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담마 - [마음(心 citta)의 분석] 다시 읽기..
마음이란 ‘대상을 인식하는 기능’ ‘앎’뿐인 기능을 마음이라 한다.
생명이란 인식하는 것. 마음=생명
*마음(心 citta)은 4종 (89종류)
1. 욕계심(欲界心 kamavacara-citta)
kama(慾)란 탐욕이 아니고, 안이비설신 5개의 감각기관에 닿는 대상을 말한다. 눈에 보이는 색․형, 귀로 들어오는 소리, 코에 닿는 냄새, 혀에 들어오는 맛, 신체에 닿는 것을 욕(kama)이라 한다.
vacara 界 란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라는 의미이다. 어느 주변을 돌고 있는가 하면 안이비설신에 닿는 대상인 색성향미촉의 주변을 돌면서 그곳을 세력권으로 해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계심이란 眼耳鼻舌身의 대상인 色聲香味觸에 닿아서 생겨나는 마음이다. 色․形을 보는 마음, 소리를 듣는 마음, 냄새 맡는 마음, 맛을 느끼는 마음, 접촉해서 느끼는 마음으로 5종류이다. 그리고 이들 5종류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머릿속의 기능․意도 마음이므로 그것도 포함해서 眼耳鼻舌身意에 닿는 色聲香味觸法이라는 6종류의 대상에 접촉해서 생겨나는 마음을 욕계심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法은 ‘생각하기 위한 대상’을 의미한다. 머리로 생각하는 6번째의 마음(意)도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접촉하는 것을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욕계심이란 어떤 대상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마음, 대상 없이는 인식이 불가능한 마음의 차원이다. 이 차원의 마음은 무엇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대상이 필요하다. ‘대상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54종류의 마음 가운데 9개의 마음은 붓다와 아라한들에게만 나타나므로 우리 일반인에게 나타나는 마음의 수는 45개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2. 색계심(色界心 rupavacara-citta)
이 마음은 안이비설신에 의존하지 않고 생겨나는 마음이다. 수행자가 명상을 계속해서 욕구나 망상을 점점 소멸해가면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그 나름으로 좋지 않은가. 보거나 듣거나 하는 욕계에는 즐거움이란 아무것도 없다. 속박되고 있을 뿐이다’라고 아는 것이다. 그러면 욕구로부터 마음은 떨어져 나오는 것이다. 이 ‘욕구로부터 마음이 떨어진다’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지식이나 개념으로 부터도 떨어진다는 것으로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다. 욕구로부터 마음이 떨어지지만 마음은 대체로 물질에 의존해서 인식한다. 이 마음이 선정의 상태이다.
물질에 의존해서 활동하고 있지만 보는 시각에 의존하거나 들은 청각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지식세계, 눈이나 귀에 의한 지식의 차원을 전부 버린다. 버리고 더욱 높은 차원을 만든다. 높은 차원을 만들지만 아직 몸이라는 물질적 구조에는 어느 정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색계심은 15종류가 있다.
3. 무색계심(無色界心 arupavacara-citta)
무색계심이란 물질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 마음이다. 명상으로 색계심에 도달한 수행자가 그로부터 더욱 진행된 명상으로 몸이라는 물질(色)에도 의존하지 않도록 의존한다. 성공하면 색계심을 넘어 순수하게 마음만이 회전하고 있는 상태가 된다. 이것은 인간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렇기는커녕 우리의 지식은 전부 眼耳鼻舌身의 정보로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色界조차도 상상 할 수 없다.(그러나 망상은 안이비설신이라는 五根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한 진정한 욕계심․의식이다.)
무색계심이란 마음이 자신의 힘만으로 기능하고, 물질․몸과 아무 관계없이 마음의 힘을 최대한 신장한 상태이다. 그래도 선정상태로서 인식하는 기능은 분명히 작동하고 있다. ‘여기 있으면서 멀리 떨어진 장소의 것이 보였다, 들렸다’ 하는 등의 이야기는 무색계의 인식이 아니고 욕계에서 일어나는 조그마한 이상 현상이다. ‘멀리 떨어진 장소의 것’도 또한 눈이나 귀로 인식한 사물에 불과하다. 무색계에 들어간 사람에게는 시각, 청각적 인식조차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수준을 넘어서 있다. ‘명상 중에 빛을 느꼈다. 초현상이 일어났다, 인간의 차원과는 관계없는 소리가 들렸다’ 등의 이야기는 색계의 경지이다. 무색계심은 12종류가 있다.
4. 출세간심(出世間心 lokuttara-citta)
지금까지 설명한 욕계, 색계, 무색계는 전부 세간(loka)에 해당한다. 존재의 차원이다. 물질에서 완전히 이탈해서 마음만의 존재가 되어도 마음에 ‘안다’라는 기능이 있으므로 존재의 차원인 것이다. 존재로 성립된 세계는 전부 세간이다. 존재를 완전히 뛰어 넘은 순간, 결국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는 에너지가 있어 번뇌이지만 그 에너지가 소멸하는 순간, 모든 현상적인 존재를 느끼지 않게 되는 그 순간에 생겨나는 마음을 출세간심이라고 말한다.
출세간심만은 석가모니께서 이 인간세계 최초로 발견하셨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마음’인 것이다. 존재를 완전히 버린다. 존재는 여하한 상태에 있어도 의미가 없다고 아는 경지에서 번뇌가 사라진다. 그때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열반의 마음이 생겨난다. 그것을 출세간심이라 한다. 이 마음을 8종류로 나눈다.
출세간심의 마음은 명상세계의 마음이다. 색계차원에서 위빳사나 명상을 실천해서 만드는 마음이다. 욕계차원에는 없다. 석가모니 시대에는 색계차원에서 위빳사나 명상을 수련시켰다. 색계의 선정은 5단계로 나누어진다. 그 색계 5종류의 차원 어딘가에서 위빳사나의 명상을 하여 출세간심을 만든다. 무색계심은 물질적 대상조차도 취하지 않는 선정의 마음이므로 이 상태에서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확인하는 위빳사나 명상을 해서 출세간심을 만들 수는 없다.
1. 욕계심(欲界心 kamavacara-citta)
1)불선심(不善心 akusala-citta) 12종류
: 탐․진․치(貪․瞋․痴) 의해서 일어나는 마음이 불선심. 탐․진․치란 마음 자체에는 없고 마음속에 녹아 있는 심소(감정)이다. 탐진치를 기반으로 해서 마음을 움직이면 그것을 불선(akusala)이라 일컫는다.
不善心은 貪․瞋․痴라는 3종의 번뇌에 따라 분류되고 있다.
-貪(탐욕)을 기반으로 한 貪根心(탐근심 lobha-mula-citta) 또는 貪俱心(탐구심 lobha-saha gata-citta)이 8종류이다.
-瞋(성냄)을 기반으로 한 瞋根心(진근심 dosa-mula-citta) 또는 瞋俱心(진구심 dosa-sahagata-citta)이 2종류 있고,
-痴(무지)를 기반으로 한 痴根心(치근심 moha-mula-citta) 또는 痴俱心(치구심 moha-sahagata-citta)이 2종류 있다.
이 마음의 인과법칙은 윤회를 불러일으킨다.
貪根心(탐근심 lobha-mula-citta) 8종류
희구(喜俱)하며 악견상응(惡見相應)에 無行이 하나, 有行이 하나
희구(喜俱)하며 악견불상응(惡見不相應)에 無行이 하나, 有行이 하나
사구(捨俱)하며 악견상응(惡見相應)에 無行이 하나, 有行이 하나
사구(捨俱)하며 악견불상응(惡見不相應)에 無行이 하나, 有行이 하나
貪(lobha 로바)란 무엇인가? 무엇을 인식할 때, 예를 들어 무엇을 보았을 때 본 것이 ‘즐겁다’, 보고 ‘즐겁다’, ‘보고 싶다’라는 마음이다. 보고 ‘저항이 생겨나지 않는 마음’이다. 무엇을 듣고 ‘싫다, 듣고 싶지 않다’라고 느끼지 않고, ‘아아, 좋은 곡이다’라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생명이 받아들이고 싶은 대상이나 대상에 대해서 일으키는 마음을 貪․欲(욕)이라고 말한다.
대상에 접촉해서 그 대상을 ‘좋다’라고 받아들이는 마음의 세계가 탐근심(貪根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을 탐(貪 lobha)이라 말한다.
貪根心(탐근심)은 기쁨의 有無(유무)로 2종류로 나누어진다.
8종류인 貪根心 가운데 기쁨을 느끼는 마음이 4개, 중립의 不苦不樂(좋지도 싫지도 않은)의 마음이 4개 있다. 거기에서 우선 ‘즐거운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감정으로 貪根心을 2개로 나눈다. 貪根心의 2종류를 구별하는 경우, 자신의 감각이 중요하다. 俗世間(속세간)의 즐거움․기쁨의 감각을 느낄 때는 ‘喜俱心․기쁨이 함께 하는 마음’이고, 중립적인 감정의 경우는 ‘捨俱心․평온이 함께 하는 마음․苦樂이 없는 마음’이다.
