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정진/아비담마

아비담마 - [심소(心所 cetasika)의 분석] 다시 읽으며..

담마마-마까 2019. 7. 6. 23:53



*아비담마 - [심소(心所 cetasika)의 분석] 다시 읽기..

 

# 共一切心心所 7

phassa(팟사 ), vedanā(웨다나 ), saññā(산냐 ), cetanā(쩨따나 ), ekaggatā(에깍가따 一境性), jīvitindriya(지위띤드리야 命根), manasikāra(마나시까라 作意)

saññā를 키우면 머리가 좋아지고, 단단히 공부할 수 있고, 지식은 발군이다.

cetanā를 육성하면 대단히 행동적이고, 온갖 것이 다 하고 싶어진다. ekaggatā(집중력)을 키우면 saññā가 더더욱 명확해지고, 행동력도 더더욱 뛰어나게 된다.

) 냄새의 phassa(접촉)에 정신을 빼앗기면 saññā(산냐 ), ekaggatā(에깍가따 集中), manasikāra(마나시까라 作意)도 냄새를 중심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 사람은 책임을 느끼고 일에 집중한다. ekaggatā를 다른 대상으로 바꾼다. cetanā(쩨따나 의지), saññā, manasikāra 등의 심소는 일하는 대상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강하게 되어 간다. 心所는 너무나도 약해진다. 본인으로서는 냄새를 신경 쓰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일에 흥미가 엷어지면 이 방은 냄새나고 있었다는 것을 회상하게 되면 다시 냄새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 때는 냄새를 중심으로 心所가 강력해진다. 이와 같이 心所가 강해지거나 약해지는 것으로서 인식이 명확하게 되기도 하고, 애매하게도 된다.

신경 쓰는, 또는 신경 쓰지 않는 이것을 manasikāra의 기능으로 이해해도 상관없다. 신경 쓰든, 아니든(manasikāra) 자신이 관리할 수 있으면 도움이 된다.

신경 쓰는 것에 대한 관리가 그리 간단하게 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쪽이 편리하다. 이 관리능력은 cetanā의 관리 능력이다. 강력한 phassa쪽으로 곧장 manasikāra가 가버리는 것이다. 그 정도로 인간은 자기 컨트롤(통제)이 되지 않는다.

책이 잘 읽혀지지 않는다. 집중력이 지속하지 않는다등의 경우는 ekaggatāmanasikāra가 쉽게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manasikāra를 활성화시켜서 무엇이 쓰여 있는가, 어떤 내용인가, , 한번 읽어보자라며 읽어나가면 그곳에 ekaggatā가 기능해서 집중이 된다. 집중이라든가 집중력이라는 말은 ekaggatā(一境性)와 관계가 있지만,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집중력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manasikāra(作意)의 기능이다.

명상이나 아비담마에서 집중이란 一境性(일경성 ekaggatā)이다. 一境性을 육성하기 위해 manasikāra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위빳사나명상 이외에도 여러 명상방법이 있다. 예를 들면 주문을 외워서 명상하는 행위도 있다. 주문을 외울 때마다 그것이 manasikāra가 된다. 서서히 ekaggatā(일경성)가 강하게 되어 간다. 일경성(manasikāra)이 상당히 강하게 되면 명상이 능숙해졌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7개의 心所는 분리가 불가능하다. 하나의 세트이다. 하나를 강하게 하려고 하면 나머지 6개도 그 대상을 중심으로 강하게 된다. 동일한 수준으로 강하게 되면 매우 고마운 일이지만 그것도 또한 제각각이다. 명상이라는 특별한 훈련방법을 추천하는 이유는 心所의 강도를 균등히 하기 위해서이다.

붓다께서 ‘vedanā(느낌)를 꿰뚫어 아는 사람은 일체의 사견(邪見 잘못된 견해)으로부터 해방된다.’라고 설하시고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이다.

