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테라와다 불교의 세계(붓다사사나, 결집, 계단, 사원) [법문교재]

담마마-마까 2023. 3. 20. 15:05

◈ 테라와다 불교의 세계

 

1. 글을 열면서... (20090520)

 

「테라와다」나 「위빳사나」 라는 말이 우리들 귀에 익숙지 않으므로 이 말들은 불교 용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가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한 말이야말로 불교어인 것입니다. 이것들은 빨리어라고 하는 언어이고, 빨리어는 부처님이 2600년 전에 실제로 말씀하시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당시 많은 종교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던 학술어인 Sanskrit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던 대화체, 회화체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빨리어는 부처님이 설법하신 말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완전하게 남기고 있는 것은 빨리어 뿐입니다. 다른 말로 쓰여진 경전도 단편적으로 발굴되고 있지만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배우고 싶다면 빨리어 경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빨리어 경전은 후에 Sanskrit어로도 번역되고, 중국에서는 한문으로도 번역되어, 우리나라에 아함경으로 소개되어 부분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는 대로 한자에는 문자 자체에 의미가 있기 때문에 한문경전은 원래의 의미와 어긋나게 해석해 버리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한문만 의지하는 것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의 가르침은 매우 심플한 말로 간결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런 만큼 하나하나 말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큰 의미를 가집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의 유언으로 유명한 「제행은 무상하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빨리어에서 「vayadammā sankhāra, appamādena sampādetha;와야담마- 상카-라, 압빠마-데-나 삼빠-데-타」로, 직역하면 「모든 것들은 조건지어진 것, 조건지어진 것은 부서지는 성질의 것이다. 지금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 스스로를 완성하라(열반을 성취하라)」라는 의미가 됩니다.

 

만약 누군가 한국어 번역만을 보고 「부처님은 힘써 노력하라고 말씀하셨으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공부하자, 자는 동안도 아껴 일하자」라고 해석했다면, 완전히 의미가 다르게 되어 버립니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설할 때, 꽤 엄격하게 말을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정진하라」라고 말할 경우는 무엇을 어떻게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하는 것을 제대로 말씀하십니다.

 

빨리어로 된 원전을 읽으면 새로운 불교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우리 붓다의 길따라 선원에서 가려 뽑은 빨리어 경구들로 인해 공부할 좋은 인연되시길 바랍니다.

 

 

2. 불교(붓다사-사나)

 

Buddhasāsana :

buddhi(지혜)의 완성자=Buddha. 그 붓다(Buddha)의 가르침(sāsana)

 

붓다사-사나(Buddhasāsana, 불교)라고 하는 말에는 폭넓은 의미가 있는데 그 범위는 담마(법), 상가(승려), 상가의 조직, 상가의 활동으로부터, 불교 성지나 불구에까지 미칩니다. 그러나 붓다사사나의 진정한 의미는 문자 그대로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붓다사사나의 본질이며, 다른 것은 붓다의 가르침의 연장선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붓다사사나가 존속한다고 하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이 존속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만약 붓다의 가르침이 애매하게 되거나 소실, 변경되거나 하면 불교도의 숫자가 아무리 많고 그 활동이 번성해도, 또는 사원이나 불교조직, 불교 건축물이 훌륭하다고 해도 붓다의 가르침이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러한 부차적인 것이 없더라도 붓다의 가르침이 존속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불교를 알 기회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붓다의 가르침을 보존하는 것에 의해 불교를 진실로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붓다사사나, 즉 불교란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보존한다고 하는 것은 붓다가 말한 말씀과 붓다가 정한 계율을 보존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도 모두는 가르침과 계율이 붓다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한 가르침과 내가 정한 계율이

  나의 사후, 너희들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붓다의 가르침과 계율을 지킬 때 붓다의 말은 스승의 현현이며, 정신적 지주가 됩니다.

 

그래서 붓다의 말을 보존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고 불교를 존속하는 열쇠가 됩니다. 붓다의 말을 보존하려고 하는 시도는 붓다의 생존 시부터 있었습니다.

