도 걸림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다.

수행자는 알아차림으로 한 선한 행위의 어떤 결과보다는

오직 매 순간 알아차림이 있는 행위를 하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어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3) 수행자가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보아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을 하면, 몸이 아플 때 마음까지 아프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에서 느낌의 성품인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게 된다.

수념처를 하면 느낌은 짧은 한 순간의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일뿐이다.

그래서 느낌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이 느낌을 조절하는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된다.

느낌은 나의 느낌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없으며,

그 스스로의 조건에 의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으로, 느낌의 주인이 없다는 무아의 성품을 볼 수 있게 한다.


결국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념처는 좋은 느낌이거나 싫은 느낌이거나 간에

모두 나의 느낌이라고 집착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여 알아차린다.

그 결과로 느낌에 넘어가는 행위를 하지 않고,

오직 여러 조건에 의하여 일어났다 사라지는 느낌일 뿐이라고 통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12연기의 7번째 느낌(受)에서 8번째 갈애(愛)로 넘어가지 않아

괴로움의 연기를 멈추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부수게 된다.

즉 고성제인 수(受)에서 집성제인 애(愛)로 넘어가지 않고

도성제인 알아차림(8정도)으로 고의 소멸인 멸성제에 도착한다.

 우리는 짧은 한 순간의 느낌을 나의 느낌이라고 착각하여 참지 못하고 반응함으로서

현재 수많은 세월동안 생노병사의 괴로움을 초래하는 업(행위)을 생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금 알아차림으로 살펴 보아야한다.

수행자가 알아차림으로 깨어있다는 것은 이 순간의 느낌에 반응하지 않고 깨어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느낌의 생멸을 보고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4) 느낌의 종류와 느낌의 단계적 발전 과정.

 느낌은 맨 느낌 6가지, 육체적 느낌 3가지, 정신적 느낌 3가지.

그러나 분류 방법에 따라 108가지로 까지 분류할 수도 있다.

우리들이 느끼는 108번뇌는 108가지 느낌에 휘둘려서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느낌은 알아차림이 없으면,

 6근과 6경이 촉했을 때 일어나는 맨 느낌에서 즉시 육체적 느낌, 정신적 느낌으로 빠르게 발전해 버린다.


 느낌 6가지가 있다.

6근과 6경이 만날 때 마음이 대상을 아는 것을 6식이라 하는데, 이것은 그 순간의 맨 느낌을 통해서 대상을 알게 된다.

이렇게 대상과 접촉할 때 일어나는 최초의 느낌을 맨 느낌이라 한다.

즉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을 하는 순간의 느낌이 맨 느낌이다.

아직 좋거나 싫거나 하지 않는 맨 느낌이다.


 육체적 느낌은 3가지가 있다. 좋은 느낌, 싫은 느낌, 덤덤한 느낌이다.

대상을 맨 느낌을 통해 인식할 때, 과거에 저장해 놓은 정보에 의해서

좋거나, 싫거나, 덤덤한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육체적인 느낌이라 한다.

 이 경우에는 번뇌의 화살을 1번 맞았다고 표현한다.

만약 대상에 촉하는 순간 이미 육체적 느낌으로 반응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즉시 정신적 느낌으로 진행해서  집착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육체적 느낌에서 알아차림을 하면 그 느낌을 집착하는 정신적 느낌으로 넘어가지 않고,

조건에 의해서 단순하게 일어났다 사라지는 느낌임을 알게 된다.


 정신적 느낌은 3가지가 있다.

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과 정신적으로 괴로운 느낌과 정신적으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이다.

이것은 좋아서 죽겠다는 느낌과,  싫어서 죽겠다는 느낌으로,  그 느낌을 나의 것으로 집착하고, 

 계속 더 강하게 추구하거나 없애려 해서 번뇌의 화살을 수없이 맞게 된다.


육체적 느낌의 발전 과정은 육체적 좋은 느낌에서 정신적인 즐거운 느낌으로 발전하고,

육체적인 싫은 느낌에서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으로 발전한다.

맨 느낌에서 한 번 화살을 맞은 육체적 좋은 느낌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 느낌을 더욱 추구하고 집착하는 갈애의 정신적 느낌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육체적 싫은 느낌은 그 느낌을 없애려고 집착하는 혐오의 정신적 느낌으로 발전한다.

