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정진/위빳사나 수행과 알아차림

닙빠리야-야 데-사나-(nippariyāya-desanā) - "진리 그 자체를 직접 말하는 것"

담마마-마까 2021. 6. 14. 13:10

「이 법(담마)은 지혜가 있는 자의 것이지, 무지한 자의 것이 아니다.」

 Paññāvato ayaṁ dhammo, nāyaṁ dhammo duppaññassa;

 (빤냐-와또- 아양 담모-, 나-양 담모- 둡빤냣사.)

 

지혜가 있는 자! 사실은 성인의 경지에 이른 자만이 지혜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전부 무지한 자들입니다. 부처님의 법대로 할 거 같으면.

 

여기서 조심해야 되는 것은 지식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지혜를 착각을 한다는 겁니다. 지식은 아무리 모이더라도 그것은 지혜를 대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일정 부분에서는 오히려 지혜로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든 것들을 다 포괄해서 지혜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특정한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은 그거는 잘할지 몰라도 다른 것은 젬병일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게 지식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지식을 얻기 위해서 온 게 아닙니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겁니다. 개념적으로 머릿속에 잔뜩 들어가 있다. 그러면 그것은 자기의 개념을 자꾸 더 견고하게 쌓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머릿속에 잔뜩 지식만 넣을려고 하면 안됩니다. 지혜롭게되도록 자꾸 만들어야됩니다.

 

뭘 하나를 배우는데 내가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마음이 참 가벼워지고 행복해진다 그럴 거 같으면 참 좋죠!

그래서 수행한다 그러면 수행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참 행복해지고 생활이 자꾸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나갈 거 같으면 참 좋은데, 근데 수행을 하고 있는데 만날 마음은 괴롭고 힘든 쪽으로만 계속 흘러가고 할 거 같으면,

그거는 자기는 지금 지혜를 닦고 있는 게 아니고, 지식을 닦고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지혜는 어떤 경우든 닦으면 닦을수록 모든 것들이 다 동일하게 밝아지고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부처님은 일체지자(一切智者)라고 그러죠. 모든 것들을 아는 것. 지혜에 인해서 가능한 겁니다. 지식으로 인해가지고는 일체지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자꾸 지혜가 있는 자가 되려고 해야지, 지식이 있는 자 더 나아가서 무식한 자가 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가끔씩 부처님뿐 아니라 스님도 법을 설할 때, 지혜를 개발해주기 위해서 법을 설하는 거보다 지식적인 부분을 전하기 위해서 설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런 지식적인 것들이 곁들여지지 않으면 지혜로 넘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지혜를 개발하라."

말은 쉽지 뭘 어떻게 개발하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나아갈까?

만날 스님들은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지혜가 있으면 돼! 지혜가 있으면!"

"실제로 뭘 어찌 지혜를 있게끔 하는데?" 하면 말을 못합니다.

 

수행하는 자는 그렇게 무조건 수행만 하면 돼? 어떻게 수행하는데? 잘못된 수행하고 있으면서 지거는 다 옳고 다른 건 다 틀렸다고 하면서 그걸 수행한다고 하고 그걸 지혜있다고 그럽니다. 참 어리석은 것입니다.

 

적어도 지혜가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지식적으로 '아, 무상한 것이다' '나라고 할 것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남을 비방하지도 않는 거고,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데 남을 비방할 게 뭐 있어?

그리고 변하는 것들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들도 변하는 것들이고 남이 가지고 있는 생각도 변하는 것들인데, 그거 변하는 것에 뭘 자꾸 틀렸다 맞다 시시비비하고 있느냐는 거라. 그러면서 지는 지혜있다고 그러는 거라. 참 무지한 자인데.

 

무상·고·무아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을 시켜줄 때는, 지식적인 부분으로써 인식을시켜줍니다. 그것이 밑바탕이 될 때, 그것에 대한 이해들이 될 때, 지혜를 개발해나가게 됩니다.

 

보통 법을 설한다고 할 때 데사나(desanā)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빠리야야 데사나(pariyāya-desanā) 라고 하는 것이 있고,

닙빠리야야 데사나(nippariyāya-desanā)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진리 그 자체를 직접 말하는 것" 진리를 어떻게 직접 말할 겁니까? 무슨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대로 드러낼 수도 없는데. 그것은 부처님이 뭐를 가지고 합니까? 몸소 보여주는 겁니다. 행동하고 말하고!

제가 스승으로 모셨던 분이 그런 대표적인 예입니다.

말을 하는데 화가 나는 상황인데도 화를 내지 않고 똑같은 말을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거라. 한 시간 동안! 몸소 보여주는 거라. 그게 몸소 진리를 나타내보이는 거라.

"부처님이 말을 하고 행동하고 하는 것들"이 바로 이런 '닙빠리야야 데사나' 입니다.

 

스님들이 행동하고 하는 것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바른 법을 설하고 수행을 잘 지도한다고 하더라도, 만날 화를 내쌌고 만날 알아차림도 없이 뭐 그냥 해쌌고 만날 뭐 변경해쌌고 이럴 것 같으면 그거 못 믿는 거라.

몸소 나타내 보이는 것들. 나는 깨달았다 하면서 개차반으로 산다든지, 막행막식 한다든지 거 못믿는 거라. 그건 아니라는 얘기라. 반증이라.

 

그다음에 또 데-사나-(desanā) 라는 것들이 뭐냐하면

'빠리야-야 데-사나-(pariyāya desanā)' "말로써 분명하게 전해주는 것"

'고는 이런 것이다' '무상은 이런 것이다' 하고.

근데 그걸 알려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무상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무아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게 원인이 돼서 무상을 자기가 직접 체험을 하게끔 되는 겁니다.

스님들이 법을 설하는 것도, 부처님이 법을 설하는 것도 꼭 그와 마찬가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가르쳐주는 것들이 모든 이들에게 다 통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똑같은 법을 전해주더라도 어떤 사람은 그걸 알아들을 거고, 어떤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왜곡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인해서 화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그런 것들이라는 거라.

 

자기가 직접 체험하기 전에는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지식적인 것들을 잘 받아들여가지고 그것을 자기가 체험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게 지혜가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런 자들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들은 '닙빠리야야 데사나' '몸으로 직접 보여주는 형태들'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러죠? 만날 수행하러 간다고 하고 가면서 만날 화만 내쌌고, 그럼 누가 그거 수행한다고 하겠어? 몸으로 나타내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

오늘부턴 그러면 안됩니다 이!

 

 

* 위대한 사람의 사유(Mahā purisa vitakka) 2. (20120129) - 법문 중에서 _ 아짠 빤냐와로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