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3~2024 일상수행법문

2024년 안거입재 법회_스스로 섬을 만들어라 (20240720)

담마마-마까 2024. 7. 23. 12:36

https://youtu.be/vpk-GL3yY2c?si=oYLO-Bu1QeJCmiou

* 2024년 안거입재 법회_스스로 섬을 만들어라 (20240720)

"이번 안거에는 어떠한 것에도 흔들림이 없는 자신의 섬을 만들어라"

 

오늘은 안거 입재 날입니다.

스님이 올해 이제 서른일곱 번째가 되니까, 여러분하고 아마 인연 맺은 것도 한 20년 너머 됐죠? 옛날엔 다 젊었었는데 이제 다들 할아버지들이 다 돼 가지고, 태종사로부터 해서 수영으로 또 부산대로 그리고 이제 웅촌으로 이렇게 이사를 다니면서 그래도 계속 수행하고 했던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스님 생각에는 빨리 좀 태국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발길이 안 떨어지는 게 그래도 이십몇 년 넘어 계속 쫓아다니면서 스님 시봉하고 또 수행하고 했던 분들이 이제 안 나올 때 정도 될 때까지는 있어야 안 되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빨리 안 나오면 돼. 그러면 스님이 떠날 수 있으니까.
안 나오기 전에 빨리 인제 선원에 안 나와도 죽을 때 돼서 적어도 호흡을 관찰하면서 죽을 수 있는 상태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어떤 경우든지 외부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상태가 되든지, 요 정도까지는 다들 머무를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특히 이런 안거철이 되면은 좀 더 용맹정진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스스로 섬을 만들어라" 하는 그런 제목으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라조하라낭(rajoharaṇaṁ)'이란 거 알죠? 쭐라빤타까 이야기. 걸레로 밀고 닦고 하면서 '라조하라낭, 라조하라낭'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거는 스님이 아마 몇 번 얘기를 하고 경전에도 자주 등장하는 거기 때문에 잘 알 겁니다. 물질적인 현상이 더러워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 참 무상하구나’ 하는 것들을 깨닫고 마찬가지로 ‘마음의 번뇌들로 인해서 탐진치에 물들어갔구나’ 하는 것들을 깨닫게 되면서 그것들을 없앨려고 자꾸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탐진치가 없어지면서 깨달음을 이루게 되죠. 그러면서 신통까지도 얻게 되고 하는 게 쭐라빤타까 이야기입니다.

그게 '라조하라낭(rajoharaṇaṁ)' 의미입니다. '마음을 닦자' 하듯이 '더러움을 닦아내자' 하는 그런 뜻입니다.

 

한번 봅시다 수행에서 처음에 걸리는 부분들이 뭔가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대상을 알아차리려고 용을 씁니다. 그래서 ‘요게 뭔가’ 하고 이렇게 보려고 하게 되는, 보이기는 하죠?
호흡을 관찰하고 있을 때는 호흡을 관찰하게 되고. 걸어갈 때는 왼발 오른발 하는 것들을 알아차리게는 됩니다. 근데 그 마음이 계속적으로 갈 것 같으면 대부분 변하는 것들이 안 보입니다. 변하는 것이 안 보이고 뭔가 답답한 느낌이 들어요. 그냥 붙잡고 가는 느낌이 들어요.

 

"자신의 섬을 만들어라" 하는 그 법구경 게송에 보면 맨 처음에 등장하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힘써 노력하라' 하는 부분, '웃타나'라고 하는 부분인데, 힘써 노력을 해야지! 용맹정진을 해야됩니다 죽을동살동! 그런데 계속 그 페이스로는 갈 수는 없습니다.
마라톤을 하더라도 아니면 100미터 달리기를 하더라도 출발선에 있을 때의 힘은 나중에 갔을 때의 힘하고는 틀립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마음을 집중하고 힘을 많이 써야 됩니다.

