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재가자 포살법회_칸띠(khanti)와 띠띡카(titikkhā) (20220416.담마와나선원)

담마마-마까 2022. 6. 17. 09:00

https://youtu.be/rKjZRIeha5s

* 재가자 포살법회_칸띠(khanti)와 띠띡카(titikkhā) (20220416.담마와나선원)

(14:28 이후부터 녹취하였습니다.)

 

오랜만에 뵙죠?

오늘은 비구 스님들은 4명이 안 되면 포살을 못해요. 비구 포살은 안 되는데, 여러분들은 팔계를 받아지녔으니 재가자 포살은 할 수가 있습니다. 재가자들은 포살일이 몇번이죠, 1년에? 1주일에 한번씩이라고 계산을 해보면, 비구스님들은 보름에 한번씩이니까 24번이 되죠. 여러분들은 몇번이에요? 48번. 1년으로 치면 포살일이 48번입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일주일에 하루 날을 잡아서 그날은 청정하게 계를 지키면서 수행한다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오늘은 계절로 보면 여름입니다. 그렇죠? 인도력으로 하면. 우리 음력으로 치면 2월 보름부터 여름이 시작되니까. 우안거 6월 보름 전에 6월 14일까지는 여름이 되는 거죠. 그다음 우기 4개월 끝나고 나면, 겨울 4개월 이렇게 3개의 계절로 됩니다.

오늘 음력 3월 보름이 되죠? 그럼 비구 스님들은 우기 계절에 3번째에 해당이 되는 포살일입니다. 3계절이 있는데 각 계절에서 3번째하고 7번째는 음력이 14일까지입니다. 인도력으로 계산을 하면. 나머지는 15일까지입니다. 윤년 들어가는 건 빼고 그렇게 되니까, 14일이 되는 게 일년 중에 6번이 있고, 나머지 15일 되는 것은 일년 중에 18번이 되게 됩니다. 그렇게 계산을 하면 비구스님들의 포살일 계산하는 방식이 편합니다.

여러분들은 거기다가 다시 또 세분화해야 되거든요. 복잡해가지고 잘 안됩니다. 그래서 아예 일년 중에 무슨 날은 포살일로,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일요일날 선원에 나오는 경우들이 많죠? 일요일을 아예 포살일로 정해서 스님한테 가서 “팔계주십시요” 하고 팔계받아 지니고 집에 있더라도 그것 팔계를 자꾸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오늘은 여러분들 재가포살일이라고 치고 얘기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진데 태국 같은데도 주식을 참 많이 합니다.

옛날하고는 달라가지고 주식들을 참 많이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직 그런 거 잘 안 물어보던데, 태국에서는 참 많이 물어봅니다.

주식투자를 해도 됩니까, 안 됩니까?

돼요? 안 돼요? (수행자 대답 : 돼요) 왜 돼요?

(주식 자체가 문제가 될 거는 없으니까요)

그렇지. 주식 자체가 문제되지는 않는데, 그런데 인도도 마찬가지고 농경사회다 보니까 열심히 일해서 노력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수확이 자기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관습들이 있어가지고, 주식은 그거하고는 좀 경우가 다르잖아요. 그래서 마음들은 찝찝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주식도 경제활동을 하는 유용한 방법 중에 하납니다.

그 대신에 주의할 점들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주식은.

그러니까 열심히 몸으로 육체적인 노동을 해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나 아니면 여러 가지 시기들이나 자금이나 이런 것들이 맞아서 하는 경우들도 있고, 아니면 누구에겐가 위탁을 해가지고 그것들로 인해서 수익을 올리는 경우들도 있고, 어찌 보면 불로소득 같이 보여지는 부분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그것들도 불교적으로 봤을 때 경제범주에 속합니다. 불교 경전에 근거할 것 같으면 과거전생에 선업들을 많이 쌓아가지고 이생에서 고생 안 하고 경제적인 활동을 하고 또 여러 가지 수익을 창출하고 하는 그런 사람들의 경우엔 복받은 사람들일 경우에,

그런데 그 복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죠? 언젠가는 거품이 사라집니다. 또 그런 경제활동은 의무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의무적으로 뭔가를 보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불확실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불확실한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들을 잘 방어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문제가 될지도 모르지만은 그것으로 인해서 경제적인 부분에서 손해를 많이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해야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제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복을 많이 지어가지고 그런 편하게 수익을 올린다고 할 것 같으면 복을 까먹진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면 선업공덕을 반드시 쌓아야 됩니다.

