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빳사나 수행의 모든 것 (20100511)
위빳사나라고 하는 것과 사마타라고 하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얘기를 누누하게 해왔습니다. 불교의 수행에는 이렇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마타 바와나(Samatha bhāvanā)의 사마타(Samatha)라고 하는 것은 집중을 말합니다.
사마타 수행에서는 자나(jhāna), 디야나(Dhyāna)라고 하는 좀 더 높은 차원의 마음의 집중을 배워나가는 그런 방법입니다.
위빳사나 바와나(vipassanā bhāvanā)라고 하는 것은 통찰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기능의 세 가지 특징을 보고 통찰한다는 뜻입니다. 즉 위빳사나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 마음과 대상의 관계를 관통해서 간파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위빳사나라고 할 때의 '위(vi)'는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세 가지 특징을 얘기합니다. '빳사나(passanā)' 라고 하는 것은 그 세 가지 특징을 올바르게 이해한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수행이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무상(aniccā, 無常)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일어나고 사라져가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의 움직임이라고 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또 순간적으로 사라져갑니다. 그것을 무상이라고 그럽니다. 마음이 한순간도 멈춰있는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육체적인 감각이라는 것도 일어났다가 곧바로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물질을 알 수 있는 것은 감각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 감각도 무상한 것이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론적으로는 이렇게 아는데 실제적으로는 수행을 하지 않으면 무상을 실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바와나(vipassanā bhāvanā) 라고 그럽니다.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는 뜻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확실히 파악해서 의식하는 것으로부터 수행은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몸이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그것이 일어나는 순간에 전심전력을 다해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빨리어에서는 나마(nāma)라고 그럽니다.
육체적인 것은 빨리어에서는 루빠(rūpa)라고 그럽니다.
나마와 루빠라고 하는 정신적인 상태, 육체적인 현상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와 같이 마음의 상태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사라져갑니다. 육체적인 현상도 영원하지를 않습니다.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사라져갑니다.
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마음과 물질이라고 하는 두 개의 진행과정의 실제적인 현상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무상(無常)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이 무상을 위빳사나 수행으로써 알아차려나가도록 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특징은 둑카(dukkha) 고(苦) 괴로움이라고 그럽니다.
원래의 의미는 '불만족'이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둑카둑카(dukkhadukkha)라고 하는 일반적인 괴로움이 있고,
위빠리나마둑카(vipariṇāmadukkha)라고 하는 변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또 상카라둑카(saṅkhāradukkha)라 해서 정신적 육체적 현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얘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둑카에 해당이 됩니다.
일반적인 괴로움도 무상한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것은 당연히 무상한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현상 육체적인 현상도 일어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무상한 성품을 지닙니다.
그래서 무상한 것은 둑카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모든 현상은 무상하기 때문에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것을 '둑카'라고 얘기합니다.
왜 이것이 둑카인가 하는 것을 빨리 수행해서 알아차리도록 하라 하는 것이, 두 번째 특성을 수행에서 알아야 되는 부분입니다.
세 번째의 특성은 무아(anattā, 無我)입니다.
마음의 현상은 스스로 독립해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것이 아니고 '나의 영혼'도 아니다 하는 겁니다. 왜냐 하면 그것들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은 무상이기 때문에! 신체적인 현상도 스스로 독립해서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라는 것이 아니고 나의 영혼도 아니다 하는 겁니다. 이것이 무상이며 둑카인 것이고 또한 무아인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이런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현상은 나의 영혼도 아니고 나라고 하는 존재도 아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무상은 빨리어로 아닛짜(aniccā) 라고 합니다. 괴로움은 둑카(dukkha), 무아는 아낫따(anattā)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을 체험하는 방법은 실천해서 그것의 성품을 알아차리는 길밖에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세 가지 특징을 체득해서 알아차리는 수행자를 '위빠사니아'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자다'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마타 수행자라고 부르지 않고 왜 위빳사나 수행자라고 하는가 하면 사마타 수행에서는 이 세 가지 성품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가 힘들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성품을 알아차리는 것은 위빳사나 수행자다 라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여기 위빳사나 수행을 하기 위해서 모여 있습니다.
이 세 가지 특징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몸과 마음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일어나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수행의 기본 원칙입니다.
