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정진/불교 입문. 경전

불자행 삼십칠송

담마마-마까 2015. 7. 17. 23:07

                                              


          "불자행 삼십칠송"

 

  (해설) 「불자행 삼십칠송」은 대승불자가 갖춰야 할 행위에 대해 서른일곱 게송으로 찬술한 것입니다.

 티베트 역사상 위대한 고승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톡메 쌍뽀(Thogme Sangpo)의 저작입니다. 14세 때 사미계를 받은 뒤 23세 무렵에 벌써 불경과 대소오명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으며, 43세 이후부터는 이십 여년 동안 바위동굴에 들어가 수련에 전념하였습니다. 평생을 보리심과 보살행을 배우고 닦아 생전에 대비심과 보리심의 보살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었습니다. 한역된 그의 이름은 음역으로는 도미상파波(발음으로는 투메이쌍뽀), 의역으로는 무착현입니다.

 

오! 관자재보살이시어!

(해설) 관자재보살은 안으로 지혜와 자비를 갖추고 밖으로는 신구의 삼업을 관찰함에 있어서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자재합니다. 법화경에서는 “승묘한 지혜의 힘은 능히 세간의 고통을 구한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께서는 일체의 오고 감이 없음을 보셨음에도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여 한결같이 애쓰시니 이러한 수승한 스승님과 보호존 관자재보살에게 항상 신구의 삼문으로 공경 배례하옵니다.

  (해설) 불자는 불법승 삼보에 몸과 마음과 말로 깨달을 때까지 귀의한 사람을 뜻합니다. 불자는 기도나 축원으로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와 같은 귀의를 통해서, 부처님과 스승들의 수승한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입에서 태어난 자, 부처님의 법의 상속자를 불자라고 합니다.

 

1. 가만을 갖춘 큰 배인 이 몸은 얻기도 어려우니 이미 얻은 이것으로 나와 남을 윤회의 바다로부터 건너기 위하여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고, 문사수 삼혜를 행하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가만을 갖춘 큰 배’는 인간 몸이며, 얻기 어려운 이 몸이야말로 진리를 듣고 얻는 지혜와 그 진리를 사유하여 얻는 지혜에 의지하여 수행하여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지혜로 돌고 도는 삶과 죽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귀한 몸을 술과 담배로 끊임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헛되이 쓰면 안 됩니다. 오로지 삶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 대 자유를 얻는 데에 쓰는 것이 바른 불자의 행입니다.

 

2. 친한 쪽으로는 애착이 물처럼 요동치고 원수 쪽으로는 성냄이 불처럼 일어나니 올바른 취사선택을 잊게 하는 이런 칠흑 같이 짙은 무명으로 이뤄진 고향 땅을 버리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애착의 반대편에는 미움, 증오가 있습니다. 소유하고자 하는 애착과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은 삼세에 쌓은 선한 공덕을 무너지게 합니다. 이것은 어리석음, 즉 무명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애착과 화는 긍정적인 감정인 자비심으로 줄이고 없애고 지혜의 칼로 무명을 베어 버리는 것이 바로 불자행입니다.

 

3. 악처를 멀리하여 무명을 점차 줄이고 일체를 방만하지 않아 선행을 자연스럽게 늘리고 뚜렷한 이지로 법을 명쾌히 이해하는 것이 생겨나니 이를 위해 적정한 곳에 머무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악처란 선한 곳, 좋은 곳의 반대말입니다. 자기의 이기심을 위한 악행을 줄이고 남을 위한 선행을 늘이는 것이 불자의 행입니다. 기도만 하는 곳, 절만 하는 곳은 부처님 법이 없습니다. 부처님 법을 설하면서 기도도 있고 절할 수도 있고 수행할 수 있다면 수행처라 할 만 합니다.