그래서 계를 지키든지, 보시를 하든지, 다른 어떤 활동을 하든지 해서 선업공덕을 자꾸 쌓도록 해야만이 불확실한 것으로부터 방호가 돼나가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오만해지지 말 것, 마음에 부정하는 부분들을 자신이 잘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겸손할 것,

그리고 나를 드러내지 말 것,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낭비하는 습관을 가지지 말 것,

그리고 항상 마음에는 자애의 마음을 지닐 것,

이것은 열심히 노력해서 버는 활동이 아닌 경우에는 반드시 명심을 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경전에도 바라문이 부처님한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죠? 뼈빠지게 일해가지고 소득을 얻어야지, 그렇지 않고 사문들은 노는 것처럼 보여져서 이익을 취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부처님이 부정을 하긴 합니다. 부정을 하는데, 부정하는 답변의 요지는 뭐냐하면 노동이 필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선택한 일에 대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스님들이 수행을 했으면 노동을 하는 것처럼 수행을 했으면 수행한 것에 대해서 좋은 결과가 나와야 된다는 것이고.

여러분들이 주식이라는 것으로서 노동으로 삼았다고 할 것 같으면, 주식으로 인해서 좋은 결과가 나와야 되는 것이 아니고, 주식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좋은 선업결과를 지을 수 있는 일들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있다는 거라.

그렇지 않고 자기가 자꾸 욕심을 부리고, 겸손해지지 않고, 자애롭지 못하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불가능하다는 거라.

그래서 그 부분만 잘 명심을 하면 주식을 하더라도 크게 무리는 없습니다.

 

가끔씩 그것에 대해서 부담감을 가지는 사람들은 반드시 명심을 해야 됩니다.

"하나를 얻었으면은 세 개의 공덕을 쌓아라."

겸손해지는 것도 하나의 공덕이 되는거고, 나를 드러내지 않고 남에게 베푸는 것도 하나의 공덕이 되는 거고, 자애의 마음을 가지는 것도 하나의 공덕이 되는 거고, 그래서 그 부분만 명심을 할 것 같으면 노동의 대가에 대한 좋은 결과를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을 명심을 하고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인제 태국에서 많이 질문을 받았던 내용 중에 하나입니다.

 

또 하나가 뭐냐면 요즘도 아직은 코로나 때문에 힘이 듭니다.

태국 같은 경우도 스님들이 탁발을 못나갑니다. 그래서 절 앞이나 아니면 절 안에 들어와서 탁발을 하는데, 그것도 스님들이 바리때를 들고 서있지를 못하니까, 접촉을 하면 안 되니까, 실을 연결해가지고 바리때는 저쪽에 갖다놔놓고 스님들은 요쪽에 있으면서 실만 잡고 있습니다.

참 우스운 현실이긴 한데, 그러다 보니까 보시하는 것 같은 마음도 안 들고, 또 어떤 사람들은 멀리까지 이동을 해서 선원 앞에까지 와야 되니까 그것도 짜증이 나고, 이런 경우들이 흔하게 있습니다. 그리고 또 집에서들 지내다 보니까 대부분 하는 일들이 인터넷 서핑을 하게 됩니다. 사원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사원에서도 스님들이 탁발을 안 나가니까 그 시간이 남잖아. 그러면 그안에 보통 하는 게 뭐 휴대폰 만지든지 합니다. 스님같은 경우에는 아예 넘어갈 때 휴대폰을 안 가지고 가요. 거기가면 거기서 주는 휴대폰이 있긴 하지만, 전화 걸 일도 없고 그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들도 없어, 필요할 때만 하고 그러니까 그걸 만지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내내 휴대폰으로 그것들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끼리 말을 참 많이 하게 됩니다.

