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선우 - 깔르야나 밋따(kalyāṇa mitta)의 자질 (20240817)

담마마-마까 2024. 8. 18. 12:45

https://youtu.be/Hb0GrcwHv3M?si=14MZ0EwiA5fZvBFs

 

* 선우 - 깔르야나 밋따(kalyāṇa mitta)의 자질 (20240817)

 

어제는 스님이 아는 스님하고 같이 통도사에 한번 갔다 왔어요.

가가지고 욕만 바가지로 먹고 왔어요. 그 통도사 그 사리 모신데로 올라가는 계단이 이렇게 있잖아요. 근데 자꾸 이 스님이 “스님! 가운데 길로 들어가십시오.” 이러는 거라. 그래서 생각 없이 그냥 가운데 길로 들어갔는데 통도사에 있는 스님이 난리가 났어요. 거 왜 조실 스님이나 큰 스님이 드나드는 그 가운데 길을 가느냐고 막 야단을 치는 거라. 그래서 내가 그냥 합장하고 “죄송합니다.”하고 인제 나는 여기 옆으로 빠져나왔는데, 같이 간 스님은 “이 스님이 누군지 알고 그러느냐?” 하면서 막 싸우는 거라. 그래서 ‘저 스님이 참 청각에 사로잡혔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소리는 저쪽에 있는 통도사에 있는 스님이 질렀는데 그 소리에 사로잡히는 게 아니고, 그 들리는 소리는 자기 귀로 듣는 거지 남의 귀로 듣는 건 아니잖아. 그러면 자기 귀에 들리는 소리 요기에 딱 사로잡히니까 기분 나쁘다는 거지. 그래서 이 청각에 사로잡혀 버리니까 그다음에는 그 모든 소리들이 나쁘게 자꾸 들리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사로잡혔으니까 같이 화를 내는 수밖에 없는 거라.

사실은 소리는 잘못이 없는데, 고함지른 스님의 잘못이 있는데, 듣는 자기가 잘못한 건데, 근데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청각의 잘못 - 듣는 걸 잘못했다는 생각을 안 하고 저 소리한테 탓을 한다는 거라. 여러분도 그런 경우 많죠? “왜 나한테 고함질러?” 그게 뭔 관계가 있다고.

실제로는 내 귀가 있으니까 파동이 와서 탁 부딪치는 거고, 부딪치는 것이 들리는 것 뿐인거라. 그런데 그 들리는 것들도 일어났으면 반드시 사라지게 돼 있는 거뿐이고 또 다른 소리들이 와서 또 닿게 되어있는 것뿐인데, 청각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그렇게만 그냥 알아차리면, 그냥 그 소리 “어 그래요. 알겠습니다.” 하고 그냥 비켜주면 될 건데, 괜히 그냥 이 청각에 사로잡히니까 그렇게 반응을 안 하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한테 경고한다는 뜻으로 얘기를 하는 겁니다.

 

소리는 거기에 사로잡히지도 말고 청각에 사로잡히지도 말고, 이 소리는 실제로는 내하고는 관계없는 것들입니다. 내가 듣는 거지 그 소리가 여기에만 들리는 게 아니라 저쪽에 있는 사람한테도 들리고 그냥 퍼지는 진동일 뿐입니다. 음파일 뿐이라는 거라.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자기 귀에만 자꾸 사띠를 하고 알아차림을 가지고 있을 것 같으면 크게 별 문제가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소리들로 인해가지고 아, 그 흐름이 보인다는 거라.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흐름이 보이면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훨씬 좋은 조건이 된다 하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어쨌든 그렇게 해가지고 막 한바탕 막 붙어 쌌더만은 나는 싫어서 저리 가버렸어요. 가버리니까 나중에 와서 씩씩 씩씩 쌌더라고. 그만 됐다 그러고 나서 참배하고 왔는데, 중요한 거는 스님이 그 사리탑에 가서 참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어느 길로 들어가는 것이 사실은 중요한 것은 아니거든.