 

4. 오래 동안 친밀했던 친구들과 각자 헤어지고 애써 이룬 재물들도 버려야 되는 몸, 몸이라는 집의 마음이라는 손님 결국은 떠나야 하니 이 생의 모든 것에 출리심을 내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죽지 않는 사람은 없고 죽을 때 모아둔 재물을 가져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대도 장수와 재물에 대한 애착으로 선업을 쌓으려 하지 않습니다. 불자들이 갖추어야 할 출리심은 이런 애착을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5. 어떤 이와 가까이 지내면 탐진치 3독이 증장하게 되고 세 가지 지혜를 얻는 문사수의 행위들이 약화되니 보리심의 뿌리인 자비를 없애는 이런 나쁜 친구를 멀리하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아난존자가 ‘도반이 수행의 절반 정도는 되지 않느냐?’고 묻자, 부처님께서는 ‘아니다. 수행의 전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도반은 좋은 스승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좋은 도반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불자행입니다.

 

6. 어떤 이와 친밀하게 지내면 과와 실이 줄어들고 공덕이 차오르는 달처럼 증장하니 좋은 친구들을 자기 몸보다도 더 중히 여기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부처님 법을 알고 수행하는 이, 깨달음의 길을 함께 가는 이가 도반입니다. 좋은 도반이 되기 위해서는 불법으로써 언제나 자기 스스로를 살펴보는 수행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친구는 또 하나의 나이며 스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불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7. 자기 자신도 윤회의 감옥에 얽매인 6도 세간의 신이 어느 누구를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무언가에게 귀의하려면 진실된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천신은 비록 인간보다 뛰어나다지만 천신도 윤회하는 중생입니다. 그런 천신들도 신통을 부릴 줄은 압니다만 어찌 불법승 삼보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야 말로 지옥, 축생 등 여섯 갈래의 생존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아는 것이, 불자를 불자답게 만듭니다.

 

8. 매우 참기 어려운 삼악도의 고통들은 악업의 결과라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목숨이 떨어져도 악업을 결코 짓지 않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불자는 자기가 지은 업을 자기가 받는다는 인과응보를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축생, 아귀, 지옥 중생의 삼악도에 빠지는 것은 자신이 지은 악업 때문이지 다른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위협을 받아도 악업을 짓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노력하는 것이 바로 불자행입니다.

 

  9. 삼계의 안락은 풀잎 끝의 이슬방울처럼 한 순간에 부서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변치 않는 해탈의 수승한 자리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으니 행복하다고 여긴다면 이 일은 동물도 추구하는 것입니다. 천국도 오히려 아침이슬처럼 무상합니다. 생사가 없는 해탈의 수승한 자리는 열반적정을 뜻합니다. 불자라면 생멸의 괴로움이 없는 열반에 큰 뜻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10. 무시 이래로 제 자신에게 연민심을 가지신 이, 모든 어머니들이 고통받고 있다면 제 자신만의 안락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한없는 유정들이 피안으로 건널 수 있는 배가 되기 위하여 보리심을 내는 것, 이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대승의 수행 핵심은 자비에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전생에 다른 중생의 어머니가 되어보지 않은 자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중생을 자신의 어머니로 생각하는 모심으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야 말로 불자행입니다.

 

11. 일체의 고통은 자신만의 안락을 추구하는데서 생겨나고 모든 깨달음(=정등각)은 타인을 이롭게 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안락과 타인의 고통들을 완전히 바꾸려고 하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자기 자신보다 사랑스러운 것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때문에 작은 이기심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입니다. 큰 이기심은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 자기에게도 이롭다고 아는 마음입니다. 불자라면 작은 이기심보다 현명한 큰 이기심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남을 버리는 이기심을 자와 타를 바꾸면 남을 사랑하고 자기를 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비심을 일으키는 대승의 수행법이며 불자의 행입니다.

 

12. 어떤 이들이 주체할 수 없이 큰 탐욕의 힘에 의해 제 자신의 재물 모두를 강탈하거나 그런 강탈하려는 마음을 내더라도 이 몸과 재물, 삼세에 쌓은 선행을 바로 그런 자들에게라도 주려고 하는 것인 불자행입니다.

  (해설) 모든 것이 꿈같고 물에 뜬 달 같음을 잘 아는 이는 탐욕에 눈이 멀어 재물과 목숨이라도 달라는 이가 있다면 연민의 마음을 내어 선뜻 내놓을 수 있는 이가 불자의 행입니다. 강탈하려는 자의 마음을 바꾸게 하는 보시행이지요.

