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에 근거한 믿음과 지혜 (20100907)
벌써 인제 9월달이죠? 안거가 얼마나 남았어요? 한달반 남았죠! 공부들은 좀 했어요? 한달반 지났는데. <10초 정도 소리 안들림>
오늘 이 시간에는 「이성에 근거한 믿음과 지혜」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아까라와띠 삿다(Ākāravatī saddhā)'라고 그럽니다. 이성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감성적인 것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고 믿음은 보통 감성적인 부분들이 많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많은데, 이성에 근거하도록 하는 그런 믿음들도 깨달음에는 방해가 된다 하는 내용입니다.
불교는 믿음의 종교는 아니죠? 지혜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지혜에 관계된 것들은 팔만대장경을 찾아보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거의 전부입니다. 믿음에 관계된 것, 나를 믿으라 한다든지 하는 그런 것들은 눈을 씻고 봐도 잘 안 보입니다. 거의 보기 힘듭니다.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이왕 믿을 것 같으면 이성에 근거해서 믿는 것이 좋습니다. 감정적으로 누가 이것이 좋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홀라당 넘어가고 넘어가버리는 이런 것보다는 그래도 이성적인 것들을 통해서 믿는 것이 조금은 더 나은 길이라는 겁니다.
이성적인 것들이 어떤 것들이 있겠어요? 들어서 알고 있다든지, 아니면 책을 통해서 알고 있다든지 여러 가지 것들을 통해가지고 알아지는 것으로 인해서 판단해 보니까 아, 이게 맞을 것 같다 하고 믿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여기 이 자리에 오기까지는 많은 경로를 통해서 온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가까운데 절에 다니다가 이리 오기도 하고, 다른 대승불교를 하다가 오기도 하고 여러 가지들이 있을 겁니다. 대부분 그렇게 올 때는 그냥 붓다의 길따라가 있다 해가지고 그냥 씩 찾아온 사람은 드물거라. 여러 가지 얘기들을 듣고 또 판단해보고 홈페이지 들어가서 글도 읽어보고 이러다가 '아, 그래도 여기 가면 부처님의 원음을 배울 수 있겠구나. 바르게 수행할 수 있겠구나' 판단해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봅니다. 그런 것들이 쉽게 말하면 '아까라와띠'라고 '이성에 근거했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아까라와띠 삿다'라고 하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아, 이것이 진실이구나 이것이 사실이구나' 하고 인정은 하지만은 실증된 건 아니죠? 실제 내가 체험하고 증명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성에 근거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해야되는 것이 스스로 실증해야 되는 부분이 남아는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스님이 법문을 한다든지 아니면 책을 통해서 읽은 것들에 대해서 납득은 한다는 거라. 납득은 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주관적인 이해를 한다는 거라. 누가 얘기를 하면 설득해서 납득은 한다는 거라. 납득은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이해인 것이지.
1차결집 끝나고 나서 뿌라나 존자가 가지고 있던 견해들을 마하깟사빠 존자가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그 부분 여덟 가지 부분에 대해서 폐지했다 했을 때 뿌라나 존자는 납득은 했거든. 납득은 했는데 나중에 그게 부파가 분열될 때 화지부의 근본적인 분열 이유가 됐다 하고 저번 시간에 담마스쿨 할 때 1차결집 마지막 부분에 아마 얘기를 했을 겁니다. 그와 같다는 거라. 납득을 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주관적인 견해의 이해라는 거라. 주관적인 이해이기 때문에 그것은 조건이 달라지면 언제든지 바뀔 수가 있다는 거라.
그렇지만 부처님의 진리는 주관적인 것은 아니죠! 객관적인 것이고, 개인적인 것이 아닌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이성적인 것, 이성에 근거한 믿음은 어디에 근거를 둘 것인가 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보통 한번 보십시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필요합니까? 무조건 실천한다고 해서 됩니까? 그건 아니죠?
스리랑카에서 옛날에 그런 부분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배우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되는 것이냐? 아니면 수행실천하는 것이 먼저가 돼야 되는 것이냐? 거기서 내린 결론이 "배우는 것이 먼저 되야만이 실천하는 것이 된다" 하고 결론을 내려진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론적으로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많이 배우고 많이 듣고 해서 불교에 흥미를 가지고 그것을 배워야 됩니다. 배우고 나서 아, 이거 부처님이 가르친 진리니까 내가 그 가르침에 대해서 아, 나도 그렇게 이해한다 하고 스스로 납득이 돼야 됩니다.
