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fgrdQlWB7Lw?si=tm-u-KSdfOw_cZTr
* 「다툼」 _빤냐와로 스님법문_테라와다 법석(法席) (120323)
저번 개강법회 하고 2주 만이죠. 앞으로는 격주가 되겠죠. 둘째 주 넷째 주를 맡았으니까 격주 간격으로 아마 여러분들을 볼 수가 있을 겁니다.
스님이 맡은 거는 「테라와다의 수행 이론과 실천」에 대한 겁니다.
나는 내 맡은 것만 열심히 할 겁니다. 행정적인 것은 여기 계신 빤냐완따 스님하고 또 경주에 계시는 냐나로까 스님하고 열심히 하고 계시니까 그래서 저는 좀 문외한이 그런 데선 될려고 하는 중입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이 왔으니까 소득은 있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매주마다 프린트물을 나가도록 노력을 할 겁니다.
스님 법문 들으라 그러면 대부분 보면 듣고 다들 나가면서 인제 주머니 털고 가요. 그래서 집에 가보면 별로 남는 게 없어. 그래서 적어도 프린트물이라도 있으면 가끔씩이라도 어디 뒹굴어 다니다가 한번 더 들여다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프린트물을 주는 거고, 한정된 시간에 스님이 또 모든 것을 다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보충자료로써 쓸 수 있게끔 하고 또 한 가지는 스님이 어떨 때는 좀 핑계를 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냥 “프린트물로 대체합니다.” 이렇게 핑계 댈 때도 있을 겁니다. 다른 걸 해야 될 때는. 그럴 때는 여러분들이 꼭 읽어봐야 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법문할 때 법문 주제를 미리 공지를 해줄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거기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오고 또 이런 자리에서 활발하게 얘기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4월 둘째 주는 주제가 「망상」입니다.
여러분들 망상 많이 피우죠? 수행에서도 망상 피우고 일상생활에서도 망상 피울 겁니다. 그래서 망상에 대해서 생각들을 하고 질문할 것들을 준비를 해오시면 됩니다. 알겠죠?
이번 주는 주제가 뭐라고요? 지금 프린트물 3개죠? 저번에 스님이 약속했듯이 하나는 경전의 게송을 여러분들이 자주 독송할 수 있게끔 하는 걸 한달에 한번씩 해달라 해서 그것이 인제 이 하나의 프린트물입니다.
「사무량심의 충만에 대한 게송」 부분입니다. 이것은 집에다 딱 붙여 나놔 놓고 아침 저녁으로 적어도 한번씩은 읽고, 또 그것을 따라서 실천하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거 가져가서 휴지로 쓰라고 드리는 건 아닙니다. 알겠죠? 스님하고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아침 저녁 많이도 안 바랍니다. 1번씩만. 그렇게 해서 적어도 사무량심이 충만될 수 있게끔 그렇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는 「왜 수행하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아마 계속 연결되는 부분으로 될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궁금해하는 수행의 실천과 실제 부분에 대한 것이 아마 계속 연결이 될 겁니다. 저번에 스님은 이걸 안 하려고 했는데, 주제를 하나 잡아서 그 주제에 맞게끔 수행하는 법과 그리고 그것에 대한 얘기들을 나누려고만 생각을 했는데, 어느 한 분이 수행법에 대한 것들을 기본적인 걸 좀 해달라 해가지고 그래서 이거는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거는 기본적인 것은 여러분들이 인터넷을 통하든 아니면 다른 자료를 통하든 어떤 방법으로든 기본적인 것은 익혀와야 됩니다. 이걸 상세하게 스님이 해줄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할당할 수 있는 시간은 적어도 한 10분 아니면 20분밖엔 아마 없을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죠?
그다음에 맨 처음에 있는 「다툼이 있을 때의 5가지 처방전」 이렇게 나가는 거는, 매번 마다 주제가 틀려질 겁니다. 이번에는 '다툼' 다음에는 '망상' 뭐 그다음에는 만약 우울이면 '우울증' 뭐 이런 식으로 주제가 틀려질 겁니다.