 

13. 제 자신에게 조그만 허물도 없으나 어떤 이들이 저의 머리를 벨지라도 연민의 힘으로 그들의 죄들을 제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연민은 상대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고귀한 마음입니다. 그렇게 도와주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죽이는 자. 즉, 은혜를 원수로 갚을지라도 그 자의 죄를 자기의 것으로 하는 것이 불자의 행입니다.

 

14. 누군가가 제 자신에게 온갖 듣기 좋지 않은 말로 삼천대천을 다 채울 정도로 외쳐대도 자비로운 마음으로 여전히 그 비방하는 자 자체의 공덕을 말하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남을 비방하면 그 비방하는 사람이 악을 짓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에 맞서 다시 비방을 하면 자신도 악을 짓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자들의 비방을 자기의 정신을 성숙시켜주고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공덕임을 알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를 위해 축원해 주는 것이 바로 불자의 행입니다.

 

15. 많은 중생 모인 한가운데서 어떤 이가 제 과실을 들춰내고 악담을 말해도 그를 좋은 친구처럼 생각함으로써 공경하여 절하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악을 악으로 갚고, 욕을 욕으로 대하면 그것은 그칠 수가 없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철없는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듯, 그저 웃어넘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욕 바라밀다를 수행할 수 있는 좋은 친구나 스승으로 생각하고 공경하고 절하는 바로 그것이 불자의 행입니다.


16. 제 아들처럼 보살피던 사람이 저를 적처럼 여기고 행동할지라도 병에 걸린 아들을 돌보는 어머니처럼 특별히 보살피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내가 이만큼 해주었으니 너도 이만큼 갚아야 된다’는 세속의 논리로는 갚지 않으면 그 대가로 투쟁과 고통을 일으킬 뿐입니다. 샨띠 데바 존자님께서 이르신 ‘베풀고 난 후에는 헌신처럼 잊으라’는 말씀처럼 베푸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고 되돌려 받지 않을뿐더러 병든 자식을 돌보는 어머니처럼 자비심으로 보살피는 것이 바로 불자의 행입니다.

17. 제 자신과 비슷하거나 저보다 하찮은 사람이 아만 때문에 저를 멸시하더라도 스승처럼 공경하여 제 자신의 정수리를 숙여 화답하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아만이란 자기를 높이고 남을 깔보는 것입니다.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자기를 멸시한다면 불같은 화가 올라올 것입니다. 멸시하는 사람도 화를 내는 사람도도 모두 아만 때문입니다. 불자라면 본래 무아인데 무지해서 아만이 생김을 알아 스승처럼 공경하고 머리를 숙임으로써 높이는 아만을 꺾어버리는 것이 불자의 행입니다.

18. 저의 삶이 내팽개쳐지고 항상 다른 사람이 핍박하고 크나큰 병고에 시달리고 악귀가 주술을 걸더라도 더 나아가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제가 받으려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생각으로 살면, 원한과 보복의 그침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생기고 또한 상호 의존함을 알아 이런 악순환을 끊으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본인이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그 중생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그 고통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불자의 행입니다.

19. 명성 크게 얻고, 많은 중생들에게 절을 받고, 다문천왕의 재물과 같은 것을 얻었을지라도 세속의 부귀란 그 의미가 없음을 바로 보므로 교만하지 않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칭찬의 장점을 말하는 것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아부의 말이기도 합니다. 만약 칭찬이나 아부의 말을 듣게 되면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아만, 교만을 없애는 약은 모든 것은 아침 이슬과 같고 꿈과 같은 무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 있는 이가 불자입니다.

20. 자신의 마음 속 적을 이길 수 없으면서 다른 쪽의 적을 굴복시켜도 적은 늘어만 갑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연민의 군대로 자신의 상속하는 마음을 굴복하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천하를 정복하는 것보다 자기 마음을 정복하는 것이 더 위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을 되돌아보며 단절시키는 탐욕과 파괴하는 성냄이라는 적을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줄이고 없애는 것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흐름을 끊는 것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불자의 행입니다.

