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갈애 없이 탈피하는 법 (20211002. 안거법문)

담마마-마까 2022. 6. 15. 09:00

https://youtu.be/r4G6W7pgQqM

* 갈애 없이 탈피하는 법 (20211002. 안거법문)

 

우리 선원 마당에 감나무 있죠? 감나무에 감 떨어지는 거를 보면 요즘은 많이 떨어지지는 않는데 작년 같은 경우에는 참 많이 떨어졌어요.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감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감이 언제 떨어지죠? 지 떨어질 시기가 되면 자동적으로 떨어지는 거지. 아무리 지가 떨어지는 시기가 아니면 내가 떨어져라 떨어져라 해도 안 떨어집니다.

 

그런데 스님들은 나무에 달려있는 걸 내가 떼어내가지고는 먹지를 못하고, 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거는 버려진 것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그거는 먹을 수 있는데, 내가 아무리 먹고 싶다고 빨리 떨어져라 한다고 해도 안 떨어집니다.

 

그걸 보면서 여러분들의 생명은 어떨까? 내가 빨리 죽고 싶다고 아니면 좀 오래도록 살고 천천히 죽고 싶다고 그 조절이 될까? 그것도 감이 무르익어가지고 떨어질 때가 되면 떨어지듯이, 죽을 인연이 돼야 죽게 되는 거지, 마음대로 당겼다가 늘렸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어찌 보면 육체가 있으니까 살아있는 건데, 육체라는 것도 마음이 없으면 육체도 없는 것이고, 그 마음도 죽음의 순간에 일어나는 마지막 마음이 그다음 생을 결정을 하는, 순차적으로 스무스하게 넘어가게 되는 것이지,

여러분들이 다음의 순간에 마음을 결정해서 태어날 곳을 결정을 한다고 강하게 '나는 천국에 가고 싶다, 천상에 가고 싶다' 해가지고 바란다고 되는 것은 아니고, 또는 뭐 삶에 대한 미련이 없다 하고 끊는다 해가지고 그것도 오래도록 훈련받지 않으면 마음대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생에 살아있으면서 육체에 대한 집착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는 육체에 대해서 집착이 없으니까 당연히 그냥 호흡을 알아차리면서 죽을 거 같으면 스무스하게 다음 순간을 맞이하고 다음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겁니다.

그때는 다른 인식기능이 작용할 틈이 없죠!

예를 들어서 내가 뭔가를 말을 해야 될 때는 뭔 말을 해야 될지를 생각을 하고 말을 하게끔 됩니다. 그냥 생각없이 말이 튀어나오지는 않는 거죠.

생각하는 것이 먼저 있고 나서 그러고 나서 말을 하게끔 되는 것이지 아무 생각 없이 말이 툭 튀어나오지는 않는다는 거라.

 

의식의 흐름이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탁 인식한다 해가지고 그게 먼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전에 여러분들이 잘 느끼지 못하는 의식의 흐름이 틀림없이 있어 왔다는 거라.

그 의식의 흐름이 결정이 되고 나서 뭔가 인식하는 것이 형성이된다는 거라.

여러분이 죽음의 순간에 맞는 의식도 인식하는 식이 아니라, 그런 잔잔한 흐름의 연결고리입니다.

 

'아, 이거는 이렇게 하니까 요렇게 해야 되겠다' 마음을 먹을 때 하나씩 진행되나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죽음의 의식이 다음의 생을 만드는, 다음 생의 인식이 되는,

이게 순차적으로 하나씩 되는 것이지 그것이 한꺼번에 감이 탁 떨어지듯이 요거는 무엇이다 하고 탁 인식되고, 요거는 무엇이다 하고 탁 인식되고 하는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사띠를 하고 있어도 마찬가집니다. 불러온다 할 것 같으면 '불러온다' 하고 인식되는 것하고, 불러올 때 '끊임없이 뭔가 진행돼나가는 것이 보여지는 거나 그걸 아는 것'은 큰 차이입니다.

내가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겉모습만 봐가지고 무엇이다 하고 일어나면 '일어남' 하고 알아차리는 거하고, 그렇지 않고 끊임없이 일어남 속에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것이 보이는 거하고는 차이가 많이 나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것은 '일어남' 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남이라는 인식 속에 끊임없이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저절로 바뀌어나가는 것이 보여야 된다는 뜻입니다.

