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의 기준점과 지혜가 일어나는 4가지 조건 (20220614)
<문경 구미 법우님들 함께한 탁발법회>
(5:10 이후부터 녹취하였습니다.)
모두 다 문경에서 오신 거라요? (예)
여기 선원에 처음 오신 분? 혼자? (예)
(저쪽 분) 언제 한번 와가지고 나무 심은 적 있죠? (네) 그렇지.
수행 얘기를 좀 할게요. 수행 잘 돼요? 잘 되는 사람? 잘 안되는 사람? 수행 아예 못하는 사람? 수행 가끔 하는 사람?
가끔 생각날 때 언뜻 '사띠 놓쳤네' 하고 또 알아차리고 하죠?
지금 수행하고 있는지 안 하는지 확인하는 것은 뭐로 가지고 확인해요?
지금 사띠하고 있는지 안 하는지,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건성건성으로 하고 있는지 그 차이를?
살아있기 때문에 뭔가를 아는 것은 분명한데 어떤 거는 흐리멍텅하게 알 거고 어떤 거는 분명하게 알 거고 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띠할 때는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압니다. 사띠를 안 할 때는 그냥 대충 알아차릴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띠가 계속 쭉 이어지면 참 명쾌하고 고요하고 밝아지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요?
지금 수행이 잘되고 있는지 안 되고 있는지 판단하는 기준이 뭐라?
하나만 생각하면 됩니다. 망상이 많은지 그렇지 않은지만 판단해보십시오.
망상이 많이 일어나는지, 아니면 망상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빨리 사라지는지 아닌지, 그걸 가지고 내가 지금 사띠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또 내 수행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판단하면 됩니다.
사띠가 강해지고 사띠를 계속적으로 하면은 망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항상 여러분들이 생각해야 될 게 망상하고 하는 시간들을 줄이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차라리 망상할 바에야 자! 그렇지 않으면 잠이 안 오면 그냥 걸어. 걸으면서 그냥 '왼발' '오른발' 하고 알아차리든지 해야지. 망상하는 습관을 게속 가지다 보면 수행만 할려고 앉아 있으면 그냥 망상을 하는 거라.
망상을 해도 좋은 망상을 하는 것이 아니고 꼭 이상한 망상을 하는 거라. 내가 이 수행을 계속해야 될까? 우짤까? 아니면 뭔가 불안하고 하는 것들이 있으면 그것들이 생각난다든지, 그렇게 안 좋은 방향으로 계속 되기 때문에 망상하는 습관들은 되도록 이면 가지지 말고, 수행하는데 "망상이 수행의 기준점이다" 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계속 수행하고 싶죠? (예)
계속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항상 명심하고 기준을 두어야 될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면, 마음은 항상 다른 데로 벗어나려고 한다는 거라.
가만히 앉아있으면 편하죠? 편하면 오는 게 뭡니까? 게으름입니다. 걸어다니고 운동하고 하면 피곤하죠? 피곤하면 오는 게 뭡니까? 쉴려고 게으름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기준점을 두어야 되는 게 마음이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지 아니지만 판단하면 됩니다. 기준점은 딱 그겁니다. 마음이 게으름을 부리면 대상이 바뀌질 않습니다. 편하게 쉴려고 하고 마음도 쉴려고 하고.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대상이 계속 바뀌고 있잖아. 숨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다 놓쳐버리고 그냥 편하게 있고 싶어합니다.
그러니까 호흡을 알아차리더라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똑같이 이렇게 편하게 똑같이 보여집니다. 변하는 것이 보이는 게 아니고, 앞에 거하고 뒤에 거하고 다르다는 게 보여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똑같습니다. 마음이 편한 걸 쫓아가다 보니까 변하는 것들이 싫고 변하는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거라.
그래서 기준점으로 딱 잡아야 되는 것이 마음이 게으름 부리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을 기준점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기준점은 마음은 변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고요하게 머물려고 한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에서 대상이 바뀌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다 그러면 일단은 게으름부린다고 생각을 하고 거기서부터 스톱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면 어떤 것이든 의존하고 싶어합니다.
하나 물어볼게요. 여러분 스승은 누구입니까? 부처님입니까? 왜 부처님이 여러분 스승이 됩니까? 담마이기 때문에! 담마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그 담마로 인해서 부처님이 여러분들 스승이 됩니다.
그런데 의존해야 되는 게 담마가 될 것 같으면 담마는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상·고·무아가 담마입니다.