 

 

3. 결집(Saṅgīti)――부처님 말씀의 보존 (20090905)

 

부처님 말씀을 보존하기 위해서 붓다가 말한 가르침을 모두 모아 기억하기 쉽게 몇 개의 섹션으로 나누는 방법이 취해졌습니다. 참가한 대중 전원이 완전하게 합의할 때까지 철저하게 질의응답을 반복하며 검토했습니다. 합의를 얻으면 승인하고 확립하기 위해서 부처님 말씀을 합송 낭독했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붓다의 말씀이 기억되어 다음 세대에게 전하기 위한 문헌의 기준이 되어 집성되었습니다. 이 방법을 Saṅgīti(결집)로 부르는데 합송 낭독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결집 또는 합송이라고 하는 방법은 부처님 생존시부터 붓다의 제일 제자인 사리뿟따존자에 의해 행하고 있었습니다. 사리뿟따존자는 붓다와 그 제자들 앞에서 스승의 말을 집성해서 각 항목의 수에 근거해 1의 그룹으로부터 10의 그룹까지 정리해 말했습니다. 사리뿟따존자가 암송을 끝내자 붓다는 이에 동의하면서 합송하는 방법을 잘 설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장부경전 33번경 Saṅgīti sutta)

 

• 불기 1년의 최초의 결집

 

붓다의 입멸 얼마 후 대규모의 중요한 결집이 거행되었습니다. 붓다의 입멸 7일 후 마하깟사빠존자는 승려들에게 결집을 위해서 모이도록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승려들은 이에 동의하여 붓다 입멸로부터 불과 3개월 후에 최초의 결집이 라자가하(왕사성)에서 행해졌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부처님 말씀이 결집되었습니다. 여기에는 500명의 아라한이 모였는데 각 분야에서 붓다의 말을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있는 아라한들이 선택되었습니다. 계율에는 우빨리존자가, 교법에는 아난다존자가 선택되었습니다. 그 후 500명의 아라한들이 붓다의 말을 합송 낭독했습니다. 의장인 마하깟사빠존자는 질문을 그룹별로 분류하고 배열하는 방법을 규정하여 체계화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의 합송이 붓다의 생존 중에 행해졌다면 붓다는 그것을 상기따 숫따에서처럼 승인했겠지만, 붓다의 입멸 후이기 때문에 제일 결집 이후 붓다의 말을 구두로 정확하고 확실하게 보존해야 할 책임이 아라한들에게 남겨졌습니다. 운집한 아라한들이 합의에 이르면 모두가 부처님 말씀을 합송으로 낭독해서 그것이 계승되어지도록 기억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통이 확립되었습니다.

 

제1차 결집은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억된 부처님 말씀은 결집 이후로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일은 제1차 결집의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완전하게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 말씀을 보존하는 방법으로서 합송 낭독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 보존을 맡은 승려들이 기억해야 할 부분을 할당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1차 결집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결집(붓다의 말씀을 편성해서 합송 낭독하는 것)입니다. 이후의 결집은 이것을 확인하는 회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이후의 결집에서는 회의에 모인 승려들이 제1차 결집에서 모아진 스승의 말을 상처없이 개변하는 일 없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서로서로 조사하기 위해서 소집된 회의인 것입니다.

 

• 제6차 결집(Chatthasaṅgīti)-불기 2500년의 국제 대회의

 

불교가 불기 2500년에 이르렀을 때 테라와다 불교의 모든 나라들은 대축하회의 준비를 했습니다. 최초의 국제 결집이 불기 2496년부터 2500년(서기 1952년부터 1956년)에 미얀마에서 소집되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에 귀의하는 모든 나라들의 불교승려와 불교 학자들, 그리고 불교의 가르침이 보급되어 있는 나라들이 미얀마에 모여 버마판 빨리어 삼장을 다른 나라들이 다른 판과 검토했습니다. 이 집회를 제6차 결집(Chatthasaṅgīti)으로 불려 모든 불교국에서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제6차 결집이 끝나자마자 미얀마는 혼란으로 정변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문에 제6차 결집의 빨리어 삼장의 보존과 인쇄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초고로서 이용된 버마판과 결집의 결과인 결정판을 잘못 잡는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 국제판 빨리어 삼장 대결집(Mahasaṅgīti Tipitaka) - 불기 2545년

 

현재 타이 최고승려인 승왕(Somdet Phra Nanasamvara)이 후원하고 있는 담마소사이어티 재단(the M.L. Maniratana Bunnag Dhamma Society Fund)이 로마자판 제 6차 결집 빨리어 삼장을 출판하였습니다. 이것은 온 세상의 테라와다 불교승려가 교정해 편집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빨리어 삼장은 온 세상에서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일을 진행시킨 작업 위원회는 버마의 혼란한 시기에 인쇄된 불완전한 제6 결집 빨리어 삼장을 조사해서 초판과 교정판을 구별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인쇄된 판에는 본래 어떻게 해서 만들게 되었는가 하는 주석을 적었습니다. 위원회는 가장 정확한 판을 얻기 위해서 정력을 쏟았습니다. 수개국의 다양한 판의 빨리어 삼장을 다시 조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6차 결집의 목표는 마침내 실현되었습니다.