주제가 틀려지니깐 한동안 열심히 안 와도 됩니다. 그러다가 한주 그냥 오고 싶어가지고 불쑥 오면 그 주는 온전히 그거 주제만 가지고 하니까 그것만 들어도 이익이 됩니다. 그래서 주로 법을 설하는 것은 이 주제를 가지고,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법을 설할 겁니다.
왜 스님이 이런 주제를 가지고 할려고 하느냐 하면,
나도 부산에서 수행을 지도를 한 지가 그래도 벌써 지금 우리 붓다의길따라 선원이 생긴지가 한 5년이 됐습니다. 꽤 됐죠?
그러면서 이제 느끼는 아쉬운 점, 그리고 다른 수행처에 갔을 때 법문을 하고 또 거기에서 수행 지도를 하고 했을 때 스님이 가지는 아쉬운 점들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 공통적인 것 같애요.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것들을 적어도 여기 지금 테라와다 법석에서는 반복하지는 말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테라와다 불교를 하시는 분들은, 고운 시선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익히 알 겁니다. ‘왜 그럴까?’ 하고 인제 스님 곰곰히 생각을 좀 해봤어요.
근데 이제 거기서 내린 주제 결론이 뭐냐면 바른 것을 하고는 있지만은 남의 것들을 포용하지를 못한다 하는 게 첫 번째였습니다. 대승불교도 포용을 못할 뿐 아니라 각각의 수행법에 대한 것도 포용을 못 하더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해결을 하고 넘어가야 되겠다.’ 하는 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뭐냐면 물론 한국의 테라와다 불교가 소개된 게 수행을 통해서 소개가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깐 수행 외적인 부분은 너무나 모른다는 겁니다.
근데 실제로는 테라와다 불교는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죠? 위빳사나 수행이든 아니면 사마타 수행이든 그 수행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래서 스님들도 교학을 배우고, 그다음에 상가의 여러 가지 일들을 배우고, 또 그러면서 수행도 배우고, 이렇게 나아가는데, ‘재가자도 적어도 그런 형태로써 나아가야만이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한 것이 두 번째고,
또 세 번째는 뭐냐면 여러분들을 적어도 뭐 아라한에 이르게 한다든지 아니면 수다원에 이르게 한다든지 아니면 수행에서 어떤 경험을 한다든지 이런 것은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하기 나름이고, 또 스님이 이제 얼마만큼의 강도로써 지도를 하느냐에 따라 틀려지겠죠.
그건 확신할 수 없지만은 ‘적어도 여러분들을 테라와다 불자로는 만들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몰라도 괜찮은데 계속 ‘저 사람은 테라와다 불교를 접하더니, 참 잘 살아간다’는 소리는 듣도록 만들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거라.
그래서 이 3가지에 중점을 둬서 할려다 보니깐 스님이 이때까지 안 해왔던 방법으로 해야 되겠다 하고 결론을 내렸어요.
수행방법에 대한 건 뭐 기존에 있는 거 어디서 끌어와가지고 이 방법 저 방법 이렇게 가르치는 것도 좋기는 한데 그건 좀 너무 식상하잖아. 이때까지 여러분들 많이 배워왔고, 또 그러한 것들은 스님을 통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봐집니다.
그래서 그런 것보다는 실제 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가지고 그것을 어떻게 수행에서 풀어나갈 것인가라는 것을 중점을 둬서 얘기를 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스님이 기분 내키는 대로 스님이 생각나는 대로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신빙성이 없으니까 경전을 근거로 해서, 또 수행에서는 이렇게 이렇게 이루어져 나간다는 수행의 과정에 대한 것들로 가지고 다루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 인제 앞으로 12월달까지 이루어질 법회에 대한 대강적인 설명을 끝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 게 여러분들 의견도 어느 정도 수렴을 한 상태에서 내린 거니까 이제는 변동이 없습니다. 이미 저번 개강 법회 때 의견수렴을 끝냈기 때문에, 물론 잘될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근데 최소한 2등은 해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결론 내린 것에 대해서는 12월달까지 그대로 이어나갑니다. 그리하면 적어도 2등은 합니다. 그러니까 좋은 방법이고 안 좋은 방법이고 하는 것은 나중에 가서 하도록 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냥 열심히 따라와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스님이 바라고 또 주문하는 것들은 반드시 해 와야 됩니다. 하다가 보면 스님이 좀 주문하는 것들이 많아집니다. 그런 것은 여러분들이 좀 해오시기를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주제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제 시간의 방식은 스님이 일방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렇게만 들으시면 안 됩니다. 중간에 의문나면 끊어도 괜찮습니다. 질문들을 하십시오. 그리고 스님이 반드시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할 겁니다. 그러면은 자유롭게 얘기해도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드러내지 않으려고 해가지고는 절대 수행의 진척이 빨리 이뤄지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 염두에 두지 말고 그냥 같이 나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임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주제는 「다툼」입니다.