喜俱(희구)와 捨俱(사구)의 貪根心(탐근심)은 각각 2종류로 나누어진다.
喜俱(기쁨이 함께 함)와 捨俱(평온이 함께 함)의 마음은 각각 惡見(나쁜 견해)에 상응하는(ditthi- gata- sampayutta) 것과 惡見에 상응하지 않는(ditthi- gata- vippayutta) 것,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불전(佛典)에 의하면 ‘견해가 없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불교를 인정하는 불교도와 업(業)을 인정하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다.
無行(무행.자극받지않은 마음)과 有行(유행.자극받은 마음)
이로써 貪根心은 4개로 되었지만 그 각각에 無行의 마음(心)과 有行의 마음(心)이라는 2종류나 나누어진다. 行(sankhara)이란 에너지가 어느 정도 모여서 간단히 행동으로 옮겨지는 상태의 마음이다. ‘활발한 마음’이라고 해도 좋다.
그 行(sankhara)이 충분한 경우 마음은 간단히 표출된다. 그러면 ‘行이 있는(有行) 마음’이라고 말해야 할 터이지만 아비담마에서는 行이 충분히 있는 마음을 無行이라고 부른다. 복잡하다. 충전하지 않아도 좋은 마음(無行)이다라고 기억해 두시기 바란다. 한편 어떤 응원, 후원, 이런저런 생각 등의 원인으로 약한 충동으로 표출되는 마음은 ‘行이 없는(無行) 마음’이라 해야 할 터인데 有行이라 부른다. 충전이 필요하게 된 마음(有行)이라고 이해하여 두자.
사물을 이해하는 경우 조금만 설명했을 뿐인데 즉시 ‘알았다’라는 이해가 빠른 사람도 있는가 하면(無行 asankhara), 설명하여 주어도 1회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좀 더 천천히 상세하게 설명해서 조금씩 이해하여 ‘겨우 알았다’ 하는 사람도 있다.(有行 sa-sankharika)
‘자신이 뛰어나다’라든가 ‘자신이 누구와 동등하다’, ‘자신이 뒤떨어진다’ 등 자신을 타인 과 비교해서 헤아리는 마음을 慢(만 mana)이라 한다.
‘헤아린다. 비교한다’라는 의미의 동사이다. 아비담마에서는 이 慢(만 mana)이라는 自我意識을 心所(마음의 성질)의 하나로 삼는다. 慢도 탐욕심의 하나이다.
慢(mana)에는 9종류가 있다. 자신이 타인보다 뛰어나다, 타인과 동등하다, 타인보다 못하다라고 생각하는 3개의 기본적 慢이
각각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과 비교해서 그 사람보다 뛰어나다, 동등하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增上慢(증상만) 3종류와
‘자신과 동등한 사람과 비교해서 그 사람보다 뛰어나다, 동등하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同等慢(동등만) 3종류,
‘자신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해서 그 사람보다 뛰어나다, 동등하다, 못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의 卑下慢(비하만) 3종류, 합계 9종류로 나눌 수 있다.
‘慢(콤플렉스)은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不善心이므로 전부 버리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한다’라고 결정하면 그것으로 문제는 해결된다. 선한 일을 할 때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신경을 쓰면 慢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가 자신의 양심에 따르고 있는가, 아닌가라는 단지 그것에만 신경 쓰면서 행하면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어느 정도로 많은 종류의 탐욕이 있을까’라고 공부하려고 해도 끝이 없으므로 수행의 입장에서는 간단히 마음을 조사해서 ‘아!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는 탐욕의 마음, 貪根心이다’라고 즉각 파악해버린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여섯 종류의 인식과정에서 즐거운 때는 喜俱(somanassa-sahagata)이기 때문에 貪根心라 하였다.
somanassa는 문법적으로 ‘su(좋은, good)’와 ‘mana(마음),’ ‘sa(붙어 있다)’라는 말이 합해져서 만들어져 있다. ‘su-mana-sa(좋은 마음이 붙어 있다)’의 발음이 변해서 somanassa가 된다. 마음이 좋고, 밝다는 의미다.
그다지 좋지도 않지만 싫지도 않은 捨俱(upekkhasahagata)의 경우도 탐근심이라고 하였다.
domanassa는 한역으로는 憂(우)이지만 somanassa가 즐겁다(happy)는 의미이므로 그 반대의 어두움, 우울, 싫음 등의 의미이다. ‘su(좋다)’라는 말의 반대가 ‘du(싫다 bad)’이므로 그곳에 mana와 sa를 붙이면 du-mana-sa로 domanassa가 된다.
domanassa라는 마음은 ‘좋아하지 않는, 밝지 않은, 어두운, 즐겁지 않은 마음’이다. 알기 쉽게 말하면 여러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물을 먹으면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 때는 즐겁다. 그러나 병에 걸린다든가 혼자서 전연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좋다, 싫다라는 생각 없이 먹으면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다. 그 감각이 憂俱(domanassa-sahagata)이다. ‘마음이 어둡다’라는 의미이다.
瞋根心(진근심 dosa-mula-citta) 2종류
憂俱(우구) 하며 瞋恚相應(진에상응)의 마음에 無行이 하나, 有行이 하나,
이들 2종류가 瞋恚相應心(진에상응심)이라고 부른다. 성냄의 無行(무행 asankhara)과 有行(유행 sasankhara). 즉시 아무 준비도 없이 홱 성을 내는 사람은 無行(무행)이고 천천히 성내는 사람은 有行이라고 구분한다.
이 憂俱의 마음에는 瞋恚(patigha)가 되는 요소가 녹아 있다.
瞋恚란 ‘부딪힌다, 반대한다, 부정한다, 거부한다, confrontation'의 의미이다. 거부하는 기분이 마음에 용해되어 있는 것이다. 용해되어 있기 때문에 相應(상응 sampayutta)라는 말이 들어간다. 인식하는 활동(마음) 속에 인식함과 동시에 그 대상 자체를 거부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다면 그것이 瞋恚․성냄이다. 거부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인식해야 하고, 인식한 대상 속에서 거부하고 싶은 것에 우선 ‘싫다’라는 어두운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싫다는 감각이 憂俱(우구 domanassa- sahagata)이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거나,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들으면 기분이 나빠진다. 마음이 어둡게 되어 밝게 되지 않는다.
성냄의 마음이란 어두운 마음이다. 성격적으로 어두운 사람들은 강력한 성냄을 가지고 있다. 보아서 즐겁지 않고, 싫고 어둡게 되는 것이다. 본 것이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보고 싶지 않은 것, 듣고 싶지 않은 것, 먹고 싶지 않은 것, 그러한 식으로 자신이 인식하고 싶지 않은 대상을 인식하면 인식한 대상에 대해서 대립, 거부하는 마음(瞋恚)이 생겨난다. patigha는 성냄(瞋恚)으로 여기서는 사용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인식한 대상을 없애고 싶은, 거부하는, 부정하는 것’이다.
도사(dosa)와 빠띠가(patigha)의 차이: 같은 ‘성냄’이다.
dosa는 dus(오염되다)라는 어근으로 만들어져 있으므로 일반적으로는 오염(더러워진 것)이다. 그것을 불교 전문용어로서 성냄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신체의 더러움’의 경우라도 dosa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전문용어 ‘성냄’의 경우 dosa(오염)는 마음이 어둡게 된 것이다. 누구든지 밝고 원기있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으므로 그 입장에서 보면 밝지 않으면 어두운, 더렵혀져 있는 것이 된다. 한편 patigha는 무엇에 대립하는, 반발하는, 거부한다는 의미로서의 ‘성냄’이다. 그러므로 이 쪽도 일반적으로 단지 ‘어떤 대상에 접촉한다, 부딪친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말하는 성냄이란 불평을 하는 것 등이지만 엄밀하게는 그것은 성낸 마음이 일어난 후의 행위이다. 성냄이 생겨나고 시간이 경과해서 나오는 행동을 세상에서는 성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소리를 들은 순간에 마음은 어둡게 되어 있고 그 순간부터 이미 성냄의 마음인 것이다.
명상에서 성냄의 마음을 인식할 때 자신의 마음이 밝은가, 어두운가를 인식하면 된다. 성냄을 버리고 마음 가볍게 살아가자. 질투도, 인색함도, 후회도 성냄이다. 성냄은 죄를 짓는 행위다. 사람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정신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痴根心(치근심 moha-mula-citta) 2종류
捨俱(사구)하며 疑相應(의상응)의 마음 하나,
捨俱(사구)하며 掉擧相應(도거상응)의 마음 하나,
이들 2종류가 極愚心(극우심)이라고 부른다.
捨俱를 먼저 말하는 것은 알기 쉬운 감각을 먼저 열거하고 있는 것이다.
명상 시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는 喜俱(기분이 좋음), 憂俱(기분 나쁨), 捨俱(즐겁거나 즐겁지도 않은 어중간한 상태) 등의 감각이 쉽다.
