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각자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
삼장법사 빤냐와로 스님의 “테라와다 이야기” 16- 담마 예경
“말을 물 있는 곳까지 데려갈 수 있지만 먹이는 건 할 수 없어”
(2). 담마 예경(Dhamma Vandanā - 담마의 6덕 : Dhamma guṇa)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Sandiṭṭhiko, Akāliko, Ehipassiko, Opanayiko,
Paccattaṁ veditabbo viññūhi ti.
dhammaṁ jīvita pariyantaṁ saraṇaṁ gacchāmi.
스왁-카-또- 바가와따- 담모-,
산딧티꼬-, 아깔-리꼬-, 에-히빳시꼬-, 오-빠나이꼬-,
빳짯땅 웨-디땁보- 윈뉴-히 띠.
담망 지-위따 빠리얀땅 사라낭 갓차-미.
존귀하신 분에 의해 잘 설해진 위없는 진리, 즉시 확인할 수 있고, 결과 바로 나타나니, 와서 보라 초청하여, 열반으로 인도되는 진리, 지혜로운 이 스스로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진리입니다.
저는 생명이 다할 때까지 담마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담마의 여섯 가지 특별한 특성
1) svākkhāto : su + akkhāta 「 올바르게, 잘, 자주, 똑같이 + 말해진, 설명되었다, 가르쳐졌다」의 nom.
bhagavatā : bhagavant의 inst. 「세존에 의해」
dhammo : dhamma의 nom.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 세존에 의해 좋고, 올바르게 설해져서 나타난 가르침입니다.
불교의 특성 중에서 처음도 올바르고, 중간도 올바르고, 마지막도 올바르게 말해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설법할 때 붓다는 항상 깨달음이라고 하는 목적을 위해서 탐·진·치로부터 멀어지는 가르침을 처음도 훌륭하게, 중간도 훌륭하게, 마지막도 훌륭하게 말씀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 Su가 앞에 쓰이는 말에는, 예를 들어 수자따(sujāta=잘+태어났다), 수카(sukha=흐름과 똑같이, 같은 방향으로+지속하다, 버티어내다)와 같이 Su가 붙으면 좋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2) sandiṭṭhiko : saṁ(잘)+ diṭṭhi(본다)+ ka(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 ka)→ 「 「아는·현재 증명되다·실제로 안다」의」= 실증할 수 있는 가르침.
실증 할 수 있는, 체험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것인데,
① 지금 여기서 잘 볼 수가 있다
② 비밀이 없는, 누구라도 실제로 볼 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이 살아 계셨던 시대에 많은 종교의 스승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의 일부분을 제자에게 가르치지 않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가르쳐 버리면 제자와 자신이 동등하게 되어버릴 우려가 있어서 스스로의 권위나 이익을 위해서라도 비밀을 유지해 두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무런 비밀도 없고, 누구에게든지 모든 것을 가르치는 교수법을 택했으므로 당시 매우 획기적이었습니다.
3) akāliko : a (부정)+ kāla 「시간」+ ka(ika, 부사) → 「시간과는 관계없는·즉시」= 보편성이 있는 것이므로 영원한 가르침이다.
시간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가르침, 진리라는 것입니다.
대승 불교에는 말법세상이라는 사상이 있지만,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근기가 점차 떨어져서 담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붓다의 담마가 소멸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시대에 의해 명상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이 많아지거나 적어지거나 한다고 말하지만, 담마는 어느 때,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항상 유효하고 보편적인 진리라고 말합니다.
4) ehi-passiko : ehi (eti의 명령형) 「오너라」+ passa (passati의 명령형) 「보아라」+ ka → 「와서 보아라」
「와서 보아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확실한 가르침이기에, 담마의 올바름과 뛰어남을 점검하라는 초청의 의미입니다.
다른 종교는 일반적으로 믿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믿는 것이 아니라 확인해 주세요, 와서 확인해 보세요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재가자가 일시적으로 출가하여 사원에서 불교의 생활을 체험합니다.
그 때문에 재가자와 출가자, 그리고 사원의 관계가 깊고 친밀해집니다.
직접 가서 자기 자신이 그 생활을 체험해 보니까, 상가의 소중함과 성스러움도 알게 되고, 수행과 배움을 통해 담마를 보고 이해하게 되기에, 그러한 것을 가능케 하는 사원의 중요성을 몸소 인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붓다의 담마를 이렇게 일시적이든, 장기적이든 상가의 일원이 되어 체험할 기회가 많이 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5) opanayiko : upanaya「인도<upa(까지)+naya(가게 간다)="" 가지고="" 하는,="">」 + ika → 「~으로 이끌다」
위로 열반까지 이끄는 가르침, 즉 담마를 바르게 앎으로써 자신의 의지처가 될 수 있기에 담마는 인도적입니다. 왜냐하면 담마는 올바르고 성스러운 길이기에, 담마를 실천하는 자를 열반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마는 인도적이라고 합니다.