싸움 안 해본 사람 없죠? 아마 많이 싸울 겁니다. 그게 부모와 자식 간에 싸우는 것이든 아니면 친구 간에 싸우는 것이든 어떤 식으로든 외부하고 그렇게 다툴 때도 있고, 지 안에서도 열심히 싸우죠? 욕심 부릴 때 ‘아, 이거 해야 되나 말아야 되는가’ 싸우기도 하고 뭐 아마 굉장한 다툼들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런 다툼이 있을 때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스님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탁발을 하거든요. 근데 가끔씩 탁발을 할 때 신도들이 준비하는 게 힘드니까 마 공양청을 할 때가 있어요.
그러니깐 어떨 때는 뭐 특별한 날이 아닌데도 공양청을 하면 ‘아! 저놈들이 음식 만들어서 스님한테 공양 올리고 하는게 귀찮으니까 마 이렇게 한 집 모아 갖고 이번에는 니가 덤더기 써라 하고 이러는구나’ 하고 판단을 할 때도 있어요.
한번은 공양청을 이렇게 갔는데 이게 요즘 말로 하면 이게 그 뭡니까? 전기청소기라고 그럽니까? 전기 청소기가 이렇게 다녀. 그래서 전기 청소기를 왜 사다 놨냐 하고 물어보니까 이 양반이 뭐라고 하느냐면 마누라가 하도 청소를 안 해서 청소기 사다 놨다고 이러는 거라. 근데 그때 탁 마누라 되시는 분을 이렇게 보니깐 눈꼬리가 이렇게 착 올라가요. 그러니까 틀림없이 내 나중에 가고 나면 둘이 싸우겠다 싶은 거라.
안 그렇겠어? 스님 모셔 놔 놓고 되도록이면 좋은 얘기하고 “아이고! 우리 마누라 잘했다.” 하고 해줘야 되는데 뭐 공개적으로 마누라 게으르다고 인제 공개를 해놨으니까 마누라가 눈꼬리 올라가는 건 당연한 거라. 그래서 인제 그분을 이제 불렀어요. 조용하게 딴 데로 불러가지고 “니 잘못했다 이. 나중엔 내 나가고 나서 마누라한테 쥐어뜯기지 말고 지금 가서 잘못했다고 해라.” 그런데 사람이 자존심이 있으니까 한번 그 말을 한거 가지고 삐끼느냐고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잘못했다’ 소리를 잘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걸 내가 알기 때문에 “그래도 오늘 스님하고 다른 사람들 모시고 공양 준비한다고 너 마누라 얼마나 고생했나? 그리고 마누라는 요리 참 잘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게 앉아서 칭찬해줘라” 이렇게 얘기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밥을 먹고 있는데, 인제 그 얘기를 하는 거라. “아유! 우리 마누라가 요리 솜씨는 우리 마누라 최고다.” 이러는 거라. 그 얘기를 듣고 인제 조금 이제 풀어져요. 그러면서 아이구, 나중에 가고 나면 내가 부엌일도 도우고 이러겠다고 자기가 자청해가지고 나중에 설거지를 하겠다고 해요. 그러고 보니까 인제 부부싸움은 안 하겠구나 하고 생각을 했어.
그게 이제 일반적인 패턴인데 그렇게 할 것 같으면 크게 다툼은 안 일어납니다.
근데 대부분 그렇게 하질 못하니까 문제가 됩니다. 뭐가 문제일까? 여기서.