21. 탐착의 성품은 소금물과 같아 더 많이 행하면 행할수록 더욱 증장하게 됩니다. 무언가을 애착하는 게 생겨나는 대상들을 즉각 버리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소금물은 갈증을 해소하기는커녕 더 많이 물을 마시게 합니다. 탐착의 욕망도 이와 같습니다. 갈망을 해소하는 방법은 갈망하는 대상이 견고하지도 영원한 것도 아닌 변하고 모습이 바뀌어 소유할 수 없음을 아는 지혜로 대상을 즉각 즉각 버리는 행이 불자의 행입니다.

22. 나타나는 이것들을 제 마음에 담고 그 마음이 바라는 대로 따라가는 희론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이해하여, 소취, 능취의 정리들을 마음에 담고 행하지 않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생기는 것은 소멸하는 것임을, 나타나는 것은 사라짐을 아는 지혜로 주관과 객관이 상대하여 생긴 것은 모두 어릿광대가 무대 위에 뛰어노는 희론과 같은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객의 경험들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생기면 사라진다’는 것을 아는 무소유의 지혜로 자신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불자의 행입니다.

23. 마음에 드는 것과 마주치더라도 여름철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그 외향이라 할지라도 진실로 추구하지 않고 연연함을 버리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소유하려는 대상이 내 밖에 따로 존재하고 견고한 것으로 알고 믿는 것은 위험합니다. 철저히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분석의 결과, 모든 존재는 시간적으로 변하고 공간적으로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아름다운 대상이라도 애착이 생기지 않습니다. 도리어 버리는 즐거움이 생깁니다.

25. 보리심을 갈구하기에 이 몸마저 베풀어 주기를 바라는데 다른 것들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베푼 일에 화답을 바라지 않는 보시를 베푸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사람은 물 없이 살 수 없고 땅, 공간, 바람, 불, 햇빛, 동식물 등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존재는 받아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보시는 베풀고 되돌려 받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속의 말로 ‘기브 앤 테이크’라고 하는 것은 투자의 논리이지 보시의 이치가 아닙니다. 어떤 것에도 머묾 없이 베푸는 것이 불자의 행입니다.

26.지계없이는 자신의 일을 이룰 수 없는데도 다른 이의 일을 이뤄주기를 바란다는 것, 그것은 웃음거리입니다. 그러므로 세간에 대한 욕망을 없애주는 지계를 지키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계는 도덕성입니다. 요즈음 연예인이든 대학교수이든 정부요인이든 도덕성 결여는 직장에서 사회에서 곧 쫒겨나고 퇴출됩니다. 도덕성이 없는 이는 자신의 일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수행자도 아무리 수십년 수행을 해도 작은 깨달음이라도 없다면 그것은 계가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27. 선업을 쌓기 바라는 불자에게 모든 해를 입히는 행위는 진귀한 보석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악행들을 성냄 없이 참아내는 것이 불자행이기 때문입니다.
 (해설) 남이 나를 화내게 해서 생기는 악업보다 내가 스스로 화를 내어 쌓는 악업이 훨씬 더 큽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지은 업을 남이 대신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해를 입히는 자라 할지라도 불보살처럼 대하고, 해를 주는 주체가 없어 무아임을 알아 참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자의 행입니다.

28. 오직 자신의 일만 성취하고자 하는 성문·독각들이라 할지라도 머리에 붙은 불을 끄려는 것과 같이 정진하는 것을 보았다면.
모든 중생의 일에 공덕의 발생처인 용맹 정진을 애써 행하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성문·독각은 자기만의 깨달음에 뜻을 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더할 나위 없이 용맹정진합니다. 중생 구제라는 큰 뜻을 품은 대승의 불자가 어찌 소승의 수행자보다 더 애써 정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9. 지법을 잘 갖춘 관법으로 번뇌를 완전히 정복한 지혜를 행하는 일로 사무색정보다 더 빼어나게 건너는 선정을 수행하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외도의 수행은 주로 지법을 행하여 마음의 행복을 찾는 것이라면, 대승의 지관쌍수는 공성의 지혜를 얻는 관법을 더해 생사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혜를 겸한 선정이야 말로 부처님의 수행법입니다.

