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다섯 가지 장애, 오근과 오력 (2022년 06월 25일)
수행을 하다가 보면 여러 가지 장애들이 사실은 일어납니다.
대표적인 것이 많이 졸리죠? 많이 졸립니다. 또 뭐가 나타나죠? 막 망상하고 하는 것들이 나타나고, 또 몸이 쑤시고 하는 그런 것들도 나타나죠. 하기 싫은 마음도 일어나고. 보통 여러 가지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보통 사념처 수행을 설명을 하고 나면 그다음에 대부분 설명을 하는 것이 그런 장애들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가 하는 것들을 보통 가르쳐줍니다. 그렇게 하다가 보니까 37보리분법의 순서, 순서대로 되어지지를 않습니다.
사념처 다음에는 뭐가 나와요?
사정진이 나오죠. 그다음에 사여의족이 나오고, 그다음에 오근 오력이 나오고 그렇게 쭉 이어져 나오는데,
사실은 네 가지 노력 그것은 특별하게 따로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면 일단은 수행을 하면 선한 마음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러면 그냥 그렇게 해나가면 됩니다. 그렇게 습관이 들고 길들여지다 보면은 선한 마음들이 계속 더 일어날려고 할 거고, 악한 마음들은 잠재워질거고, 그런 역할들을 합니다. 그래서 특별하게 그것을 가지고 수행법으로서는 적용을 하지는 않고,
그대신에 사여의족 부분은 좀 달리 설명들을 해야 됩니다.
사여의족 그것은 보통 사마타 수행에서 선정에 드는 과정들에 대한 얘기들을 해줘야만이 이 사여의족이 설명이 되어나갑니다. 그런데 이제 겨우 대상이 뭔지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에서 선정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러면 대부분 이해를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여의족은 대부분은 뒤로 이렇게 물러갑니다. 그거는 선정부분에 대한 설명을 할 때 그 부분이 곁들여지도록 그렇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오근과 오력이 앞으로 나아가지게 되는데, 이걸 보통 분리를 안 하고 설명을 하는 이유가 뭐냐면 여러분들이 여기는 경전연구회죠? 그래서 경전을 통해서 오근이 뭔지, 오력이 뭔지는 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같은 거에요, 다른 거에요? 다른 거 같은데 또 같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럴 겁니다.
수행에서 대부분이기 때문에 어떻게 설명을 해줄까.
오근이든 오력이든 이것은 정신적인 영역이죠!.
아,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육근, 육근이 뭡니까? '안·이·비·설·신·의' 의를 빼고 나면 다섯 가지죠? '안·이·비·설·신'이죠! 그것은 몸의 영역이죠. 그래서 지금 스님 소리 들리죠? 스님 소리 들리는 것은 어디의 영역이에요? 귀의 영역이죠! 그래서 귀가 잘못됐을 경우에는 소리가 안 들리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소리 들리는 게 정확하게 들리고 다른 소리들이 안 들릴 경우들이 있을 거고, 어떤 사람들은 스님 소리도 들리고 옆에 사람이 얘기하면 옆에 사람이 하는 소리도 들릴 거고, 차 소리도 들릴 거고 이럴 겁니다.
그래서 들리는 것에서는 차이가 나게 됩니다. 이게 뭐냐면 오근과 오력의 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귀의 영역은 귀는 소리를 듣는 역할을 합니다. 그거는 쉽게 말하면 소리를 듣는 근본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근의 영역이다' 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듣는 걸 어떤 때는 정확하게 잘 들리는데 어떤 때는 잘 안 들리거든. 그거는 왜 그럴까? 집중하는 힘이 생기면 그 소리가 또렷하게 잘 들릴 거고, 집중하는 힘이 약하면 그 소리가 정확하게 와 다 듣지 않고 다른 소리도 들리고 보이기도 하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게 '힘이 얼마만큼 세느냐 안 세느냐의 차이'입니다. 그렇게 얘기할 때는 그것은 '힘의 영역에 속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오근과 오력은 쉽게 그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게 '정신적인 영역'에서 그렇게 구분되어진다고 생각을 하면 간단할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구분해서 설명들을 할 이유들은 사실은 없는데, 그렇게 구분해 놓은 것은 또 나름대로의 틀림없이 그 이유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그냥 함부로 그것을 구분해 놓지는 않거든.
그 부분에 대한 설명들을 이번 시간에는 하도록 하겠습니다.
교재 나간 것에 보면 「수행에서 다섯 가지 장애물」이라고 나온 거 있죠?
수행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장애들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그 장애들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언제 장애들이 극복이 돼나갈까?
여기에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와 있죠! 감각적인 욕망부터 해가지고 의심까지!
[다섯 가지 장애- 감각적인 욕망, 악의, 혼침·졸음, 들뜸·후회, 의심]
의심이 사라지게 되면 어디에 도달하게 돼요? 수다원에 도달하죠!
그러면은 성냄이나 이런 것들이 완전하게 사라지게 되면 어디까지 도달하게 되죠? 불환과까지는 일단 도달하게 되겠죠.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다섯 가지 장애를 다 극복해가지고 완전히 소멸시키고 나면 이거는 아라한이지 그냥 범부중생이 아니라.
그렇다고 이걸 다 제거를 하고 수행을 하면 좋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거든. 그래서 더불어서 살아갈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게 인제 여러분들의 아이러니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 수행에서 다섯 가지 여기 장애들이 일어나는 것이 감각적인 욕망부터 해서 의심까지 나오는 것들이, 나오는 형태들이 딱 있습니다.
감각적인 욕망이 많으면 어떤 것들이 많이 일어나질까? (수행자 대답) 탐심이?