그런 걸 만들어놨으면 그냥 따르면 되는 거고, 그런데 애초부터 그런 걸 안 만들면 참 좋은데 사람이라는 게 자꾸 그런 걸 만들어요. 그래서 되도록이면 여러분들은 그런 나눌려고 하는 그런 것들은 안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갔다 와가지고 스님이 한번 생각을 좀 해봤어요.

과연 "스님들이 해야 되는 역할이 뭔가?" 하는 것들을 생각을 해봤습니다.

남을 험난하고 비방하는 거 해서 돼요, 안 돼요? 안 되죠! 꼭 그런 건 스님만 해당이 되는 게 아니죠. 근데 간혹 스님들 중에서도 자기를 높이려고 다른 사람들을 자꾸 비난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건 아주 나쁜 버릇들입니다.

그거는 어찌 보면 깔르야나 밋따(kalyāṇa mitta)라고 하는 선우의 조건을,

그 첫 번째를 갖추지 못한 상태들입니다.

여러분들도 남을 비난하는 그런 성향은 되도록이면 안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지혜와 자비를 갖추는 데 깊이가 달라지게 됩니다.

지금은 가족들이 소중하죠? 가족들한테도 막 자비롭게 하고 이렇게 하는데, 점점 더 인제 나이가 먹어간다든지 아니면 수행이 깊어지면 자비의 마음이 확대됩니다. 내 가족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다 골고루 자비가 퍼질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지혜로운 것도 마찬가집니다.

 

경전에는 일반적으로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제한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걸 빠데사냐나(padesañāṇa)라고 그럽니다.

그런 제한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은 자기가 수행을 하는 게 맞아! 다른 사람은 틀려! 수행 방법도 이게 맞고 다른 것이 틀리다고 하는 거라. 그리고 자기가 체험한 것들 그것은 다 성인의 경지에서 이루어진 것들이고, 아니면 다른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라는 거라. 다른 체험들 이런 것들을 인정할려고 하지 않아요. 그걸 이제 빠데사냐나라고 합니다. 지혜가 있긴 있는데, 제한적인 지혜라는 거라.

 

이렇게 '제한적인 지혜'가 있을 것 같으면은 본인은 물론 공부를 계속해 나갈 수가 있는데, 그런 성향이 자꾸 깊어지면 점점 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수행 자체도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지게 되고, 세상 삶을 살아가는데도 외골수처럼 자꾸 나아가지게 되는 거라. 두루두루 이렇게 친해지면서 “아, 참 저 사람 참 좋은 사람이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따라갈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질 않는다는 거라. 그걸 빠데사냐나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지혜와 자비를 갖추어야 되는데 그 갖추는 데는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빨리 이것들이 누구에게나 해당되고 누구에게나 다 허용할 수 있는 그런 지혜와 자비가 될 수 있도록 자꾸 만들어 나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부처님의 지혜를 우리가 빌리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부처님 지혜는 어떠한 경우든지 나누는 것은 없거든. 그리고 부처님의 자비는 어느 누구도 차별하는 법도 없다는 거라. 점점 더 그렇게 되어 나갈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부처님 지혜에 비추어 봤을 때 ‘아, 이게 맞는가 안 맞는가’ 하는 걸 갖다가 자꾸 판단할 수 있도록 그렇게 자꾸 해야 됩니다.

 

어떻게 하면 그 길을 조금씩 따라갈 수 있을까?

첫 번째는 그겁니다. 일상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할 때 선한 것들만 자꾸 하라는 거라.
수행에서 즉각즉각 현재의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왜 그럴까? 아까 그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는 그냥 청각에 울리는 그냥 그거뿐입니다. 그냥 소리 들리는 것뿐이라고 자꾸 알아차리면 되는데, 왜 나는 소리 들리는 것으로 알아차렸는데 옆에 있는 스님은 화가 일어났을까? 생각이 일어나서 그렇다는 거라. 망상이라는 거라.