다시 말해서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든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든 어떤 것이든 주의 깊게 관찰해서 그것을 감시할 필요가 있다 하는 겁니다. 마음 상태이든 신체의 현상이든 일어나는 것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들이 위빳사나 수행의 대상이 된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 밖에서 일어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것들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가장 두드러진 대상이 실제 수행대상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것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눠보니까 신수심법 이라고 얘기합니다.
몸에 대해서 알아차리고, 느낌에 대해서 알아차리고, 마음에 대해서 알아차리고, 담마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위빳사나 수행의 알아차릴 대상이다 하는 것입니다.
처음 알아차릴 대상은 신체적인 현상에 대한 것입니다.
두 번째 알아차릴 대상은 감각 느낌에 대한 것.
이 감각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즐겁고 유쾌한 느낌, 그 반대로 불쾌하고 싫은 느낌, 또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느낌 이 세 가지 느낌들이 있습니다. 이 느낌들이 일어날 때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입니다.
세 번째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어떠한 의식이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알아차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시각적인 인식작용, 눈에 보이는 것을 본다고 하는 것은 시각적인 인식작용입니다. 눈이 있고 눈에 보이는 대상이 있는 경우 시각적인 인식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뭔가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있는 경우에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내가 '보고 있음' 하고 알아차리는 것, 보고 있는 것은 이런 눈의 시각작용, 눈의 인식작용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에 마음의 알아차림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똑같이 소리가 들렸을 경우에는 청각적인 인식작용이 일어납니다. 소리가 들렸을 경우에 그것을 듣고 있다고 알아차리고 있는 경우 이것도 마음의 알아차림입니다.
이와 같이 후각, 미각, 촉각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이것을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네 번째는 담마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담마에는 의식상태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고,
신체적인 현상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의식상태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빛이 보인다든지 니밋따가 형성이 된다든지 선정삼매에 들어있다든지 이런 의식, 마음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도 그대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빛이 보일 때는 '빛'이라고 알아차리고, 니밋따에 들었을 때에는 니밋따에 마음을 알아차림을 해야 되는 것이고.
또한 신체적인 현상에서 일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졸린다든지 배고프다든지 하는 것. 배고픔이 있을 때는 배고픔이라는 신체적인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배고픔이 있을 때는 신체적인 느낌, 배고픔이라는 신체적인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배고플 때는 배고프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되고, 졸릴 때는 졸리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것이 담마에 대한 알아차림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렇게 신수심법...
<1분 정도 소리가 안들립니다.>
이렇게 부처님이 네 가지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을 가르쳤지만 그 어떤 것이나 특정한 대상만을 관찰할 필요는 없습니다. 즉 몸에 대해서만 알아차린다든지 느낌에 대해서만 알아차린다든지 마음 또는 법에 대한 것들만 알아차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럴려다 보면은 마음은 고정적이게 돼버립니다. 신체적인 현상이든 정신적인 현상이든 그 수행대상도 고정된 것이 아닐뿐더러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고정되어 있질 않습니다. 무상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겁니다.
하나의 대상만 수행할 경우에는 사마타쪽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을 할 경우에는 어떤 것이든 특정한 대상을 선택해서 그것만 알아차려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처음 수행하는 분들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보통 특정한 대상을 주어서 지도를 합니다.
그래서 마하시 센터에서는...
<30초 정도 소리가 안들립니다.>
이런 것들은 처음 수행하는 자에게 수행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달아나는 마음을 대상에 일치시키기 위한 방법인 것이지 그것만을 주대상으로 그것만을 수행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우리의 마음과 몸에서는 대상들은 한 가지만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한 가지가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되면 또 다른 대상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됩니다. 어쨌든 처음 수행을 할 때 주 대상을 잡을 필요성은 있습니다. 마음을 대상에 갖다 붙이기 위한 수단으로써 한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야 됩니다.
그 예로 마하시 수행법에서는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의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은 바람의 요소입니다. 바람의 요소라는 것은 움직임의 요소입니다. 그런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배가 불러오는 움직임이 있고 배가 꺼지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숨을 들이마시면 배가 앞으로 나오고 숨을 내쉬면 배가 꺼지게 됩니다. 그래서 배가 불러올 때는 '일어남'이라고 마음을 알아차려주고, 배가 꺼질 때는 '사라짐'이라고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대상에 집중해서 세세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되는 것이 수행에서 '제1의 대상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 제1의 대상은 유일한 수행의 대상은 아닙니다.