납득이 되고 나서 자기 개인적인 주관이 어느 정도 세워지고 나면은 그러고 나서는 그 가르침에 대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내가 실천해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해서 그걸 실증을 해버리고 나면은 그사람은 불교도로서 할 일을 마치게 됩니다. 할 일을 다하게 되는 그런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그게 일반적인 과정입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없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몇 가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하면 이성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일려고 해도 전체적인 이성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찾고자 하는 것들을 여기서 발견할려고 한다는 거라.
그게 첫 번째 이유입니다.
예를 들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싶다. 그래서 여기 와서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경전공부를 하고 한다. 그럼 마음이 어느 정도 편안해지면 거기서 중단을 해버린다는 거라. 거기서 더 나아가지를 않는다는 거라.
또는 삼매를 체험해보고 싶다. 삼매를 체험해보고 나면 거기서 더 안 나가진다는 거라.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여기서 찾을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니까 어떤 문제점들이 있습니까? 나름대로의 불교들을 오해합니다.
실제로는 불교의 극히 일부만을 알게 된 건데 그걸 전체인양 생각을 해버리고 오해하게 됩니다. 제멋대로의 견해들을 가지게 돼서 그런 견해들을 표방함으로 해서 결과들이 나쁘게 되는 경우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목적이 충족되면 충분히 불교를 이해했다고 판단하게 되는 경우들이 되는 거죠.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목적을 그런데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필요한 부분에 두는 것이 아니라 쉽게 말하면 내가 왜 사는가? 이 마음은 왜 더러워지는가? 번뇌에 물들게 되는가? 이런 것들을 찾을려고 불교를 접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건 왜 그렇겠어요? 사는데 왜 괴로움이 있는가 하는 것을 발견하기 전에는 그 문제해결이 안됩니다. 마음이 왜 번뇌에 물들게 되는가? 그거 해결하지 않으면 끝날 수가 없다는 거라. 그게 끝나는 것은 이미 할 일을 다 마치는 형태가 되는 거라. 그런 것들이 주목적이 되고 그런 것들을 알려고 했을 때 불교의 전체적인 것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지, 부분적인 것들을 이해할려고 접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성에 근거한 믿음은 목적을 분명하게 가질 줄 알아야 됩니다.
두 번째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정의 내려라. 물론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도 있겠지. 두 마디로 정의 내려라 하면 두 마디로 정의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이 그리 간단한 겁니까? 만약에 한마디로 정의내리라고 했다. 만약에 누군가 사띠다. 그럼 모든 거 알아차리면 되겠지.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겁니까? 절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업에 대해서 이해를 했든, 윤회에 대해서 이해를 했든, 삼법인에 대해서 이해를 했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다가 대부분 보면 중도에 포기를 해버린다는 거라. 가다가 '아, 나의 능력은 이것 뿐이다' 하고 생각하고 거기서 중단을 해버리게 되는 거라. 중단을 해버리면 실천을 하는 길도 아울러서 중단을 해버리게 됩니다. 이성에 근거해서 그런 가르침을 배우는 것들이 중단이 되면 더불어서 실증해나가는, 실천해나가는 과정들도 중단을 하게 됩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부처님 가르침은 간단한 게 아니니까 아무리 배워도 자꾸 배울 것이 있다는 거라. 평생 배워도 다 못 배우는 거라. 그러니까 배움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야 이게 실천하는 길이 되는데 이거는 배우다가 한 생을 마쳐버리게 된다는 거라.
빨리어 용어 중에 두라(dhura)라고 하는 용어가 있습니다.
또 하나 용어는 빤디따(paṇḍita)라고 하는 용어가 있습니다.
차이점이 뭔지 아세요? 큰스님들을 부를 때 대부분 이 두 가지 용어로써 부릅니다. 차이점이 뭔지 아세요?
이해하고 많이 아는 사람들에게는 '빤디따'라는 명칭을 써줍니다. 그런데 이해하고 알고 있는 데다가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 그런 분들에게는 '두라'라는 명칭을 써줍니다. 그래서 두라와 빤디따는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이 스승을 가리키는 용어인데도 그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어쨌든 배우기만 할 거 같으면 빤디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실천 실증되지 않으니까. 온 생애를 배우는데만 다 바쳐버리고,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배움에 따라서 내가 가르치는 입장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실천하는 것이 점점 더 멀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공부하는 스피드가 점점 더 떨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실천을 안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되면 좋은데 어떻게 됩니까?
이 불교의 세계에서는 많이 아는 사람들을 더 존경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보다 많이 아는 사람들을 더 존경합니다. 그래서 많이 알면 가서 뭘 물어봐도 금방금방 잘 대답을 해주니까 많이 아는 것들을 더 선호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런 분들은 많은 것들을 얻게 됩니다. 명예도 얻게 되고, 또 사람들이 와서 여러 가지 시주도 하고.