또한 덤덤한 육체적 느낌이 있을 때, 이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좀 더 재미있는 것을 찾아다닌다. 

그래서 덤덤한 느낌을 무지(無知)의 느낌이라고 한다.

특히 현대인들은 이 심심한(덤덤한) 느낌을 참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느낌에 홀려서 산다. 

느낌이 원하는 대로 행동을 하는 느낌의 노예라고 할 수 있다.  

정신적 느낌의 경우는 화살을 2번 맞았다고 표현하지만, 사실 정신적 느낌의 화살은

셀 수 없이 계속 맞아서 번뇌를 키워가면서도, 그 느낌자체가 괴로움인 것을 모르고 즐긴다.

이것이 무지(無知)해서 느낌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다.


5) 수념처 수행을 하면 언제라도 오직 현재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느낌에서 갈애로 진행하지 않고,

그냥 조건에 의한 느낌일 뿐이라고 알아차려  평등심의 상태에서 행위를 한다.

즉 느낌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느낌은 빠르든지 늦든지, 화살을 한번 맞았든 10번 맞았든, 상관없이 일단 알아차리면 그 순간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느낌에 의한 번뇌의 화살을 맞지 않는다.

알아차림이 있으면 그냥 그 느낌 자체의 성품을 객관적으로 보는 평등심의 느낌이 된다.


모든 느낌은 알아차릴 대상으로 보면, 느낌은 변화가 빠르고 일어남 사라짐이 분명하여 無常을 알기 쉽다.

그리고 느낌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는 無我를 알게 해준다.

조건에 의해 생하고 멸하는 느낌 자체가 괴롭다는 苦를 알게 해준다.

 그래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념처에서 삼법인의 진리를 통찰할 수 있는 힘이 쌓인다.


** 수행할 때 느낌을 알아차리는 실제 방법 **


1) 미세한 느낌 알아차리기

 미세한 느낌은 편안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몸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느낌을 알아차리는 방법이다.

먼저 몸이 있다는 것을 모양으로 알아차리고, 알아차림이 이어짐에 의해 마음이 안정되면

점차 그 안에 있는 느낌(빠라마타)를 알아차린다.

몸의 한 부분에 주의를 기울여 알아차릴 수도 있고, 몸 전체의 느낌을 크게 알아차릴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좌선을 시작 할 때 우선 몸이 앉아있다는 것을 모양으로 알아차린다.

 이제 마음으로 머리부터 발까지 몸의 느낌을 죽 훑어 내려가면서

서로 닿아있는 부분(눈꺼풀, 입술, 손바닥, 엉덩이)의 모양과 그곳에 실재하는 여러 가지의 감각들을 알아차린다.

그러면 그 느낌들이 변화하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느낌들을 알고 있는 마음도

그 느낌과 함께 일어났다 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거친 느낌 알아차리기

 거친 느낌은 저절로 인식될 만큼 강하게 나타나는 느낌이다.

주로 가슴에 콩닥거리는 느낌이나 또는 머리가 무거워지거나 화끈거려 저절로 알게 되는 느낌이다.

특히 화가 날 때나 통증이 있을 때 몸에서 일어나는 열감이나 쑤심, 몸의 전율 등은 거친 느낌이다.

주로 현재의 대상에 대하여 정신적 느낌까지 넘어간 경우에 몸에서 거친 느낌으로 표현된다.


수행자가 이런 거친 느낌들을  빨리 알아차리면 그런 느낌을 일으킨 원인되는 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느낌에서 마음을 보고 다시 거친 느낌이 변화되면서 사라질 때까지 그 느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다시 주 대상으로 돌아와 알아차림을 이어간다.

이런 과정은 수행자에게 알아차림을 이어가도록 해주고 또 현재의 느낌에서 마음을 알아차려

 번뇌의 뿌리를 알게 하는 것으로서  번뇌를 제거하는 힘이 된다.


3) 수념처에서 느낌과 연계된 마음을 볼 수 있다.

모든 느낌은 일어날 때 느낌 혼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오온이 함께 일어난다.

그러므로 거친 느낌을 알아차리면 그 느낌을 일으킨 원인이 되는 마음을 함께 볼 수 있다.