즉 담마는 실천하는 자를 열반으로 인도하는(이끄는) 가르침입니다.</upa(까지)+naya(가게>
6) paccattaṁ : paccatta의 acc. 「개별적으로, 각자에게, 홀로」
veditabbo : vedeti 의 grd(미래 수동분사) nom. → 「경험되어야 할」
viññūhī : viññū 「현자」의 pl. inst. 「현자들에 의해서」
Paccattaṁ veditabbo viññūhī- 현명한 사람에 의해서 곧바로 경험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붓다는 깨달음까지의 길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있고, 마음을 증장시키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지만, 누군가를 깨닫게 할 수 없고, 누군가의 마음을 증장시키는 일도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노력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말을 물이 있는 곳에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먹이는 것은 할 수 없다고 자주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깨달을 때까지의 길을 제대로 설명해 주고 있지만, 각자, 자기 자신이, 각각 개별적으로, 실제로 스스로 수행하고 노력하여, 그 성과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얻을 수밖에 없는 가르침입니다.
dhammaṁ : dhamma의 acc. 「담마에게」
jīvita : 「생명」
pariyantaṁ : pariyanta 「한계·끝」의 acc.
saraṇaṁ : 「의지처에」
gacchāmi : gacchati의 sg. 1st. 「( 나는) 간다」
dhammaṁ jīvita pariyantaṁ saraṇaṁ gacchāmi.(나는 생명이 다할 때까지 담마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를
dhammaṁ yāva nibbānaṁ saraṇaṁ gacchāmi. (나는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담마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라는 표현으로도 사용합니다.
뿍갈라뺜냣띠(Puggalapaññatti, 인시설론)에 따르면
붓다의 담마를 만나는 사람(puggala)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1) 욱가띠딴뉴(ugghaṭitaññū): 부처님을 몸소 뵙고 간략한 법문을 들어서 성스러운 도과를 바로 얻는 사람입니다. 수십만겁 동안 바라밀을 닦고 닦아서 말 그대로 최상근기를 지닌 분들로, 경전에 나오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같이 게송만 듣고도 그 자리에서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2) 위빠찌딴뉴(vipacitaññū): 간략한 법문을 그냥 경청해서는 성스러운 도과를 바로 얻지는 못하지만 그 법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다시 듣고 나서야 깨닫는 사람입니다. 역시 상근기에 속하는 분들로, 경전에 나오는 안냐 꼰단냐 존자같이 상세한 설법을 여러 번 듣고서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3) 네이야(neyya): 간략한 법문이나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경청해서는 성스러운 도과를 얻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계속해서 교학을 공부하고 열심히 수행을 해야 도과를 얻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네이야는 도과를 얻는 기간에 따라 다시 여러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과를 얻는 기간은 개개인이 과거전생에 얻은 바라밀에 따라 다르고, 어떠한 번뇌를 극복했는지에 따라 다르다고 합니다.
(4) 빠다빠라마(padaparama): 설령 부처님의 법을 만나서 교학과 수행에 열심히 매진을 하더라도, 금생에는 절대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금생에 오직 선업과 바라밀만 쌓는 일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라도 사마타나 위빳사나를 수행하다가 죽는다면 내생에는 사람이나 천인으로 다시 태어나서, 도과를 얻을 수가 있다고 합니다.
레디 사야도(Ledi Sayādaw)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은 전생에 쌓은 많은 바라밀이 있어서, 간략하거나 또는 상세한 가르침을 듣기만 해도 열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바라밀이 없기 때문에 점진적인 절차에 따라서 팔정도를 수행해야 합니다. 지금은 부처님께서 입멸하신지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첫 번째와 두 번째에 해당하는 사람은 없으며, 오직 세 번째와 네 번째에 해당하는 사람만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레디 사야도의 이 해석은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당시의 그런 상근기의 사람들처럼 법문만 듣고 깨닫는 시대는 지났기 때문에 ‘우리들이 의지할 곳은 오직 수행뿐이다’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과연 나는 위의 네 부류의 사람들 중 어디에 속할지, 적어도 세 번째 네이야에는 속해야 한다고 자신을 추스르고 계속 정진을 해봅시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 > 테라와다불교의 신행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테라와다 이야기 11- 상가의 덕 ⓶ (1) | 2016.08.06 |
---|---|
테라와다 이야기 11- 상가의 덕① (1) | 2016.08.06 |
테라와다 이야기 10- 담마의 덕 (1) | 2016.08.06 |
테라와다 이야기 9- 부처님의 덕 (0) | 2016.08.06 |
테라와다 이야기 8- 이상적인 재가상 (1) | 2016.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