스님들끼리도 참 많이 말을 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어느날 법문을 하러 갔는데 거기서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말을 안 하고 살 수는 없는데, 말을 하기는 해야 되는데 주의해야 될 것이 뭔가 하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얘기한 부분들을 여러분들한테 얘기를 해드릴테니까 여러분들도 귀에 담아놨다가, 말을 할 때 말을 들을 때는 그 부분을 어긋나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건 제 얘기가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입니다.

 

'말을 할 때, 말을 들을 때 주의할 점'

 

첫 번째, 감정적인지 아닌지 체크를 하라는 겁니다. 말을 할 때 어떤 경우든지 탐· 진·치가 섞이면 안됩니다. 들을 때도 마찬가집니다. 감정적인지 아닌지를 항상 체크를 해야 됩니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어야 되지 감정적인 상태로써 말을 하는 것은 아예 스톱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톱을 하고 자애수행으로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나서 다시 말을 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두 번째가, 이게 잘 안되는 부분들인데, 확인된 건지, 증거가 있는 건지 아닌지 하는 것도 모르고 남이 얘기를 하니까 함부로 막 얘기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확인된 것이 아니면 함부로 말을 하는 습관들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것.

괜한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말을 하나 잘못하는 것이 큰 결과들을 가져오게 됩니다. 확인되고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면 함부로 말하는 습관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럼 어떻게 다 확인들을 해요? 여러분이 다 확인할 방법이 없죠? 그럼 말을 안 하면 됩니다. 그 확인되지 않는 것들 대부분은 보면 별 의미없는 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안 들어도, 말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별 영향을 주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그런 습관을 가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 세 번째가, 내 입장에서 말하는지 아닌지 하는 것.

“나는 말이야, 이렇게 생각해!” 자신은 말했지만 듣는 상대방은 은근하게 강압적으로 강요적으로 들리게 됩니다.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얘기하는 습관을 가지면 안됩니다.

좋은 설법사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자신의 주관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그거는 철저하게 검증을 받습니다. 법문하는 얘기들을 할 경우에는. 안 그러면 자신의 종교가 되어버리고 자신의 말이 되어버리지 불교이거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되지는 못하게 되어버립니다.

법을 설할 때 뿐아니라 일반적으로 말을 할 때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객관적인 것들을 얘기를 할려고 해야 되지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주관들, 자신의 견해들을 밝히는 것은 그것은 삼가해야 됩니다.

 

특히 여러분들이 조심해야 되는 건, 자신이 좋아하는 수행법, 자신이 좋아하는 테라와다,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방법, 그것들을 어떤 경우에는 아무 생각없이 표출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그건 전부 자신의 주관적인 것입니다. 본인이 아라한에 이르렀을 것 같으면 주관이 없을 것이고, 아라한에 이르지 않았으면은 어떠한 경우든지 주관이 섞여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말을 할 때는 그런 것들을 굉장히 조심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가끔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핵연료"와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핵연료가 밖으로 빠져나오면 굉장히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됩니다. 그런데 핵폭탄도 분열되면서 핵폭탄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유출이 되면 좋은 영향을 미치는데, 나쁜 방향으로 유출이 되면 나쁘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왕 말을 할 것 같으면 도움이 되어야 될 거 아니라?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도록 말을 해야 됩니다. 도움이 되지 않고 이익이 생기지 않는 말들은 그건 전부 거짓말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잡담이나 이런 것들도 전부 쓸데없는 말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말들에서 우선은 반만 줄이고 산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요. 답답할 거 같죠? 그 답답한 시간을 수행시간으로 늘려야 된다는 겁니다. 훨씬 이익이 많고 또 그러면 점점 더 말하는 것도 조심하게 되고, 그마만큼 마음은 고요해지고 수행하는데 도움을 줄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하루종일 말 안 하고 있어도 좋아요, 마음에서는. 그런데 오히려 사람들하고 만나가지고 얘기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요. 그렇다고 고립되라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이익을 줄 수 없는 말일 것 같으면 되도록이면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 자신이 불안해지고 괴로워지는 이런 것들, 말을 해놓고 후회하는 것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그 얘기를 듣고 불안해하고 괴로워하는 것들, 이런 것들은 좋은 말에는 속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안 하니만 못합니다.