30. 지혜 바라밀다가 빠진 다섯 바라밀다로는 완벽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으니
그 방편을 갖추고 신구의 삼문이 무분별한 지혜를 수행하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바라밀다의 뜻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상태, 또는 벗어난 상태입니다. 지혜바라밀은 지혜로써 번뇌의 뿌리를 자르고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난 상태를 뜻합니다. 나머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바라밀다는 지혜바라밀다를 돕는 방편입니다. 불자는 기도나 구복이 아니라 이 지혜를 함양하기 위한 배움과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31. 제 자신의 실수로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면 법을 따르는 불자의 형색이 법을 없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 깨달아 법이 아닌 것을 버리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아는 것도 바로 사람입니다. 스스로 불자라고 생각한다면 그릇됨을 빨리 버리고 정법을 수지하는 자세를 항상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32. 번뇌의 힘이 다른 불자들의 과실을 말하게 한다면 제 자신만 악화되니 대승에 입문한 유정의 과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남의 잘못은 보기 쉬워도 자기 잘못은 보기 어려운 법입니다. 거울을 깨끗하게 닦는 것은 거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로 보기 위해서입니다. 남의 잘못을 통해 자신이 저지르는 잘못을 고치려는 자세가 바로 불자의 자세입니다.

33.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은 서로를 싸우게 하고
문사수 삼혜의 행을 훼손하니 이런 것을 떠나서 친한 친구의 집과 보시를 행한 집에 나쁜 탐심을 버리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세간 사람들은 부와 명예, 권력을 쫒습니다. 그러나 불자라면 출세간의 법인 열반적정, 해탈을 추구해야 합니다. 오직 이것만이 윤회라는 고통의 바다에 떠도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좋은 친구와 법을 따르는 이웃을 공경하고 자신의 거울로, 도반으로 삼는 것이 바로 불자의 행입니다.

34. 거친 말은 타인의 마음을 화나게 하고 불자들의 품행을 훼손하니 그러므로 타인의 마음 나쁘게 하는 거친 말을 버리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삼업 중에 말로 짓는 것이 네 가지로 가장 많다는 것을 아는 불자라면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말이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남에게 들은 나쁜 말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상처를 입었던가를 생각해 보면 좋지 않은 말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잘 알 것입니다.

35. 번뇌에 습이 들면 대치법으로 그치기 어렵지만
억념을 갖춘 사람은 대치법의 무기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탐심 등 번뇌가 일어나자마자 그 생긴 것을 부수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세세년년 이어온 업장 때문에 수행자라고 해도 번뇌나 실수가 생깁니다. 그런 번뇌와 실수를 재빨리 알아차리고 고치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번뇌와 습을 없애는 공성을 알아 공성에 머물러 공성을 잊어버리지 않는 억념이 해결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이고 불자의 행입니다.

36. 간략하게 말하자면, 언제 어디서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마음의 상태, 그와 같은 것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억념 같은 것을 갖추어 다른 이들의 일들이 성취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한마디로 정리해서 항상 자신의 몸의 행위, 입의 행위, 마음의 행위를 즉각 알아차려 번뇌로부터 몸과 마음을 보호하고 공성을 억념하여 대 자유를 추구하는 수행으로 다른 중생을 사랑과 연민으로 대하고 그들의 성취를 도와주는 것이야 말로 불자의 자세입니다.

37. 그와 같이 애써 성취한 선업들을 무량한 중생의 고통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삼륜 청정 지혜로 보리심이 생길 수 있도록 회향하는 것이 불자행입니다.
 (해설) 보리심은 모든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고자하는 염원이며 그 원을 이루기 위해 위없는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을 이롭게 행하는 지혜가 바로 이 보리심이 생기게 하는 근원이며 회향입니다. 이것이 수행을 뜻하는 것이니 불자라면 언제나 마음속에 담고 행해야 합니다. 

                  원허 지운스님의 자비선 명상 문자서비스........ 2015. 1. 31 ~ 2015.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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