그런데 담마가 의지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대상이 된다든지 아니면 여러분들 스님이 대상이 될 것 같으면 의존할 대상이 잘못되어 있다는 거라.
부처님 아무리 불러봐도 부처님은 여러분들 앞에 안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스승을 아무리 불러봐야 스승이 지금 여러분들한테 직접 내가 원할 때 여러분들 앞에 담마를 설해주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앞에 나타나고 여러분들한테 법을 설해줄 수 있는 것은 담마 밖에 없습니다.
담마는 여러분들이 실천할 때 담마는 여러분들 앞에 드러나지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의지하고 의존할 대상은 담마라는 걸 알아야 되는 거지, 다른 걸 자꾸 의지할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하물며 스승이나 부처님도 여러분들의 의지처가 되지 못하는 판에 다른 것들이 의지처가 된다? 자식을 의지처로 아니면 돈을 의지처로 아니면 마약을 의지처로, 그건 더 쓸데없는 것들이라.
해야 될 일을 하는 거하고 의지처가 되는 것은 다릅니다. 자식은 당연히 잘 길러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수행할려면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기반도 갖춰야 됩니다. 그런데 그거는 해야 되는 거하고 의지처가 되는 것은 다릅니다.
그 차이는 뭐냐면 독사가 위험한 줄 알게 될 것 같으면 조심을 하게 됩니다. 위험한 줄을 모르면 만지다가 물리는 거라. 자식도 언젠가는 떠나야 할 대상이고 하나의 생명체라고 생각할 것 같으면, 그 자식으로 인해서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마음의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독사에게 물리는 거와 마찬가지라. 돈도 마찬가지고.
의존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항상 생겨납니다. 내가 지금 의존하고 싶어하는 의지하고 싶어하는 것이 뭔지를 잘 판단해야 됩니다. 그게 기준점이 되지 않으면 마음은 항상 수행은 안 하고 다른 데로 가버립니다.
그래서 또 중요하게 여러분들이 생각해야 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은 귀한 존재입니다.
귀한 존재라는 생각을 안 하면 자기 자신을 항상 하찮게 여기게 됩니다. 마음을 먹으면 얼마든지 뭔가를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존재는 여러분들 밖에 없습니다.
천상이 아무리 좋고, 또 내가 키우는 강아지들이 아무리 좋게 보여도 그 존재들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분들 같이 귀한 존재는 없다는 거라. 뭔가를 할 수 있고 원하는 대로 뭔가가 될 수 있는 존재는 여러분들이라.
지금 여러분들이 이 몸을 받았을 때 해야 될 것들을 잊어버리면 자신이 귀한 존재라는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럼 자꾸 뭔가를 더 높은 걸 바라게 된다는 거라. 천상에 태어나고 싶고 아니면 뭔가 하기 싫으면 '아, 나도 저렇게 편하게 우리집 강아지처럼 됐으면 좋겠다' 진짜 쓸데없는 생각들입니다.
그게 명상수행에서 여러분들이 항상 기준점이 되도록 해야 되는 몇가지입니다.
수행은 왜 하죠? 왜 합니까?
오늘 처음 온 사람, 왜 수행해요?
(예. 어리석지 않기 위해서 수행을 합니다.)
어리석지 않기 위해서? 그럼 좀 더 지혜롭게 살아야 되는데, 어떤 게 지혜로운 거라? 어떤 게 어리석은 거라?
(좋고 나쁜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좋고 나쁜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 (예)
지혜는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좋고 나쁜 것을 구분하는 게 지혜가 아니고 그건 그냥 지식인 거고, 지혜는 그냥 아는 겁니다.
나쁜 거는 일어나질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좋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선택하는 것은 있을 수가 있는데, 그 선택도 골똘히 생각해서 '요리갈까 저리갈까' 해가지고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갑니다. 어떤 것이든. 이 길이면 이 길 그냥 가는 거고, 요 길이면 요 길 그냥 가는 겁니다. 그게 지혜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들을 선택하고 나쁜 것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지식적인 것으로 충분히 가능한 겁니다.
지혜의 부분은 어떤 경우든지 나쁜 것은 일어나질 않는다는 거라. 나쁜 말 나쁜 행위들 나쁜 생각들 어떤 것이든 일어나지 않습니다. 선한 것들만 일어나는데 그 선한 것들을 그냥 사띠하는 것뿐입니다.
사띠할 때는 생각해서 사띠하는 것은 그건 사띠가 아닙니다. 그렇게 판단하면 됩니다.