 

그다음에 여섯 번째, 말하는 타이밍이 좋은 조건에서 좋은 분위기 좋은 타이밍에 말을 해야 되지, 똑같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감정이 안 좋은 상태에서 말하는 것과 감정이 서로 좋은 상태에서 말을 하는 것은 차이가 많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일곱 번째, 말을 길게 하지 마라. 뭔 말을 하더라도 되도록이면 짧게 할 수 있는 것들이 가장 좋습니다. 뭘 장황하게 자꾸 얘기하다 보면 계속 주관적으로 바뀌고 그리고 요점이 없어져버립니다. 듣는 사람도 지루해질 수가 있고, 그래서 되도록이면 짧게! 그런 것들은 조심해야 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서로 만나면 뭐라 그래요? 그냥 “안녕하세요?” 하잖아. 만난 사람한테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냥 앉아서 주절주절주절 하고 있을 거 같으면 힘들다는 거라. 그래서 되도록이면 말은 짧게 할 수 있는 습관을 자꾸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이게 인제 말의 바다에서 수영을 잘하는 방법들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것들은 명심을 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말은 마음의 상태가 밖으로 표출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자답게 또 부처님의 제자답게 살아갈려고 할 것 같으면 그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오늘 본격적으로 해야 될 법문들입니다.

 

"인내가 열반으로 이끈다." 그러죠? 칸띠(khanti) 하고 띠띡카(titikkhā) 라고 하는 인내의 종류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해탈에 이르게 할까? 인내가. 무조건 참는 게 인내는 아니죠? 그거는 여러분들이 누누히 배워왔기 때문에 잘 알 겁니다.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 지금 일어나는 대상들을 편안하게 알아차림 하는 것들이 칸띠의 영역에 속하게 됩니다.

띠띡카는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그것들을 어려운 것들을 극복해 내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오늘 여기 오기 힘들었죠? 여러 가지 일들도 있었을 거고 그런데도 그걸 극복해가지고 여기에 왔다. 무엇 때문에 온 거라? 부처님 법을 듣기 위해서 온 거죠? 보시하기 위해서 온 거고, 또 좋은 도반들 만나서 또 같이 수행하기 위해서 온 거고.

 

여러분들에게 부처님이 말한 칸띠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가장 먼저 여러분들에게 형성되는 것이 좋은 도반들, 좋은 조건들의 자리가 마련된다는 거라.

칸띠는 그런 기능들을 합니다. 그래서 좋은 도반 동료들을 얻는 것에 대해서 하루빨리 자꾸 서둘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스님이 지금 앞에 뭐뭐 얘기를 했죠?

칸띠는 있는 그대로 잘 관찰하는 것이 칸띠라고 얘기했죠? 있는 그대로 잘 관찰하고 있으면 사띠를 분명히 하고 있을 건데 맨 처음에 스님이 뭘 얘기했고, 그다음에 뭘 얘기했고, 그리고 지금은 뭘 얘기하는 거고, 분명히 따라왔어야 될 거 아냐?

자기 스스로 그게 체크가 안 되면 그건 칸띠가 없는 거라.

자신의 상태를 가장 잘 체크할 수 있는 이 칸띠입니다.

내가 지금 탐욕이 일어난 건지, 아니면 성냄이 일어난 건지, 아니면 게으름에 빠져있는 건지, 칸띠가 있으면 그게 체크가 돼나갑니다.

당연히 칸띠가 있으면 사띠가 있기 때문에 듣는 말에 대해서도 집중하게 되고 그것들을 분명히 순서대로 기억을 해냅니다.

 

태국에 있을 때 그런 훈련들을 참 많이 한 게, 휘익 지나가면서 차로 빨리 지나가니까 간판들을 읽기 힘듭니다. 간판의 글자 몇개를 읽느냐 해가지고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사띠의 능력이 큰지, 칸띠가 있는지를 측정을 합니다. 한번 해보시겠어요?