성냄은 확실히 언제나 마음이 어둡고 기분이 나쁜 우구(憂俱)이므로 알기 쉽다. 탐욕도 꽤 즐거운 희구(喜俱)이므로 알기 쉽다. 탐욕은 강력하지 않은 捨俱의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음악이 흐르고 있어도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경우는 사구(捨俱)이다. 痴(어리석음)의 경우는 반드시 捨俱 즉,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멍한 상태이다.
無知(무지)는 언제나 捨(사)의 마음이다.
無知의 경우 감각은 언제나 捨俱이다.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捨(neutral)인 보통의 감각이다. 그러므로 無知의 사람이 암울하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자신이 無知한지 어떤지도 알기 어렵다. 간단히 말하면 즐겁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그저 멍해 있는 상태가 無知인 것으로 捨俱이다.
예를 들면 게으름은 無知이지만 게을러서 즐거울 리 없고, 본인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게으름피워서 하고 있지 않으므로 괴롭지도 않다. 그것은 捨의 감각이다.
의심. 疑相應(의상응 vicikiccha-sampayutta)
無知의 의심은 지혜를 추구하는 의심이 아니고, 이해를 거부하는 것이다.
사물을 단순히 이해하지 않고, 이해하는 능력이 없으며, 단지 멍해 있는 느낌이다. 마음이 명료하지 않고 게으른 것이다. 관습에 얽매임도 疑(의심), 윤회(輪廻)를 의심하는 것도, 믿는 것도 의심(疑)dlek.
도거. 掉擧相應(도거상응 uddhacca-sampayutta)
掉擧는 마음의 혼란상태 즉, 들뜸의 상태이다. 침착하지 못해서 사물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이것도 욕구(탐욕)나 성냄이 아니고 단지 혼란스러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지인 상태이다.
인식력이 둔해서 사물을 명확히 인식하지 않는, 어쩐지 멍하니 인식하는 것은 도거의 마음에 속한다. 명확하지 않은 심소(감정)가 용해되어 있는 마음이 졸림에 빠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졸림도 痴根心(어리석음)에 속한다.
十惡은
殺生(살생), 偸盜(투도), 邪淫(사음)이라는 신체의 행위 3가지
妄語(망어), 兩舌(양설), 綺語(기어), 惡口(악구)라는 말의 행위 네가지
그리고 마음으로 망상하는 瞋恚(진에), 貪慾(탐욕), 邪見(사견)이라는 머리․마음만으로 일으키는 죄 3가지이다.
2) 欲界淨心(욕계정심 kama-avacara-sobhana-citta) 24종류
가. 욕계정심- 大善心(대선심 maha-kusala-citta) 8종류
喜俱(희구)가 함께 하는 智相應(지상응)의 마음에 無行이 하나, 有行이 하나
喜俱가 함께 하는 智不相應의 마음에 無行이 하나, 有行이 하나
捨俱(사구)가 함께 하는 智相應의 마음에 無行이 하나, 有行이 하나
喜俱가 함께 하는 智不相應의 마음에 無行이 하나, 有行이 하나
이들 8종의 마음을 欲界善心이라고 부른다.
어떤 좋은 행위를 할 때에는 24종류의 마음이 생겨난다. 24종류의 마음을 기반으로 해서 사람은 좋은 행위를 하고 있다. 不善은 12종류이고 善은 24종류이다. 하지만 우리 일반인간에게 생겨나는 善心은 이 24종류 가운데 8종류뿐이다. 나머지 16종류에서 8종류는 善心의 결과로서 단지 받아들이는 마음이고 또 8종류는 완전한 阿羅漢果(아라한과)를 깨달은 사람이 ‘단지 행할 뿐’인 善心이다. 결국 우리의 보통 행동 가운데 선한 행위를 할 때에 생겨나는 마음은 8종류뿐이다.
수행하거나 명상을 하면 色界, 無色界, 깨달음의 차원의 수준이 높은 善心도 여럿이 생겨난다. 그것을 더하면 善心은 17개나 더해져서 不善心보다 수가 많게 된다. 마음이 善한가, 不善한가를 결정하기 위해 필요한 心所(감정)는 貪瞋痴거나 不貪不瞋不痴의 어느 한 쪽이다.
欲界善心(욕계선심)도 우선 喜俱(희구)와 捨俱(사구)로 나누어진다.
欲界善心 8종류의 분류방식은 우선 喜俱(희구 somanassa-sahagata)의 마음과 捨俱(사구 upekkha-sahagata)의 마음이라는 2종류로 나눈다.
智相應(지상응 nana-sampayutta)과 智不相應(지불상응 nana-vippayutta)
善心은 이어서 智相應의 마음과 智不相應의 마음, 2종으로 나누어진다. 선한 행위를 할 때에 지혜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둘이 있다.
지혜(nana)란 사리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선한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이해가 있다. 또는 불교적인 마음의 작용을 잘 알고 있는 것, 불교의 진리․kamma(業) 법칙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올바른 인식․이해도 지혜가 있는 것이 된다.
喜俱(희구 somanassa-sahagata)의 智相應(지상응 nana-sampayutta)이나 智不相應(지불상응 nana-vippayutta), 捨俱(사구 upekkha-sahagata)의 智相應(지상응)이나 智不相應(지불상응)이라는 4가지가 된다.
善心(선심)을 無行(무행)과 有行(유행)으로 분류. 이 4종의 善心을 또 2종류로 나눈다. 無行(asankharika)과 유행(sasankharika)이다. 行이란 마음속의 작용이다. 즉시 예리하게 휘익 판단해서 행동하는 것이 無行이다.
불교도라면 지혜로 행동한다.
선한 행위는 누구라도 그 나름대로 하고 있지만 불교를 믿는 사람은 같은 선한 행위에 지혜가 들어오도록 하고자 한다. 청소․세탁이든, 무엇이든 지혜를 사용해서 행위하고 그 행위로부터 어떤 지혜를 얻는다.
無常(무상)을 이해한다.
苦(고)를 이해한다.
無我(무아)이고 實體(실체)가 없음을 이해한다.
事物(사물)의 生滅變化(생멸변화)를 이해한다.
執着(집착)으로부터 생겨나는 괴로움(苦)을 이해한다.
執着이 없는 마음의 깨끗함(淸)․가벼움(輕)을 體驗(체험)한다.
그러므로 喜俱인가, 捨俱인가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스스로 통제가능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한 행위에 지혜가 있는가, 없는가’라는 점뿐이다. 그리고 만약 지혜가 없다면 그곳에 지혜가 생겨나도록 노력할 수도 있다. 이 ‘선한 행위를 할 때에는 지혜가 중요하다’라는 포인트를 잘 파악해 주기 바란다.
# 욕계 無因心(무인심 ahetuka-citta) 18종류
아비담마에서의 因(hetu)이란 貪(lobha), 瞋(dosa), 痴(moha)와 그 반대인 不貪(alobha), 不瞋(adosa), 不痴(amoha)의 어느 것을 가진 마음을 의미한다. 이 6개에 의해서 善․不善을 판단하기 때문에 그 ‘善惡 판단의 因(hetu)'이라는 것이다.
善惡 판단은 貪瞋痴와 不貪不瞋不痴의 6개의 마음으로 구분하고 있다. 행동의 善, 不善은 이 6개의 어느 것이 들어와 있는가에 의해서 결정된다. 통상 어떤 원인으로 결과가 있다라는 의미의 因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비담마에서 無因心이라 말하면 ‘결과를 낳는 원인이 되지 않는 마음’이 아니고, 단지 간단히 ‘善도, 不善도 아닌 마음’이라는 의미가 된다.
인간의 마음은 전부 善, 不善뿐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善도 아니고, 不善도 아닌 선악의 판단이 없는 채로 단지 마음이 흘러가고 있을 때도 있다. 그 마음이 無因心이다. 이것에는 18종류가 있다.
無因不善異熟心 7개, 無因善異熟心 8개, 無因唯作心 3개이다.
가)욕계무인심-無因不善異熟心(무인불선이숙심 akusala-vipaka-citta): 7종
捨俱(사구)의 眼識․耳識․鼻識․舌識 그리고 苦俱(고구)의 身識, 捨俱의 領受心, 捨俱(사구)의 推度心, 이들 7종의 마음이 不善異熟心이라고 부른다.
나)욕계무인심-無因善異熟心(무인선이숙심 ahetuka-kusala-vipaka-citta): 8
捨俱(사구)의 善異熟인 眼識(안식), 耳識(이식), 鼻識(비식), 舌識(설식)과 樂俱(낙구)의 身識(신식), 捨俱(사구)의 領受心(영수심), 捨俱(사구)의 推度心(추도심)과 喜俱(희구)의 推度心 이들 8종의 마음이 善異熟無因心이라고 부른다.
다) 욕계무인심- 無因唯作心(무인유작심 ahetuka-kiriya-citta): 3종
捨俱(사구)의 五門引轉心(오문인전심)과 捨俱(사구)의 意門引轉心(의문인전심), 喜俱(희구)의 笑起心(소기심), 이들 3가지를 無因唯作心이라 한다.