노력도 그래서 3단계로 구분들을 합니다. 처음에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대상이 일단 뭔지는 알아야 됩니다. 대상이 있는지는 알아차리고 대상이 뭔지는 알아차려야만이 되기 때문에 그때의 힘하고, 대상을 안 알아차린다고 호흡을 안 합니까? 여기서 집까지 걸어갈 때 안 걸어가집니까? 그건 아니거든.

그럼 대상을 처음 알아차렸을 때의 마음하고 그 뒤에 노력하는 그거하고는 분명히 달라야 되는데, 달리기 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가다가 보면은 그 추진력으로 인해서 계속적으로 이렇게 나아가게 됩니다. 가면서 넘어지지 않게끔만 주의하면 돼요. 근데 대부분 가다가 그걸 잘 못합니다. 왜 그럴까? ‘이놈 뭔고’ 하고 이거 보려는 마음을 계속적으로 가지고 있는 거라. 그러니깐 거기에 대상들은 보이기는 보이는데 어떻게 보여요? 내가 만들어서 보는 거라.

 

그래서 수행할 때 주의해야 될 것이 뭐냐면 대상을 보고 나면은 그러고 나면 대상이 움직이는 것만 보였다 할 거 같으면 그 마음은 일단 버려야 됩니다. 그냥 버려버리고 움직이는 걸 봐야 되는데 이게 뭔고하고 계속 볼려는 마음이 계속 강해져 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면은 어떠한 경우든지 변하는 것이 안보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스님은 사회생활을 안 해봐가지고 돈을 버는 걸 모르는데 돈을 잘 버는 사람들은 보면은 돈을 벌 때 처음에 굉장히 마음을 기울인다고 그럽니다. 어떻게 해야 돈을 벌리는지 하는 걸 갖다가 면밀히 조사하고 뭐 이렇게 해 가지고 딱 돈 버는 시점이 딱 되고 나면 그다음엔 돈이 저절로 굴러 들어온다고 그래요.
실제 그런가? 하여튼 그렇게 된대요. 그때는 크게 노력을 안 해도 내가 빠져나가는 것만 조심할 것 같으면 들어오는 돈은 그냥 계속적으로 굴러 들어온다고 그래요. 자기가 나쁜 길로 빠진다든지 아니면 흥청망청 쓴다든지 할 것 같으면 버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겠지만은 그것만 조심하고 할 것 같으면 버는 거는 수월하게 벌린다는 거라. 그래서 처음에 준비했을 때의 마음가짐하고 그 뒤에 돈을 벌 때의 마음하고는 조금 차이가 난다 하는 거라.

 

우리 수행할 때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아람바 다투(arambha dhatu)'라 해서 처음에 탁 대상을 알아차릴 때 마음하고 그 뒤의 대상이 잘 알아차려지는 상태에서의 다뚜(dhatu)는 분명히 차이가 납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대상이 변하는지 안 변하는지! 그리고 내가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지고 구분을 해요. 만약 이 2가지가 있다 그러면 처음에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을 그냥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거라.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여러분이 의도를 하든 사띠를 하든 뭐하고 관계없이 조건 따라서 일어났다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뿐입니다. 그걸 여러분들이 그냥 보기만 하면 됩니다.

볼려면은 앞에 봤던 것들은 놓아버려야 됩니다. 놓는 거는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관찰을 하면 자연스럽게 놔지게 됩니다. 근데 용을 쓰는 마음이 있을 것 같으면 이걸 못 놓는 거라. 그러니까 집착하는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게 되면 본인은 알아차린다고 하지만 잘못된 알아차림이라. 잘못된 사마디로 빠지게 되고 대상도 변하지 않게 되고 무상·고·무아의 성품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자꾸 흘러버리게 되는 거라.