감나무에 감이 무르익으면 자연스럽게 떨어질 때가 되서 떨어지는 거하고 꼭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경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갈애란 재생을 가져오고, 기쁨과 탐욕을 수반해서 여기저기에 환희하는 것이다」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갈애가 윤회를 만듭니다. 갈애에 인해서 '아, 이게 참 좋다' 하는 욕구도 일어나게 되는 거고, 그런 욕구가 일어나면 당연히 기쁨이나 만족감 같은 것들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갈애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집착하는 것에 인해가지고 그런 생존욕구가 일어나게 되는 거고, 그런 생존욕구는 집착하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끊임없이 뭔가를 하게끔 만드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수행을 할 때 다리에서 통증이 있습니다. 괴로운 느낌입니다. 괴로움이 있으면 이것으로부터 벗어날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그게 첫 번째 하나이고,

그다음에 또 수행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어가지고 그게 기쁨이든 아니면 마음의 고요함이든 아니면 한곳에 마음이 통일되어 있는 것이든 그런 것들이 일어났을 때 그것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갈애없이 탈피하는 법, 쉽게 말하면 집착함이 없이 탈피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보통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수가띠(Sugati) 둑가띠(Duggati) 그렇게 나옵니다. 좀 더 좋은 세상 그리고 괴로운 세상. 괴롭고 즐겁고의 세상으로 육도윤회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옥이라든지 축생 같은 이런 것들은 둑가띠에 해당이 되고, 인간이나 천상같은 경우에는 수가띠에 해당이 되고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지옥은 어떤 세상일까? 뭔가를 끊임없이 뭘 먹고자 하는데도 안 먹어지죠? 그러면서 끊임없이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경우는 뭘까?

목갈라나 존자 어머니가 지옥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 탈출했을까요? 경전에. "기대를 안 해서"

 

배고프기는 하지만 먹고 싶다는 욕구를 일으키지 않으면. 아, 나는 이만큼 가면은 저기에 먹을 것이 있으니까 그걸 구할 수 있겠지 하는 기대가 있으면은 그걸 못 구하면 더 큰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괴로움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기대하는 것들을 탁 접어버리고 나면은 적어도 괴로운 것은 없다는 거라.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을 때 '이것들을 관찰해서 어떤 느낌인지 알아야지' 하고 마음을먹고 기대하고 딱 달려들면 괴로운 것들이 더 커진다는 거라. 더 아픕니다.

기대하는 것이 없이 ', 그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성품이다' 하고 바라보고 그냥 관찰하면은 괴로운 느낌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립니다.

 

천상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또한 그 천상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뭘까? 천상세계는 쉽게 말하면 원하면 다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윤회의 세계입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뭘까?

 

천인들이 천상세계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걸 하나로 딱 뭉뚱그려서 얘기하면은 "시시하다" 하는 것입니다. 재미없고 시시하다는 마음이 들면 천인은 죽음을 맞습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에서 아무리 좋은 현상들, 새로운 현상들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아니면 집중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해탈이라고 할 거 같으면 그냥 그대로 계속 있으면 되지. 그런데 그게 해탈이 아닌 걸 어떡할 거라.

그리고 그곳을 나와가지고 일상생활하면 또 욕심내고 성질부리고 하게 돼있다는 거라. 그럼 아무리 좋은 느낌들이 일어나고 하더라도 그것조차도 그냥 현상일 뿐이고 참 시시하다 재미없다 하는 생각이 일어날 거 같으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거라.

 

대상이 변하는 것이 보여야 되는 거고, 그것이 빠르게 변하면서 그속에는 어떤 것도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보여야 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고 기쁘고 즐겁고 집중돼서 고요하기만 할 것 같으면 그건 해탈이 아닌 것일 뿐 아니라, 그걸 어디다가 일상 생활에서 응용할 거라?

 

그래서 스님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수행에서 즐겁고 기쁘고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고, 일상생활에서 괴롭고 행복하고 하는 것들도 꼭 마찬가지로 기대하는 것이 없고, 시시하다하는 생각이 들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평온해집니다.

 

괴로운 느낌이 있을 때는 그것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이 없이 바라보라는 거라.

즐거운 것이 있을 때는 그것조차도 시시하다는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거라.

그러면은 평온하게 바라보게 되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육체에 대한 집착이 없이 마음을 오로지 지금 마지막 순간에 집중을 할 수가 있다는 거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고 일상생활에서도 즐겁고 괴로움의 세계에서 기대하거나 하는 것 없이, 또 그런 좋은 것들도 마지막이 아니다 하는 것으로 마음을 가지고, 시시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 대상들을 바라보는 상태를 연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일상에서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