요즘 수행을 하라고 했으니까 해봤다고 칩시다 이.
어떤 장애들이 많이 일어나져요? (수행자 대답) 수마?
수마를 그럼 어떻게 극복할까?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이걸 완전히 없앨 수는 없는데, 어쨌든 안 없애면 뭔가 마음이 평온해지지가 않아. 그리고 수행이 잘 안돼. 그러면 어쨌든 수행할려면 이걸 어느 정도 눌러놔야만이 가능해질 거 아니라. 어떻게 극복 해야 돼요?
누가 경전 많이 읽은 사람, 수마는 어떻게 극복하라고 그랬어요?
목갈라나 존자가,
(수행자 대답) 예, 경행을 하라고, 그것도 나오죠!
하기는 하고 있는데 막 졸아싸니까 부처님이 “야, 이놈아! 그렇게 수행하면서 조불면 되냐?” 하면서 얘기한 방법이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그게 대표적으로 여러 가지들을 쭉 얘기해놨죠. 빛을 많이 쐬라든지, 정 안되면 걸어 경행을 하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정 안 될 거 같으면 네가 몸이 너무 피곤한 것 같으니까 좀 쉬어라든지, 이런 식으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어떻게 돼요? 그거는 수행을 포기하는 경우가 되는 거죠!
좌선에서 경행으로 옮길 때 끊어짐이 없이 그냥 계속 해지면 좋은데, 수마가 올 정도의 사람이면 그게 끊어집니다. 좌선하고 나면 벌떡 일어나서 경행을 하지,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경행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자라" 그러면 진짜 자버립니다. 그냥 살큼 몸을 좀 쉬어라는 얘긴데 그냥 자버립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게 잠이 올 때는 잠이 오는 길을 차단을 해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잠이 오면 어떤 현상들이 일어날까요? 눈꺼풀이 무거워져 있겠죠. (수행자 대답) 예, 몽롱해지면 ‘몽롱해진다’고 알아차리는데, 그거는 ‘몽롱해진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 아니고 몽롱해질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느낌들이 있습니다.
눈꺼풀이 무거워진다든지 아니면 눈꺼풀이 따갑다든지 아니면 뭔가가 바늘로 눈꺼풀을 콕콕 쑤시듯이 하는 느낌이 있다든지 뭔가 있을 거 아니라. 그러면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들을 알아차리라는 거라.
‘잠이 온다, 잠이 온다’ 하고 알아차리면 진짜 자버리게 됩니다.
왜 그럴까? 잠이 온다는 것은 관념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니거든. 그렇잖아요.
수행에서는 실재하는 것들을 알아차려야 되는데, 잠이 온다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관념이거든. 그러면은 그걸 대상으로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실제 그렇게 잠이 올 때 일어나는 느낌들을 관찰을 하라.
따가우면 ‘따갑다’고 알아차리고, 무거우면 ‘무겁다’고 알아차리고, 돌로 머리를 누르듯이 누른다 할 것 같으면 ‘누른다’고 알아차리고.
어쨌든 목갈라나 존자도 그렇게 수행을 하다가 보니까 마음이 밝아지고 깨끗해지면서 탁 잠이 달아났다 하는 거라. 실제 여러분들이 그걸 경험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럴 때는 어떤 느낌들이 일어나는가? 잠을 잘려고 하는데 누가 탁 깨웠을 때 어떤 느낌들이 일어나요? 정신이 바짝 차려지죠!
수행에서는 정신이 반짝 차려질 때는 머리가 뚫려서 바람이 확 지나가듯이 그렇게 상쾌한 것이 확 일어나집니다.
마음이 어둡고 움직이지 않을려고 하기 때문에 잠이 오는 건데 마음이 완전히 탁 전환이 돼버린다는 거라. 전환이 돼버리면 잠은 이미 달아나버린 상태가 되고 수행대상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수행을 해나갈 수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다섯 가지 장애들이 일어나는 것들은 여러분들이 경전을 통해서 공부를 해가지고 이런 이런 방법으로 해라 해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들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실제 수행에서는 그 방법대로 동원을 할 정도의 여러분들이 힘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 그게 잘 안된다는 거라.
그래서 스승들이 필요하게 됩니다.
아까 장애는 언제까지 있다고 그랬어요?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
그럼 스승은 언제까지 필요해요?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언제든지 스승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거라.
그리 얘기해봐야 안 하면 도리가 없습니다.
(수행자 질문)
바른 길을 알게는 되죠. 당연히 그 흐름에 들었으니까. 그 흐름대로 계속 가게끔 됩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그 흐름에 들었으면 빨리 가고 싶지 않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스승에게 물어볼 필요성이 당연히 생겨나는 겁니다. 그래서 그 흐름에 들어서 그 흐름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하고, 스승이 필요하냐 안 하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거는 흐름에 들었기 때문에 인제는 스승이 필요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없어도 당연히 일곱생 이내에는 가능하겠지. 그렇지만 어느 누가 그렇게 할려고 하겠느냐는 거라. 그렇게는 안 한다는 거라.
그리고 아라한에 이르러도 스승은 이미 인간적인 인격체로의 스승은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될런지는 몰라도 담마라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스승이 되어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스스로를 의지해서 나아가야 되기 때문에 스스로가 오히려 스승이 되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그래서 담마하고 자기 자신하고가 일체가 되게 될 때 그때 법념처하고 법귀의 자귀의라고 그러죠? 법귀의 자귀의가 동일시 하는 상태가 되게 됩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 그것이 최상의 상태가 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어떤 경우든지 스승은 필요하다!