 

타이 최고승려인 승왕이 후원하는 담마소사이어티 재단은 로마자판 빨리어 삼장, 즉 불기 2500년 국제 대회의의 빨리어 삼장을 불기 2545년에 출판해서 붓다의 가르침이 먼 곳까지 골고루 미치도록 담마의 선물을 온 세상에 증정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붓다의 가르침을 전해야 하는 임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붓다가 최초의 제자들에게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붓다의 말을 전하도록 말씀하신 가르침인 것입니다.

 

 

4. sīmā-(금강)계단, 결계(석) (20090905)

 

결계, 경계, 계단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결계 안에서 출가 비구들의 계율에 관련되는 의식이 거행되므로 vinaya sīmā(위나야 시-마-)라고도 말합니다.

한 달에 2번 출가한 비구들은 계율을 합송하는 행사인 uposatha(우뽀-사타)를 실시합니다. 우리말로 포살이라고 알려진 것입니다. 포살행사는 반드시 결계 안에서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결계를 uposatha sīmā(우뽀-사타 시-마-)라고도 말합니다. 그리고 uposatha라는 것은 부처님 시대에는 수행의 날을 의미했습니다.

불교 이외의 종교에서도 한 달에 4번(초생달, 만월, 상현·하현의 반달) 경제활동을 멈추고 자신의 신앙에 적절한 수행을 한 것 같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여 불교의 재가 신자도 한 달에 4번 속세적인 생활을 일단 중단하고 수행을 하였습니다. 출가 비구는 일생 동안 수행하는 것이므로 수행하는 날을 따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으로서 한 달에 2번 계율을 상기하는 포살행사가 부처님에 의해 정해졌습니다. 결계인 계단을 무대로 행해지는 다양한 의식 중에서도 이 포살행사는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됩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계단이라고 하는 것은 비구들이 다섯 명 이상 모여 앉는 정도의 면적을 가진 토지입니다. 그러나 다섯 명이 빠듯하게 앉을 수 있는 좁은 장소는 계단으로서 인정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비구 계율 중에서 비교적 무거운 13가지 계율이 깨어졌을 경우 상가는 그 파계 비구에 대해서 동료로부터 멀리 떨어지도록 별주 하는 것을 명령합니다.

참회의 기간이 끝나면 별주를 해제하고 상가의 동료에게 허가를 청하는 행사를 실시합니다. 이 2개의 행사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비구들 20명 이상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계단의 최소 크기는 25명이 앉을 수 있는 장소가 됩니다. 한 사람이 앉는 크기란 서로 붙지도 떨어지지도 않고 손을 뻗으면 다른 비구를 잡을 정도의 간격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 계단의 조건

 

부처님의 시대에는 비구들은 재산을 가지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토지를 소유할 것도 없었습니다. 당시의 인도에서는 성자·출가자들이 모이는 장소는 도처에 있었습니다. 또 부유한 사람들이나 국왕은 소유하고 있는 거대한 토지나 공원 등을 수행자들에게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을 허가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개인 재산이 아닌 숲이나 공원 등의 국유지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장소에 비구들은 표시를 하여 자신들이 의식을 거행하는 결계(계단)로서 인정했습니다. 비록 계단 인정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 토지는 비구들의 사유재산은 아닙니다. 계단에서의 의식이 끝나면 비구들은 자신들의 거주처로 돌아갑니다. 2주가 지난 후에 또 그 결계의 장소에서 모입니다.

 

초기에는 계단으로 인정된 토지는 원래 서로서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어느 공원에 여러 명이 놀러 가서 한쪽에 전기밥통을 올려놓은 매트를 깔아 즐겁게 놀고 난 후 매트를 접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놀고 있는 동안은 매트 안으로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가 널리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불교도가 되었고 부처님과 비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보시하거나 절을 만들거나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경우도 신도들이 보시한 토지나 건물은 비구들의 개인 재산으로 할 수 없고, 상가라고 하는 출가 조직 전체의 공유재산이 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땅에 연중 의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상설 건물을 지어 계단으로 승인하게 되었습니다. 태국·버마·스리랑카 등의 전통적인 절을 보면 경내의 한곳에 건물을 지어 계단으로서 승인하고 있습니다.