자! 한번 보십시요. <손가락으로 크게 포물선을 그리심> 손가락 보였죠?

손가락이 이쪽에 보였을 때 뒤에 벽에 뭐가 있었는지, 여기에서는 뒤에 벽에 뭐가 있었는지 보여졌어요? (아뇨)

적어도 명확하게 알아차리는 사람들은 그게 보여집니다. 각각의.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일어나고 사라졌고, 여기서는 그다음이 일어나고 사라졌고, 그다음에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사띠가 계속적으로 연속적으로 이어지면은 그 부분은 분명하게 구분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본인의 지금의 감정 상태를 가장 먼저 체크하고 그것들을 빨리 바꿀 수 있는 것들은 칸띠가 있어야 되게 됩니다.

 

스님이 태국을 갖다와서 아마 비행기에서 감염이 된 거 같애요. 계속적으로 목이 좀 안 좋아서 이것들을 관찰대상으로 쭉 했었는데, 안 잡혀요. 한국에 와서도 이게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계속적으로 퍼지기는 퍼지는데 관찰하니까 이게 빨리 퍼지지도 않고 그냥 잡혀있는 느낌이 들어요.

아니나 다를까 보통은 일주일이 지나면 오미크론은 안 나타난다고 그러는데, 일주일만에 오미크론이 나타난 거라. 그래서 그때부터 다시 일주일 격리가 들어가게 된 거라. 이번에 스님이 태국을 갖다 오고 나서 3주 격리를 했습니다. 의도하지 않게끔.

그래서 다시 또 일주일 격리를 당하고 나서, 끝나갈 시점에 다시 또 해보니까 아직도 양성이 나와요. 그러니까 그걸 계속 잡고 있으니까 이게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고 그런 상태가 된 거라.

 

감기에 걸려본 사람들 있죠, 독감이나? 사띠가 강한 사람들은 감기가 걸리면 그게 딱 잡힙니다. 그럼 그걸 계속적으로 잡고 있으면 그것이 계속 늘어나는 것이 아니고, 일정하게 늘어날 듯하다가 쏙 사그라드는데, 이거는 사그라들지를 않는 거라.

그래서 나중에는 '아, 이거 이래가지고는 안되겠다' 해서 약을 처방을 받았어요. 약을 처방받아서 먹으니까 그게 2주 정도 지나니까 사그라지는 것이 보여져요. 그래서 3주 동안 격리 당해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스님이 생각을 한 게 뭐냐면 '참 잘 쉰다. 갔다 오고 나서 힘든데 잘 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쉬게 해주는 것도 뭐가 해주는 걸까? 칸띠가 해줍니다.

쉬어야 될 때와 쉬지 말아야 될 때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칸띠가 하는 역할 중에 하나입니다. 칸띠의 활용법입니다. 무조건 달린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수행을 할 때도 좌선을 하고 경행을 해야 되는데, 감정이 개입되면 좌선을 더하고 싶다든지 좌선을 빨리 끝내고 경행을 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그 발란스를 맞춰주는 것 그것은 칸띠가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쉴 때와 쉬지 말아야 될 때를 잘 조절할 수 있는 능력들이 생기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하나는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가끔 빠지는 병중에 하나입니다. 선원에 와야만이 수행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집중수행 장소에 가야만이 집중수행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반대의 경우들이 있습니다. 저 멀리 사람들하고 떨어진 숲속에 가야만이 수행이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거기도 누군가 와서 복작거리면 또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려고 합니다.

칸띠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아, 이게 성냄이 일어나서 그런 건지, 탐욕이 일어나서 그런 건지, 게으른 마음이 일어나서 그런 건지를 분명하게 알아차리게 됩니다.

 

탐욕이 없으면 꼭 선원에 들어가야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성냄이 없으면 좀 더 고요하고 한적한 장소를 찾을 수 있을까? 게으름도 마찬가집니다. 게으름이 일어날 거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나쁜 방향의 나쁜 성격들이 일어나는 것들이 가능해질까? 못합니다!

