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정진/위빳사나 수행과 알아차림

알아차림에 대하여

담마마-마까 2013. 5. 8. 23:10


** 알아차림에 대하여 **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림(sati. 사띠)으로 시작해서 알아차림으로 끝이 난다고 할 만큼

알아차림은 아주 중요한 단어이다. 


'사띠'(sati)라는 말은 빨리어다.

이 단어가 의미 하는 여러 가지 뜻 중에서 기억과 알아차림이 가장 큰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불경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올 때 sati. 사띠를 념(念)자로 번역하고

이것이 다시 우리나라로 넘어올 때  기억(念)으로만 넘어왔다.


보통 기억하면 과거를 기억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위빠사나의 사띠의 기억은 현재 이 순간에 대한 기억이다.

빨리어 사띠. sati는 기억과 동시에 알아차림이란 뜻이 함께 포함된 단어로 넘어 왔어야

본래의 뜻을 바르게 전달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 



지금 우리나라의 위빠사나 책에서는 사띠를 기억. 알아차림, 마음챙김, 주시하다 등으로

여러 가지로 혼용하고 있지만 우리 선원에서는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통일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84,000 법문은 좀 크게 축약하면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37조도품으로 축약되며,

이는 다시 8정도로 축약되고, 다시 계. 정. 혜 삼학으로 축약되며,

계정혜 삼학은 다시 알아차림(사띠, sati)하나로 귀결 된다.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알아차림(사띠)이다.


매 순간 알아차림으로 깨어있어 번뇌가 될 원인을 행하지 말고

그 순간 알아차려 번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셨다.

그래서 수행자가 알아차림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진다면 위빠사나 수행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부터 알아차림의 정의와, 알아차림의 대상과, 알아차림을 할 때의 마음가짐 등등

알아차림에 대한 모든 것을 여러 번에 나누어 자세하게 살펴본다.


1) 알아차림은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 아는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먼저 몸의 느낌을 마음이 직접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알아차림이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려면 알아차림을 하는 마음이 편안해야 된다.


무엇을 바라거나, 또는 억제하지 않고, 나타나는 대로 차분하게 지켜보면 된다.

알아차림이란 "할 때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 말은 현재 자신의 오온이 하고 있는 일을 마음이 아는 것이다.

오온이 그 순간의 실재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나타난 법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불교에서 실재(實在. 존재)란 대상을 인식할 때 인식하고 있는 대상이 실재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불교의 존재론은 인식론이다.

지금 양손을 마주 대고 있지만 그 순간에 마음이 손에 있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순간에 손은 나에게 없는 것과 같고, 생각이라는 행위가 실재가 된다.

이때는 생각이 알아차릴 대상인 법(실재)이 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인식 할 수 없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법이 아니다.

인식을 하는 것만이 인식하는 그 순간에 실재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 마음이 인식하고 있는 실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것이 알아차림. 사띠이며 그것이 그 순간에 법(法. 알아차릴 대상)으로 실재하는 것이 된다.


2) 그럼 무엇을 대상으로 알아차릴까?


현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대상으로 알아차린다.

알아차리려는 마음을 대상에 기울여 나타나는 대로 현상을 알아차린다.

마치 사진 찍듯이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


거기에는 나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 개입되지 않으며,

또한 분리해서 구경하듯이 객관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대상에 개입하여 어떻게 조절하려고 하지 않고 영화를 보는 관람자의 입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린다.


이 말은 대상에 대해 좋고 싫고 하는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경치를 보고 있을 때의 알아차림은 밖의 경치를 열심히 보는 것이 아니다.

밖의 눈 내리는 경치를 본다는 것을 알고(色),

그 순간 일어나는 느낌이나(受), 생각이나(想), 의도나(行), 마음상태(識)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즉 마음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자신(오온)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매순간 알아차릴 하나의 대상(法)을 잡고,

그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 알아차리는 행위가 사띠(sati)인 알아차림이며,

있는 그대로 보는 위빠사나 수행이다.

또한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지 자신을 되돌아보아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에게 이 순간을 깨어서 알아차리는 일을 시키는 행위이다. 오온 중에서 행(行)이다. 

만일 마음이 일을 하지 않고 느슨해져 알아차림이 없는 순간은

마음이 대상에 대하여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탐진치의 상태로 이미 오염된 것이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하면,

그 순간 대상과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마음만 있지 탐진치가 들어올 자리가 없다.