대상에 접촉하면 그것을 느끼기 때문에 느낀 것을 느꼈다라고 안다. 느꼈다면(vedanā), 무엇을 느꼈는가를 구별하고 나서(saññā),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고 의지(意志 cetanā)를 내고, 그러고 나서 집중(ekaggatā)하고, , 하자(manasikāra)라는 심소(心所)의 활동으로 모두 행하게 된다. 알기 쉽게 말하면 눈을 뜬 순간에 빛이 눈과 접촉하고, 접촉한 순간에 보았다로 전부 끝난다. 말로 개입될 세계는 아닌 것이다. 말이 개입되기 전에 이미 보고 끝나 있는 것이다.

 

# 雜心所(pakiṇṇakā-cetasika)6.

vitakka(위딱까 ), vicāra(위짜라 ), adhimokkha(아디목카 勝結), virya(위리야 精進), pīti(삐띠 ), chanda(찬다 意慾)

대상을 마음에 태운다vitakka()이고 태우는 방식이 vicāra()이다.

vitakka곧바로 나오는 논리이고 vicāra그것에 대해서 다시 잠시 부드럽게 생각한다.’라는 느낌이다.

무언가를 인식하려고 하는 마음에 일어나는 논리성이 vitakka인 것이다. vitakka라는 것은 마음에 대상을 태우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식할 때마다 vitakka가 필요한 것이다. 인식할 때는 vitakka가 대상에 의식을 태운다.

vicāra는 보다 정중히 타는 방법을 더한다. 그렇다고 해도 인식하는 마음속에 vitakka가 있는 경우 반드시 vicāra도 있다.

명상을 하는 경우 이 둘의 기능을 잘 알게 된다. 명상을 막 시작한 사람은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고, 말에 의존해서 호흡 등의 대상에 강제로 의식을 태운다. 생각으로 계속 되풀이하면서 대상을 태운다. 그것이 vitakka의 기능이다. 이어서 무리 없이도 자연스럽게 마음속에서 명상대상을 계속 인식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마음속에서 대상을 회전하기 시작하면 명상대상에 대해서 보다 명확한 인식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vicāra가 발달해 가는 증거이다. 명상 이외의 세계에서는 vitakkavicāra의 차이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의 비유에서는 소리소리의 확장 방식이다라고 생각한다. 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오른다. 그러고 나서 날개를 편 채 하늘을 난다. vitakka-vicāra의 차이는 이와 같다.

adhimokkha(아디목카 勝結) - adhi에는 뛰어나다라는 의미뿐만 아니고, ‘優先的(우선적)’이라는 의미도 있다. mokkha(자유)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활동하게 하는 기능으로 자유를 방해하는것이 된다. 어떤 대상이 마음으로 들어오면 그것이 우선이 되어서 그 대상을 인식한다. 다른 것을 인식하는 것을 방해한다. 말하자면 原語(원어)의 직역은 무리이므로 意譯(의역)으로는 勝結(승결)’이 되는 것이다.

viriya(위리야 精進)는 마음으로 일부러 약간의 에너지를 만드는 心所이다.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냄새 맡아야 하지 않겠는가, 맛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몸으로 접촉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에너지를 만드는 心所이다. 眼耳鼻舌身意로 무언가 하자라는 활동이 일어난다.노력이다. 어쩐지 cetanā, manasikāra, adhimokkha 등과 겹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무언가 하자라고 하는 향하는 방향이 다르다. 이제까지의 심소들과는 반대이다.

viriya라는 心所는 평소라면 인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밖에서 축제를 하고 있으면 귀가 그쪽으로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축제가 있어도 무시하고 이 강의를 들으려 하는 것은 精進(정진)’인 것이다. 자연스러운 상태라면 밖의 축제 소리를 듣는다. 그쪽으로 마음을 빼앗긴다.’