(1) 6경(색성향미촉법)과 6근(안이비설신)이 만날 때 색 (色蘊)

(2) 대상을 받아들여 아는 의식작용과 (識蘊)

(3) 대상에 대하여 일어나는 느낌의 감수작용과 (受蘊)

(4) 대상을 개념화하는 지각작용과 (想蘊)

(5) 대상에 어떤 반응을 할 것인가 하는 의지작용 (行蘊) 의 다섯 가지 무더기가 한 순간 함께 일어났다 함께 사라진다.


그래서 느낌 안에는 반드시 마음도 함께 있으므로 느낌을 통해 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어떤 느낌이든지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그 현장으로 가서 “지금 무슨 마음인가?”하고 느낌을 아는 그 마음을 보려는 의도를 내어

느낌과 연계된 마음을 알아차린다.

 그러면 그 느낌을 일으킨 원인이 되는 마음이나, 이미 그 느낌에 반응한 마음을 보게 된다.

 이렇게 마음을 보는 심념처를 한 뒤에 즉시 몸으로 돌아와 다시 그 느낌을 알아차리면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를 다 하면서 알아차림도 잘 유지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 느낌과 마음을 함께 알아차리는 수행법 **

 

통증과 망상은 초보 수행자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는 장애(손님)이다.

통증이나 망상이 있을 때 이것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하는 것은 수행이고,

이것을 싫어해서 망상이나 통증을 없애려고 하는 것은 알아차림을 놓치고 망상이나 통증에 넘어간 것이다.

수행자는  망상이나 통증이 있다는 것을 마음이 느낌을 통해서 알기 때문에

이런 장애들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접수하여 알아차린다. 


+ 망상이나 통증에 대한 알아차림 +


1) 몸에 느낌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 sati.

- 통증이 있거나, 망상이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


2) 지금 무슨 마음인가? 하고 현재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린다. - 심념처.

-통증에 반응한 마음(성냄)을 보거나,

-망상을 일으킨 마음이나 망상한 것에 반응한 마음을 알아차린다.


3) 다시 몸의 느낌을 알아차린다. - 수념처

- 통증과 연계된 마음, 즉 통증을 싫어한 마음이 일으킨 몸(가슴이나 머리)의 느낌을 알아차린다.

- 망상의 경우는 망상 때문에 일어난 몸(가슴이나 머리)의 느낌을 알아차린다.

이런 느낌들이 거친 느낌에서 점차 미세한 느낌으로 변화되어 사라질 때까지

느낌의 변화를 계속 주시하여 알아차린다.


4) 다시 수행의 주 대상 (호흡, 몸의 움직임 등 이 순간 분명한 대상)으로 돌아와

알아차림을 이어간다. - 신념처


이런 수행방법은 한국 위빠사나 선원만의 독특한 수행법이다.

어떻게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고 계속 이어갈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더불어 신수심법 4념처를 조화롭게 할 수 있는 수행기법이다.


** 느낌에서 마음을 보면 어떤 이익이 있는가? **

 

1) 느낌에서 마음을 보면 원인과 결과를 통찰하는 직관적 지혜가 개발된다.

지금의 느낌을 일으킨 원인을 알아 이 느낌에 넘어가지 않고 이 상황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지혜가 생긴다.

즉 현재의 느낌에서 더 이상 번뇌의 화살을 맞지 않고 행위를 제어할 수 있는 이익이 있다.


만일 그 느낌의 원인이 탐진치의 마음이었다면, 알아차림에 의해, 

탐진치의 마음은 과거의 마음으로 이미 소멸이 되었고, 지금은 알아차린 마음이 현재의 마음이 되어,

그 순간은 탐진치의 행위를 할 수 없다.


만일 그 느낌의 원인이 관용 자애의 선한 마음이었다 하더라도 알아차림이 있으면

선한 행위에 대한 만족감으로 들뜨지 않는다.

그래서 선업에 대한 과보도 바라지지 않는, 깨어있는 상태에서 가장 적절한 행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선한 행위를 할 때 그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집착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고

그것은 다시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이렇게 느낌에서 마음을 볼 때 수행자가 느낌에서 원인을 찾으려하면 안된다.

생각으로 원인을 찾으려하면 그 순간 알아차림을 놓치게 되고 사유로 빠져 망상으로 넘어간다.