탐진치는 모두 자기만의 정보인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에 휘둘릴 때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심소)이다.


3) 그럼 어떤 마음가짐으로 알아차림을 해야 할까?


알아차림을 성공적으로 하려면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자의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원하는 마음, 성냄이나 슬픈 마음, 근심 걱정이 있는 마음으로 알아차림을 하면 알아차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아주 편안한 안정된 마음 상태에서 알아차림을 해야 오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다.


오직 알아차림(사띠)과 노력(위리아)과 지혜(빤냐)로서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

여기에서 노력은 힘을 주어 강하게 대상을 집중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현재를 알아차리려고 하는 것이 노력이다.


이런 마음가짐을 갖기 위해,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몸과 마음을 가만히 느껴본다.

몸이 긴장했는지 보아서 풀어주고, 마음에도 바라는 것이 있는지 보아서 긴장을 풀고,

편안해진 마음으로 알아차림을 시작한다.


그리고 현재의 마음이 가는 곳을 그냥 따라가면서 편하게 알아차림을 하면 된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이어지면 수행자는 몸과 마음의 자연적인 성품을 저절로 이해하게 된다.


수행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수행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수행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수행이란 내 안에 잠재해 있는 탐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인데,

오히려 수행을 하면서 수행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며,

수행이 잘 안되면 안 된다고 진심(성냄)을 일으켜 탐진치의 잠재 성향을 더 키운다.

또한 수행이 잘 되면 잘된다고 좋아하여 아만심(치심)을 키운다.

이것이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수행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다.


행은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개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대상을 보고 들으면서 일어나는 느낌이 시키는 대로 좋은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은 버려버리는,

그 마음바탕에  탐진치를 깔고 행위를 했다면,

수행은 이 탐진치의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탐진치에 휩쓸리지 않고,

탐진치로 부터 벗어나는 습관을 길들이는 작업이다.


그래서 탐진치를 벗어나는 수행은 처음에 잘 안되게 되어있다.

이때는 잘 안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는데,

그것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은 유신견(아상, 아만심)에 의한 어리석음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어떤 현상이 있기를 바라지 않고(집중이 잘 되길),

또 대상을 없애려하지 않고(통증이나 망상 졸음 등이 없어지길),

나타나는 대로 그냥 알아차리기만(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것이 수행자의 의무라고 알아야 한다.


즉 현재 나타난 대상을,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다 알아차릴 법으로 받아들여 알아차려 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알아차리는 힘이 차츰차츰 쌓여간다.


4) 그럼 수행에서 알아차림이 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첫째는 몸과 마음의 자연적인 성품을 알게 한다.

마치 관객이 영화를 보는 것처럼 몸과 마음을 계속 지켜보면,

관객은 영화가 끝날 때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저절로 알 수 있듯이,

수행자는 몸과 마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게 된다.

즉 오온(몸과 마음)의 성품을 통찰하는 힘을 알아차림이 키워주고 결국 있는 그대로 통찰하게 된다.


둘째는 알아차림은 "안이비설신의" 의 6군데 감각기관을 지키는 문지기역할을 한다.

우리는 보통 6문을 통해 6경의 대상을 받아들일 때,

대상에 대한 좋거나 싫은 느낌이 일어나 탐심과 성냄이 같이 들어온다.

그런데 알아차림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는 마음의 작용이므로

당연히 6문으로 들어오는 탐진치의 번뇌를 막아준다.

만일 대상을 받아들일 때 알아차림이 없다면 그 순간 수행자는 탐진치로 계율과 고요함을 도둑맞는다.


셋째 알아차림은 불선업을 선업으로 바꾸어준다. 

탐진치의 마음이 일어날 때 알아차리면, 즉시 관용 자애 지혜의 선한 마음으로 바뀌어 선업으로 이어지지만,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냥 탐진치의 불선업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하는 순간이 가장 큰 선업을 행하는 순간이다.

탐진치가 끼어들 수 없는 순간이다.


넷째는 알아차림이 있으면 저절로 계율을 지키게 되고,

그 결과 마음이 청정해지고 사마디(삼매. 집중하는 힘)가 생긴다.

고요하게 집중된 상태에서만 바른 견해인 지혜가 생기고 이런 지혜들이 모여서 열반(닙바나)에 이르게 된다.