특히 예류과에 이르지 못한 범부중생들은 더더구나 필요하다!
그거는 법이 여러분들에게 의지처가 되어주면 참 좋겠는데 법을 모르거든. 수행하는 법도 모르고, 이 법에 대해서 정확하게 확신이 들지도 않고, 그럼 누굴 의지해야 되요? 붓다·담마·상가라. 다른 도리가 없는 거라. 붓다·담마·상가가 여러분들에게는 의지처가 되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는 그렇게 범부중생의 의지처는 이런 것이고, 그다음에 성인은 이런 것이고, 그다음에 완전하게 깨달은 자들은 이게 의지처가 된다 하고 구분을 해놓은 이유가 그런 이유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승은 어떤 경우든지 필요하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됐습니까?
다섯 가지 장애부분을 한번 쭉 읽어보십시오.
장애 일어난 걸 얘기를 안 하는데 장애부분을 얘기할려니까 그렇기는 한데, 어쨌든 여러분들이 실제 수행에서 실재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해야 됩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장애가 일어났으면 장애도 내가 수행대상이 된다고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걸 벗어날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그걸 움켜쥘려고 해가지고는 수행은 거기서 딱 중단되어버립니다.
많이 빠지는 잘못들이 뭐냐면, 수행이 잘 되어나갈 때 그것이 자기는 게으름인 줄도 모르고 수행이 잘되고 마음이 아주 포근하고 하나의 대상에 딱 집중해가지고 오롯하게 성성하게 있는 것처럼 느껴요. 착각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게으름이 일어나는 건데도.
이렇게 보면 됩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든 위빳사나 수행을 하든 그 대상이 구분이 안 된다 할 것 같으면 그거는 게으름 피우고 있다고 딱 보면 됩니다.
사마타 수행에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거 다르죠? 그게 구분이 되어져야 됩니다. 구분이 안 되어진다? 똑같이 그냥 호흡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이 구분이 없이 그냥 된다? 그러면 그냥 오토매틱화 하고 있는 겁니다. 자동으로 그냥, 마음은 평온하고 고요할지 몰라도, 굳이 마음을 평화롭고 고요하게 할 것 같으면 그거 할 필요가 뭐 있어? 여러분들 좋아하는 거 노래 듣고 있으면서 그리 있으면 오히려 더 평온한데. 지 좋아하는 거 하면. 그게 아니라는 거라.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더더구나 대상이 분명하게 구분이 되어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그게 구분이 안 된다? 그거는 이미 게으름 부리고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몸이라는 것은 ‘몸’이라고 분명히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아차릴 수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구분이 되어나가기 시작을 할 때 수행은 인제는 재미가 붙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다 끝내고 났을 때 ‘아, 진짜 너무 재밌다. 더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게 일어나져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네 가지 노력이 일어나질 거고,
네 가지 노력이 일어나져야만이 이거는 대상에 집중해가지고 사마디가 형성이 되든지 그렇게 되어나갈 거고,
그렇게 되어나가다 보니까 다섯 가지 장애는 발 디딜 틈이 없이 눌려져 있는 상태가 되는 거고, 그래서 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수행을 해나가게 되는 거라.
그리하다 보니까 ‘아, 이거는 내가 뭐가 부족하다, 뭐가 강하다’ 하는 것들이 구분이 되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오근과 오력에 대한 것들이 분명하게 이해가 되어져나가서 칠각지 쪽으로 빠져나가게끔 되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고 뭐 그냥 두리뭉실하게 수행을 한다? 그러면 그것은 잘못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수행은 대상이 분명해야 된다. 대상이 명확해야 된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반드시 변해야 된다.
사마디에서도 대상이 변합니다.
여러분들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멍한 공의 상태에 있는다? 그거는 이론상 개념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얘기라.
23페이지에 앞에 보면 「이런 다섯 가지 장애는 실제로 수행에서 마음이 좀 고요해지면 "망상, 통증, 졸림, 싫증, 의심" 등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고 돼있습니다.
이런 종류로서 드러나지는 것이 보통 다섯 가지 장애입니다.
'감각적인 욕망'이 있다고 해서 감각적인 욕망이 막 성욕이 일어나고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그거는 수행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그냥 대상에 끄달려들어가버리는 거고,
그리고 뭐 '성냄'이 막 일어난다, 성냄이 일어나는 것하고 성냄이 일어난 것으로 인해서 내가 말로서 성을 내고 있다 하는 것은 다른 겁니다.
이미 대상에 끄달려들어갔을 때는 그건 이차적인 것이 돼버리는 거고, 수행에서는 그것까지 다루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에서는 일단은 "망상, 통증, 졸림, 싫증"
싫증이라는 것은 하기 싫어하는 겁니다. 배척하려고 하는 것,
"의심", 이런 것으로서 나타나집니다.
그런 것들이 일어날 때는 그것들에 대해서 아까 졸림 부분에 얘기하듯이 실재하는 것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 잘 되면 어떻게 될까?
여기 보면 스님 발 뒤에 보면 온데 까져있고 이래요. 며칠 전에 우리 재가자 수행자들이 수행하러 왔기에 오늘은 수행 좀 하고 나서, 저 나뭇가지들이 너무 무성하게 돼가지고 지붕을 덮쳐가지고 물빠지는 게 안 돼요. 그래서 나뭇가지들을 좀 쳐야 될 거 같은데 하고 얘기하니까 그날 나뭇가지들을 치더라고.