이상의 無因의 不善異熟心 7개와 無因의 善異熟心 8개는 과거 業의 결과이다.
무인심은 이제 3가지 남아 있다. 무인(無因)의 유작심(唯作心)이다. 탐진치(貪瞋痴)도, 불탐불진불치(不貪不瞋不痴)도 아니고, 善도 惡도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과거 業으로부터 나타나는 異熟心도 아니다. 唯作(kiriya)이란 단지 기능하는 것뿐으로 조그마한 심리적인 작용이 일어날 뿐 業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한 마음이 3가지 있다.
첫 번째는 사구(捨俱, upekkhasahagata), 즐겁지도 어떠하지도 않은 보통 감각인 오문인전심(五門引轉心, pancadvara-avajjana-citta)이다.
五門이란 眼耳鼻舌身이다.
引轉(인전)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신체에는 그저 대상을 받아들이고 싶은 기능이 있다. 밖의 정보를 언제나 받아들인다. 정보가 들어오면 그것을 곧바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가 나의 신체의 어딘가에 닿으면 닿은 그 순간 그곳에 의식이 일어나고 만다. 곧바로 의식이 일어나도록 언제나 준비하고 있다. 아무리 내가 책에 빠져있어도 누가 손가락으로 신체의 어떤 곳이라도 닿으면 그곳에 바로 意識이 일어나고 만다. 즉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 깨어있어 준비하고 있는 상태,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 아주 재빨리 신체가 일어나는․반응하는 상태가 引轉心이다.
아무리 명상을 하고 있어도 어딘가에서 희미한 소리가 나면 벌써 그것을 듣고 있다. 우리에게는 五門(眼耳鼻舌身)이 대상을 끌어들이기 위해 깨어 있는 상태로 있다. 그 마음을 오문인전심(五門引轉心)이라 한다. 그 五門引轉心은 눈에도 생겨나고, 코에도 생겨나며, 五門의 어디에도 생겨난다. 五門引轉心이 없으면 그곳에는 감각이 없다. 닿아도, 잘라도 알지 못한다.
두 번째는 捨俱의 意門引轉心 (의문인전심 upekkhasahagata- mano- dvara- avajjana- citta)이다.
이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마음이다. 意識(의식) 즉, 갖가지 망상개념이 머릿속에 빙빙 돌고 있다. 언제나 어떤 생각을 하고 있다. 생각 없이 있을 수가 없다.
五門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意․心도 언제나 무언가를 생각하려고 준비 오케이의 상태이다. 대상을 끌어들이려는 상태에 있다. 신체가 언제나 무엇이 닿으면 ‘느끼자, 알아차리자’라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듯이 마음도 곧바로 意識․槪念(개념)이 생겨나도록 대비하고 있는 상태가 되어 있다. 이것은 너무나도 빠르게 1회 意門引轉心이 생겨나면 벌써 개념이 다음에서 다음으로 회전해버리고 만다.
명상이 간단한 것 같은데 좀처럼 실행하기 어려운 것은 그러한 극히 평범한 심리학적인 시스템으로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체는 통일하려고 해도 五門引轉心이 기능하고 있는 한은 좀처럼 통일 상태로 되지 않는다.
그래도 어느 정도 신체가 안정되어 가면 이번에는 意門引轉心이 발군으로 활동을 개시한다. 갖가지 망상이 생겨난다. 그것도 안정된 상태가 되어서 겨우 통일상태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상의 세계는 마음의 차원을 부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세 번째는 喜俱(희구)의 笑起心 (소기심 somanassa- sahagata- hasita- uppada- citta)이다. ‘웃을 때 생겨나는 마음도 단순한 기능일 뿐으로 業은 되지 않는다’라고 아비담마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마음은 아라한에게만 생겨난다’라고 말하고 있다. 아라한이 된, 깨달은 분들도 웃는다. 하지만 그 웃는 방식이 틀린다. 우리 같이 깔깔 웃지도 않는다.
빨리어에는 정견(sammaditthi)에 대한 부정형을 非正見(asammaditthi)라고 하지 않고 邪見(micchaditthi)으로 정해져 있다.
나. 욕계정심- 大異熟心(대이숙심 maha-vipaka-citta): 8종
喜俱智相應心은 無行이 하나, 有行이 하나. 喜俱智不相應心은 無行이 하나, 有行이 하나.
捨俱智相應心은 無行이 하나, 有行이 하나. 捨俱智不相應心은 無行이 하나, 有行이 하나. 이들 8종류를 有因欲界異熟心이라 부른다.
異熟心이란 결과의 마음으로 이 ‘大’異熟心이라든가 교재에 있는 것처럼 ‘有因’異熟心 등으로 말하는 경우는 다음 生으로 태어남을 결정하는 마음이다.
* 태어난 때의 마음이 일생 동안 이어진다.
* 異熟心(이숙심)이 평생을 결정한다.
*無因善異熟心(무인선이숙심)과 大異熟心(대이숙심)의 차이
이제까지의 설명을 정리해 본다. 악한 행위를 하는 不善心은 12종류 있고, 그 결과․應報(응보)를 맛보는 때는 7종류의 不善異熟心이 나타난다. 그것으로 不善의 세계에 대한 설명은 끝이다.
善의 세계, 善한 행위를 한 경우는 8종류의 마음으로 선한 행위를 한다. 그 결과․응보를 받는 경우는 16종류의 마음이 생겨난다. 16종류의 善한 결과가 나타나지만 그곳에는 시스템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喜俱의 지혜가 있는 無行(喜俱智相應無行)의 마음으로 어떤 善한 행위를 했다고 하자. 그 결과로서 8종의 大異熟心 가운데 ‘喜俱의 지혜가 있는 무행(喜俱智相應無行)의 마음’이 생겨날 지도 모른다. 이것은 태어남․轉生(전생)을 만드는 마음으로 8종류 가운데 어느 것 하나만 생겨난다. 그것으로 나머지 8개의 無因善異熟心을 感受(감수)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탄생을 만드는 마음은 하나밖에 없으므로 16종류의 마음 전부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태어남을 만드는 마음은 8종류의 大異熟心 가운데서 선택된 것이다.
五識(오식)으로 감지하는 無因善異熟心은 眼耳鼻舌身(안이비설신)의 五根(오근) 모두로서 감지하는 경우도 있고 그 가운데 한, 두개로 감지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이 어떤 善(선)한 행위를 하는 경우는 8종류의 大善心 가운데 어느 하나의 마음, 喜俱智相應無行心 등으로 행동한다. 그 때, 그 때 각각 어느 하나의 마음으로 행동한다. 지금 우리가 善한 행위를 할 때에는 8종류의 大善心의 어느 것이라도 마음속에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 결과가 생겨나는 경우는 大善心과 같은 이름의 8종류의 異熟心이 생겨난다.
그러나 異熟心 8개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어느 것이나 적당히 생겨난다는 의미는 아니다. 善心이라면 무엇이든 생겨난다. 大異熟心은 하나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喜俱智相應無行心(희구지상응무행심)으로 善한 행위를 하고 그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태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結生心이 생겨나야 한다.
그 새로운 마음은 喜俱智相應無行心의 異熟心, 결국 완전히 동일한 마음의 異熟心일지도 모른다. 혹은 두 번째, 세 번째인지도 모른다. 어느 것이든 상관없다. 그 결생심은 생애, 마음 흐름의 연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했던 ‘항상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하나의 사실을 인식하고 다른 사실을 인식하려고 하기 전에 일단 자신의 본래 마음으로 되돌아옴으로 새로운 인식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大異熟心은 한 사람 당 하나가 된다.
8종류 중 에너지가 가장 강한 것이 첫 번째가 된다. ‘기쁨이 있고, 지혜로움으로 스스로 행하는 마음(喜俱智相應無行心)이다. 기쁨으로 행하기보다는 기쁨 없이 보통의 마음으로 행하는 쪽이 에너지가 미묘하게 적다.
* 죽는 순간부터 내세에 태어날 순간까지 결생심(結生心)과 사심(死心)
다. 욕계정심- 大唯作心(대유작심 maha-kiriya-citta): 8종
喜俱智相應心은 無行이 하나, 有行이 하나. 喜俱智不相應心은 無行이 하나, 有行이 하나.
捨俱智相應心은 無行이 하나, 有行이 하나. 捨俱智不相應심은 無行이 하나, 有行이 하나. 이들 8종류가 有因欲界唯作心이라 부른다.
大心의 최후 8종류는 大唯作心이다. 大唯作心은 大善心 8종류와 동일하지만 결과를 낳는 행위․業은 없다. 결과도 없다. 이것은 阿羅漢들의 행위에 관한 것이다.
2. 色界心 (大心 mahaggata-citta) : 15
色界心(색계심)의 色(색 rupa)의 의미 : 色(물질 rupa)이라는 차원으로 건너가 있는(界 avacara) 마음이기 때문에 色界心(색계심)이다.