다른 의식이나 신체적인 현상이 일어나면 수행자는 배의 움직임- '일어나고 사라짐'이라 하는 배의 움직임을 일단 놔두고, 다른 현상이 생겨나는 곳에 마음을 향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느낌이 일어났으면 그 느낌을 알아차림 해야 되고, 마음이 일어났으면 그 마음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되고, 이렇게 그 대상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주대상인 배의 '일어남, 사라짐' 혹은 느낌의 '일어남, 사라짐' 마음의 '일어남, 사라짐'으로 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때 주대상인 일어나고 사라지는 배의 움직임에서 배의 '모양'은 무시를 해야 됩니다.
배의 모양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적인 것이 아닙니다.
실재적인 것은 배가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일어나는 '느낌'입니다.
그 느낌들은 '움직임'으로써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움직임에다가 마음을 집중하도록 해야 됩니다. 배의 겉모양, 겉모습인 모양에 집중하도록 하면 안됩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모양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배가 불러올 때의 움직임 배가 꺼질 때의 움직임에 집중하도록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움직임에 집중되고 났을 때 배가 움직이면서 불러오는 움직임에서 일어나는 느낌들, 사라지면서 일어나는 느낌들에 집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이렇게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품이라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실재적인 성품을 관찰하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이고, 그 움직이는 느낌이 실재적인 성품이다 하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해야 됩니다.
이렇게 배가 불러오고 꺼지는 배를 보고 그 겉모양을 무시하고, 불러오고 꺼질 때의 움직임과 불러오고 꺼질 때의 느낌들을 알아차림 하도록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그러다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기 힘들 때는, '닿음'이라는 것을 하나 더 첨가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할 때 몸이 닿아있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해도 대상에 대해서 마음이 다가가서 붙어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는, '앉음'과 '닿음' 두 가지를 동시에 첨가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앉아있을 때는 머리끝에서부터 보자기를 씌우듯이 꼿꼿하게 몸이 앉아있는 성품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앉아있음' 하면서 머리끝에서 엉덩이뼈까지 몸이 꼿꼿하게, 부력에 인해서 꼿꼿이 앉아있는 성품, 이것이 어떤 성품인가? 바람의 성품인지, 지탱하는 성품인지, 아니면 팽창하는 성품인지 하는 그 성품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일어남' 하고 나서 '앉아있음' 하고 알아차리고, 바로 닿아있는 첫 번째 닿아있는 포인트 오른쪽 눈꺼풀을 알아차리도록 하고, 그리고 '사라짐' 하고 나서 알아차리는 것이 앉아있는 성품을 알아차리고, 닿아있는 왼쪽 눈꺼풀-두 번째 닿아있는 부분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중간에 '앉음'과 '닿음'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이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네 부분으로써 나누었을 때의 관찰 방법입니다.
주대상이라 하더라도 수행이 잘 되어나갈 때는 '일어남' '사라짐'이라고 하는 배의 불러오고 꺼지는 성품만 관찰을 해나가면 됩니다. 그렇게 해도 관찰이 잘 안될 때는 '닿음'을 넣어주고, 그래도 잘 안될 때는 '앉음'과 '닿음'을 넣어주고, 네 가지 방법을 통해서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도록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오래도록 열심히 수행해도 안 될 때는 이렇게 세 가지 방법, 네 가지 방법으로써 마음을 대상에 집중해나가도록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집중력과 지혜가 힘이 점점 생겨나서 망상이나 생각, 계획하고 하는 것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바로 알아차림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한 단계의 힘이 생겨나갈 때 대상은 '사라짐' 만을 볼 수가 있게 됩니다.