그래요. 좀 더 지혜로워지면 좋겠죠. 지혜로워졌으면, 수행하는 것도 지혜가 어느 정도 일어나야만이 밑으로 떨어지질 않는 거니까.
경전에는 보면 지혜가 일어나는 4가지 조건을 다른 말로 하면,
수다원에 이르는 4가지 조건이라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게 4가지가 있습니다.
그 4가지가 뭘까? 이렇게 보면 됩니다.
밥 안 먹고 살 수 있어요? 못살죠. 하루는 살겠지. 이틀 삼일 정도 지나면 반드시 먹어야 됩니다. 스님 같은 경우도 밥 때가 정해져 있습니다. 10시에서 11시 아무리 늦어도 11시 반 그 사이에서 공양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못 견뎌. 어떻게 될까? 힘이 없어 그냥 축축 쓰러져요. 그런데 그걸 한끼 먹고 나면 그다음날까지 버틸 수 있는 거라. 몸이 필요한 영양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싶으니까 그걸 먹게 되는 거라.
아무리 몸에 필요한 영양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의식도 필요하고 그다음에 사고하는 것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들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물질적인 영양소도 필요하게 됩니다.
지혜는 정신적인 부분이죠? 정신적인 부분이니까 내가 마음만 잘 닦아가지고 정신적인 부분을 성숙시키면 될 거 같죠? 절대 안 그렇습니다. 이 지혜라는 놈도 마찬가지로 외부적인 조건이 맞아야 되고 내부적인 조건도 들여봐야 되고, 이 두 개가 합이 딱 맞을 때 이 지혜는 일어나게 됩니다.
외부적인 조건(2가지)들은 어떤 것이냐 하면 이렇게 보면 됩니다.
지혜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가장 좋은 것이 부처님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전해줄 수 있는 법을 많이 듣는겁니다. 지식적으로 책을 놔놓고 경전을 달달달달 외운다 해가지고 그게 부처님 법을 아는 것이 아니고, 실제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해 줘가지고 내가 수행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는 법! 내가 또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법! 이런 것들을 많이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법을 많이 알아도 그걸 실천을 못합니다. 가끔씩 어떤 사람들이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와가지고 대뜸 “부처님 말씀 좀 전해주십시요” 하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스님이 판단할 때는 법을 담을 그릇을 만들어오지를 않아! 않고 그냥 부처님 가르침을 그냥 가르쳐달라는 거라. 그냥 지식으로 삼법인은 뭐고, 사성제는 뭐고 팔정도는 뭐고 이걸 가르쳐달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그래서 경전에서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물어보고 물어보고 나서 그 의문이 해소되고 나면 끝입니다. 자기 지식을 많이 채울려고 하는 거라. 그거는 그릇을 못 갖추는 거라.
그릇을 갖춘다는 것은, 그 법을 듣고 그것들을 실천할 수 있을 때 그릇이 갖추어지는 겁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아무리 많이 듣고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탐진치가 결국엔 다시 또 일어날 것 같으면 그것은 못들은 거라. 부처님 가르침을 많이 듣고 아는 것만큼 탐심도 줄어들고, 성냄도 줄어들고, 게으른 것도 줄어들어야 되는 거라.
좀 더 쉽게 얘기하면 '저 사람은 부처님 가르침 많이 듣고 배우더만은 좀 더 좋은 사람이 돼가네' 하는 것들이 보여야 된다는 거라. 보이지 않고 별 차이가 없고 아니면 오히려 자기 생각만 하고 이기적으로 바뀌고 오히려 외골수로 자꾸 바뀐다 그러면 그건 그릇을 못 만드는 상태에서 자꾸 법만 자꾸 넣으려고 하는 거라. 그거는 어떤 경우든지 지혜의 영역에 속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다문(多聞)이라고 하는 것은 실천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어질 때가 되어야 되는 거고, 그것들로 인해가지고 내가 생활도 바뀌어야 되고 마음도 바뀌어야 되는 것들이 다문에 속합니다.
외부적인 조건 첫째는 다문(多聞)입니다. 그런 것들을 많이 듣고 많이 기억해두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외부적인 조건 두 번째는 아까 처음에 얘기했던 거 누굴 의존하고 누굴 의지처로 해야 되죠? 담마입니다.
담마 외에는 지혜를 개발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의존할 대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라. 담마는 어떤 경우든지 선한 것들이 돼야 됩니다.
여러분들 마음에 조금이라도 불선한 것이 일어난다- 그러면 빨리 버려버려야 되는 거라.