欲界心의 경우 인식하는 마음은 色聲香味觸의 범위이다. 色界心의 범위는 일상다반사로 일어나는 일반적인 마음이 아니다. 色界心은 명상 세계의 범위라고 이해하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1) 色界善心(색계선심) : 5개
尋(심), 伺(사), 喜(희), 樂(락), 一境性(일경성)이 함께 하는 初禪善心.
伺, 喜, 樂, 一境性이 함께 하는 第二禪善心.
喜, 樂, 一境性이 함께 하는 第三禪善心.
樂, 一境性이 함께 하는 第四禪善心.
捨(사), 一境性이 함께 하는 第五禪善心. 이들 5가지를 色界善心이라고 부른다.
* 色界禪定에 들 수 없는 五蓋(오개 panca-nivaranani)
欲愛蓋(욕애개 kamacchanda-nivarana) : 선정 혹은 초월한 지혜가 생겨나지 않는, 그것을 방해하고 있는 원인의 첫째는 이 眼耳鼻舌身에 철저하게 의지하고 있는 것, 결국 色聲香味觸으로부터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 자극을 받고 싶은 기분(欲)이다. 이것을 까맛찬다•欲愛(욕애)라 한다.
우리는 眼耳鼻舌身의 정보에 처음부터 끝까지 의존하고 있고,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철저하게 집착해서 붙잡혀 있다. 자신이 희망해서 三次元 속에 갇혀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애써도 초월의 지혜가 생겨나지 않는다. 보통의 인간은 물질적 정보가 눈으로 들어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귀로 소리가 들어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눈이나 귀로 정보가 들어오지 않으면 두려워진다. 죽임을 당할 듯한 기분이 된다. 이 세상의 공포 가운데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의 공포이므로 이 五根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에 착 달라붙는 핸디캡은 좀처럼 극복할 수 없다. 만약 우리의 마음이 튼실해서 눈이나 귀로 정보가 들어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러한 것은 귀찮고, 어차피 소량의 정보만이 들어오지 않는가.
넓은 우주 속에서 작디작은 자루 속에 들어가서 극히 작은 구멍 5개를 열어서 그곳으로 들어오는 약간의 경관을 보고 <나는 우주를 전부 알고 있지> 등으로 으스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쓸모없다>라고 알고 자신이 들어가 있는 이 자루를 부수어 버리면 틀림없이 전부 보일 것이다. 이 5개의 구명이 없어도, 오히려 이 5개의 구멍이 없으므로 해서 틀림없이 명확히 보일 것이다. 하지만 부셔지지 않는다. 수행하고 있는 사람조차 마음속에는 ‘眼耳鼻舌身으로 들어오는 정보의 세계는 즐겁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이 세상의 欲의 세계가 진정으로 싫어지면 정말로 ‘그것에는 의미가 없다. 이 세속적인 세계는 매우 협소하고, 조그마해서 싫은 세계다’라고 지혜로 납득하면 그 때 kamacchanda는 어느 정도 사라진다. chanda(意慾)가 3차원의 세계가 아닌 명상의 세계로 향하는, 명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억지로 명상하는 것이 아니고 ‘명상을 멈추시오’라고 말해도 숨어서라도 명상을 한다. 그 정도의 마음가짐이 있으면 초 차원의 색계선정의 레벨(수준)이 생겨난다.
瞋恚蓋(진에개 vyapada-nivarana) : 브야빠다•瞋恚(성냄)는 그 3차원의 정보에 거역해서 성내는 것이다. 欲을 떠난 것이 아니고 단지 欲의 반대로 달릴 뿐이다. 마음속으로 성을 내고 있는 한 우리는 3차원의 레벨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무엇에 성을 내는가 하면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 귀로 들어오는 정보에 성을 내기 때문에 결국 3차원의 수준인 것이다.
昏沈․睡眠蓋(혼침․수면개 thina․middha-nivarana) : thina란 마음이-이상한 표현이지만- ‘위축되는 것’이다. 지식이나 인식이 크게 팽창해서 밝게 되지 않고, 마음이 자신 속으로 작게 위축되어 숨고 싶게 되는 것이다. 당당히 밝고 활발하게 되지 않고, 마음이 어둡고 약하게 위축되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으로는 아무리해도 초월의 마음은 생겨나지 않는다. 마음이 회전하는 에너지가 적은, 회전은 하지만 에너지가 부족한 상태이다. 이 숨고 싶은 에너지가 있는 한 초월의 지혜는 생겨나지 않는다. 명상은 숨어서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방해받기 때문이다. 마음은 자신의 좌우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도 정신적으로는 당당하게 있을 수 있는 정도, 숨지 않는 상태, 불외(不畏), 공포감이 없는 상태를 철저하게 만들어야 한다.
middha는 둔하고, 졸리며, 나른한 것이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활동하고 싶지 않은, 숨어서 자고 싶을 뿐이다. 인간이 솔직하게 말해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잠자는 것이다. 기본적인 마음의 상태는 ‘숨고 싶다․자고 싶다’이다. 왜 자고 싶은가 하면 잠들면 眼耳鼻舌身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찾으며 고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생명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眼耳鼻舌身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찾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잠들면 마음이 자기회전하기 때문에 고생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다. 마음이 휴식한다. 자고 싶다는 기분이 있는 한은 禪定은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도 누구에게나 생태적으로 있는 하나의 거대한 핸디캡(장애)이다.
掉擧․後悔蓋(도거․후회개 uddhacca․kukkucca-nivarana) : 掉擧란 기본적으로 숨고 싶은 마음이 숨을 곳이 사라져서 밖으로 드러나는 그 순간에 혼란에 빠지는 혼란 상태인 것이다. 초월한 지혜를 얻고 싶다면 이것이 문제이다. 마음은 숨고 싶어 안달한다. 억지로 밖으로 내보내면 혼란스럽다.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kukkucca는 말 그대로 후회이다. 명상할 때도 당당한 자세를 취하는 쪽이 좋다. 지금까지 어떤 나쁜 행위를 하였어도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당당한 태도를 취하고, 밝은 마음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후회하면 과거의 실패나 죄를 회상하게 되고 마음이 어두워져서 에너지가 사라진다. 그래서 초월적인 지식이 생겨나지 않게 된다. 후회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끄달려 있고 명상하고 있어도 그것이 떠올라서 사실의, 진리의 세계로 마음이 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후회는 선정이나 초월적인 지혜를 얻고, 마음의 차원을 높이는 데에는 당치도 않은 장애(핸디캡)이다.
疑蓋(의개 vicikiccha-nivarana) : 疑(의심). 이 경우의 의심은 지식적인 의심으로 ‘사물을 가마우지 물마시듯이 하지 마라. 사물을 이해하기 위해 올바른가의 여부를 스스로 강력하게 확인해서 이해하라’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惡이라 하는 ‘疑(vicikiccha 위찌낏차)’는 아니고 진리를 알기 위한 활기참이다. 활기차고 정신적으로 힘이 있어 남이 말하는 것을 가마우지 물마시듯 하지 않을 뿐이다.
여기서 선정을 방해하는 장애로서 말하고 있는 ‘疑’는 마음의 약함이다. ‘이것으로 될까. 정말일까. 만약에 잘못되면 어쩌나’ 등으로 우물쭈물하고 있는 상태이다. 확신이 없는 것이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확고하지 않은 상태가 ‘疑(vicikiccha)’이다. ‘믿지 않는다’고 말할 뿐인 겁쟁이 상태로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경험에 도전하는 용기가 없거나, 능력이 없거나 그 둘 중 하나의 원인으로 자신의 주관의 껍질에 틀어박히고 싶은 것이다. 새로운 지식 등에 대해서 조사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 거절반응을 일으킨다. 이유를 물어도 본인은 ‘싫으니까 싫다’의 정도밖에 말하지 않는다. 이 상태는 ‘疑蓋 vicikiccha-nivarana’인 것이다.
명상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의 도전이다. 모두가 첫 경험이 되는 것이다. 두렵거나 거절반응을 일으키거나 하면 진전이 없다. 처음부터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에 도전해서 새로운 경험의 세계로 돌입하는 용기가 명상의 경우는 필요하다. ‘疑(vici kiccha)’는 그 반대이고 장애가 된다.
* 五蓋가 사라지면 장애(蓋)가 기능하지 않게 되면, 혹은 장애를 극복하면 거대한 에너지를 갖고 있는 마음은 그 거대한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활성화된 상태로 된다. 眼耳鼻舌身에 의존하지 않아도 마음은 염려 없고, 태평스러우며, 스스로 죽음의 공포감에 승리했으므로 자신만만한 상태이다.
이들 5개의 欲愛蓋(kamacchanda nivarana)를 극복한 것이므로 자신만만하고 힘이 강한 상태이다. 瞋恚蓋(vyapada-nivarana)를 소멸한 ‘성냄이 없는 상태’는 지극히 밝은 상태이다. 昏沈․睡眠蓋(thina․middha-nivarana)를 소멸하면 더 이상 숨어 들어갈 필요가 전혀 없고, 졸림도 전혀 없다. 극히 활발한 상태이다. 掉擧․後悔蓋(uddhacca․kukkucca-nivarana)의 혼란 상태를 소멸하면 후회가 전혀 없기 때문에 안정되어 있고, 숨어들려고도 않고 마음은 밖으로 표출된다. 마음이 밖으로 표출되어도 혼란은 없다.