 단지 느낌이 나타날 때 즉시 " 지금 무슨(어떤) 마음인가? " 하고  마음을 보려는 의도를 내어,

그 순간의 느낌에 묻어있는 마음을 직관으로 느껴서 알아져야한다.

수행자에게는 알아차리는 의무만 있다.

알아차린 뒤에 오는 결과는 수행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알아차리는 힘이 스스로 결정한다.


 만일 거친 느낌에서 마음을 보았는데,

그 순간 어떤 마음도 볼 수 없었다하는 경우에도 새로 마음을 보려는 의도를 낸 것으로 이미 마음을 본 것이다.

이미 느낌을 일으킨 원인의 마음은 사라졌고 알아차림을 하는 선한 마음이 일어난 것이므로

느낌을 일으킨 마음의 파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때 알아차림이 지속되지 않으면  느낌에서 원인되는 마음을 보고도 그 마음에 머물러  알아차림을 놓치게 된다.

그래서 다시 원인이 되는 마음에 휘둘리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을 보고 즉시 몸의 느낌을 잡아서 알아차림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2) 느낌을 알아차려 보면 느낌은 한 순간 일어났다 그 자리에서 즉시 사라져버리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느낌의 생멸을 보는 것이 수념처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수념처에서 현재의 느낌을 객관화하지 못하고 그 느낌을 내 것이라고 집착하면 느낌의 생멸을 볼 수 없고,

오히려 느낌에 대해 갈애와 집착으로 업을 생성해서 다시 생과 노사로 이어진다.

결국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진행 시키면 익어서 맺는 결실은 유신견이다.

 유신견(아상)은 윤회의 주범이며 괴로움의 원인이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이 조건에 의해 밀접한 관계성을 지니고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흐르는 과정의 존재일 뿐, 변하지 않고 실제로 상주하는 어떤 존재는 없다고 분명하게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수념처에서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느낌의 성품을 보지 못하면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무명(유신견)에 의해 갈애가 일어나고,

그 결과로 탐진치에 의한 불선업을 짓게 된다.


** 괴로운 느낌 알아차리기 **


1) 괴로운 느낌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반응한 마음을 먼저 알아차려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괴로운 느낌을 직접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이미 괴로운 느낌에 마음은 안정을 잃고 들떠 있기 때문에

괴로운 느낌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겨냥하지 못하고

계속 괴로운 느낌에 의한 번뇌의 화살을 맞게 되어 괴로움이 더욱 증폭된다.


즉 현재의 괴로운 느낌에 대해 싫어한 마음을 알아차리면 이 마음은 사라지고,

알아차림에 의한 안정된 마음이 일어나 비로소 괴로운 느낌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그래서 느낌의 성품을 볼 수 있게 된다.

 만일 반응한 마음(두려움, 근심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계속 괴로운 느낌을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므로, 마음이 안정되지 못해 현재의 괴로운 느낌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좌선 중 통증이 생기면, 통증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이때 통증에 반응하는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통증을 싫어하며 통증이 빨리 사라지길 바라고,

또 통증이 사라지지 않으면 화를 내면서 통증과 싸운다.

계속 정신적 괴로운 느낌으로 발전하여 통증은 더욱 커진다.

이런 마음 상태는 통증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없게 한다.

이때는 이미 알아차림을 놓치고 느낌에 넘어간 상태다. 그

러나 이렇게 진행된 경우라도 그 상태를 다시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이다.


2) 몸의 괴로운 느낌을 마음이 분리해서 객관적으로 알아차리면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보는 지혜가 생긴다.

그러면 몸이 아플 때 마음까지 아프지 않게 된다.

본래 아프다 하는 것은 물질인 몸이 아픈 것인데,

이것을 내 통증이라고 보면 "큰일 났네! 계속 아프면 어쩌지!" 라는 두려운 마음 때문에

몸과 더불어 마음까지 함께 아프게 된다.

래서 두려워하는 마음이 괴로운 느낌을 더욱 증폭시킨다.

괴로운 느낌을 단지 육체적 느낌으로 볼 수 있을 때, 몸이 아플 때 마음까지 아프지 않게 된다.


3) 일상의 모든 선한 행위나 불선한 행위에는 그 행위로 인한 정신적 느낌이 함께 있다.