그런데 수행하러 온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사띠가 있는 것 같죠? 아닙니다. 절대. 떨어지는 걸 잘 계산해가지고 이렇게 잘라가지고 줄을 매놓든지 뭘 하든지 해가지고 그렇게 잘라야 되는데 그냥 막 자르다 보니까 나무가 떨어지면서 나무울타리를 쳐놨는데 울타리를 그냥 다 부셔버렸어.
나는 몰랐죠 그걸. 수행 다하고 가고 났는데 나가보니까 울타리가 다 부서진 거라. 그래서 아, 이놈들이 나무 좀 잘라라 했더만 나를 좀 고생시키네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 그래서 뭐 어떻게 해? 내가 있으니까 내가 또 울타리를 보수 해야 되는 거지. 그래서 울타리를 내내 보수하고 밑에 공구리를 쳐야 되는 데는 공구리를 좀 치고 했습니다. 일을 잘하는 스님이 아니라서 일을 하다가 나무에 막 쓸렸어요. 다리가 짧은데, 이걸 넘어가가지고 해야 되는데 넘어가다 보니까 다리가 자꾸 걸리는 거라. 그래서 걸려도 그냥 조금 아프고 말겠지 해가지고 이렇게 했는데 이게 푹 그냥 찢어져버리더라고. 그래서 피가 나기에 그냥 동동동동 동여매놓고 하던 걸 마무리를 지었어요.
살아가면서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할 겁니다.
뭔가 안 좋은 일 고통스러운 일들이 겹쳤을 때 그걸 피해야 되는 건지, 아니면 그 고통스러운 것을 참고 그냥 계속 나아가야 되는지.
가장 좋은 방법은, 참고 어떻게 나아가노? 그걸. 못 나가겠는데.
그 고통을 관찰하는 겁니다.
그 고통을 관찰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 고통이 나에게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판단이 딱 들고나면 별 대수롭지 않게끔 해나가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여러분들 중에 누가 가족이 죽었다 할 것 같으면 되게 슬프죠? 직접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런데 아주 먼 사람이 누가 돌아가셨다, 슬픔은 그거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습니다.
별 영향을 안 미치는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 놔놓으면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내가 할 일은 내가 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스님도 참 많이 경험을 합니다. 다리 이쪽이 지금 신경이 끊어졌거든요. 여러분들은 내가 잘 걸어다니는 것 같죠? 감각이 있어가지고 디디는 것 같죠? 없습니다. 이쪽은.
누가 잘못해가지고 위에서 유리를 탁 깨는 바람에 그게 내려오면서 다리를 탁 쳤어요. 신경하고 살하고 다 떨어져 나갔어요. 그래서 병원에 응급실에 갔더니 그날 담당할 의사가 없어요. 신경을 매야 되는데. 살점 떨어진 거야 뭐 어디 엉덩이 살이든 붙이든지 뭘 하면 되는데 신경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까, 의사가 오기 전에는 그냥 진통제 맞고 하룻밤 주무시라는 거라. 그다음날 해야 된다고.
그래서 물어봤어요. “진통제를 맞은 것하고 안 맞은 것하고 수술할 때 차이가 있습니까?” 하니까 차이가 있다는 거라. 특히나 신경을 이을 때는 그게 차이가 많이 난다는 거라. 신경을 잇기는 하는데 그 신경이 빨리 살아나느냐 안 살아나느냐 하는 것은 차이가 난다는 거라.
그래서 그냥 진통제 없이 낼 아침에 수술을 받겠다 하고 이렇게 했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이게 굉장히 통증이 오거든. 그래가지고 다른 스님들이 간호하고 있는데 나는 잘 자거든. 왜 그렇게 됐을까?
통증을 관찰하면은 통증이 사라지는 게 보입니다. 통증이 사라지는 게 보이면 이것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거라.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분명하게 인식할 거 같으면 통증으로 인해서 내가 다른 일을 못하게 되는 일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냥 자야되겠다 싶어가지고 그냥 잤어요. 잠들면 또 전혀 모릅니다. 그러니까 아침에 깨어날 때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깨어나지게 되고.
여러분들이 장애들을 극복하는 훈련들을 평소에 자꾸 해두지 않으면 살아가면서 이 지금 수행에서 일어나는 이런 다섯 가지 장애만 있겠어요? 갖가지 장애들이 굉장히 많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런데 그걸 어떻게 대처하고 넘어갈 거라?
모든 것은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상태와 그렇지 못한 상태는 그걸 대처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래서 수행할 때도 싫은 대상이 일어났을 때는 그걸 멀리 배척할려고 멀리할려고 자꾸 하면 안 됩니다. 그건 대상이기 때문에 그건 대상대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잘된다,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 그럼 무조건 집착하고 내 것으로 내 가까이 둘려고 한다? 수행에서는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좋은 현상들도 일어나지게 되고 나쁜 현상들도 일어나지게 됩니다. 인생과 꼭 마찬가집니다. 수행은.
기쁨이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부처님이 확 나타난다든지 좋은 것들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수행하다 보면. 특히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왜? 집중하는 힘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믿음이 있기 때문에 신심들이 있기 때문에, 신심이 있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게 그런 좋은 현상들이 참 많이 일어나집니다.
그런데 이게 지혜롭지 못하면 이게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생각을 못하면 그거 쫓아만 갑니다. 그럼 그거는 거기서 딱 스톱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장애는 여러분들이 하나의 수행대상, 호흡과 마찬가지로 수행대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자꾸 관찰할려고 해야 됩니다.
내가 그걸 관찰할 능력이 안된다, 그럼 버려버리라는 거라. 버려버려도 여러분들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잠이 온다, 잠을 사띠할 능력이 안 된다, 그럼 퍼뜩 일어나갖고 눈씻고 뺨을 몇차례 때리든지 뭘 해가지고 잠을 벗어나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 마음이 평온해지면 다시 호흡을 하든지 해야 되는 거고.