그렇게 되니까 그것만 모여지는 게 아니고 그 사람에게는 그런 재산과 명예라고 하는 바다에 빠지게끔 된다는 겁니다.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거라.
자기가 아직 해탈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게 되고, 그런 명예와 재산들이나 이런 것들이 따르게 됨으로 인해가지고 하나 더 생겨나는 것이 '나'라고 하는 아만까지 생겨나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다른 사람들 하고는 계속 자기의 견해와 부딪치니까 실증되지 않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주관적인 이해이기 때문에 견해입니다. 그러면 자꾸 다툼이 있습니다. 물론 다툼해가지고 논쟁에서 이기는 경우들이 많겠죠? 그거 이기면 뭐 할 건데?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삼매에 도달한 자, 삼매를 유용하게 잘 조화롭게 조절할 수 있는 자가 마을에서 사는 것 나 칭찬 안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차라리 수행하라 그러면 만날 꼬박꼬박 조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꼬박꼬박 조는 사람이 숲속에 들어가 수행하는 사람은 나는 칭찬한다" 하고 얘기했습니다.
꼬박꼬박 조는 사람이 뛰어나겠어? 삼매에 들 수 있는 사람이 뛰어나겠어? 삼매에 들 수 있는 사람이 훨씬 뛰어나다는 거라. 뛰어난데 그 뛰어난 자가 마을에서 살고 있는 경우는 부처님은 칭찬하지 않는다고, 기뻐하지 않는다고 얘기했습니다. 왜 그렇겠어요? 휩쓸려버린다는 거라. 세속적인 재산과 명예와 이익에 휩쓸려버리기 때문에 그 삼매는 언제든지 달아나 버린다는 거라.
그런데 숲에서 꼬박꼬박 조는 사람은 뭐 다른 거 할 게 없습니다. 다른 사람하고 얘기할 것이 있어? 세속적인 것에 휩쓸릴 염려가 있어? 꼬박꼬박 졸다가 보면 공부는 하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내가 더 기뻐한다는 거라. 설혹 졸고 있어도 혼자 고요한 곳에서 수행하는 자들을 부처님이 더 존중하고 기뻐한다는 얘깁니다.
세속에 살고 있으면 어떻게 그러면 그와 같이 고요하게 숲속에서 수행할 수 있겠어요? 경전에 그런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큰 대로를 걸어가도 나는 앞을 보고 뒤를 보고 돌아보지 않는다. 오로지 걸어만 간다."
걸어가다 보면 우리는 옆에 뭐가 있는지 다 보고 갑니다. 앞만 보고 가는 게 아니고 옆에도 보고 어떨 땐 뒤로 돌아서도 보고, 뒤로 돌아보는데 몸을 같이 돌아보면 좋은데 목만 돌립니다. 그게 일반적입니다.
부처님은 뒤를 돌아볼 때는 몸을 같이 돌렸습니다. 큰 길을 걸어갈 때 아주 시장통에 있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의 눈에는 오로지 걸어가는 것 밖에는 해당이 안된다는 거라. 주변의 영향을 못받는다는 거라. 그런 것들이 바로 고요한 숲속에서 살아가는 거와 같다 하는 거라.
그렇게 안 될 때는 어떻게 해야 돼요? 자주자주 그런데 가서 수행을 해야 됩니다. 이런 선원에 와서, 아니면 집중수행처에 가서, 아니면 한적하고 고요한 곳에 외부 방해를 받지 않는 곳에 가서 수행들을 하는 사람들을 부처님이 더 기뻐한다는 거라.
지금 내가 조금 더 다른 사람들보다도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있고, 그래서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이 수행법을 가르쳐주고 부처님 가르침을 가르쳐준다고 해가지고 부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거라. 내가 조금 더 다른 사람보다도 수행에서 앞서나가 있고, 어느 정도 성취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가지고 부처님이 그걸 기뻐하지 않는다는 거라.
부처님이 꼬살라국을 떠나가지고 어느 마을에 도착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앗차낭갈라 가마'라고 하는 마을입니다. 가마는 마을이죠. 앗차낭갈라 라고 하는 마을에 도착을 했는데, 이 마을에 도착하니까 마을 사람들은 아주 위대한 성자가 우리 마을을 방문했다 해가지고 마을에서 떠들썩하게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내일은 우리가 부처님한테, 부처님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리자 해가지고 그날 공양을 준비해가지고 다음날 부처님한테 가지고 옵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너무 시끄러운 거라. 자기들은 기뻐서 그랬겠지. 그 위대한 성자가 왔으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을 거라.