알아차림이 계정혜 3학의 초석이 된다.

결국 열반으로 향하는 첫걸음은 알아차림. 사띠이다.


5) 그러면 우리는 어째서 이렇게 유익한 알아차림을 챙기지 못하고 자주 놓치게 될까?


첫째는 몸과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이 별다른 특별한 것이 아닌 것 같아

시시하게 생각하여 알아차리려는 의도를 내지 않는다.

그 바탕에는 알아차리면 무엇이 좋을까? 하는 의심이 깔려있다.

그러나 수행을 해보면 알아차림을 하는 일이 가장 값어치가 있는 일임을 알게 된다.

더불어 알아차림을 놓치고 행위를 해보면 그 결과가 괴로움으로 돌아오는 것을 직접 경험한다.


둘째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 본적이 없어 그냥 대상에 넘어가버린다.

또한 알아차림이 습관이 되지 않아 자꾸 알아차려야 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몸과 마음의 현상을 하나의 법으로 객관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나와 동일시 해서 집착해버린다.


셋째는 알아차림의 힘은 약하고, 대상에 대하여 탐진치를 일으키는 힘은 강해서

알아차림을 하다가도 대상에 휩쓸려서 알아차림을 놓쳐버린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좌선 한 시간 동안에 "한 호흡"만이라도 제대로 알아차려야한다.

제대로 알아차린 한 호흡이 두 호흡 세 호흡으로 늘어나면서 알아차리는 힘이 강화된다.


6) 그럼 알아차림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알아차림을 해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 방법으로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 "지금 자세는 바른가?"

 "지금 내 몸이 무엇을 하는가?" 하고 현재의 몸과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물음을 떠올려

즉시 현재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몸에 마음을 자주 붙여서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알고(하고) 있는가? 하면서

자주 알아차림을 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예를 들면 지금 일어남. 세수함. 식사. 이야기함. 걷고 있음. 앉음. 운전함, 집안 일 등등을 하면서 그 상황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불쑥 일어나는 마음들과 생각들 느낌들 의도 등이 있으면

그들에 대하여 알아차림을 해보는 것이 가장 알아차리는 힘을 길러준다.

이런 방법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능숙해지면 나중에는 저절로 알아차림이 따라 다니게 된다.


둘째는 알아차림을 한 뒤에는 알아차린 대상에 대해 "그랬구나"하고 알고 말아야한다.

그 대상을 계속 잡고 시비를 하면 알아차림을 놓친다.

‘그랬네’ 라고 알고 바로 지금 새롭게 나타난 대상을 알아차리려고 해야 한다.

몸과 마음은 계속 생멸하면서 흐르고 있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대상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새롭게 나타난 현재의 대상을 다시 잡아 알아차림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만일 알아차렸다고 좋아하거나, 알아차림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맞는 것인지? 등등으로 생각하며 시비하고 판단 분별하면 알아차림을 놓친 것이다. 

그리고 이미 나타난 현상에 대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하고 그 원인을 알려고 하면

그 순간 망상에 빠지면서 나도 모르게 알아차림을 놓치게 된다.


셋째는 알아차림에는 마침표가 없다. 알아차림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매 순간 새로 일어나므로 계속 새로운 대상이 있다.

그래서 항상 현재의 대상을 다시 알아차리려는 노력이 지속되어야한다.

수행자는 열반을 얻어 윤회가 끝날 때 까지 알아차림이 연속되어야한다.

그러나 만일 지금 알아차림을 놓치고 이미 탐진치로 반응을 했다면

수행자는 다시 그 상황을 그냥 그대로 다시 알아차리면 수행을 하는 것이다. 


현재를 다시 알아차린 순간 이미 불선심은 사라지고 알아차림에 의한 선업을 행하는 순간이 된다.

아무리 늦은 알아차림이라도 알아차리면 그만이다.

만일 알아차림을 한 뒤에 “내가 현재를 알아차렸다!” 하고 마침표를 찍는 순간 알아차림을 놓친 것이다.

어떤 대상이라도 마음이 두 순간을 머물러 있으면 집착을 한 것이다.

그래서 항상 알아차림이란 티켓을 들고 다녀야

최상의 행복(열반, 깨달음)인 윤회의 종식, 불사(不死)의 문으로 들어 갈 수 있다.


                           한국 명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