통증이 일어난다, 그럼 일어나는 원인이 있을 거 아니라. 다리가 구부러져 있으면 다리를 펴라는 거라. 펴고 편안한 상태에서 호흡을 관찰하라는 거라.
그런데 어거지로 막 할려다 보면 수행하는 게 힘드는 거라. 하고 나면 다시 하기 싫어져버리고.
일상생활에서도 꼭 마찬가집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상한 성품으로서 보지 못하게 될 것 같으면 그 대상을 항상 붙잡거나 밀치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수행을 하면서 일상생활에 자꾸 그게 적용이 돼나가야지, 그렇지 못하고 수행 따로 일상생활 따로, 부처님은 그렇게 설한 법이 없습니다. 똥 눌 때도 수행하라고 그랬어요. 옷 입을 때도 수행하라고 그러고.
모든 것이 수행이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도 수행할 수 있는 준비는 항상 돼있어야 됩니다.
마음이 나쁜 마음 자꾸 일으킬려고 하지 말고 선한 마음 자꾸 일으키라는 거라. 자비를 하든지, 부처님을 염송을 하든지, 관세음보살을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선한 마음이 자꾸 일어나도록 해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들이 선한 쪽으로 자꾸 기울어져야만이 수행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겁니다.
오늘 뒤에 할 게 뭐더라? 황경환 회장님이 하는 게? (수행자 대답)
예. 불선업, 불선업은 악한 마음을 짓는 게 불선업을 짓는 거라. 불선업을 지으면 윤회를 반복하는데 그 윤회는 나쁜 쪽의 윤회겠죠! 그러면 선한 업을 지으면 윤회는 반복 안 합니까? 그것도 반복은 하겠지. 그래도 좀 더 좋은데 가겠지. 좀 더 좋은데 가면은 좀 더 좋은 조건에서 깨달을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거고. 적어도 그렇게는 만들어라는 거라.
지금 보다 더 나은 조건이 되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이지, 나쁜 조건으로 만들어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평상시 때는 항상 그걸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선한 마음을 자꾸 일으키도록.
특히나 이런 경전공부 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인 게 남을 칭찬한다든지 아니면 남에게 베푼다든지 이런 것들이 굉장히 인색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오력이 균형이 안 맞아서 그럽니다.
딴 거 자꾸 배울려고 하기는 하는데, 그런데 그 배움은 자기의 지식적인 것만 채울려고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하고 나눌려고 안 하는 거라. 그래서 오력의 균형 부분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뭘 모른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부처님, 부처님’만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사람들은 마음이 오히려 더 따뜻해. 신심은 분명히 뛰어난데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거든. 요걸 잘 잡아주면은 참 좋은 데로 가겠는데.
또는 지식적으로는 뭔가 많이 알고 뭔가 많이 알려고는 하는데 믿음은 부족해.
“윤회 뭐 별 의미 없어” “있는지 없는지 나는 중요하지 않아” “붓다·담마 그거는 있겠지” “상가, 필요 없어” 이럽니다. 이것도 뭔가 잘 잡아주면 지혜와 신심이 균형이 맞으면 이게 참 잘 굴러가겠는데.
자동차를 비유를 들면,
자동차의 핸들은 사띠와 같습니다. 핸들 트는 데로 방향이 조절이 되는 겁니다.
앞에 두 바퀴는 신심과 지혜가 균형이 맞아야 됩니다. 이게 균형이 안 맞으면 어떻게 돼요? 한쪽으로만 계속 가게 되는 거라. 나아가는 방향대로 가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되는 거라.
그럼 뒤에 두 개는 뭘까? 노력과 사마디, 집중하는 것들이 균형이 맞아야 됩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게요. 대표적인 부처님 제자 세 사람이 있죠. 사리뿟따, 목갈라나, 아난다, 이게 대표적인 세 사람입니다. 아까 목갈라나는 얘기했죠.
사리뿟따는 어떤 경우가 있었어요? 지혜제일이라고 보통 얘기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제자의 한소리만 딱 듣고 “야, 이게 진리다!” “이 세상에 정등각자가 출현했다고 그러는데 스승님 나하고 같이 그거 배우러 갑시다.”
사리뿟따 존자의 스승은 뭐라고 그랬어요? 육사 외도 중에 한사람이었죠! “나는 안 해!” 가만히 있어도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뭐하러 내가 거기 가서 꼬랑지 하고 있을 거냐는 거라. 안 간다는 거라. 니 말대로 지혜 있는 사람이면 거기 가라. 나는 어리석은 사람들하고 같이 있으면서 나는 우두머리 노릇 할래.
조금만 자기 자신을 내려놨으면 진리를 만날 수 있는 조건이 됐는데 못 만난 거라. 오히려 사리뿟따 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어서 악처에 떨어지는 결과가 되는 거라.
여러분이 아무리 뭘 많이 알고 있고 또 남들보다도 더 풍족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 똑바른 믿음하고 균형이 맞지 않으면 잘못된 길로 가기가 쉽다 하는 거라.
로또 일등 당첨된 사람 벼락부자 됐죠. 좋게 결론 낸 거 별로 없어요. 왜 그럴까? 이걸 가지고 뭘 해야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뭔가 좋은 일을 하고 남들하고 베풀고 그래서 자기가 가진 것들에 대해서 환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되는데 그걸 못하는 거라. 그냥 지 혼자서 흥청망청 하다가 보니까 엉뚱한 방향으로 가버리는 거라.