조금이라도 나쁜 말을 할려고 한다- 빨리 버려야 되는 거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들을 한다- 그러면 빨리 버리라는 거라.
담마는 어떤 경우든지 선한 작용을 하게 됩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생각이든 어느 것에든 선한 작용을 하는 것이 담마입니다.
여러분들이 지혜를 개발할려고 한다- 그러면 담마가 의존할 대상이고 의지할 대상입니다. 그게 아니고 다른 것들- 악한 말 악한 행위들 빨리 버려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혜하고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는 거라.
외부에서 의존해야 되는 것은 이 두 가지입니다.
그거는 수행하고는 별 관계가 없죠? 충분히 가능하겠죠! 이것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지혜가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충분히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지혜는 열심히 수행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거죠? 지식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지혜는 못 얻어집니다. 여러분들 아무리 보시 많이 하고, 공부 많이 하고 그런다 해가지고 지혜가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지혜가 여러분들 것이 될려고 할 것 같으면, 안으로 갖추어야 될 조건들이 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빨리어로 하면 '요니소 마나시까라' 입니다. '선한 것에 사띠가 일어나는 것' 선한 것에 마음이 기울어져 가지고 그것들이 사띠가 지속적으로 일어나지는 것.
예를 들면 성이 확 났어. 그럼 성냄이 사띠의 대상이 되어서 '성냄' '성냄' '성냄' 이렇게 하면 그거는 요니소 마나시까라에 포함이 될까?
사띠가 강하면 포함될 수가 있습니다. '성냄'이라고 관찰하는 순간 사띠가 강하면 사띠라고 하는 것은 선한 마음입니다. 선한 마음이 일어나서 진짜 성내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성냄은 죽어버리고, 성내고 있다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사띠가 강할 경우에는 그게 가능합니다.
그런데 사띠가 안 강하면 어떻게 될까? '성냄' 하면 거기에 딱 뭔가가 달라붙습니다.
[누가 성내죠? 내가 성냅니다. 뭐 때문에 성내지? 저사람 때문에] 그런게 착착 달라붙으니까 성냄이 어떻게 돼요? 더욱더 증폭되는 거라.
그래서 성냄을 관찰하는데 성냄이 빨리 사라지지 않고 성냄이 지속된다- 그러면 다른 것들이 달라붙었다는 얘기라. 사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이거는 바른 요니소 마나시까라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라.
그러면 성냄이 관찰 대상이 돼서는 안돼. 그거는 그냥 내둬버리고 호흡 관찰하든지 경행을 하든지 이렇게 돼야 되는데, '요니소 마나시까라'인지 아닌지를 구분을 못하면 다른 사람들 다하듯이 나도 그냥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을 한다는 거라.
경행을 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여기서 저기까지 걸어가는데 5분 시간이 걸립니다. 천천히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뒷발 들리고, 앞발 들리고, 아, 멈췄네, 나아갈려고 하는 의도가 있네, 나아가네, 내려놓을려고 하는 의도가 있네, 발이 서서히 내려오네, 어느 발꿈치부터 먼저 닿고, 발이 닿았을 때 누르는 느낌이 있고, 이걸 다 관찰하면서 가니까 여기서 저기까지 가는데 5분이 걸리는 거라.
나도 그대로 따라하는 거라. 천천히, 마음은 딱 봐도 조는데. 그걸 따라할려고 하니까. 그게 관찰되어지는 사람은 그렇게 걸으면 됩니다. 나는 그게 관찰이 안 되어지는데 왜 그렇게 하고 있느냐는 거라. 그러면 인위적으로 내가 조작하게 됩니다. 발을 들어올릴 때 들어올려지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느낌들이 관찰되어져야 되는데, 그게 변하는 것이 보여야 되는데, 안 보이는 거라. 그러면 그렇게 걸을 필요 없어. 그냥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하면서 그냥 걸으면 되는 거라. 뭘 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사띠하면 되는데, 그걸 남들 따라 하다 보면 바르지 못한 대상에 마음이 기울어지게 돼있다는 거라.
수행할 때도 그와 같습니다. 바르게 그 대상에다가 마음을 기울여야 되지, 그렇지 못하면 요니소 마나시까라가 아닌 상태로서 빠져버리게 된다는 거라.
수행은 자기에게 맞는 상태를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가장 편한 마음의 상태에서 '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있네' 뭐 그냥 불러오고 꺼지고만 알아차리고, 그걸 지속해주면 되는 거라.