망상이 일어나니깐 ‘어디서!’ 이렇게 생각이 일어나버리는 거라. 현재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망상이 일어나서 그 현재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생각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러면 망상이 일어나면 당연히 망상은 불선한 것으로써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안 좋은 생각이나 안 좋은 말이나 행위들로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지금 현재 것들을 철저하게 사띠하지 못하는 것은 망상 때문"이라고 자꾸 판단을 하라는 거라. 그래서 지금 것들을 알아차리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마음과 말과 행동들이 일어나야 되는 거라.
차라리 사띠가 없더라도 선한 마음과 말과 행동들이 자꾸 이루어지도록 자꾸 습관을 가져야 되는 거라. 그래서 그게 아니면 안 할려고 자꾸 해야 돼. 내가 나쁜 말을 했을 때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은 어떤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해서 불편한 마음들이 또 일어나고 행동들을 할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그거는 물론 그 사람의 책임이지만, 내가 왜 그런 것들을 자꾸 일으켜 주는 원인을 제공해야 되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거는 불선한 것들이 일어나고 말하고 행동할 것 같으면 나는 오염이 안 돼? 자기가 먼저 오염이 되는데! 자신을 해치는 짓을 자꾸 할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리고 여러분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이유는 고통스러운 이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겁니다. 쉽게 말하면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겁니다. 그걸 자꾸 잊어버리면 자기자신이 고통스러운 세계로 자꾸 들어가게 된다는 거라. 내가 한번 이렇게 고통을 자꾸 일으킴으로 인해가지고 그걸 내가 또 결과로써 받아야 되는 거라.
왜 자꾸 악순환을 자꾸 반복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선한 행위를 하고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을 하고 깨달음에 이를려고 자꾸 노력하면서, 고통의 세계로 자꾸 들어간다는 것은 '내가 지금 살아가는 목적이 뭔가' 하는 걸 자꾸 잃어버린다는 거라. 잊어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이 2가지만 자꾸 마음에 두고 할 것 같으면은 적어도 그래도 내가 선우가 되기 위한 조건을 자꾸 만들어 나가게 되는 거라.

 

경전 주석서에 보면 선우의 조건에 대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삐야(Piya)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선우의 자질일 뿐 아니라 여러분들이 선우가 되기 위해서도 갖춰야 되는 것들입니다.

삐야는 쉽게 얘기하면은 그냥 형식적인 행위들은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이죠.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밥 먹고 또 일상생활을 하고 하죠? 그게 당연한 겁니다. 근데 어떤 사람들은 그걸 하면서도 기쁘지가 않아. 세수하는 데도 안 기쁘고, 밥을 먹는데도 맛있다는 생각도 안 들고, 회사생활이나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할 수가 없는 거라. 이게 형식화 돼있기 때문에.

이왕 해야 되는 거면 좀 기쁘게 하면 안 돼? 음? 세수할 때 그래도 뽀득뽀득 씻으면 기분 안 좋아? 밥 먹을 때 먹는 거 이렇게 관찰해보면 얼마나 맛있어? 행위하는 것 자체가 모든 것들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할 거 같으면 얼마나 기뻐?

근데 마음 하나만 싹 바꿔버리면은 참 좋은 생활들이 있는데, 그걸 자꾸 형식적으로 할려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것으로 자꾸 생각을 하게 되는 거라. 그거로부터 벗어나라는 거라.

삐야(piya)라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내가 뭔가를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것들인데 그걸 해야 될 때 기쁜 마음으로 ‘이게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이게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하는 걸로 생각하면서 행하라는 거라.

 

가끔씩 스님도 법문하면서 ‘내가 이 뭔 법문을 이렇게 해봐야 뭔 의미가 있노?’ 그럴 때들이 많아요. 그냥 법문은 법문대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걸 또 귀담아 듣는다는 거라.
그러면서 또 다시 또 듣기하고, 그러면서 수행의 포인트들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너무 법문에 빠져갖고 수행할 생각 안 하고 뭐 법문만 자꾸 듣는 사람들이 있기는 한데, 저 지금 웃는 사람 보니까 그런 사람이네...