교수라고 해가지고 죽을 때 “나 죽기 싫어!” 이렇게 안 할 거 같애요? “죽기 싫어!” 그럽니다. 그때사 느낍니다. 내가 그리 많이 알고 있던 지식들 죽으면서 요만큼도 도움이 안 된다는 거라.
차라리 내가 부처님에 대해서 믿음이라도 좀 든든할 거 같으면 부처님 빽 믿고 ‘아이고 뭐 내가 죽고나면 부처님이 어떻게 해주겠지’ 하는 마음이라도 생길 건데, 그것조차도 요만큼도 안 생긴다는 거라.
자! 한번 봅시다.
「균형잡힌 수행의 다섯 가지 원리」 라고 돼있습니다.
앞에 부분은 25페이지 26페이지 27페이지 이런 것들은 오근하고 오력하고의 차이점에 대한 것들을 쭉 설명을 해놓은 겁니다. 그거는 여러분들이 한번 쭉 읽어보면 됩니다.
그런데 한가지 유념해야 될 게 이 프린트물 이렇게 나가는 게 그냥 여러분들이 한번 읽고 말 정도의 것은 아닙니다 이. 이게 두고두고 나중에 수행할 때 자꾸 되돌아보고 읽어 보면은 여러분들한테 참 많이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것들이라는 걸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리뿟따 했고, 아까 목갈라나 했고, 아난다는 뭐가 부족했을까?
아난다가 아라한이 되는 것은 어떻게 아라한이 됐어요? 지나치게 열심히 노력을 해가지고 오늘 밤 중에 아라한이 될려고 한 거라. 아라한이 되어야 결집에 들어온다 했으니까. 엄청 노력을 했을 거 아니라. 좌선하다가 안 되면 경행하고, 경행하다가 안 되면 또 좌선하고, 밤새도록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요만큼도 진전이 없거든.
그래서 ‘아, 안 되겠다. 내가 좀 쉬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들어서 마음을 탁 내려놓습니다. 내려놓으면서 발이 땅에 닿는 거 알아차리고 엉덩이 땅에 닿는 거 알아차리고 하면서 딱 손이 등 뒤로 와서 닿는 걸 알아차리고 하는데, 머리가 채 땅에 닿기 전에 딱 아라한이 됩니다.
뭐가 균형이 맞았을까? (수행자 대답)
아니. 사띠는 항상 강해야 되는 거고. 사띠는 어떠한 경우든지 강해야 됩니다. 강해질려고 개발을 해야 되는 거고, 무조건 그거는 최고조에 이를 때까지 그거는 만들어놔야 되는 거고, 아까 노력의 힘과 뭐가 조화를 맞춰야 된다고 했죠?
노력의 힘과 사마디! 읽어 봐, 읽어 봐. 노력하는 힘과 집중이 맞아야 되는데, 노력하는 힘이 너무나 강한 거라. 뭔가 될려고 하는 것 때문에.
집중하는 사마디는 뭘 얘기하는 겁니까?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입니다.
뭔가 자꾸 할려고 막 달려드는데 그게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워져요? 안 되는 거라 그게. 균형이 맞아야 되는데 이게 안 되니까 안 되는 거라.
그런데 그걸 탁 놓아버리고 나니까 이 두 개가 균형이 탁 맞아지는 거라. 그래서 아라한에 이르르게 된 거라.
가끔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행은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 그런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열심히 노력한다 해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거는 뭐냐면 "물에 들어가서 막 씻으면 업이 제거된다"고 얘기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때 뭐라고 그랬어요? 그렇게 해서 업이 제거될 거 같으면 소멸될 거 같으면 물속에 있는 물고기는 벌써 해탈에 다 이르렀을 거라.
여러분도 업은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선한 업을 자꾸 쌓도록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업조차도 짓지 않는 방법은 아라한이 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왜 그러냐면 의도가 일어나면은 일단은 업이 돼버립니다. 이게 선한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그래서 의도가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알아차리는 상태가 지속될 거 같으면 업이 쌓이질 않습니다.
어쨌든 간에 노력을 무조건 많이 한다 해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수행은 항상 스님이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상을 먼저 알아차릴려고 하지 말아라! 수행은.
특히 한국에서 법문할 때 스님이 항상 강조하는 것이 그겁니다. 대상을 먼저 알아차릴려고 할 거 같으면 언제든지 노력의 힘이 더 커질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대상을 먼저 알아차릴려고 하지 말고 마음을 먼저 고요하고 평온하고 가볍게 만들어라는 거라. 그래서 아주 고요하고 평온하고 가볍게 됐을 때 대상이 탁칵탁칵 와서 닿듯이 내가 대상을 알아차려져야 그게 맞는 것이지, 무조건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일단은 사마디의 고요한 상태와 노력의 힘이 균형을 못 맞추게 되는 거라.
수행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호흡은 어떻게 하라고 그랬어요? 자연스러운 호흡!
왜 그럴까? 인위적으로 호흡을 하다가 보면 노력의 힘이 더 커져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은 평온함이 깨져버리게 됩니다. 억지로 해야 되니까. 빨리 하든 늦게 하든 간에. 하다가 보니까 저절로 호흡이 느려지고 짧아지고 아니면 미세해지고 하는 것들은 있습니다. 그거는 자연스러운 것들입니다. 그렇게 변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건데, 대상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일부러 호흡을 천천히 한다? 그건 미친 짓이라는 거라.