그래서 精進해서 아니, 이쪽의 소리를 듣는다.’라고 갖고 온다. 그 에너지이다. 마음이 걸리는(향하는) 대상을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이다. 정진을 사용하면 귀로 소리가 들어와도, ‘이것은 듣지 않는다. 그것을 듣는다’. 갖가지 대상이 눈으로 들어와도 그것은 보지 않는다. 이것을 본다.’라고 스스로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다. 명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精進이 필요하다.

pīti(삐띠 ) 명상의 기쁨은 마음을 집중해서 마음의 거친 물결을 소멸하는 것이다. 자연히 pīti(삐띠)가 생겨난다. 거친 물결이 사라지면 pīti가 생겨난다. pīti가 생겨날 때는 마음이 안정되어 있다. 음악을 듣는 것이 즐거운 경우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

명상으로 pīti가 생겨나는 원인은 마음의 안정인 것이다. 마음이 초조하다거나 안정되지 않은 掉擧(도거: 들뜸)상태라면 이미 pīti는 없다. 그러므로 기쁨이 생겨날 때는 마음이 안정되어 있다. 명상은 마음이 곧바로 안정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상이 잘 되면 확실히 pīti가 생겨난다. 명상의 ()pīti가 점점 성장해 가는 이다. 희열감이 점점 생겨나는 이다. 그것은 위빳사나든, 보통의 사마디명상이든 그 어떤 명상으로도 한가지이다. 마음이 안정되어서 pīti가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위빳사나명상을 해서 그다지 재미가 없다고 느낀다면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논리적으로는 명상을 하면 pīti가 틀림없이 생겨난다. 깨달음을 목표로 해서 위빳사나명상을 실천한다고 할 때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pīti가 없으면 그 어떤 일도 계속할 수 없게 된다.

chanda(찬다 意欲)精進(정진)과 닮아 있다. ‘할 마음이다. 마음으로 무엇을 인식하자라고 생각한 때 인식하고 싶다라는 기분이 있다면 그것을 chanda(의욕)라 한다.

cetanā(의도)와 어딘가 닮아 있지만 cetanā의 경우는 어떤 포텐셜에너지(잠재적 에너지)()을 만들어 버린다. chanda의 경우는 그것을 만들지 않는다. 단순히 할 마음인 것이다.

이상 13종류의 심소는 同他心所(동타심소)이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단순한 심리적 기능. 13종류의 心所는 어떤 마음에 생겨나더라도 그 마음의 특색을 지니게 된다는 의미이다.

 

10- 불살생불투도불사음이라는 이 3개가 몸의 이고, 綺語(기어 거짓말)惡口(악구 악한 말)兩舌(양설 이간질)妄語(망어 쓸데없는 말)를 하지 않는 이 4가지가 입()이며, 貪愛(탐애비정상적인 욕망)瞋恚(진애비정상적인 성냄)痴暗(치암正見이 아님)에 빠지지 않는 이 3가지가 마음의 이다.


# 不善心所

akusala-sādhāra

na-cetasika 14

+공일체불선심소 4 : moha(모하 ), ahirika(아히리까 無慚 무참), anottappa(아놋땁빠 無愧 무괴), uddhacca(웃닷짜 掉擧 도거)

악행을 하는 데에도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다. 無慚’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두렵지 않다. 無愧’ ‘전혀 집중력이 없는 상태,혼란상태 掉擧

본래 무지한 사람은 moha(無知) 탓으로 善惡을 모른다.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싶어진다. ‘하고 싶기 때문에 한다라는 기분으로 된다. 말하자면 ahirika(無慚)anottappa(無愧)이다. 그래서 냉정함을 상실하고, 흥분하고, 차분하지 못하여 그 순간은 머리가 이상해진다. uddhacca(掉擧)이다. 4가지는 죄를 범하는데 필요한 기본조건이 된다. (불선 행위)를 범할 때는 이 心所 4가지는 반드시 있다.

 

+불선심소 10 : 로바(), 딧티(), 마나(), 도사(), 잇사(질투), 맛차리야(인색), 꾹꿋짜(후회), 티나(혼침), 밋다(졸음), 위찌낏차(의심)

-lobha(로바 ), diṭṭhi(딧티 ), māna(마나 ). ()의 세트 3가지는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기분이 좋다.

이란 사람을 비도덕적인 생활방식으로 바꾸어 버리는 견해에 대한 것이라고 이해해 두자. 거짓말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살생을 하는 경우 그 충동은 이다. 도덕을 부정하는 사고이다. ()의 카테고리에 들어간다. 왜냐 하면 인간은 자신의 견해를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다.