 

그 대신에 포기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게 변하지 않는 것이든 변하는 것이든 뭐 어떡하겠어? 자기가 계속 처음에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래도 그거 포기하지 않고 계속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물론 그러면 부작용들이 생깁니다. 상기들이 일어나지게 되고, 대상이 변하지 않으니까 힘은 계속 들고, 그럼 수행할려는 마음들은 자꾸 떨어져 나가게 되고, 그래도 포기를 하지 말아야 됩니다.

 

쭐라빤따까가 걸레질을 할 때 걸레가 처음에 더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적으로 하다 보니까 서서히 더러워지는 것이 보입니다. 근데 하기 싫으면 걸레가 더러워지기 전에 그만둬 버리게 되는 거라.

수행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물질적인 것이 더러워지고 나면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들이 보여야 되는데, 이미 마음이 더러워지기 전에 현상을 관찰하는 물질적인 현상을 관찰하는 데서 포기를 해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은 안 변하더라도 그냥 계속하면 되는데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싫으니까 요걸 안 하고 딴 걸 하는 거라. ‘소리가 들리네’ ‘뭔가 볼려고 하네’ ‘뭔가 또 생각을 하네’ 계속 이런 쪽으로 넘어가 버리는 거라.
하나도 대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또 다음 거 넘어가지고 또 다음 거 넘어가지고, 그것을 알기는 하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서 그러냐는 거라. 마음이 거기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들이 떨어져 나가지 못하는 상태인데 그걸 안다고 무슨 의미들이 있느냐는 거라.

 

그래서 첫 번째 해야 되는 것이 '웃타나(uṭṭhāna)'라 해서 무조건 해야 됩니다.

특히 안거철이 됐다. 오늘은 1시간 좌선하고 1시간 경행하고 하는 거 4시간을 하겠다. 마음먹었으면 무조건 4시간을 채우십시오. 수행이 되든 안 되든.

한 시간 좌선 시간을 잡았으면 무조건 1시간을 채우십시오. 경행 한 시간을 잡았으면 경행 1시간은 무조건 채우십시오. 망상이 많이 일어나서 힘들어 죽겠고 고통스러운 것들이 일어나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 시간은 다 채우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노력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그다음에는 변하는 것들 망상이 일어나는 것들 게으름이 일어나는 것들을 갖다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는 것을 알아야만이 고통스러운 느낌도 변하는 것들을 알게 되는데 고통스럽기 전에 이미 그만둬버리는 거라. 그러면서 다른 대상을 봐버리는 거라. 도돌이표를 자꾸 계속 하지 말고. 그래서 '아, 나는 경행하는 것이 더 낫겠다' 싶어서 좌선을 갖다 한 30~40분 하고 경행을 해버리면, 이렇게 하지 말아라는 거라. 웃타나는 어떠한 경우든지 목표를 잡았으면 우직하게 그냥 그 목표를 다 채우도록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적어도 수행에서 대상을 모를지언정 수행할라는 마음은 생겨난다는 거라.

일상생활에서 대상을 사띠를 하는 마음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까? 안 일어난다는 거라. 본인이 생각하고 채워야 되는 시간들을 다 하지 못하고 자꾸 변경해 버리니까 마음은 계속 산란해져버리는 거라.

산란한 마음에서는 대상을 사띠할 수가 없습니다. 일상에서.

밥을 먹을 때든지 일을 할 때든지 걸어갈 때든지 뭐든지 일상에서 자꾸 사띠하는 습관들이 들어야 되는데 그걸 못 하는 거라. 그러면서 자꾸 수행의 시간만 채울려고 그러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경전에는 '압빠마다(appamāda)' 라고 돼있습니다.