(수행자 질문)
아닙니다. 의도는 반드시 개입이 됩니다. 의도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호흡하는 것도 의도가 있어야지만이 호흡이 가능합니다. 살아있는 것도 의도가 있어야지만이 살아있을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질문)
자연스럽다는 것은 의도가 지금 있든지 없든지 그걸 신경쓰지 말고, 가장 편안하게 호흡하는 것들이 돼야 됩니다.
내 지금 몸의 상태, 생각을 한번 해보십시오. 스님은 인제 60대가 넘었습니다. 호흡이 어릴 때보다도 길고 가늘까요? 아니면 빠를까요? (수행자 대답) 빠르다고? 어린애들은 호흡이 빠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길어집니다. 그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호흡입니다.
그러면 쉽게 얘기하면 60 넘고 70 된 사람이다, 1분에 호흡을 몇 번 하게 될까?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한번으로 쳤을 때? 보통 열다섯 번 합니다. 어떤 땐 적은 사람들은 열네 번 합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호흡입니다.
그런데 40대 50대는 몇 번 할까요? 15번 16번 합니다. 그거보다도 훨씬 빠르다는 거라. 그러면 어떤 게 자연스러운 거라? 15번이 자연스러운 거라, 14번이 자연스러운 거라, 13번이 자연스러운 거라? 각각 틀려요. 그거는 그 생체리듬에 맞는 것들이 가장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거는 수행하기 전에 자기 자신이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호흡을 몇 번 하는지 체크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가면, 우리가 태국에서 수행 배울 때 성냥개비를 한묶음 줘요. 그걸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 하나 손으로 탁 떨어뜨리고, 또 하나 탁, 그래가지고 1분이 종소리가 탁 울리고 나면 그거 한번 체크해봅니다. 몇 개 떨어져 있는지. 그게 쉽게 말하면 가장 자연스러운 호흡에서 자기가 쉬는 호흡수라는 거라.
그런 걸 얘기하는 것이지, 의도가 없는 상태에서 하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없습니다.
그리할 것 같으면 "의도가 업"이라고 부처님이 얘기를 안 했겠지. 업이 안 되는 것은 아라한 밖에는 없다는 거라. 이해가 됐습니까?
자! 그래서 빤짜 인드리야(Panca indriya 오근), 빤짜 발라(Panca bala 오력) 부분은 균형이 맞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대신에 사띠는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
아까 얘기했죠. 쎄면 쎌수록 좋다! 쎄면 쎌수록. 그런데 그게 뭐 마음대로 쎄집니까? 안 쎄지죠. 안 쎄집니다.
사띠의 힘의 차이에 따라서 수행의 정도 수행의 깊이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띠가 강하면, 예를 들어서 눈을 감고 여기 개미 기어가는 소리를 듣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이게 안 들립니다. 그런데 사띠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개미 기어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것도 개미가 기어가는 발이 움직임이는 것까지 다 감촉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걸 뭐라고 그래요? "천이통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천이통이 생기든 천안통이 생기든 뭔가 생기면 「나」라고 하는 것이 아직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요게 재미가 들어버리는 거라. 그러면 어떻게 돼요? 개미 기어가는 소리는 일반적으로는 잘 들리지도 않는데 나에게는 굉장히 크게 들리고 있는 거라.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그 소리가 고막을 찢기도 한다는 거라. 눈을 멀게도 한다는 거라. 그래서 신통 좋아하지 말아라는 거라. 신통을. (수행자 질문)
예, 그래서 요쪽(오른쪽), 요쪽(오른쪽) 망막이, (수행자 질문)
그렇죠. 버르장머리 없이 지 좋다고 막 하다가 그렇게 되는 거라. 실제로 그랬거든.
마음을 누군가에게 딱 향한다, 그 사람이 지금 말하는 소리가 들려요. 거짓말 같죠? 들린다는 거라. “야, 니 뭐뭐뭐뭐 얘기했지?” 그대로라는 거라. 다른 사람들은 그게 무슨 큰 것처럼 얘기하는데 사실은 그거 별 거 아니라는 거라.
그리고 그게 수행의 끝이 아닌데 사람들은 거기에 재미를 붙여버리는 거라. 그리고 그걸 가지고 막 대접받을려고 하는 거라. 아주 나쁜 버릇들입니다.
어쨌든 간에 그런 위험성만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사띠의 힘을 강하게 키워주면 키워줄수록 좋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키워주면 좋을까? 억지로 대상에다가 마음을 갖다 붙여야 돼. 마음을.
예를 들어볼게요.
눈을 딱 감고 손을 들어서 요쪽 손가락을 하나씩 펴봐요. 여기에서 한번 딱 부딪쳐보십시오.
(눈을 감고 두 손을 어깨 위로 눈높이까지 올립니다. 주먹쥐고 검지손가락만 펴서 검지손가락 끝이 마주보도록 위치시킵니다. 양쪽 검지손가락 끝이 눈앞에서 마주치도록 움직여봅니다.)
천천히 가서 살 부딪치면 ‘부딪친다’고 분명히 알고, 떨어뜨리면 ‘떨어뜨린다’고 알고, 딱 멈추면 ‘멈춘다’고 알고. 다시 한번 해보십시오.
자! 스톱! 그냥 일반적으로 했을 때와 그걸 집중해서 그 움직이는 걸 그대로 따라가면서 할 때는 마음이 훨씬 많이 집중이 됩니다. 물론 마음이 편한 상태에서 하는 걸 얘기합니다. ‘꼭 내가 이거 두 손가락 맞출거야’ 안 맞으면 어때? 안 맞으면 안 맞는다고 알면 되는 거지.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안 맞으면 안 맞는대로 맞으면 맞는대로, 좀 세게 부딪치면 세게 부딪친다고 알면 되는 거고 그러면 되는 거라. 그런데 그걸 계속 단순한 걸 한번 해보면 집중하는 힘은 훨씬 커지게 됩니다.