증상만, 비하만, 동등만 어느 것이나 와 타인을 비교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māna()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은 결국 내가 있다라는 개념에서 나오고, 어쨌든 비교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 不善心所를 솜씨 있게 사용하는 방법도 설해져 있다. ‘이 사람들은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고 있다. 나도 정진해야 한다.’ ‘이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고, 선행을 하고 있다. 나도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 ‘저 사람은 정진해서 깨달음에 도달했다. 나도 인간이다. 그 사람도 인간이다. 나도 못할 리가 없다. 그럼 정진해서 깨달음에 도전하자.’ 이와 같은 사고로 을 솜씨 있게 사용하는 것이다. 을 충동적으로 해서 을 없애는 것이다. 의 독이 있어도 위험하게 되지 않는 또 하나의 방법은 항상 겸손(謙虛)히 하는 것이다.

3가지 lobha(), diṭṭhi(), māna()()의 세계에 들어간다. (어떤 의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나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는 것)은 싫어서가 아니고, 좋기 때문에 하는 ()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mānadiṭṭhi는 함께 생겨나지 않는다. 이 함께, 이 함께 생겨난다. 마나는 아라한이 되어야 없어진다.

-dosa(도사 : <>,<>), issā(잇사 : 嫉妬 질투), macchariya(맛차리야 :인색), kukkucca(꾹꿋짜 : 후회)라는 dosa(성냄)의 세트 4가지이다. 성냄의 세트이므로 반대로 어두운 감정이다. dosa()는 기본이기 때문에 언제나 있다. 그래서 嫉妬하면 嫉妬, 吝嗇의 경우는 吝嗇, 後悔後悔라는 그러한 조합으로 생겨난다.

-thīna(티나 昏沈) middha(밋다 睡眠), vicikicchā(위찌낏차 )3가지는 無知(무지)心所 세트이다.

thīna는 자신이 지극히 정신적으로 위축된 듯한 상태이다. 행동적이지 않고 위축된다는 의미이다.

middha(睡眠 수면)둔감해져서 졸린다.’는 것이다. 졸림은 왜 不善心所인가? 정신적 향상이 스톱하기 때문이다. 얻음이 없기 때문이다. 끝까지 墮落(타락)하기 때문이다. 不善心所로부터의 탈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vicikicchā의심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의심이라기보다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우둔함이다. 명확한 정보나 윤리나 이치, 근거도 없이 단지 나는 그러한 것을 믿지 않는다.’라든가 그런 식으로 적당히 포장된 기분 나쁜 개념사고방식인 것이다.

*불교에서 가장 큰 죄는 邪見(사견, 잘못된 견해)라고 설한다.

마음의 기본은 無知(무지)이고 不善(불선)이다.

 

# 淨心所(정심소 sobhana-cetasika) : 25

+共淨心所(공정심소 sobhana-sādhāraa-cetasika) : 19

saddhā, sati, hiri, ottappa, 不貪 alobha, 不瞋 adosa, / 中捨 tatramajjhattatā, 身輕安 kāya-ppassaddhi, 心輕安 citta-ppassaddhi, 身輕快性 kāya-lahutā, 心輕快性 citta-lahutā, 身柔軟性 kāya-mudutā, 心柔軟性citta-mudutā , 身適業性 kāya-kammantā, 心適業性 citta-kammantā, 身練達性 kāya-pāguññatā, 心練達性 citta-pāguññatā, 身端直性 kāya-ujjukatā, 心端直性 citta-ujjukatā 이라는 이들 19개의 心所共淨心所라 한다.

19개의 共淨心所(공정심소)共善心所(공선심소)는 인식을 으로 전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心所이다. 그 가운데서도 최초의 6개는 불교에 한정되지 않고 일반 세상에도 공통하는 淨心所이다. 이후의 13개는 불교만이 발견한 선한 심리상태이다.

sobhana-sādhāranā()과 함께 한다라는 의미이므로 한 마음에는 반드시 존재하는 心所이다. 19개가 세트로 갖추어지지 않으면 한 마음이 아니다.

saddhā()이란 단지 인간이 행동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밝음, 활기차게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saddhā(믿음)’이라 하지 않고 確信(확신)’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영어로는 confidence이다. 신앙은 아니다.