압빠마다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방일하지 말아라'는 건데 '사띠가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사띠가 안 끊어지고 계속 이어질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앞에 걸 놔버려야 됩니다! 지금 일어난 것만 사띠해야만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감각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 있다든지 아니면 뭔가 망상하는 현상으로 마음이 변해버렸다든지 이럴 것 같으면은 현재 일어난 것들을 사띠를 하지 못합니다. ‘어, 나는 왜 안 변하지? 대상이’ 그것도 망상입니다. 인제는 대상이 변하는 것이 보이도록 사띠가 계속적으로 이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이 사띠라는 것은 사띠하고 삼빠자나하고 같이 있는 겁니다. 계속적으로 이어지면은 ‘어, 이게 변하네. 아까 하고는 틀리네’ 하는 것들을 알게끔 되는 거라. 분명하게 알게끔 되기 때문에 재미가 그때부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하는 노력들은 분명히 또 다릅니다.

재미있으면 그 대상을 더 보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면 대부분은 그 대상 자체가 변하는 것들이 사띠가 돼야 되는데 대상 자체에 그냥 몰두를 해버린다는 거라. 예로 여러분들이 재미난 것들을 할 거 같으면은 다른 건 다 잊어버리고 재미난 것들에 몰두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부작용들은 생각을 못하고 그냥 계속적으로 하게끔 되는 거라.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나 마약을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그거 그냥 빠져버리는 거라.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상이 변하고 하는 것들이 보이면은 재미가 나면은 그냥 대상이 변하는 것들을 갖다가 그냥 순간순간 계속 사띠하는 그것만 있어야 되는데 대상이 변하는 것이 ‘재미나다’는 생각에 딱 묶여버리는 거라. 그러면 또 다른 내가 다른 실재하지 않은 것들을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게 되는 거라.

크게 노력을 안 해도 분명히 보이는데, 처음에 스타트할 때의 힘하고는 분명히 틀려서 잘되고 있는데, 부드럽고 고요하고 대상이 보이는데, 그냥 보이면 ‘보인다’고만 분명히 알아차리면 된다고. 근데 현재를 자꾸 놓쳐버리니까 요걸 연속하는 걸 한 묶음으로 만들어버리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은 대상을 묶으려고 합니다. 묶지 않으면 이게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찰나 찰나 있는 것만 있으면 여러분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여버리는 거라.

들리면 들린다고 알아차린다? 저 감미로운 음악인데 감미로운 음악이라고 들어야 내가 마음이 평온하고 좋은데, 들린다고 알아차리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이 돼 버리는 거라.

 

마음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이걸 그냥 같이 묶으려고 그럽니다. 묶을려고 하면은 그냥 묶여지는 게 아니니까 ‘내가 듣는다’고 하는 거라. ‘내가 감미롭다’고 안다고 듣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이 거기에 같이 포함이 돼 버리니까 묶여지는 게 더 수월해지는 거라.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변하는 것이 보이고 할 때도 그래서 조심을 해야 됩니다.
그럴 때도 지금 현재 일어난 것만 분명하게 사띠만 하려고 하면은 그것이 계속적으로 이어지면은 그것으로 됩니다. 괜히 그게 뭔지 알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수행하는 사람들 중에 병 중 가장 큰 병이 '내가 지금 어느 상태에 와 있나' '이 세상에 수다원이 누구고 아라한이 누군가' 알려고 하는 것, 병입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인데 그럴려고 하는 거라.

수행 문답하는 사람 중에서 3분의 1이 그겁니다. 기쁘고 좋고 하는 것들을 체험하면은 그거 그냥 막 스님한테 흥분해 갖고 풀어놓기 바빠요. 풀 때의 지 마음은 생각을 안 하고 ‘나 이런 경험, 이런 좋은 거 봤습니다’ 하는 것들만 얘기를 할려고 하는 거라. 그럼 그럴 때는 사띠를 안 하고 그냥 하게끔 되는 거라.

 

문답을 할 때도 그러는데 대상이 좋은 것들이 알아차려지면 얼마나 마음이 들뜨겠어요? 자꾸 놓쳐버리고 그걸 자꾸 묶어가지고 자기가 편집을 합니다. 수행을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가 '압빠마다'라는 겁니다.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끊임없이 사띠해서 사띠가 이어지도록 하는 것!