법문은 그냥 가리키는 지도일 뿐이라는 거라. 지도 아무리 갖춰놔 봐야 내가 그거 가지러 가지 않으면 보물을 못 찾는 거라. 그래도 그게 지침서가 돼서 공부할 수 있는 마음들을 가질 수 있으니까 법문을 기쁘게 할 수가 있는 거라.

여러분들도 일상생활을 할 때 항상 기쁨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자꾸 갖추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가루(garu)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건 빨리어 용어 자체로만 볼 것 같으면 존경받는다는 뜻인데 뭘 어떻게 하면 존경받을까?
자기가 잘 행동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면 존경을 받습니다. '날 존경해달라' 해갖고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니면 '내가 최고다' 하고 얘기하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 하고 한다 해가지고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라. 그 사람의 마음이 얼마만큼 선한 마음을 지니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느냐를 가지고 그 사람을 존경하고 안 하고가 되는 거라.

 

행위하는 것들이 선하게 되려고 할 것 같으면 선한 마음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근데 그게 자기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모든 이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고 모든 이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것들을 자꾸 마음을 품고 행하라는 거라. 그럼 그 마음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들이.

애들이 아주 어릴 때 엄마가 안아주면 새근새근 자는데, 아빠가 안아주면 금방 웁니다. 왜 그런지 알아요? 아빠 마음은 이걸 어떻게 안아야 될지를 모르니까 우선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물론 예뻐하고 안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두려운 마음이 있으면 애들은 그 두려운 마음을 압니다. 본인은 물론 예뻐해주고 안고 싶은 마음으로 안았겠지만, 실제로는 두려움이 밑바탕에 깔려있는 상태라는 거라. 근데 그걸 애기들도 안다는 거라.

그 애들도 아는데 다른 일반인들이 다 큰 어른들이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행위들에 대해서 모를 것 같아요?

저 사람이 진짜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나를 위해서 질책하듯이 얘기하는 건지, 진짜 나를 위해서 뭔가를 이렇게 좀 바꿨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질책하기 위해서 하는 건지, 그걸 모를 것 같아요?

아무리 질책하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할 것 같으면 상대방은 그 사람을 존경합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마음을 지니느냐에 따라서 상대방은 받아들이는 것이 정반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게 가루(garu)라고 그럽니다.

 

이 둘을 갖다가 합해 갖고 빨리어 경전에서는 바와니야(bhāvaniy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친절한 사랑-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지닌 채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행위를 한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2가지는 반드시 여러분들이 갖추어야 될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왓따(vattā)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근데 이거는 수다원 이상이 되기 전에는 사실은 완전하게 갖추기는 힘듭니다. 여러분들 허물 드러낼 수 있어요? 잘못한 것들은 잘못했다고 탁 얘기할 수 있어야 되는 거라.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그런 잘못들을 더 이상 저지르지 않으려고 하게 되는 거라.
근데 자꾸 숨기려고 하면은 그건 더 큰 괴로움을 낳게 되는 거라. 고름이 되고 썩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진실되게 말을 하고 진실되게 행동할려고 해야 되지, 진실되지 않고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자꾸 미화할려고 하면 안된다는 거라.

 

그래서 수다원들은 어떤 조그마한 허물이라도 그걸 감추려고 하지 않는 거라. 근데 여러분들 복 받았는 줄 알아야 되는 거라. 이 세상에 그런 분들이 있다는 것만 하더라도 참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래서 쪼끄만 허물도 저지르지 않으려고 하는 거라.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왓따(vattā) 자질이라는 것은 잘못을 해도 솔직하게 잘못했다고 얘기하고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버릇들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그다음에 와짜낙카마(vacanakkhama)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거는 조금 전에 얘기하고 비슷한 겁니다. 비판받을 때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 여러분들이 무슨 지금 현재 성인군자가 돼 있는 것도 아니고 잘못하는 것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비판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거는 잘못했다고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걸 안 들으려고 하는 거라. 그러면 안 된다는 거라.