그러다가 또 안되면 '어, 관찰하는 것이 잘 안되네'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놓고, 내가 뭘 긴장해서 그러나? 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해서 관찰하고, 입술이 닿아있는 게 좀 부드럽게 만들고, 손이 닿아있는 것들도 편안하게 하고, 그러고 나서 '아, 마음이 편안한가' 하고 알아차리고 나서, 다시 또 '일어남' '사라짐' 관찰하고.
사띠만 끊어지지 않게끔 대상만 옮겨가면서 그렇게 하면 되는데, 그게 요니소 마나시까라인데, 남들을 자꾸 따라하는 거라.
'아, 스님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데 배가 불러올 때는 어떤 느낌이 일어나는지 그게 변하는 것을 보라더라' 안 되는 것을 왜 자꾸 할려느냐는 거라. 그것은 요니소 마나시까라가 아니라.
수행을 하면 가장 편안해야 되고, 수행을 하면 가장 마음이 가볍고 가장 마음이 부드러워져야 됩니다. 그게 수행이라.
그렇게 수행하고 나면 되게 기분이 좋아요. 힘들어 죽겠고 괴롭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대상을 잘못하고 있는 거라. 요니소 마나시까라가 아니라 억지로 하고 있는 거라.
지혜는 가장 마음이 편안하고 가벼운 상태에서 대상하고 딱 일치가 될 때, 번쩍하고 일어나듯이 지혜는 탁 포문을 열게 됩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에서 그렇게 열릴지는 여러분도 모릅니다.
그런데 자꾸 남들 따라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그거는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다음에 내부적인 조건 두 번째가, '담마누담마 빠띠빳띠'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계속적으로 갈고 닦아야 됩니다.' 그냥 오늘 잘됐으니까 오늘 한번 하고 나서 내일 쉬고, 그렇게 해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러분 자동차 타고 여기까지 왔죠? 차가 끊임없이 엔진이 돌아가야 차가 굴러갑니다. 그런데 오다가 엔진이 탁 꺼지면 어떻게 돼요? 탁 멈춰버리죠. 그러면 중단해야 됩니다. 내려야 됩니다. 그리고 다시 또 엔진에 시동 걸 때는 그거보다도 훨씬 많은 힘이 필요하게 됩니다.
수행도 마찬가집니다. 일정하게 시간을 정해서 그걸 계속적으로 해야만이 수행에 힘을 얻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집중수행을 할 때도 어디 집중수행이 있으면 가서 진짜 열심히 하고 일상에 와가지고는 싹 다 까먹어버리고 그냥 또 사띠를 놓쳐버리는 상태가 되면, 그건 내가 자꾸 엔진을 꺼뜨리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수행은 지속적으로 계속 돼야 됩니다. 매일 두시간씩만 수행할려고 할 것 같으면 매일 두시간씩 해라는 거라. 처음에는 앉아서 수행하고 경행하는 것 이것만 수행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거라도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더 늘어나면은, 일상생활에서 하는 것들이 '아, 수행이구나' 해서 일상생활도 수행하듯이 사띠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게 점점 더 늘어나서 자동적으로 사띠가 어느 정도 돼나가고 알아차려나가진다 할 것 같으면, 실수하는 것들도 없어지고, 말하는 것들도 편안하게 남을 존중해가면서 하게끔 되고, 사띠를 하니까. 사띠를 하면 일단 나쁜 마음들은 안 일어나고 나쁜 말들은 덜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바뀌어져 가지고 사띠가 어느 정도 돼나갈 때 엔진 시동이 계속 걸리는 거하고 마찬가지라.
그럴 때야만이 지혜는 일어나게 됩니다. 자동적으로 사띠가 잘 돼나가서 그것이 잘 익혀지도록 만들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지혜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는 걸 알아야 됩니다.
힘든 과정인 줄은 압니다. 그런데 어떡하나? 지혜가 일어나는 것이 이렇게 4가지 조건들이 갖춰져가지고 딱 합이 맞아야 되는데. 그래서 지혜가 탁 일어났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수다원에 가까이 이르게 되는 거라. 그 사람은 마음에서 탐진치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거라. 그게 지혜에 이르는 것이라는 거라.
어리석지 않고 좀 더 지혜로워질려고 할 거 같으면 스님이 얘기한 4가지들을 반드시 명심해서 따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말로만 지혜롭게 될려고 하지 말고 실제 지혜로운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나중에 질문들 있는 사람들은 와서 질문들을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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