 

찰나 찰나 간의 대상은 분명하게 나하고는 관계없이 변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에 따라서 내 마음도 변하면서 그것들을 알아차리고 앞에 거는 놓아버리고, 또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앞에 거는 놔 버리고, 설혹 들리는 소리가 ‘들림’으로 하고 알아차리고 또 놓아버리고 또 ‘들림’으로 하더라도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수행은 그게 잘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소리'라고 못 알아들어도 전혀 관계가 없다는 거라.
그게 압빠마다 입니다. "지금 현재 것들을 분명하게 사띠해서 그 사띠가 끊어지지 않도록 계속적으로 사띠 사띠만 있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자꾸 하라"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산야마(saṁyama)'라고 하고 '쌍야마'라고도 하는 겁니다.

근데 수행해 보신 분들은 이해를 할 겁니다. 탐진치가 안 일어나면 좋겠는데 안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대부분은 그냥 자연스럽게 그냥 대상 하나만 뭔가가 탁 부딪치더라도 탁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감정들은 그냥 폭주를 합니다. 누가 뭔 소리를 했다 - ‘어, 듣기 좋은데!’ - 뭔 소리를 들었다 - 화가 그냥 확 일어나버립니다. - 그냥 폭주를 하는 거라. 그걸 멈추는 법을 모르니까 그냥 그대로 폭주를 하는 거라.

 

그거 어떻게 될까? 남한테 싫은 소리 해가지고 남을 파괴하는 거는 파괴하더라도 파괴하기 전에 이미 자기 마음은 먼저 파괴가 돼 버리는 거라. 멈출 줄을 모르면 이미 파괴된 상태에서 자기가 파괴돼 버리고 남도 파괴해버리게 되는 거라.
만약에 그런 험한 말들을 하게 된다면 어떤 사람들은 그런 얘기도 하던데, 그냥 “혀를 짤라라” 말을 못하게끔! 그 정도의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게 이 단어의 뜻입니다. 폭주하는 것들은 일단은 절제해야 됩니다. 딱 멈출 줄 알아야 됩니다.

 

스님이 언젠가 그런 얘기 했죠. 경행할 때 "생각이나 망상이 안 일어나면은 경행을 하겠다" 했는데 경행을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그냥 계속 멈추어져 있는 상태라. 우리의 머릿속은 계속적으로 뭔가를 갖다가 멈추질 못합니다.
왜 그럴까? 살려고 합니다. 생존 욕구가 있는 한은 멈추는 것들은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뭔가를 해야 됩니다.

수행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그런 생존 욕구는 줄어듭니다. 그래서 설혹 죽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냥 받아들이고 그냥 그것을 사띠할 뿐입니다.

과연 여러분 앞에서 지금 나이가 젊든 나이가 많든 죽음이 탁 다가와서 ‘인자 당신 갑시다’ 할 것 같으면 받아들이고 ‘그래 데려가’ 하면서 나는 내 할 일을 하려고 호흡을 알아차리든지 아니면 고요한 마음을 가지든지 마지막 순간에 선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할 자신들이 있어요? 못한다는 거라. 그 정도로 지금 생각들은, 감정들은, 탐진치라고 하는 감정들은 폭주를 하고 있는 거라.

폭주한다는 생각을 안 일으키면은 그걸 멈출려고 하지를 않는다는 거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살아있는 것들은 생존 욕구니까 내가 더 살려고 하고 더 노력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자꾸 착각을 하게 되는 거라.

 

수행에서 대상을 알아차리는데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변하는 것들을 알아차리지 않으면은 대상을 일단 놓아버려야 됩니다.
놓아버리고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고 가벼운지?' 알아차려야 됩니다.