얼마 전에 송천님한테 내가 “고맙다”고 하면서 그래도 선원에 자질구레하게 뭐 만들고 하는 것들 그런 것들 그래도 와가지고 성심성의껏 하는 거는 참 고마운데 말미에다가 “성질만 좀 안 냈으면 좋겠다”하는 거라. 근데도 받아들이는 거라. 본인이 성질내는 게 있으니까. 비판받는 걸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자꾸 가져야 되는 거라. 한번 보라고. 오늘부터 이제 송천님이 성질 두 번 부릴 거 한번 밖에 안 부릴거라. 보일 거라는 거라.

(수행자 : 현재 안보입니다. 2주 됐습니다. 벌써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이제 안 보여? 2주 됐어요? (ㅎㅎㅎ)

어쨌든 어쩔 수 없이 여러분들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내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라. 그럼 나의 견해도 완벽하지도 않는 거고, 다른 사람들이 “니 틀렸다” 하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럼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되는 거라. ‘내가 이렇게 진짜 틀렸을까?’ ‘내가 고칠 게 뭔가?’ 하는 것들을 자꾸 돌아볼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마지막 특성은 노 짯타네 니윳자꼬(no c'aṭṭhane niyujjako)라고 그렇게 합니다.
여러분은 어찌 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뭔가를 합니다. 직장일을 하든지 아니면 뭔가를 하든지. 근데 이 의미는 뭐냐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직장에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하는 일들이 나에게도 이익이 있을 뿐아니라 직장에도 이익이 있도록 돼야 되는 것이지, 나에게는 이익이 있는데 직장은 점점 더 곤궁해져 간다 할 거 같으면 그거는 잘못돼 있다 하는 거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것들을 이용할려고, 특히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는 뜻입니다.

 

이런 것들 6가지 재질들이 깔르야나 밋따(kalyāṇa mitta)라고 하는 선우가 갖추고 있는 것일 뿐아니라 여러분들 또한 갖추어나가야 되는 그런 것들입니다.

항상 평상시 때는 선한 것들을 자꾸 행하려고 하고, 그리고 언제든지 대상들을 지금 현재에 사띠하는 버릇들을 자꾸 가질려고 하게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 것들이 밑바탕이 될 때 선우의 조건들을 여러분들도 서서히 갖추어 나가게 됩니다. 선우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선우가 될 때 그 선우들은 밖에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스스로 울타리가 되고 의지처가 되는 겁니다. 다른 것들을 의지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행한 것들을, 자신이 하는 것들을, 지금 사띠하고 있는 것들이 의지처가 된다는 것들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다음은 선원장스님께서 법문의 주요 요목을 정리해주신 내용입니다. _()_


【 좋은 친구 깔르야나 밋따(kalyāṇa mitta)의 자질을 살펴봐야 합니다.

이 사람이 갖추어야 할 여섯 가지 자질이 있습니다.

 

● 삐야(Piya) : 그저 가식적인 행동이 아닌 좋은 개인적 행동을 하는 것. 개인적인 행동이 좋을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이것이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자질입니다.

● 가루(garu) : 그 사람은 개인적인 행동이 좋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태도도 좋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또한 가루라고 불리는 존경받는 자질도 있어야 합니다.

◎ 이 두 가지 자질이 합쳐져 바와니야(bhāvaniya)가 되는데, 바와니야는 다른 사람의 멧따(사랑의 친절)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 다음 자질은 왓따(vattā)로, 유익하고 진실한 말을 할 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 와짜낙카마(vacanakkhama) - 또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으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와짜낙카마라고 합니다.

● 노 짯타네 니윳자꼬(no c'aṭṭhane niyujjako) - 마지막 특성은 자신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을 부적절하게 이용하지 않는 것, 즉 노 짯타네 니윳자꼬입니다. 이는 자신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들에게 좋지않은 일을하도록 강요하지 않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여섯 가지 자질을 갖춘 사람이 좋은 친구, 즉 깔르야나 밋따(kalyāṇa mitta)입니다. 이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러한 자질을 갖춘 사람을 친구, 멘토 또는 스승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