다시 얘기하면, 집중하는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사띠는 강해진다는 거라.
사띠의 힘을 단기간에 키울려고 할 것 같으면 가장 단순한 대상에다가 집중을 하라. 발을 앉아서도 ‘내렸다가, 들었다가’ ‘내렸다가, 들었다가’ 지속적으로 그것만 해보라는 거라. 그게 되면 조금 더 다양한 패턴으로 해보면 됩니다.
걸어갈 때도 ‘왼발, 오른발’ 하고. 왼발 ‘들고 내리고’, 오른발 ‘들고 내리고’,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더 늘려가면 늘려갈수록, 집중하는 대상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집중하는 힘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사띠는 강해진다는 거라.
사띠는 어떠한 경우든지 강하게 여러분들이 단련을 시키고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왜? 사띠의 힘에 따라서 앞에 두 바퀴, 뒤에 두 바퀴가 균형을 맞춰지게 됩니다.
그냥 신심? 저 사람은 지나치게 신심이 많은 거 좀 줄이고 좀 더 고요하게 마음이 변하는 것들을 알아차려가지고 그냥 집착하는 것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게 마음대로 되나?
사띠의 힘만이 그게 가능하다는 거라. 노력과 사마디도 사띠의 힘만이 그걸 균형을 맞춰줄 수가 있다는 거라.
그것이 오력의 요점입니다.
오근이든 오력이든 그게 요점이 됐을 때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반대적인 작용들을 몰아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아까 신심이 지나치면 뭐로 빠질 수 있다고 그랬어요? 맹신으로 빠집니다. 사이비도 “아, 부처님”이라고 그럽니다. 그 사이비를 사이비라고 할 줄 알아야 되지, 왜 부처님이라고 그래? “도사님!” 합니다. 그거는 그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반대적인 작용들 맹신으로 흐르기 쉽고, 또는 지 잘난체 하게 되고, 이런 것들로 가는 걸 억지로 못가게 잡아주는 거, 이게 다섯 가지 힘이라는 거라.
그런데 그것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어떤 사람은 삿다라고 하는 믿음의 힘이 강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노력의 힘이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믿음이 강한지 노력이 강한지 약한지를 알지 못하면 이걸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자신이 그것이 강한지 아닌지는 다른 작용들을 하는 것들을 가지고 알 수가 있습니다.
아까 반대작용을 얘기했죠. 노력하는 힘이 강하다? 그런데 내가 자꾸 뭔가 할 것 같으면 산만하고 들뜨고 한다? 그러면 사마디가 부족한 거라! 그러면 자기는 빨리 사마디를 끌어올려줘야 되는 거라.
그리고 뭔가 누가 이거 좋다 할 것 같으면 금방 팍 믿어버린다? 믿음은 강한데 지혜는 부족하다는 얘기라. 그러면 지혜가 끌어올려지도록 냉정하게 볼 수 있는 힘들을 키워줘야 되는 거라.
오력은 여러분이 생각하듯이 한꺼번에 확 올라갔으면 좋겠죠? 절대 그렇게 안 됩니다. 자기가 뭐가 넘쳐나고 뭐가 부족한지를 먼저 판단해가지고, 그 부족한 것들을 채워넣어 줄 때 균형이 맞아지게 됩니다.
그러면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두 쌍, 두 쌍의 균형이 맞아지면 사띠의 힘은 아무리 약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가장 약한 사띠인데도 수행 열심히 몇십년 한 사람보다도 훨씬 빨리, 수행에 대한 보고를 하는데 알고 있는 거라.
왜 그러냐면 사띠는 약하지만 이게 균형이 맞은 거라. 두 짝, 두 짝이.
그래서 두 짝, 두 짝에 대해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수행에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균형이 맞기 시작할 때 다섯 가지 장애는 서서히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균형이 맞기 시작할 때 다섯 가지 장애가 드러나지 않을 뿐아니라, 이미 수다원 쪽으로 마음이 싹 휩쓸려집니다. 그래서 점점 더 사띠의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수다원 쪽으로 가는 것이 더욱더 강해집니다.
의심하는 것이 없다, 그런 사람에게 감각적인 욕망이 있을까? 있죠! 경전에는. 아직 불환과가 되기 전에는 수다원에 있으니까 감각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영향을 미칠까? 안 미칩니다.
그게 얼마만큼 영향을 미치느냐 안 미치느냐 하는 것은 사띠가 좌우합니다. 사띠가 강하면 수다원인데도 이게 없는 거와 마찬가지가 됩니다.
사띠가 약하면 감각적인 욕망이 뭔가 조건만 맞으면 요게 탁 드러나지게 되는 거라.
인제 이해가 됩니까?
자! 오력에 대한 것을 얘기를 했습니다.
그게 오근이든 오력이든 여러분들이 빨리 그 힘을 키워야 됩니다. 그 힘을 키워가지고 사띠가 강해지도록 만들어야 되는 거고, 두 짝의 힘들도 균형이 맞아야 되는데, 균형 맞은 것이 점점 더 힘이 강해지게 될 때 여러분들은 점점 더 수행할려는 마음들이 강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하고, 다음 시간에는 그렇게 강해졌을 때 강해졌다고 치고, 그러면 틀림없이 그렇게 되니까 삼매쪽으로 마음이 확 쏠려버릴 거란 말이라. 사마디 쪽으로 집중하는 힘들도 강해지고, 그럼 그때는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 하는 것들을 가지고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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