疑蓋(vocoloccha-nivarana)도 없어져서 도전정신이 왕성하게 된다. 이 究極的(구극적)인 정신상태가 되면 곧장 다음 순간에 선정상태의 마음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五蓋(오개)의 성질과 그것을 소멸한 상태를 이해하면 이 세상에서 ‘선정상태에 들었다.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깨달았는가의 여부를 곧바로 알게 된다. 사람이 말하는 정신 상태는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깨달았다’라고 들으면 그대로 믿든지, 부정하든지 양자일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경험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어버리면 곤란하다. 그래서 불교는 심리학적으로 五蓋(다섯의 장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상대가 ‘五蓋(오개)를 혁파하고 있다’라는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으면 상대의 정신상태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명상상태의 경우는 심리학적인 해명이 필요하다.
* 五蓋와 煩惱(번뇌)의 관계 : 번뇌란 마음의 쓰레기(오염)이다. 마음에 나타나는 모든 오염을 번뇌라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생명은 무지(무명)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五蓋는 번뇌의 일부이다. 이 다섯은 마음이 초월의 수준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있다. 사마디(삼매)명상으로 선정에 들기 위해서도, 위빳사나명상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도 五蓋가 기능하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사마디명상에서는 五蓋(오개)가 가라앉아서 수면상태가 되는 것이다. 위빳사나명상에서는 깨달음을 여는 순간에 번뇌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없어지게 된다. 수면상태로 되지 않는다. 번뇌는 한 번에 소멸하기는 어려우므로 4단계로 소멸해야 한다. 어떻게 번뇌가 사라지는가 하면 위빳사나명상은 사마디를 목표로 하지 않고, 사물을 主觀(주관)이 아닌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혜’가 나타난다. 지혜에 의해서 번뇌가 없어지게 된다.
* 色界禪定(색계선정)에 들어가는 방법
색계의 善心을 만들기 위해서는 명상을 해야만 한다. 그 경우는 사마디(사마타, 삼매)명상을 한다. 사마디명상을 하는 경우는 3차원의 레벨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에 대단한 집중을 요한다. 그러므로 어떤 하나의 대상을 취해서 집중적으로 명상한다. 그렇게 하면 그것에 대해서 재미있어져서 欲(욕구)의 세계는 어떠하든 상관없다. 그것으로 선정의 상태가 생겨난다. 그러한 실천방법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壁(벽)을 보고 명상한다. 흰색을 보고 명상한다. 자비의 명상만 해본다. 그렇게 해서 오로지 집중하고 있으면, 그것만 행하고 있으므로 점점 집중해서 기분이 좋아지게 된다. 그렇게 하면 다른 것에 흥미를 잃어 간다. 그래서 五蓋가 억제되는 것이다. 벽을 보고 명상하면 蓋가 억제되는 것이다.
이전에도 설명하였지만 벽을 보고 명상하면(地遍) 각가지 이상한 사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평소라면 아무 것도 없는 벽이지만 이것을 30분 정도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지금까지 본적도 없는 갖가지 사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면 그것이 재미있게 된다. 재미있게 되면 텔레비전을 보고 싶다던가, 이야기하고 싶다는 3차원의 즐거움은 이미 시시해지고 그것만을 하게 된다. 그리고 차원을 초월하기 위해 조그마한 시도를 해 본다. 눈을 감아도 벽이 보이는지의 여부를 시험한다. 눈을 감아도 벽이 보이면 마음은 눈에 의지하는 것을 어느 정도 하지 않게 되어 있다. 눈을 감고도 벽이 보인다면 다른 장소에 가서 눈을 감고 벽을 응시해 본다. 벽이 보이면 그곳에서 다시 명상한다. 그런 식으로 계속하면 ‘벽’이라 해도 눈에 보이는 것은 실제로 ‘빛’이므로 점점 빛 자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빛이 보인다면 진짜의 물질이 보이고 있는 상태이다. 그곳에서 마음이 억지로 활동하는 상태가 휙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상태가 생겨난다. 그것은 대상과 자신을 일체감으로 느낀다. 하나가 되었다고 느낀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있고, 대상을 보고 있다’라는 상태였지만 갑자기 대상과 자신이 하나로 용해되어 경험만, 認識(인식)만이 흐르고 있는 듯한 경험이 생겨난다. 이것이 제1선정이다.
五蓋만 사라지면 그 제1선정은 경험될 수 있다. 하지만 끝임 없이 그 명상을 되풀이해서 간단히 선정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을 몸에 배어지게 해야 한다.
*제1선정에서 제5선정까지의 특색
제1선정의 특색은 이전에 설명하였다. 우선 尋(vitakka)․伺(vicara)가 있다. 결국 개념․말이 기능하고 있다. 喜(piti) 즉, 신체로서 실제로 느끼는 굉장한 기쁨이 있다. 樂(sukha)이라는 대단한 희열감이 있다. 마음과 몸으로 실제 느끼는 경험인 것이다.
그러고 나서 一境性(ekaggata)이라는 철저하게 평온함이 있다. 어려운 것은 이 평온함이 있는 상태, 사마디(삼매)상태이다. 같은 상태를 꼼짝하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지만 자칫하면 이 일경성이 끊어져버린다. 그래서 다시 본래대로 되돌아가 버린다. 그러므로 선정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사람은 이 평온함을 지키고 싶어진다. 무엇이 일어나든 아무렇지 않게 냉정한 마음으로 대상을 보고 있도록 하는 것이다.
土色을 보고 명상을 하는 地遍(흙의 요소)을 예로 설명하였다. 그 때도 갖가지 현상이 나타나 보이지만 집중력만은 끊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이는 벽이 변했을 뿐으로 흥분하거나 놀라면 일경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다시 명상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만 한다. 명상의 경우 一境性을 소중히 지키는 것이다. 언제나 평온해서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土色을 보는 명상((地遍)의 경우 눈으로 보면서 명상하므로 어쨌든 힘이 너무 들어가서는 안 된다. 선정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편하게 계속 보는 것만으로도 갖가지가 보인다. 보여지면 왠지 모르게 마음속에 혼란이 일어난다. ‘앗, 이상하다’는 느낌이다. ‘무언가, 이건’이라고 재미있게 된다. 그러한 혼란함 없이 平常心으로 계속 보는 능력(一境性 ekaggata)이 필요하다. ‘앗’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어쨌든 ‘앗, 이상하다’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러므로 평온함이란 지극히 어렵다. 조금 평소와 다른 이상한 것이 보이면 곧바로 ‘앗’ 하고 마음이 움직여버린다. ‘앗’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이상한 것은 사라져버린다. 그러므로 一境性(집중력)을 유지해야만 한다. 명상이 진전되어 선정에 들어 있어도 선정이 끊어지는 것은 이 집중력을 잃어버린 때이다. 냉정하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 하나의 사물만 보고 있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그러므로 언제나 냉정한 마음으로 계속 보는 것이 필요하다.
제1선정에 들면 지식은 기능하고 있고, 신체가 아주 편하게 되며, 희열감이 있고, 그 위에 일경성이라는 집중력이 있다. 제2선정은 지식이 기능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언어가 없어도 되는 상태이다. 경전에 의하면 제1선정에서는 지식․사고방식이 기능하고 있고 제2선정에서는 지식․사고방식은 기능하고 있지 않다. 思考(사고)함이 없이 단지 마음이 회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지극한 기쁨(喜)과 희열감이 있다. 집중력도 있다. 그것이 제2의 단계이다. 그 제2선정을 아비담마에서는 둘로 나누고 있다. 경전의 제2선정으로 사라지는 지식․사고방식(vitakka-vicara) 가운데 아비담마에서는 제2선정에서는 尋(vitakka) 즉,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사라진다. 제3선정에서는 伺(vicara) 즉, 말을 사용하지 않아도 개념에 끄달려 들어가지 않는다. 아비담마의 제4선정(경전의 제3선정)의 경우는 喜(piti) ‘아아, 즐겁다, 기분이 좋다’는 상태가 사라진다. 언어 따위는 없다. 단지 樂(sukha)뿐이다. 물질적인 신체의 즐거움(piti)이 아니고 신체의 감각이 사라진 상태로 지극한 희열감이 있고, 평온하고, 집중력도 있다. 이것이 4번째이다. 아비담마의 제5선정(경전에서는 제4선정)에서는 이 희열감도 사라져버린다. 捨(upekkha)의 상태이다. 집중력이 있고 자신이 있을 뿐이다. 그것뿐이다. ‘어쩐지 있다’라는 느낌이다.