sati(사띠) () 항상 자신이 놓여져 있는 상황에 깨어 있는, 알아차림하고 있는 상태가 sati이다. 생동적이다. 그러므로 명상을 하지 않아도 sati가 있을 때의 사람은 밝고 행동적이다.

hiri(히리)-ottappa(옷땁빠)라는 두 가지는 慚愧(참괴). 善心所의 경우는 나쁜 것, 무의미한 것을 컷 한다. 행위를 컷하는 기능이 두 종류 있는데 慚愧(hiri-ottappa)라고 부른다. 이 두 가지의 心所가 함께 마음에 활동하는 것이다.

alobha(아로바)adosa(아도사)가 한 짝이다. alobhalobha()가 없는 상태, 不貪(불탐)이라 한다. 교재에는 無貪(무탐)으로 쓰여 있지만 의미는 같다. alobha란 부족하다는 마음이 아니고 충분하다는 마음일 것이다. 그것이 밝음이다. adosa는 성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한역으로 不瞋(불진)이든, 無瞋(무진)이든 상관없다.

中捨(중사) 대상에 대해서 기울어지지 않는 상태, 그 순간순간에 또는 그 대상에 중립적으로 되다.

身輕安心輕安(까야빳삿디찟따빳삿디) passaddhi(경안)란 지극히 평온함이라는 의미이다.

신체와 마음으로 구별하면 色蘊(색온)은 신체이고, 나머지 수상행식 四蘊은 마음이다. 아비담마에서는 心所의 설명을 할 때 kāya受蘊, 想蘊, 行蘊이 되고, citta識薀이 된다. ppassaddhi受蘊想蘊行蘊의 경안과 識薀의 경안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Dhamma-saṅganī마음의기능을설명하고있다.

kāyalahutācittalahutā(身輕快性心輕快性) lahutā는 정말로 가볍다는 경쾌성의 의미이다. passaddhi가볍다보다는 평온함안정의 의미이다. 신체의 나른함은 조금 운동하면 낫지만 마음의 나른함은 좋아지지 않는다. 마음은 언제나 가볍게 기능하도록 유지해야 한다.

kāyamudutācittamudutā(身柔軟性心柔軟性) mudusoft(부드럽다)라는 의미이다. 마음이 굳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언제나 유연성이 있으면 일이 잘 풀린다. 성장하는 경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유연성이다.

kāyakammantācittakammantā(身適業性心適業性) kammantā적업성이라고 쓰고 있지만 activeness(능동)와 같은 의미이다. 마음이 다음에 할 일에 적응하고 있다. 마음이 유연하기 때문에 곧바로 다음의 상황으로 변환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 적업성이 있으면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kāyapāguññatācittapāguññatā(身練達性心練達性) pāguññatā연달성(練達性)으로 무언가를 해서 경험이 있다 숙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할 수 있는 상태훈련이 끝난 상태.

kāyaujjukatācittaujjukatā(身端直性心端直性) ujukatā는 단직성(端直性)이다. 대단히 심기가 꿋꿋한 것이다. 마음은 mudutā(유연성)이 있어야 하고, 경직된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역시 무언가를 할 때는 그것을 제대로 결정하고 마음을 굳게 다잡아서 해야 되지 않는가라는 기본적인 문제가 생겨난다. 그것을 여기서 똑바름단직성(端直性)이라고 일컫고 있다. 마음을 똑바로 한다, 심기가 꿋꿋하다 라는 의미이다.

+離心所(이심소 virati-cetasika 위라띠-쩨따시까) : 3가지.

sammā- vācā(삼마-와짜 正業), sammā- kammanta(삼마-깜만따正業) sammā- ājīva(삼마-아지와 正命), 3가지는 누구나 잘 아는 팔정도(八正道)에도 들어 있다. 악을 떠나기 때문에 心所라 한다.

善心所가 되는 것은 八正道 가운데 3가지만 일까? 그렇지는 않다. 八正道는 해탈하기 위해 실천하는 이다. 八正道八支(팔지)는 전부 善心所이다.