 

계단으로 인정되는 장소는 비구들이 모이기 쉬운 장소가 아니면 곤란합니다. 또한 상가나 유흥가, 도박장, 춤추고 즐기는 곳은 계단으로 인정될 수 없습니다. 그런 곳은 비구들의 마음이 더러워질 염려가 있고, 계목을 송출할 때 놀고 있는 사람들이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재가 신자가 토지 사용을 허가해 준다면 그런 토지에서도 계단을 설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유자가 죽고 나서 상속하는 사람이 비구들의 출입을 금지한다면 그 계단은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 계단이 왜 필요한가?

 

출가 비구는 속세를 떠난 존재입니다. 그러나 출가에 의해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고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구는 상가라고 하는 조직의 일원입니다. 상가란 비구들 모두를 나타내는 고유 명사입니다. 계율적으로는 비구가 네 명 이상 모이면 saṅgha(상가)인 것입니다. 세 명만 모이면 gaṇa(가나)이고, 두 명 이하는 개인입니다.

 

출가한 비구의 생활 습관의 관리, 절의 재산 관리, 사람 간(비구들끼리 혹은 비구와 재가자, 그 모두)의 문제가 일어났을 경우에 조정을 행하는 것, 비구들에게 계율에 대한 의문이 생겼을 경우의 해결, 위반한 계율을 참회토록 하는 것, 재가자를 비구로서 출가시키는 것, 출가자로서 적절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비구들을 추방하는 것, 등의 의무는 상가가 실시합니다. 개개인 비구에 대해서 상가는 절대적인 권한·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비구 한 사람 한 사람은 상가의 일원인 것입니다.

상가의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로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요컨대 상가는 가장 이상적인 민주주의 조직인 것입니다.

 

세속 생활과 멀어진 무욕·무집착의 조직이므로 상가의 의식·의무 등은 출가자만으로 실시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타종교의 사람이나 재가 신도는 상가의 고유 행사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 국회의 운영 위원회와 같은 것입니다.

일견 배타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결코 배타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느 비구가 밤에 식사를 했다고 합시다. 상가는 계율위반으로 그것을 경고합니다. 그 회의에 일반인이 들어가 있다면 어찌될까요? 「밤에 배가 고파 밥을 먹은 것이 무엇이 나쁩니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라고 재가자가 말한다면 상가는 곤란합니다. 그것은 출가 비구의 계율이기에 지키지 않은 사람은 참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저기서 반대 의견이 난무하면 만장일치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또 그 비구도 자신에게 아군이 있다고 판단하면 오만하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깨달음을 구한다는 것은 구름 위의 이야기가 됩니다. 어쩌면 타 종교인들은 계획적으로 상가를 곤란하게 할 우려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같은 가치관, 같은 목표를 향해 걷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 사이좋게 온화하게 함께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가는 모두 같은 가치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조직이므로 그 조직 속의 관리에 대해서는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게 한 것입니다.

 

• 계단의 중요성

 

불교는 인류에게 처음으로 나타난 세계적인 종교입니다. 세상에는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세계적인 종교가 있지만, 그것은 정치적·군사적 힘에 의해 세계에 넓힐 수 있었던 종교입니다. 교리적으로 봐도, 그 기원을 봐도 민족적인 종교인 것입니다. 그러나 붓다에 의해 말해진 진리는 처음부터 범천·신들·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명에 들어맞는 가르침으로서 빛나고 있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아직껏 붓다의 가르침(불교) 만이 유일한 세계종교인 것입니다. 무기를 가지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위협하지 않고, 철저한 자애에 기초를 두고 2600년간 함께 하여 왔습니다. 인류에게 평화로운 삶의 방법을 가르쳐 왔습니다. 세계에 유례없는 훌륭한 불교문화도 쌓아 올렸습니다.

어떤 권력도 재력도 가지지 않은 부처님 제자들이 지금까지 행하여온 결과는 기적이라고 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 그 자체이므로 격변하는 시대를 살아남은 것입니다.