왜? 변하는 것이 안 보인다는 거는 마음이 이미 탐진치에 오염돼 있어서 뭔가를 붙잡으려고 하든지 밀쳐내려고 하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걸 대상으로 하면 안 돼! 그럴 때는 먼저 마음을 고요하고 편안하고 가볍게 먼저 만들어야 되는 거라!

그러기 위해서 육체적으로 고요하고 편안한 걸 갖다가 먼저 만들려고

'눈꺼풀이 닿아있는 거, 내가 긴장해 있구나 알고 긴장 풀어주고, 입술이 닿아있는 거 부드럽게 풀어주고, 손이 닿아 있는 거, 엉덩이가 닿아 있는 거'

이런 거를 차례차례 관찰하면서 몸의 긴장을 먼저 풀어주고,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한지,

대상을 즉각 즉각 알아차리고 있는지 자꾸 보고,

그렇게 해서 고요하고 편안하고 가볍게 만들어야만이,

그다음 대상이 일어나는 것이 즉각적으로 사띠가 되면서 그것이 변하는 것이 보여진다는 거라.

 

멈추라는 거라. 감정이 일어났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딱 멈추라는 거라. 그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거라. 벗어나지 않고 그 대상을 끝까지 관찰할려고 한다? 계속 그 상태로 그냥 휩쓸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라.

그게 '상야마'라고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다마(dama)'라고 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은 '계를 잘 지키는 것'들입니다.
안거 기간 동안은 팔계를 지킵니다. 특히 오늘 같은 '불재일 날, 일주일에 한 번씩은 반드시 팔계를 지킨다' 마음을 먹었으면 그날은 무조건 팔계를 지켜야 됩니다.

왜 계를 지키라고 할까? 오후에 배고파서 힘들어 죽겠는데 왜 먹지 말라고 할까?

계를 지키는 것은 그마만큼의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이 길들여야 되는 것은 자신의 감각기관을 길들여야 되는 것이고, 자신의 마음을 길들여야 되는 것들입니다. 내가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한다 해가지고 그걸 능숙하게 훈련해라는 것을 잘 길들인다고 얘기를 하질 않습니다.

 

가장 길들이기 좋은 게 계를 지키는 겁니다. 지키기가 너무 힘듭니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지키기 힘든 계가 있고, 나이 드신 분은 나이 드신 분대로 지키기가 힘든 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취사 선택을 합니다.
또는 자기가 특정한 날을 스스로 ‘어, 오늘 아니고 내일이다’ 하고 바꿀려고 합니다. 근데 그러는 법은 없습니다. 계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스스로 정해진 날은 그날은 반드시 지켜야 되는 것이 계의 원칙입니다. 그것도 전부 완전하게!

 

오늘은 8계를 지키는 날이면 8계는 무조건 지켜야 됩니다. 계는 자신에게도 감각기관으로부터 잘 조절할 수 있는 것들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선한 영향을 끼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불재일이나 이런 특히 안거철에는 반드시 1주일에 1번씩은 8계를 지키도록 해야 됩니다. 그거는 의무사항입니다.

이런 것들이 자신의 섬을 만들 수 있는 근거가 되게 됩니다.

 

이런 안거 때 어떠한 폭류가 와도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자기 자신을 지키면서 사띠할 수 있는 섬을 만들지 않으면은 만들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안거라고 하는 것은 소중하고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날짜가 됩니다.

부처님이 얘기한 것이 바로 그런 겁니다.

부지런히 자꾸 노력을 하고 자기 스스로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그리고 또 탐진치가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것들을 끊어내려고 자꾸 노력을 하게 되고, 그리고 부처님이 얘기한 계와 율은 반드시 지키면서 나아가려고 하는 마음들을 지니게 될 때, 안거를 끝내고 나면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하나의 섬을 만들었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이번 안거에는 어떠한 것에도 흔들림이 없는 자신의 섬을 만들어라" 하고 스스로 맹세를 하면서 그렇게 노력들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