그것이 지혜의 단계에 들어섰다는 징조입니다. 그걸 '방가냐나'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할 때는 그 대상이 일어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만 알아차릴 수가 있고, 사라지는 배의 현상도 '사라짐'만 알아차리게 됩니다. 중간 중간에 일어나는 망상 생각들도 일어나는 것들은 모르고 일어나자마자 바로 사라지는 것 '사라짐' 만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모든 대상들이 즉시 사라져버리는 것을 스스로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집중력이 점점 좋아지고 지혜가 있게 될 때는 산란한 마음들도 사라져버리고 그것을 연이어서 아는 알아차리는 마음도 연이어서 사라지는 것을 알게끔 됩니다. 그래서 마음도 영원하지가 않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영원하지가 않고, 실제적인 그 대상이 육체적인 대상이든 정신적인 대상이든 그 대상도 영원하지가 않고 '무상'한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전부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굉장한 고통을 느낍니다. 굉장한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그렇게 슬픔을 느끼는 것, 그래서 만족하지 못하게 될 때 이것이 '고통의 진리'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불만족스럽고 슬픈 성품, 모든 것들이 사라져 가는 고통스런 성품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끔 됩니다. 내 자신이 그것을 조절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아! 이것이 '무아'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무상의 지혜, 고통의 지혜, 무아의 지혜들이 이렇게 일어나게 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또는 일어나고 사라지고 닿고, 또는 일어나고 사라지고 앉고 닿고, 하는 것이 마음 집중하는 동안 이런 한 시간 혹은 삼십 분 동안 갖가지 고통스런 성품들이 일어납니다. 쑤시고 저리고 아프고 찌르고 하는 그런 통증들이 일어납니다. 그런 통증들이 일어나면 쑤시고 저리고 찌르고 하는 고통스러운 느낌들은 강하게 알아차림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런 통증들이 있다고 해서 자세를 바꿀려고 하지 말고 끝까지 알아차리도록 하고 나서, 도저히 알아차리지 못할 상태가 됐을 때, 알아차림을 유지한 체 자세를 바꾸겠다 하는 마음을 내고, 천천히 자세를 바꾸면서 그것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이런 쑤시고 저리고 아리고 찌르고 하는 아픈 통증들을 수행의 대상으로 해야 됩니다.
그럴 때는 몸에 대한 알아차림에서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수행의 대상이 바뀌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배가 불러오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알아차림 하고 있을 때, 신체 중에 어떤 부위가 아파온다. 그런 경우에 그 아파오는 대상에 마음을 두고 '아픔' '아픔' '아픔' 하면서 마음에 새기면서 그 아픔을 관찰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 대상이, 아픈 대상이, 아픔의 불쾌한 느낌들이 사라져버리고 나면 다시 몸의 현상, 두드러진 현상인 배의 '일어남' '사라짐'으로 돌아와서 알아차림 하도록 해야 됩니다.
배의 현상도 앞에 설명했듯이 무상·고·무아의 성품이 있듯이, 느낌의 성품도 무상·고·무아의 성품이 있습니다.
'아픔'이란 느낌이 있다고 하면 그 아픔이란 느낌도 빠르게 변해갑니다. 그래서 그 아픔이란 느낌도 사라짐 만을 볼 수가 있게 됩니다. 그 사라짐이란 것이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아픔이란 느낌이 일어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이 다르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너무나 빠르게 변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림 하는 마음도 동시에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내가 조절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므로 해서 무상·고·무아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배를 집중하고 있을 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집중하고 있을 때, 소리가 들릴 때도 '소리들림' 하고 알아차림 해야 됩니다. 그 소리가 들리는 것도 똑같이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소리들리는 것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배의 움직임으로 돌아와야 됩니다.
'아픔'이 있든 '가려움'이 있든 또 '소리들림'이 있든 그것들은 대상이 일어났을 때는 그것 자체가 주대상이 됩니다.
주대상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기본적인 배의 '일어남' '사라짐'이라는 주대상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이렇게 생각이 일어났든 느낌이 일어났든 어떤 것이든 영원히 계속되지 않고 그것은 떠오름과 동시에 사라져가기 때문에, 그것이 무상이기 때문에 근심이고 고통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영원히 계속되는 존재, '나'가 아니다 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 세 가지 특징 무상·고·무아 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좌선수행을 하게 됩니다.
좌선수행을 할 때 이렇게 네 가지를 다 알아차리게 됩니다.
'일어남' '사라짐' 혹은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을 알아차림 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관찰하는 수행방법입니다.
<1분 정도 소리 안들립니다.>
이렇게 좌선수행 할 때도 꼭 마찬가지로 사념처 수행을 전부 다 하게 됩니다.
좌선수행을 할 때 몸에 대한 알아차림 수행만 한다고 착각을 하면 안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네 가지를 다 수행을 하게끔 됩니다.
그다음에 경행수행을 할 때입니다. 걸으면서 수행을 하는 경우입니다.