 

불교 전도의 역사 속에서 출가자의 역할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실제로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시켜는 데에는 출가자의 노력에 의한 결과인 것입니다. 과학이 발전해도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도 붓다에 의해 말해진 진리는 바뀌는 것이 아니기에 어떠한 시대의 사람에게도 마음의 평온함을 주는 것, 살아가는 길을 가리키는 것을 불교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가자가 이 중대한 의무를 담당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재가자는 불교보다 먼저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 가족을 지키는 것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출가자는 붓다의 가르침을 위해서 일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출가자가 있는 것은 그 사회에 불교가 살아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교가 살아 있는 것은 인류에게 평화와 평온함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출가자의 생명은 상가에 의해 지켜질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의 출가자를 만드는 일도 상가 이외에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승려의 옷을 입는다 해도 출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계단이라고 하는 것은 출가자가 새롭게 탄생하는 장소입니다. 계율을 어겼으면 그 출가자는 정신적으로 약해집니다. 그것을 참회하고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장소도 계단이므로 출가자의 병원과 같습니다. 출가 세계의 국회 의사당도 계단인 것입니다.

 

한국에 전래한 불교의 대부분은 불멸 500년 후 새로운 해석 아래 번성한 대승 불교가 중국 등을 거쳐 전해진 것입니다. 그렇게 전해진 불교는 천 수백 년의 역사를 거쳐 여러 가지 변화를 겪으면서 많은 종파 불교가 한국 불교문화의 꽃을 피워 왔습니다.

한편 스리랑카, 태국, 버마, 캄보디아 등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2500여 년간에 걸쳐 부처님 가르침을 계승하려고 노력해 온 테라와다 불교가 정통적인 지위를 차지하며 지금까지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계속 살아 있습니다.

또한 현재 한국 안에서도 종파 불교의 테두리를 벗어나 부처님 가르침의 숨결을 직접 접하려고 하는 승속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법을 전하는 담당자인 출가 승려의 출가 의식이나 매월 2번의 계율 의식(포살)을 실시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장소인 정통「계단」이 한국에는 없어서 그 설치가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이런 가운데 사단법인 한국 테라와다 불교에서 추진하고 있는 계단 추진과 그 선포식에 관심 기울여 주시길 바랍니다.

 

 

5. 테라와다의 사원(vihāra) (20090905)

 

먼저 붓다가 이 세상에 출현하고 출가 제자들도 출현했습니다. 그래서 붓다와 출가자들이 있는 곳에 사람들도 모이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장소의 필요성이 생겨났고, 재가 신자들은 먼저 출가자가 살 수 있을 곳, 묵을 수 있는 곳을 제공(보시)했습니다. 그곳에 재가자도 모여 설법을 듣거나 수행하거나 했습니다. 그것이 시대와 함께 서서히 발전해서 건물수가 증가하거나 특별한 목적을 위한 곳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인도의 날란다 사원은 국제적인 맘모스 대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이면서 절이기도 했습니다. 현재의 테라와다 사원들도 불교 문화 센터, 불교도의 교류장소, 학교, 출가자와 재가자의 수행장소, 사회의 종교적 역할을 담당하는 관공서 등의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테라와다 불교에서 「절」, 즉 사원(vihāra 위하-라)의 관리 운영 방침은 대체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⓵ 재가 신자가 사원을 만든다.(출가 비구는 관계하지 않는다)

 ⓶ 재가 신자가 보수나 유지, 세금 등을 포함한 모든 관리 운영을 담당한다.(출가 비구는 관계하지 않는다)

 ⓷ 사원의 건립 후에 사방 상가에 보시한다.

 

출가 비구는 재가 신자와 같은 개인이 아닙니다. 출가하여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분, 세상사에 관계하지 않는 분들입니다. 어떤 비구가 설법해 주었으면 한다든가, 이 절에 묵었으면 좋겠다든가 하는 것을 부탁할 수 있지만, 비구 중의 누구를 지명해서 당신에게 이 절을 보시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비구 상가 전체의 공유재산으로 하고 관리는 재가자인 우리가 한다고 비구 개인의 책무가 되지 않게 시주합니다. 출가 비구가 이 세상 사람들이나 물품에 집착할 수 없게 하고, 재가자도 비구에 대해서 이 비구, 저 비구 등 개인적으로 집착할 수 없습니다.