색계의 제4선정(아비담마의 제5선정)에 들면 지복감도 없고 왠지 모르게 냉정한 마음이다. 기쁨도 느끼지 않는다. 괴로움도 없다. 단지 단순히 ‘존재할 뿐’이라는 상태이다. 그 정도로 마음이 성장하면 매사를 자유자재로 할 수가 있다. 물질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가 있다. 이미 3차원을 초월해 버렸기 때문에 3차원의 물질은 그 마음이 말하는 대로 되는 것이다. 소위 신통력을 얻게 된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色界의 제4선정(아비담마의 색계 제5선정)에 들었기 때문이다. 명상은 3차원 수준이 아니다. 마음의 명령에 의해서 3차원의 몸이나 물질은 곧바로 변화하기 때문에 명상하는 사람은 3차원의 세계를 실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후에 관찰(paccavekkhana)
色界 5禪定의 경지
色界(색계) 최후의 선정상태에는 냉정한 마음(upekkha)과 일체감(ekaggata)이라는 둘이 남는다. 이 상태가 되어도 후에 관찰하면 ‘이것 이상 뛰어난 경지는 없을까. 어쩌면 더욱 명상을 지속하면 더욱 수승한 경지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어쩐지 느껴진다.
어떻게 느껴지는가 하면 ‘자신은 어떻게 해서 일체감을 얻었을까’라고 관찰하고, ‘자신의 이 일체감은 물질 에너지와 마음 에너지가 깔끔히 일체가 되어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맛보고 있는 것이다’라고 발견하게 된다. 이런 발견은 선정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횡설수설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선정에 들기 위해서는 어떤 종교의 명상일지라도 어떤 대상이 있어야 한다. 호흡명상은 불교에서도 주요한 명상의 하나이다. 그 호흡명상이라도 마음을 어떤 물질적인 기능(작용)에 연결해 둔다. 어떤 대상을 정하고, 그것을 보면서 명상할 때도 분명하게 마음을 부착하여 둔다. 그것에 의해서 일체감이 생겨난다. 벽을 보고 있으면 예를 들어 벽을 지식의 레벨로 보지 않아도, 벽으로부터 들어오는 물질적인 정보에 깔끔하게 마음이 들어붙어 하나가 되고, 함께 흘러가게 된다. 이것이 선정상태이다.
그리고 색계선정의 최후 상태에 도달한 사람이 발견하는 것은 ‘물질 에너지와 자신이라는 마음 에너지가 함께 움직이고 있다. 不二(불이)이다’라는 것이다. ‘둘이 아니다. 하나이다. 물질도, 마음도 한가지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힌두교의 베단타철학에서 말하는 경지인 ‘不二’이다.
色界 5禪定에서 無色界(무색계)로
색계선정에서 빠져나온 후에 관찰하여 ‘일체감은 물질 에너지와 자신의 마음 에너지가 하나로 행동하면서 생겨나는 것이다’라고 알게 된다. 그 사람이 물질 에너지를 억누르고, 명상하여 마음을 점점 성장시켜 가면 이 물질 에너지가 보이지 않게 된다. 보이지 않게 되면서 ‘직접 체험하고 있는 것은 地, 水, 火, 風’이라고 알게 된다. ‘소립자가 가장 빠르게 활동하는 물질로서 마음은 그것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라고 안다.
‘그럼 이 물질의 극한 차원도 극복하자’라고 생각하고 더욱 집중한다. 색계명상에는 ‘빛과 함께 되었다’라든지 자신이 체험한 대상이 있었다. 벽을 보고 명상하는 경우 벽의 색과 자신의 마음 파동이 하나로 물결치듯이 되어 조화한다. 그런 상태가 된다. ‘이 대상과 일체감을 느끼는 상태를 빠져나와 보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거기서 수행자는 모든 물질적인 대상이 사라진 상태를 회상해서 그것에 집중한다.
명상 중에서 호흡명상이 가장 우수하다고 하는 이유는 진공상태를 관찰하는 자세로 들어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순서 있게 진행해야 한다. 처음은 호흡도 물질이고, 모양이 있으며, 긴 호흡이든 짧은 호흡이든 모양으로 느낀다. 선정에 들어서 점점 선정이 진행되면 곧 형태가 없는 명상까지 이른다.
欲界의 선정은 ‘마음에 무엇을 체험’하는 수준(레벨)이다. 色界는 마음이 무엇을 체험하는 차원이다. 無色界는 마음이 무엇으로 되는 차원이다.
2) 色界 異熟心(색계 이숙심) : 5
尋(심), 伺(사), 喜(희), 樂(락), 一境性(일경성)이 함께 하는 初禪 異熟心
伺, 喜, 樂, 一境性이 함께 하는 第二禪 異熟心
喜, 樂, 一境性이 함께 하는 第三禪 異熟心
樂, 一境性이 함께 하는 第四禪 異熟心
捨(사), 一境性이 함께 하는 第五禪 異熟心 이들 5가지를 색계 이숙심이라 한다.
명상하여 선정에 든 사람이 다시 태어나면 인간 등이 사는 삼차원에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마음이 차원을 초월했기 때문에 범천에 태어난다. 범천에 태어나는 경우는 선정의 수준에 의해서 그것에 상응하는 어떤 동일한 수준의 장소에 태어난다. 태어나면 그곳에 있는 마음은 色界의 異熟心이 된다.
3) 色界 唯作心(색계 유작심) : 5
尋(심), 伺(사), 喜(희), 樂(락), 一境性(일경성)이 함께 하는 初禪 唯作心
伺, 喜, 樂, 一境性이 함께 하는 第二禪 唯作心
喜, 樂, 一境性이 함께 하는 第三禪 唯作心
樂, 一境性이 함께 하는 第四禪 唯作心
捨(사), 一境性이 함께 하는 第五禪 唯作心 이들 5가지를 色界 唯作心이라 한다.
唯作心은 阿羅漢(아라한)의 마음이다.
3. 無色界心(무색계심) : 12
1) 無色界善心 : 4
空無邊處善心(공무변처선심), 識無邊處善心(식무변처선심), 無所有處善心(무소유처선심), 非想非非想處善心(비상비비상처선심)
滅盡定(멸진정)은 불교뿐
불교의 깨달음을 열어서 아라한이 되면, 최저 不還果(불환과)에 이르면 그 사람에게는 번뇌가 없고, 존재하고 싶은 마음(bhavatanha)도 이미 없다. 그래서 그 사람이 명상해서, 예를 들면 非想非非想處定에 이르러 결국 마음이 무엇을 인식하는지, 못하는지의 여부를 말할 수 없는 희미한 상태가 되면 그 때 존재하고 싶다는 번뇌도 없기 때문에 ‘이 파도도 멈추면 어떨까’라는 단계로 들어간다. 不還이나 阿羅漢인 사람이 사마디에 들면 마음의 파도․마음의 흐름을 끊어서 멈출 수 있다.
이것도 하나의 선정이다. 마음의 파도가 완전히 사라진다. 그러면 물질은 무색계에 드는 순간 기능하지 않게 되고, 마음의 기능도 여기서 끊어진다. 그것을 멸진정(nirodhasamapatti)이라 한다. nirodha(滅)와 samapatti(定)로 빨리어에서 직역하면 ‘滅定’이다. 한역으로는 滅盡定으로 알려져 있다. 滅盡은 ‘번뇌는 사라졌다’의 의미이다.
이 滅盡定의 상태로 살아가면서 열반이라는 상태, 사라진다는 상태를 체험한다. 그 때는 ‘이미 신체는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쓰여져 있다. 마음조차도 멈추어져 있기 때문에 신체의 기능도, 물질도 움직이지 않고 기능하지 않는다. 보통의 물질과는 다르게 된다.
위빳사나의 깨달음은 그 선정(samadhi)이 있는 순간에만 체험할 수 있다. 預流果(예류과)가 되거나, 一來果(일래과)가 되는 것은 단지 순간뿐으로 그것을 체험할 수는 있다. 계속 체험하고 싶다면 선정을 수행해야한다.
‘깨달았다’란 滅盡定(멸진정)을 극히 순간으로 체험한 것이다. 그것으로 번뇌는 사라진다. 번뇌를 소멸하는 마음이 없으면 체험할 수 없다.
2) 無色界異熟心 : 4
空無邊處異熟心(공무변처 이숙심), 識無邊處異熟心(식무변처 이숙심), 無所有處異熟心(무소유처 이숙심), 非想非非想處異熟心(비상비비상처 이숙심)
3) 無色界唯作心 : 4
空無邊處唯作心(공무변처 유작심), 識無邊處唯作心(식무변처 유작심), 無所有處唯作心(무소유처 유작심), 非想非非想處唯作心(비상비비상처 유작심)
4. 出世間心(출세간심 lokuttara-citta)
통상의 마음을 초월하는 조건. 초월한 마음을 만드는 조건은 좀처럼 갖추기 어렵다. 깨달을 정도의 마음이나 몸의 상태를 모두 갖추는 것은, 진실하게 말하면, 거의 영(제로)에 가까울 정도의 귀중한 확률이다. 그 정도는 이해해 두기 바란다.