··치를 제어해주기 때문에 어떤 경우든지 수행이 가능해지고 어떤 조건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떤 위의에서도 수행이 가능하다는 것들을 알려주는 것은 칸띠가 가능합니다.

 

오늘은 대충 칸띠가 어떤 것이다 하는 얘기만 하고, 칸띠가 해탈에 이르도록 나아가는 방향까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십시요. 이제까지 칸띠에 대한 얘기를 했고.

 

띠띡카(titikkhā)라고 하는 것 참고 견디는 것들은,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만이 띠띡카가 된다는 생각을 하십시오.

 

첫 번째 악조건을 참고 견디는 것, 나쁜 조건을. 그것도 여러분들이 평상시 생각하는 인내의 부분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탐진치를 제어하는 것.

이 2가지가 같이 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은 띠띡카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탐욕 분노 어리석음 그다음에 거기에서 파생되는 각각의 것들이 있습니다. 그 마음들을 제어하는 것들이 가능해질 때 부처님이 말하는, 여러분들이 보통 얘기하는 인욕한다고 하는, "인욕한다"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걸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그게 띠띡카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만 이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 그러면 그것들이 제어가 가능하도록, 그리고 나쁜 일들로부터 방호해주는 역할들을 하는 것이 띠띡카라고 그랬는데 어떻게 해야 될까?

무조건 그냥 사띠를 하면 돼요?

그래서 필요한 것들이 침착함과 지혜가 와야 됩니다.

칸띠(khanti), 띠띡카(titikkhā)가 지혜를 일으키는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온해지고 대상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힘이 안 생기고 그런 능력이 없을 거 같으면 지혜쪽으로 넘어가지지 못합니다.

인내가 왜 해탈로 인도하고, 인내가 어떻게 열반으로 인도하는데? 고요함과 평온한 마음의 상태가 되지 않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방법은 없습니다.

조금 전에 얘기한 것은 인내라고 하는 칸띠하고 띠띡카라고 하는 부분의 통칭의 설명입니다. 그것들이 되지 않으면 그다음으로 넘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구분해지고,

궁극적으로는 좀더 넘어와가지고 ‘아, 이게 상카라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고 ‘그 상카라에 어떤 경우든지 나라고 하는 것이 개입이 자꾸 되는구나’ 이걸 자꾸 분리할려고 하는 노력들을 자꾸 하게 되고,

그게 어느 정도 되고 나면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가 되어서 어떤 대상 어떤 자극이 오더라도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게 되고,

그것이 더 넘어가게 되면 ‘아, 인제는 다시는 내가 밑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게 되는 거고,

그리고 도의 물에 탁 들어서는 것을 본인이 알아서 ‘아, 나는 인제 더 이상 밑으로 떨어지지 않고 성자의 길로 가는구나 이런, 내가 할 일들은 끝나가는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인식을 하게 되는 거고, 그러면서 아라한에 이르르게 되는 거라.

그마만큼 칸띠(khanti)라고 하는 것은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데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거라. 어찌 보면 칸띠는 사띠와 다르지 않습니다. 또 칸띠는 해탈이라는 열반과 다른 말이 아니라는 뜻이라.

 

오늘은 칸띠(khanti)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들을 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그다음 장에 칸띠가 따뜨라맛잣땃따 라고 하는 중립적인 상태에 이르는 것에 대한 얘기들을, 탐진치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릴 겁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왕 이 불교를 알게 됐고 또 스님들을 통해서 불교에 대한 수행법들을 배우고 있을 거 같으면 차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자꾸 받아들여서 수행을 해나가는 방법으로 해나가야 됩니다.

적어도 수행을 할 거 같으면 선한 마음들이 일어나야 될 거 아니라. 남한테 폐를 끼치며 사는 삶들보다는 스스로 ‘아, 내가 참 잘 살아가고 내가 이 길로 갈 거 같으면

좀 더 나은 삶을 살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 수 있게끔 해서 다들 노력을 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청정한 범행을 하는 날입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에서도 청정범행이 자꾸 일어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