 

공양청 할 때도, 예를 들어 세 분의 식사만 준비할 수 있는 형편이면 비구 상가에 「비구 3분을 공양청합니다.」라고 부탁해서 올 수 있는 3명에게 비구 상가 전체를 위해서 공양 올립니다. 그렇게 해야만 공양하시는 분은 세 명뿐이라도 비구 상가 전체를 공양한 것이 됩니다. 공양 올리는 마음이 비구 상가 전체에 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분의 식사를 준비해서 「○○ 비구와 △△ 비구와 ◇◇ 비구 3분을 초청합니다.」라고 개인을 지정하면 보시의 공덕도 세 분 만의 작은 것이 됩니다. 마음에 집착함이 있어 개인밖에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료, 음식, 가사, 발우, 약품 등 매우 한정된 것으로 개인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인 소비재는 비구 개인이 받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자나 침대, 책상 등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인 내구재는 비구 개인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의자를 내가 보시받았으니까 나의 것이라고 하여 그걸 어깨에 짊어지고 걷는 명상을 하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의자나 침대, 절(사원) 등의 내구재는 비구 개인에게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방 상가에 보시하는 것입니다. 사방은 온 세상이라는 것으로 온 세상의 상가 전체에 보시해서 상가의 일원이면, 특히 비구이면 어떤 분이라도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개방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보시하는 사람의 공덕도 무한대가 됩니다. 사방 상가에 보시했기 때문에 스리랑카나 태국, 버마 등에서 비구가 와도 여기에 머무셔도 됩니다, 공양청을 받아 주십시오, 법을 설하여 주십시오라고 부담 없이 초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상가에 보시한 것에 의해 아시아의 한쪽 구석에 있으면서도 온 세상 불교도와 교류할 수 있는 하나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사방 상가에 보시하지 않고 우리들의 절이라고 말해도 괜찮지만, 그 경우 「절」이라는 이름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협회의 「본부」라든지 「사무실」이라고 하는 개념이 되어버립니다. 절은 모두의 것입니다. 테라와다의 절이라면 온 세상의 테라와다 불교도 것입니다. 우리들만의 시설이라면 우리들에게는 편리하겠지만 공덕도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곳은 ○○사원이며 이 사원을 사방 상가에 보시한다고 선언하지 않으면 보시한 것이 되기 어렵습니다. 여러 명의 비구들을 불러서 공양을 올리고 절이 세워진 것을 축복받기위해 한국의 절에서 흔히 거행하는 낙성식과 같은 법요식을 하면서 “이 절이 불법을 수호하고 전법과 수행에 도움이 되기 위해 사방 상가에 보시합니다, 참가한 스님들은 상가를 대표해서 이 사원을 받아들여 승인해 주십시오.” 라고 간청하고 선언하면 보시가 실현된 것이 됩니다. 이럴 때 비로소 보시한 사람들의 공덕은 무한대가 됩니다.

 

정리하면,

*유지 운영은 재가자의 의무이고 사원은 사방 상가의 것입니다.

*사방 상가에 보시하는 것으로 테라와다의 사원이 됩니다.

*테라와다의 사원은 현재 한국의 절과 다릅니다.

특정한 스님만이 절에 거주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덧붙이면, 절에는 온 세상의 비구가 언제라도 자유롭게 방문해서 머물다가 떠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객비구가 숙박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재가자는 이러한 비구들의 자유로운 행동을 재가자의 취향 때문에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방문하기 쉬운 절이면 언제 어디에서라도 비구들은 오고 갈 수 있습니다.

 

비구들이 방문하기 쉬운 절이란 역으로부터 3분 이내라든지, 냉난방 등이 완비되어있는 절이 아니라, 그 절을 유지 관리하는 재가 신자들이 사이좋고 밝고 서로 도와가며 배움과 수행을 해나가고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는 절, 즉 「재가의 상가」가 되어 있는 절입니다. 「비구 상가」 없이 불교는 성립되지 않지만, 「비구 상가」를 만나고 싶다면 훌륭한 재가의 상가가 되어 초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법도, 지도도 쓸모없는 곳에는 비구들은 오지 않습니다.

 

사원이라고 하는 평온함의 장소는 일반 세상의 어떤 곳보다 평화롭고, 부처님과 담마와 상가를 따르는 곳입니다. 그래서 사원은 법을 듣거나 명상할 수 있는 장소여야 합니다. 모두의 노력으로 그러한 장소가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