다툼이 일어난 첫 번째 원인은 어쨌든 남에 대해서 나쁜 것을 지적했을 경우, 그것이 설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상대방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쁘죠. 그러니까 자존심의 상처를 받게끔 되니까 그게 인제 첫 번째 인제 원인이 됩니다.
물론 현명한 사람이고 또 수행을 열심히 잘해온 사람이면 만약에 남편이 그 얘기를 했다 할 것 같으면 부인 입장에서 ‘그래 내가 여태까지 청소를 참 잘 안 했는 모양이다. 내가 앞으론 잘해야지’ 하고 생각해 버리면 크게 또 문제는 안 됩니다. 근데 똑같으니까 이게 인제 싸움이 되는 거라.
부처님 당시 때도 그랬습니다. 꼬삼비에 비구 스님들이 있었는데, 출가한 스님들은 물을 떠놓아야 될 때가 있고 물을 비워야 될 때가 있습니다.
어디다 물을 떠놓아야 되느냐 하면 큰 저장하는 공간에는 물을 반드시 채워놔야 됩니다. 자기가 목욕을 하든지 빨래를 하든지 뭘 하든지 썼으면 쓴 만큼 그 물을 채우고 놔야 돼요. 그래서 그걸 채우지 못할 경우는 허물이 되어버립니다.
그다음에 이제 비워야 될 경우는 뭐냐면 화장실 같은데, 물을 쓰고 나면, 옛날에는 물로 뒷물을 했거든요. 근데 그게 더러우니까 반드시 그걸 비워야 됩니다. 비우지 않으면 벌레가 생기기도 하고 냄새가 나기도 하기 때문에. 그리고 만약에 여러분들 같으면 부엌 같으면 부엌 같은데 설거지하고 나면 그 물은 반드시 비워야 되고 그렇죠? 기본적으로 그건 알고 있는데, 가끔씩 사람들이 깜빡합니다. 인간이니까 어쩔 수가 없죠
그래서 화장실에서 물을 비워야 하는 용기에 비우지 않고 그냥 급하게 나와버렸는데, 그 뒤에 들어간 스님이 그것을 본 거라. 그러니까 스님이 잘못한 거죠, 앞에 물을 쓴 스님이. 그건 반드시 비워야 되는 건데. 그래서 그 스님한테 가서 “어, 그릇을 안 비웠더라. 니가 잘못했다야” 그렇게 하니깐 그 스님이 “내가 깜빡했다. 잘못했다.” 이렇게 하거든. 두 사람 간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다툼이 안 있으려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잘못을 시인을 해버리면 문제는 간단해 버립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했다 싶으면 괜히 자존심 세우지 말고 “잘못했다.” 해요. 그래버리는 게 문제가 수월해집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성냥개비에 불이 있을 때 그 불을 끄라” 하고 얘기합니다. 성냥개비에서 다른 데로 번져나간다면 나중에 못 잡는다는 거라. 그래서 불이 성냥개비에 붙었다 해서 이걸 꺼야 된다고 판단될 때는 성냥개비에서 다른 데로 번지기 전에 꺼버려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두 분은 문제가 없었는데 이 두 분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이 문젠거라. 제자들은 아무래도 조금 아직 어리니까 다 자기들끼리 시샘 질투들을 합니다.
그래서 “너 스님이 물도 못 버리면서 뭐 어떻게 율장을 가르킨다고 그러노?” 이렇게 핑계를 잡고, 또 한쪽에선 “뭔 소리냐? 그렇게 해가지고 잘못했다고 했는데 뭘 그걸 가지고 또 시비를 거느냐? 뭐 그런 걸 배우는 너 스님은 뭐 잘난 게 있노?” 이렇게 해가지고 제자들끼리 이렇게 다툼이 붙은 거라. 이게 이미 성냥개비에서 이미 다른 데로 번져버린 거라.
부처님이 가서 이걸 잡을 수 있겠어요? 못 잡습니다. 부처님이 아니라 부처님 할아비가 가도 이 다툼을 재울 수가 없는 거라.
테라와다의 원칙 중에 하나가 뭐냐면 "스님들이 금전적인 부분 소유물이 없도록 만들어라" 하는 것이 첫 번째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겁니다.