걷고 있는 동안에는 다리의 움직임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수행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걷고 있는 동안에는 우선 한 발이 나와서 나아가고 내려놓게끔 됩니다. 또는 한 발이 들어올려지고 내려놓고 나야 다른 발이 들어올려지고 내려놓게 됩니다.
처음 수행할 때는 모든 것들을 다 알아차림 할 수가 없습니다. 왼발일 때는 왼발인 것을 알아차리고, 오른발일 때는 오른발인 것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처음 수행할 때는 '왼발' '오른발' 하면서 걸으면서 알아차림하고 이렇게 해야 됩니다.
걸으면서 왼발 오른발인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림 하고 나면, 수행의 대상을 조금씩 조금씩 늘려나가면 됩니다. 왼발도 들어올리고 내려놓게끔 됩니다. 그래서 왼발인 줄 알아차릴 때 왼발이 들어올려 질 때 '들어올림' 하고 알아차리고 내려놓을 때는 '내려놓음' 하고 알아차림 합니다. 오른발이 들어올려질 때는 '들어올림' 하고 알아차리고 내려놓을 때는 '내려놓음' 하고 알아차리고.
그러다가 다리가 들어올려지고 내려놓을 때는 멈추는 현상이 있습니다. 멈추는 현상을 알아차리게 될 때는 수행의 대상을 더욱더 넓혀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는 것을 알아차림 하는 것입니다. 왼발을 들어올리고, 멈추고 나서 나아가고, 멈추고 나서 내려놓고 하는 것을 알아차림 하도록 해야 됩니다. 오른발을 들어올리고, 멈추는 것을 알고, 나아가는 것을 알고, 멈추는 것을 알고, 내려놓는 것을 알아차림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걸을 때는 '왼발' '오른발' 하고 알아차림을 하고, 통상적인 것보다 조금 더 속도를 늦출 때는 '들어올림' '내려놓음' 하면서 알아차림 하고, 들어올림 내려놓음 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을 알게 될 때는 조금 더 천천히 걸으면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고 알아차림 하도록 해야 됩니다.
이렇게 했을 때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는 것에 분명한 알아차림이 있을 경우에는 조금 더 천천히 걸을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뒤꿈치를 들려고 하는 것을 알고, 들어올리는 것을 알고, 나아가는 것을 알고...
<1분 정도 소리 안들립니다.>
알아차림을 지속하도록 해야 됩니다.
발뒤꿈치를 들려고 하는 의도를 알아차릴 때는
그 의도를 먼저 알아차릴려고 해서 발뒤꿈치가 들리면서 앞꿈치가 들리고 발이 들리는 것은 발뒤꿈치로부터 점점 더 발이 들려지는 것으로부터 해서 발가락 끝이 완전하게 들려서 세워지는 것까지를 하면서 '발을 듦' 하면서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발을 듦' 할 때는 발바닥이 바닥에서 완전히 떨어져서 분리되는 상태까지가 해당이 됩니다. 그러고 나서 들어올려지는 것을 천천히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고 '나아가고자 함' 하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나아가고자 할 때는 그 나아가는 시작과 끝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마음을 챙겨서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발을 들어올릴 때는 뒤꿈치가 들리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또 앞꿈치가 분명하게 들리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고, 또 발을 들어올리는 것이 낱낱이 구분해서 알아차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나아갈 때는 초보자의 입장에서는 '나아감' '나아감' '나아감' 하면서 분리해서 알아차리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하고 끝까지를 갖다가 분리하지 않고 '나아감' 하면서 하나의 마음챙김에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내려놓을 때는 발을 내려놓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나서, 발을 내려놓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발을 내려놓기 시작하는 부분부터 해서 발이 천천히 내려오면서 수평을 유지하고 혹은 앞꿈치가 먼저 내려오고 혹은 뒤꿈치가 먼저 내려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됩니다. 어떨 때는 동일하게 내려올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앞꿈치가 먼저 내려올 때가 있고 어떨 때는 뒷꿈치가 먼저 내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됩니다.
분명하게 인식해서 발바닥이 닿을 때 어떤 부분이 먼저 닿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러고 나서 앞꿈치가 먼저 닿았다 할 것 같으면 앞꿈치가 닿는 것을 인식하고 나서, 천천히 발바닥이 닿는 것들을 인식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발바닥이 완전하게 땅바닥에 닿아있는 데까지를 분명하게 알았을 때 그것을 '내려놓음' 이라고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발바닥이 완전히 닿았으면 '닿아있음' 하고 알아차리고.