그때 부처님 시자가 나기따 라고 하는 시자였습니다. 나기따 시자가 사람들이 부처님한테 오는 것을 보고 이럽니다. "부처님 마을 사람들이 부처님한테 공양을 올리기 위해서 옵니다. 공양을 받으십시오" 하고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뭐라고 하느냐면 "나는 그런 명예와 재산과 이익의 무서움을 알고 있다." 하는 거라. 그래서 나는 그런 공양을 받을 수가 없다는 거라.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아주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잔뜩 차려놔 놓고 "잡수십시오" 하는 거라.
그거 다 먹을 수가 없습니다. 먹는 데는 양이 있기 때문에 특히나 부처님은 양을 딱 조절해가지고 먹을 만큼만 먹는데 아무리 차려놓아도 다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라. 그럼 이걸 먹어라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할 거라? 못 먹겠다는 거라 부처님이. 그 위험을 안다는 거라. 그 무서움을. 그래서 나는 이런 거 바라지 않는다. "나는 이 공양을 거부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나는 벗어난 것의 즐거움을 알고 있고, 떨쳐버린 것의 즐거움을 알고 있고, 고요한 것의 즐거움을 안다는 거라. 그리고 깨달음의 즐거움을 알고 있다는 거라. 그 즐거움이 있는데 그 즐거움을 놔버리고 내가 여기 이익과 명예와 또 그런 의지하는 것들의 두려움 무서움 속으로 빠져들어라는 거냐는 거라.
"앎을 많이 가지게 되면 이런 무서움에 빠져들게 된다" 하는 부처님의 경고입니다. 많이 지식적으로 알고 있으면 이런 무서움에 빠집니다.
명예의 무서움, 지식의 무서움, 또 게으름으로부터 오는 무서움, 또 내가 의지하는 것들 스님들은 여러 가지 시주물에 의지하게 되고, 여러분들은 또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 의지하게 되고, 그런 의지하는 것들로부터의 무서움을 알아야 되는데 무서움을 모르게 된다는 거라.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떨쳐버리는 것들로부터 오는 즐거움 이걸 누릴 줄 모른다는 거라. 고요해짐으로 인해서 오는 즐거움들 아, 내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것으로부터 오는 즐거움들 이런 것들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거라.
가장 큰 비유가 뽓틸라 비구에게 부처님이 한 겁니다. 뽓틸라 비구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뚜쪼 뽓틸라라 해서 "골빈 뽓틸라다" 하고 여러번 여러분들에게 그 얘기를 했습니다. 그와 같다는 거라.
이성에 근거한 믿음은 감성에 근거한 믿음보다는 이로움이 있지만은 이성에 근거한 믿음도 한계성을 지니게 된다는 거라.
실천에 의해서만 지혜가 일어나는 것이지 아무리 이성적인 믿음이라 하더라도 거기로 인해서 지혜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실천하지 않는 자는 그것이 이성적이든 감성적이든 그것이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타락의 길로 들어가는 거와 마찬가지다" 하고 얘기합니다.
왜? 이런 명예와 이익과 여러 가지들이 나에게 다가와지게 되고 그런 위험으로 내가 빠져들어가기 때문에 타락의 길로 가는 거와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앎으로써, 지식만으로써 나아갈려고 하는 자는 곧 파괴의 길을... <20초 정도 소리 안들림>
여러분들은 그런 지식으로 인해서 스스로 목을 졸라매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야 됩니다. 내가 조금 더 남들보다도 많이 알고 있다. 좀 더 수행에서 앞서 나가 있다. 그리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견해에 붙잡히게 되면 스스로의 목을 졸라매는 것이다 하는 것을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만은 그게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겁니다.
그걸 요즘 말로 하면 '항암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당장 나는 병들어 있고 늙어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다는 거라. 이런 사람들에게는 항암제를 맞아야 된다는 거라. 항암제를 맞아야되지만 항암제는 신체에서 보면 독과 같습니다. 죽은 세포만 없애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세포마저도 같이 없앤다는 겁니다. 항암제에 의해서 암을 치료하고 그걸 고쳐야 되는 것은 분명하다는 거라.
그래서 불교를 수행해나가는데 지식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빠뜨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거는 악마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라는 거라. 그렇게 생각해야만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는 거라.
해탈의 길에 이르는 데는 항암제와 같고 악마의 선물과 같은 거지만은 그것을 의지해버리고 그것에 집착하는 순간 바로 그와 같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스스로 목을 졸라매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런 위험성으로부터 분명하게 벗어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수행을 해야만이 바르게 수행을 해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성에 근거한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버려버려야 될 것들이다 하고 판단을 하고, 지혜로써 나아가도록 지혜로써 판단하도록 지혜를 계발하도록 더욱더 실천하는 길로 나아가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 > 2008~2010 일상수행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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