아비담마에서는 실제의 마음속에 善心所가 나타나는 과정을 바탕으로 해서 정리하기 때문에 八支 가운데 다른 心所는 각각 적절한 카테고리(범주)에 들어가 있다.

sammādiṭṭhi(삼마딧티 正見 정견)paññā(빤냐)이다. 지혜는 특별히 키워서 해탈에 이르는 기능을 관장하는 心所로서 마지막에 설명한다.

sammāsaṅkappa(삼마상깝빠 正思惟 정사유)vitakka(마음에 대상을 태우는 것)라는 雜心所가 된다.

sammāvāyāma(삼마와야마 正精進 정정진)viriya(위리야 정진)로서 雜心所에 들어 있다. (vitakka)精進은 향해지는 방향성에 의해서 不善이라는 2종류가 된다. 생각하는 것이나 노력하는 것은 으로도, 으로도 되기 때문에 雜心所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sammā-sati(삼마사띠 正念 정념)는 단순한 sati(알아차림)로서 共淨心所(공정심소)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선한 마음에는 sati가 있게 된다.

sammāsamādhi(삼마사마디 正定 정정)共一切心心所(공일체심심소)가운데 ekaggatā(에깍가따 一境性 일경성)로서 들어 있다. 일체의 마음에 일경성이 있다. 여하한 대상도 그 순간에 집중하지 않으면 인식이 되지 않는다. 인식하는 순간의 집중력은 일체의 마음에 있다. 그러므로 일경성이라는 이름으로 共一切心心所에 들어간다. 명상수행처럼 집중력을 키워서 samādhi(선정)에 드는 경우, 共一切心心所一境性 心所samādhi(사마디)라는 이름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無量心所(무량심소 appamañña-cetasika 압빠만냐-쩨따시까) : 2가지.

()(). 無量心所(무량심소)란 한없이 확장되어도 좋은 감정이다.

()란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지는 마음, 남의 괴로움을 해소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muditā()란 사람들의 행복을 보고 기뻐하는 진정한 밝음으로 질투의 반대이다. 그러므로 아아, 잘 됐다라고 기뻐한다.

4無量心4가지 있으나 여기에는 karunā(까루나 )muditā(무디따 )라는 2가지밖에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정심소(共淨心所)adosa(불진) , 성냄이 없는 심소(心所)mettā(멧따 자애)와 같은 심소로, 같은 기능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共淨心所tatramajjhattatā(中正中捨)라는 心所도 나오는데, 中正(upekkhā 우뻭카)와 닮아 있다고 여겨진다. 같은 기능으로 겹치기 때문에 따로 내세워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 두 가지는 앞의 共淨心所(공정심소) 19세트 속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따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따로 취급하는가 하면 해탈하는 마음에는 자비희사는 없으므로 역시 따로 떼어서 설명해야 했던 것이다. 자비희사에 대한 명상의 대상은 중생(생명)이다. 깨달을 때는 자비희사의 4가지 모두 생겨나지 않는다. 이유는 깨달을 때는 생명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깨달을 때는 무상, , 무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생명의 괴로움을 해소해 주자.’ 등으로 생각하면 깨달음의 마음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윤회를 보고 있는 것이다. ‘아아,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구나.’라고 기뻐해 버리면 또한 윤회에 정착하고 있는 마음이므로 깨달음의 길로는 들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자비의 부정은 옳지 않다. 완전히 깨달음을 얻은 분이라도 열반에 들 때까지 생명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삶이란 것은 다른 생명과 관계를 갖고 있다. ‘생명과 관계는 慈悲喜捨이어야 한다.’는 것은 붓다의 말씀이다.

+慧根心所(혜근심소) amoha : paññā(빤냐 지혜) paññā란 있는 그대로 대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善心所25의 카테고리는 간단하다. 19개가 공통의 보편적인 것으로 공정심소(共淨心所)에 속한다. 3가지가 계율 세계의 심소로서 이심소(離心所)라 하고 팔정도에도 들어간다. 2가지는 자비희사(慈悲喜捨) 속에 들어가는 의 무량심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소 하나만이 다른 카테고리에 들어간다. 그것은 paññā()이다. 지혜라고도 말한다. 소중한 보물로서 별도로 취급하고 있다. paññā도 한없이 확장할 수 있다. 다른 어떤 심소도 갖지 못한 특별한 힘이 paññā에는 있다.