그러고 나서 다른 쪽 발을 이동하기 전에는 몸의 무게중심을 닿아있는 발에다가 두어야 됩니다. 그럴 때는 '누름' 하고 알아차림하고.
닿아있을 때의 느낌과 '누름' 할 때의 느낌은 분명하게 틀립니다.
무게의 중심이 이동하기 때문에 그 느낌들도 분명하게 가볍고 무겁고 뜨겁고 차갑고 하는 것들이 분명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닿아있음'을 알아차림과 '누름'을 알아차림을 분명하게 구분하게 됩니다.
그래서 몸무게가 이동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그 누름을 알고 나서, 그러고 나서 마음을 재빨리 그다음 발-발을 옮길 발에다가 알아차림을 두어서 '발을 들어올리고자 함' 하고 알아차리고 발을 천천히 들어올리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발을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할 때 가볍게 올라오는 것은 불의 성품과 바람의 성품이 강합니다. 무겁게 내려올 때는 반대로 흙의 성품과 물의 성품이 강합니다.
가볍게 올라올 때는 떠받쳐주듯이 발을 튕겨주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리고 움직임의 성품이 있습니다.
발이 올라올 때는 가벼움의 요소가 점점 더 강해지기 때문에 발을 들어올릴 때는 가벼움이 증가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래서 발을 들어올릴 때는 가벼움이 증가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거기에는 불과 바람의 성품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발이 내려올 때는 무거움을 느낍니다. 무거움의 요소는 흙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물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무겁게 내려올 때는 그 무거움이 점점 더 증가하게 됩니다. 흙의 성품과 물의 성품, 물의 성품은 떨어지는 성품이 있을 뿐 아니라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가속도가 붙기 때문에 더욱더 빨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무거움이 점점 더 증가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내려올 때는 반드시 물의 성품과 땅의 성품-흙의 성품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게 됩니다.
그래서 들어올릴 때는 가벼움이 증가하고, 내려놓을 때는 무거움이 증가하는 그 변화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이렇게 해야 됩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제일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천천히 경행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걷고 있는 동안에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아서는 안됩니다.
동작은 천천히 하더라도 눈은 앞에다가 고정을 해야 됩니다.
두리번두리번 거리면서 마음을 산란하게 움직이면 이러한 성품들을 분명하게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보폭은 가능한 한 자신의 다리, 어깨넓이 이상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발을 옮기도록 해야 됩니다. 그 이상 크게 하면 자신의 보폭이 커지기 때문에 분명하게 그 대상을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속도가 빨라지게끔 됩니다.
다리의 움직임, 다리의 느낌, 다리의 성품들을 분명하게 인식할려면 이렇게 보폭도 크게 해서도 안되고, 눈도 두리번거려서도 안되고, 속도도 빠르게 해서도 안됩니다.
그러한 것들을 분명하게 구분을 해서 경행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이 수행하는 동안에 모든 성품들을 낱낱이 알아차리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리를 들어올리는 동작, 내미는 동작, 내려놓는 동작을 할 동안에 일어나는 갖가지 성품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곡예사가 한 줄 위에서 줄을 타듯이 한 줄을 똑바로 걸어갔다가 다시 똑바로 돌아온다고 생각을 하고, 방의 한쪽 구석에서 또 다른 한쪽 구석으로 걷는 것들을 반복하도록 해야 됩니다.
서두르지 않고 멈추지 않고 그렇게 걸어가서 한쪽 끝에 닿았으면, 자신의 서 있는 모습을 한 열 번 정도 관찰합니다. '서있음' 하면서 아까 앉아있을 때와 꼭 마찬가지로 머리끝에서 발바닥 끝까지 지탱해있는 성품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서있음' 하면서 그렇게 서 있는 지탱하는 성품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한 열 번 정도 알아차림 하고 나서는 '몸을 돌리고자 함' 하고 '의도'를 알아차리고 나서
<1분 정도 소리 안들립니다.>
의도를 알아차리고 나서 '왼발' '오른발' 하면서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 시간 동안 경행을 지속해나가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좌선수행과 경행수행은 교대로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한 좌선수행 전에는 통상적으로는 경행수행을 먼저 하도록 해야 됩니다.
경행수행에서 집중력이 깊어지고 그 움직임을 면밀하게 알아차리게 되면 사띠도 집중력과 동시에 커지게끔 됩니다.