 선한 느낌이나 불선한 느낌이나 둘 다 반드시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다.

 불선한 행위의 느낌들 (탐진치의 행위들)은 괴롭기 때문에 알아차리기가 그래도 좀 수월하다.

그러나 선한 행위의 느낌(보시, 관용, 자애, 지혜로 한 행위들)은 편안하고, 만족스럽고 좋은 느낌이라 

 더욱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그래서 좋은 느낌을 내 것이라고 집착하고 아만심이나 유신견을 키워 새로운 불선업의 원인을 만든다.

그러므로 선업인 보시를 할 때도 반드시 ‘지금 무슨 마음으로 보시하는가?’하고 그 순간의 마음을 보아 주어야한다.

그 때 ‘내가 보시한다.’는 유신견과 '보시로 인한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을 먼저 알아차려 주고, 그 마음이 알아차림에 의해 소멸한 뒤,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를 해야 한다.

이렇게 행한 청정한 보시는 어떤 과보도 생성하지 않아 윤회를 끊는 원인이 된다.


** 수념처 수행의 이익 **


 수념처 설명을 하던 중 갑자기 12연기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간 것은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념처가 바로 12연기의 회전을 막는 유일한 방법임을 설명하다가 나온 것입니다.

이제 12연기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신수심법 4념처 중 수념처를 총 정리하겠습니다.

 

1) 매 순간 오온(색 수 상 행 식)은 함께 일어났다 함께 사라집니다.

이렇게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오온의 흐름이 우리의 삶의 과정이지,

이미 정해진 나의 운명이나 창조주의 힘으로 삶이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실재(實在)하는 것은 매 순간 조건에 의해 일어났다 사라지는 몸과 마음일뿐 그것이 나(我)가 아닙니다.

즉 매 순간마다 새로운 오온이 생성하면서 한 순간의 현재를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현재에는 항상 느낌과 함께 느낌에 연계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느낌에서 그 느낌을 일으킨 원인 되는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번뇌의 뿌리를 보는 것이라서, 탐진치로 부터 벗어난 바른 행위로 이어집니다.

즉 느낌에서 마음을 함께 보면 느낌에 휘둘려 진행되는 불선업을 제어할 수 있고, 

또한 느낌에서 원인과 결과를 통찰하는 직관적 지혜가 생깁니다.


2) 무릇 사람들은 매 순간 일어나는 느낌들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보지 못하고,

느낌을 영원한 것으로, 또 나의 것이라고 착각하여 느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 즐거운 느낌을 행복이라고 알고 계속 추구하는데,

이것은 5관의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얻으면 더 큰 즐거움을 끝없이 추구해서 괴롭고,

얻지 못하면 얻지 못해서 괴롭습니다.

이것은 느낌의 찰나 생멸하는 성품을 모르는 무지에서 오는 결과입니다. 

즉, 알아차림이 없는 느낌이 익어서 맺는 결실은 이 느낌의 주체가 나라고 하는 유신견(有身見)입니다.

그래서 더욱 나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고, 끝없이 괴로움을 재생산 합니다.

그래서 느낌은 좋거나 나쁘거나 간에 다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觀受是苦)

 

사실 이 순간의 느낌은 오온 중에 수온(受蘊. 느낌의 무더기)의 기능입니다.

그것을 그 순간의 마음이 알 뿐이지 내가 느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 순간의 오온이 경험하는 느낌일 뿐이지, 나의 느낌이 아니라고 볼 수 있어야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여실지견. 견청정)이 됩니다.


3) 수행자는 어떤 단계의 느낌(맨 느낌, 육체적 느낌, 정신적 느낌)이라도

알아차림과 평정심으로 반응하지 않고 지켜보아서 느낌의 성품을 통찰해야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느낌은 주인이 없고, 조건 지어진 현상이며, 한 순간에 생멸하는 찰나적인 것임을 직접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느낌의 노예가 되지 않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즉 느낌에서 갈애로 가지 않아 12연기의 회전을 멈추고 느낌이 괴로움의 원인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괴로운 느낌, 또는 즐거운 느낌이라도 불선업의 원인이 되지 않습니다.

느낌을 단지 느낌일 뿐이라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수념처 수행입니다.


                                           한국명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