붓다께서는 “Khanam vo ma upacchaga(너희는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이 순간이란 우리의 지금 상태이다. 1. 인간으로 태어나고, 2. 부처님을 만나고, 3. 적당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4. 적당히 풍족해서 근심이 없는 순간이다. 이 상태를 ‘얻기 어려운 것(dullabha)이 4가지 있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4가지를 갖추는 순간은 윤회 속에서 지극히 드물게 나타난다. 그것은 길고 긴 윤회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로 순간이다. ‘그것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는 의미이다. 붓다께서는 신중히 생각하신 후 말씀하신다.
出世間(출세간)의 의미
出世間心의 ‘出世間’이란 loka(로까)와 uttara(웃따라)가 합쳐져서 lokuttara(로꿋따라)고 한다. loka는 세계이다. 물질적인 세계라고 하기보다 불교에서는 생명에 관해서도 세계(loka)라 한다. 우주의 물질적인 물체도 loka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물질과 관계없이 생명이라는 의미로도 loka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생명의 세계 전부 포함해서 loka이다. 존재의 세계, 존재의 차원이다.
uttara는 넘어선다는 의미이다. 존재라는 차원을 이미 넘어섰다, 초월하였다. 여하한 생명의 차원도 그 틀을 넘어섰다. 한역으로는 간단히 ‘出世間, 世間에서 나오다’라고 하여 용어는 간단하지만 진정한 의미는 파악하기 어렵다.
lokuttara는 생명의 차원을 넘어섰다, 생명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생명이 아니게 되었다’라고 한다면 부정적인 말이므로 마치 허무주의와 같이 들린다. 그러므로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넘어섰다’라고 긍정적인 말을 사용하고 있다.
道心(도심, magga-citta 막가-찟따) : 4
預流道心(예류도심), 一來道心(일래도심), 不還道心(불환도심), 阿羅漢道心(아라한도심)이라는 이들 4가지를 出世間善心이라 부른다.
果心(과심, phala-citta 빨라-찟타) : 4
預流果心(예류과심), 一來果心(일래과심), 不還果心(불환과심), 阿羅漢果心(아라한과심)이라는 이들 4가지를 出世間異熟心이라 부른다.
預流果에서 사라지는 3가지의 번뇌
1) 有身見(유신견 sakkayaditthi)
그 ‘실체로서 무엇이 있다’라는 ‘사고방식 ditthi(딧티)’이다. 무언가 여기에 진짜인 체계(시스템)가 있다’라는 사고방식이다. 일반적인 말로 하면 나에게는 ‘나인 것’이 있다라는 사고방식이다. ‘참나’가 있다..
2) 疑(의 vicikiccha)
어떤 疑인가 하면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의심, 인과법칙에 대한 의심, 불도․수행방법에 대한 의심이다. 有身見만 자르면 이어서 疑의 번뇌도 사라진다.
3) 戒禁取(계금취 silabbataparamasa)
의식의례에의 집착은 마음에 자연히 생겨나는 번뇌의 하나이다.
一來果에서 두 개의 번뇌가 감소한다.
kamaraga(欲愛 욕애)와 vyapada. 강렬한 성냄이다.
不還果(불환과)에서 탐욕과 성냄은 완전히 소멸된다.
아비담마에서 취급하는 번뇌의 리스트(목록)에는 두 개의 이름이 더 열거되어 있다. 질투(issa)와 인색(macchariya)이다. 이 두 가지 번뇌는 不還果에서 사라진다. 一來果에서 일부가 사라져서 약해진다. 不還果가 되면 성냄은 이제 완전히 생겨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만(慢) 즉, 자신과 남을 비교하는 마음의 기능은 생겨날지도 모른다. 不還果가 되어서야 비로써 성냄과 욕구가 사라진다. 그래도 아직 번뇌가 남아 있다. 성냄은 완전히 사라지고 욕구 즉, 성욕이나 식욕 등 욕계차원의 보통의 욕구는 완전히 사라지지만 色界와 無色界에 대한 집착은 남아있다. 오만(高慢)과 掉擧(도거 : 들뜸)와 無明은 아직 남아있다.
마지막 해탈 : 阿羅漢果(아라한과)
아라한이 되면 이미 모든 번뇌를 소멸해 있다.
아라한이 되어서 비로써 사라지는 번뇌는 rupa-raga, arupa-raga, mana, uddhacca, avijja라는 다섯 가지이다. 色貪(색탐) : rupa-raga(루빠-라가),무색계에 대한 욕구(arupa-raga 아루빠-라가), 오만(慢 mana 마나<프라이드>), 掉擧(도거 uddhacca 웃닷짜), 無明(무명 avijja 아윗자)
‘오만은 있는 것이다’라고 인정한다. 프라이드는 있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는, 남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행위는 하지 않고 겸손하자’라고 힘을 낸다. 그것이 수행이고, 계율이다.
명상실천에 힘쓰는 사람들은 ‘어쨌든 안정되어야 한다.’라고 도를 넘는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깨달음을 열 때까지는 마음 따위는 안정되지 않는다라고 이해해 두는 편이 마음 가볍게 명상실천을 할 수 있다.
avijja(무명) 사싷 이 번뇌가 사라지면 일체의 번뇌가 소멸된다. 아라한이 되기 위해 수행할 때 ‘탐욕(raga 라가)을 버리자’ 등으로는 전연 노력하지 않는다. 그러한 번뇌는 不還果(불환과)에서 깨끗이 소멸되어 있다. 그렇지 않고 ‘무명을 버리자’라고 노력한다. 무명을 부수는 지혜가 완벽하게 나타나기를 바란다.
預流果를 목표로 한 사람은 ‘지혜가 나타나기를’이라고 무명(avijja)에 도전한다. 그러므로 有身見(유신견)이라는 邪見(사견)이 소멸되도록 도전해야 한다.
一來果를 목표로 하는 사람도 무명의 소멸에 도전한다. 성공하면 욕구와 성냄(진에)이 약하게 된다. 不還果를 목표로 하는 사람도 ‘무명을 소멸해 보자’라고 무명에 도전한다. 그래서 성냄과 욕구가 마음에서 완전히 소멸한다. 아라한인 최후의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사람도 무명을 완전히 소멸하는데 도전한다. 무명이 완전히 소멸됨과 동시에 지금까지 남아 있던 질이 나쁜 5개의 번뇌가 완전히 소멸한다. 그러한 이유로 불도는 ‘지혜에 시작해서 지혜로 끝난다.’는 것이다.
모든 번뇌는 무명(avijja)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무명에서 발생한다. 번뇌는 한 가지 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무명뿐이다. 무명이 부수어지면 번뇌는 모두 완벽하게 부셔져 소멸된다.
깨닫는 순간의 마음이란
마음에는 언제나 대상이 있지만 깨닫는 순간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
마음의 활동이 세간의 차원 속에서 대상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면 마음이 있어서 출세간의 마음이 생겨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모순이다. 그래서 단지 어느 한 곳 즉, 어느 한 순간만 마음은 대상을 취하지 않는다. 일체는 無常임을 안다면 이미 무엇을 대상으로 취하던 싫어서 마음이 침체된다. 그렇지만 마음은 위빳사나(알아차림)를 계속하고 있으므로 스스로 노력하지 않아도 언제나 확인상태에 있다. 그래서 마음은 너무나 싫기 때문에 어느 순간만 대상을 취하지 않는다.
깨달음이란 이 ‘취하지 않는 순간’인 것이다. 어떤 것도 대상으로 취하지 않는 순간이다. 사실 ‘자신이 있다’라는 개념도 그 순간에는 없다. 일체가 사라진다. 일체가 사라진 바로 다음 순간에 다시 자신이라는 개념이 나타나서 ‘아, 그 순간이 훌륭했다’라고 안다. 그곳이 預流果心이라는 마음이다. 그 대상을 취하지 않는 순간은 마음이 멈춘다. 우리의 부정적인 표현 방식으로 말하면 대상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結語
簡略心(간략심 citta-sankhepa) : 89
三性分別攝偈 (3성분별섭게 jati-bheda-sangaha-gatha)
이상으로 不善心 12, 善心 21, 異熟心 36, 唯作心 20으로 計 89心이 된다.
四地分別㒤偈(4지분별섭게 catubhumika-bheda-sangaha-gatha)
또 그 가운데 欲界心을 54종, 色界心을 15종, 無色界心을 12종, 無上(出世間)心을 8종으로도 분류한다.
結語와 序(결어와 서 nigamana-nidana)
또 여기서 慧眼者(혜안자)들은 마음을 89종으로도, 혹은 121종으로도 분류한다.
欲界心은 不善心 12, 無因心 18, 欲界淨(善)心 24,합 54개이다. 이들은 누구에게나 극히 보통으로 생겨나는 마음이지만 唯作心 가운데 1개는 阿羅漢에게만 일어나는 마음이다.
다음으로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마음이 아니고. 명상을 통하여 특별히 일으켜야 하는 色界心이 15, 無色界心이 12개이다.이 27개는 성장한 마음, 大心(mahaggata-citta)이다. 그리고 이 세상과 아무 관련도 없는 出世間心(lokuttara-citta)도 8 또는 40개 있다. 이들을 전부 합하면 마음은 89 혹은 121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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