선심(善心)이란 상당히 밝은 마음으로, 활발한 마음은 善心이라는 것이다.

 

* 慈悲喜捨라는 무량심소는 의도적으로 키워야 하는 행동의 선심소이다. 공정심소(共淨心所) 19개에다 자비희사의 무량심소를 덧붙여 성장시킨다.

() mettā(자애)이다. 우정(友情)이라는 의미이다. 보통의 우정과 다른 점은 일체의 생명에 대해서 우정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성냄과 욕망이 없는 마음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간단히 실천할 수 있다. 자애()가 성장하면 성냄이 나타나지 않게 된다.

()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그 괴로움을 없애주고 싶어지는 마음이 karunā()이다. 친한 사람들에게는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나지만 그것은 당연한 마음가짐이다. ‘무량이기 위해서는 일체의 생명에 대해서 karunā가 생겨나야 한다. karunā의 덕택으로 슬픔을 초월하는 것이다. karunā를 실천하면 세상이 서서히 좋게 되어 간다. karunā는 붓다와 보살의 motto(좌우명)이기도 하다. karunā()에 의해서 원한, 증오, 낙담, 遺恨은 기능하지 않기 된다. 즉시 인격자가 된다.

() muditā(무디따)와 정반대의 감정이기 때문에 는 함께 생겨나지 않는다.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지는마음의 친절함이다. 사람들의 행복을 보고 공감할 수 있는마음의 친절함이다. 사람들이 성공하는, 행복해지는 그것을 질투하지 않고 자신도 정직한 마음으로 아아, 좋구나.’라고 공감하는 마음이다.

upekkhā()는 매우 어려운 심소이다. 윤회 전생하는 생명은 지옥, 아귀, 축생의 생명이든, 인간이든, 신들이든 평등하다. 번뇌로부터 생겨나는 괴로움은 대부분의 생명에게 항상 따라다닌다. 범천(梵天)은 일시적으로 번뇌를 잠재우고 있기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지 않지만 윤회를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업이 다하면 윤회전생을 시작한다. 일체의 생명에 대한 평등한 마음이 upekkhā()이다. ()()()의 경우는 마음에 어떤 파도가 일어난다. 우정의 파도, karunā의 파도, 기쁨의 파도라고 해두자. upekkhā()의 경우 마음은 평온하다.

는 동시에 동일한 마음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하나밖에 생겨나지 않는다.

 

* vitakka(위딱까)vicāra(위짜라)의 차이

vitakka는 말로서 생각하는 것이고, vicāra는 말에 의지하지 않고 대상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상관없다.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는 경우는 vitakka()vicāra()가 필요하지만 자기 혼자서 무엇을 이해할 때는 vitakka()는 없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이해할 때, 정확하게 말하면 무언가를 인식할 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프로세스(과정)를 설명하기 위해 이 두 가지의 심소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 사()가 모두 기능하기보다는 만이 기능한다면 이해가 빠르리라고 생각된다. 여기까지 까다롭게 분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심리학의 주된 목적은 명상과 깨달음의 경지에 대한 심리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다.

색계(色界)의 제1선정에 尋伺가 있다. 2선정에는 심()이 사라지고 사()가 있다. 3선정부터 그 위의 선정 모두에는 , 도 없다. 사마타명상에 흥미를 갖지 않고 위빳사나 수행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제1선정과 함께 預流果(예류과)라는 깨달음의 경지가 나타난다. 그러고 나서도 수행을 계속하면 아라한과(阿羅漢果)까지 도달할 수가 있다. 그러나 토대가 되는 사마디는 제1선정이다. 말하자면 尋伺가 있는 채로 최종적인 깨달음의 단계까지 도달할 수가 있다는 의미이다. 尋伺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제2선정 부터이다. 2선정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최후의 해탈에 이르기까지 尋伺와 가까이해야 한다.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일어나는 출세간심 8개의 기초가 되는 禪定色界5개로 제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