걷는 수행-경행으로 인해서 얻어진 집중력은 좌선수행에서 자리로 돌아가면 흐트러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돼나갑니다.
그래서 경행수행을 하고 나서 급하게 자리로 돌아가서 좌선을 할려고 하면 안됩니다.
자세를 절대 흐트러지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바라보고 나서 이제 좌선을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나서 그 자리로 천천히 경행을 하면서 가서 자리에 서도록 해야 됩니다.
서고 나면 '서있음' 하고 알아차리고, 그러고 나서 앉겠다고 하는 의도를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나서, 천천히 '앉고자 함' '앉고자 함' 하고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허리를 구부려서 앉을 때는 '앉음' '앉음' 하면서 알아차리고, 그렇게 해서 신체가 바닥에 닿을 때는 '닿음' '닿음' 하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천천히 몸이 안정되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배의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알아차림하도록 해야 됩니다.
이렇게 좌선의 끝에서 경행으로 돌아갈 때든, 경행의 끝에서 좌선으로 돌아갈 때도 절대 그것들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 집중력이 좌선으로 이어지고 또 좌선에서 생겨난 그 집중력이 경행으로 이어지게끔 됩니다.
집중력과 동시에 커진 사띠들도 똑같이 가져올 수 있게끔 됩니다.
좌선을 할 때는 눈을 가볍게 감아야 됩니다.
그리고 마음은 배의 움직임에 먼저 집중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양 손바닥은 되도록이면 위를 향하게 해서 살포시 손가락만 겹치도록 손바닥은 겹치지 않도록, 손가락만 겹치도록 해서 다리 위에다가 살포시 올려놓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배의 움직임에 집중하도록 해야 됩니다.
다리는 절대 가부좌를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편한 평발(편하게 앉은 자세)에서 발만 당겨서 붙여놓는다 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양쪽 무릎만 바닥에 닿는다는 느낌으로 좌선하는 것이 오래도록 좌선을 하고, 또한 좌선수행 할 동안에 방해를 받지 않고 대상에 편하게 마음을 갖다 붙여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이 헤매기 시작하면 마음을 쫓아서 '헤매고 있음' 혹은 '생각하고 있음' '상상하고 있음' 하고 알아차리고, 느낌이 일어났으면 그 느낌을 '고통' '쑤심' '통증'이라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마음의 움직임이 있으면 그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으면 그 현상들을 알아차림 하고.
이렇게 해서 좌선과 경행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일상적인 동작에서의 수행입니다.
명상수행은 좌선과 경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알아차림 하는 것으로만 충분할 거 같으면 일상생활에서의 알아차림과 수행을 분리했을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분명하게 일상에서의 알아차림을 유지하도록 해라 얘기했습니다.
일상에서 하는 행동 일반적인 행동들에 대해서 명상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를 들어서 팔을 뻗을 경우에 뻗는 동작 그 자체를 천천히 알아차리면서 '뻗고있음' 하고 알아차리고, 팔을 다시 굽힐 때는 천천히 굽히면서 '굽힘'하고 알아차리고, 앉아있을 때 손을 내릴 때, 걷고 있을 때, 얼굴을 씻을 때, 또 식사를 할 때, 목욕을 하고 있을 때 이러한 모든 동작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이렇게 일상적인 동작을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가야 통찰력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일상적인 동작을 알아차림을 해야만이 집중력을 높일 수가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통찰력을 높이고 집중력을 높여야만이 지속적으로 관찰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상적인 동작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그마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모든 마음의 상태나 신체적인 상태를 관찰해나가도록 해서 수행의 본래 목적인 몸과 마음의 본질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렇게 세 가지를 분명하게 인식해나가고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갈 때 우리는 수행에서 진보가 있게끔 됩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위빳사나 수행을 지속해나가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수행 방법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또 분명하게 인식해서 자기 수행에서 하나도 놓침이 없이 수행을 해나가도록 계속 지속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 기존의 법문 녹음파일에서 소음들이 중간중간에 있었습니다. 음성파일을 재편집하여 소리가 너무 큰 부분들은 일부 삭제하여 다시 유튜브에 업로드했습니다.
법문을 들을 때나 필사법문을 읽을 때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도움을 주신 담마짠다님께 감사드립니다.
항상 평온하시길 바랍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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