물론 스님도 아주 고물차가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내 통장에는 많지는 않지만은 10~20만 원은 항상 있거든. 그걸 있는데 없다고 하느냐고 할지는 몰라도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범위 이상을 넘어서지 않게끔은 합니다. 생기면 퍼주어버립니다.
왜? 그 위험성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으려고 해요.
테라와다 스님들이 청정성을 유지해 나가는 것 중의 하나가 그런 것들이 원인이 됩니다. 근데 인제 이게 소유하는 것들이 합법화되어 버리면 이건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뭐 부처님이 와도 이거는 바꿀 수가 없어요. 아무리 제도적으로 만든다 어쩐다 해도 그걸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단칼에 그냥 끊어버리는 수밖엔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툼이 번졌을 때는 부처님이 와도 조정이 안 됐었거든. 그러니까 부처님이 ‘에이 빌어먹을 놈들 내가 너들을 제자라고 내가 여기 있는 것보다 그냥 나 혼자 갈란다’ 하면서 그 숲에 가서 인제 3개월 동안 수행을 해버립니다.
먹을 것이 있으면 다툼은 멈추질 않습니다. 근데 먹을 것이 없으면 안 다툽니다. 지금 뭐 배가 고파 죽겠는데 다툴 여가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일반 재가인들이 “저렇게 다투는 스님들은 용납을 할 수 없다.” 해가지고 먹을 것을 안줘버립니다. 배고프면 어떻게 해요? 스님들이. 결국에는 가서 부처님한테 참회하고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걸 재가에서 상가 스님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벌칙 중의 하나라고 그럽니다.
그걸 이제 갈마라고 그럽니다. 하위 갈마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여기 있는 스님들 중에 청정하지 못하고 법답게 살아가지 못하고 그리고 승려로서의 위의를 보이지 못하고 한다 할 것 같으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스님 왜 이러소?” 하고 얘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예 먹을 걸 끊어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그 스님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겁니다.
그게 재가인들이 승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벌칙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잘못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스님들이.
여러분들이 잘못할 경우에는 스님들은 공양을 받지를 않습니다.
여러분들한테 가서 법도 설해주지도 않고, 여러분들이 스님한테 뭐 맛있는 초콜렛 하나 갖다줘도 안 받습니다. 일절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 그리고 법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다가 박탈해버립니다.
뭐 그냥 평범하게 살면 되겠죠. 뭐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근데 그렇게 하면 정신적인 발전은 기대하기 힘들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여러분들이 잘못할 경우에는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들은 지금 잘못한 거 많죠? 아마 죄를 많이들 지었을 겁니다.
솔직히 스님이 좀 기대하는 거는 뭐냐면 빤냐완따 스님이 어쨌든 이 행사라면 행사를 위해서 굉장히 고생합니다. 근데 그것을 조금 떠안으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
또 하나는 이 사무국장을 비롯한 사무국이 있는데, 여러분들의 모든 편의들을 저기서 다 제공을 하지 여러분들이 직접 나서서 그것을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게 이렇게 눈에 보여요. 몇 주밖에는 안 지났지만. 그래서 적어도 그런 것들은 좀 바르게 시정을 해나가야 되겠다 하는 그런 생각들을 해봅니다.
불교는 2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혜와 자비」입니다.
지혜는 어떻게 발현되는지 아세요? 지혜는 어떻게 발현될까?
만날 여러분들 스님들 법문하면 “지혜만 있으면 돼” 그렇게 얘기를 하죠. 그 지혜는 어떻게 나오는 거라? (수행자 대답...)
음, 오계를 지키고 팔정도를 닦아나간다? 맞습니다. 근데 그거는 완전한 답은 아니고,
오계를 지키는 데 옆에 분이 오계를 지키지 않았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지키는데 너는 못 지켰지’ 하는 우월감들을 가집니다. 그럼 차별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차별하게 되면 당연히 그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게 되고, 또 비평을 하게끔 됩니다. 그러면은 적어도 저 사람하고 지키는 사람하고 지키지 않는 사람하고는 조화롭게 살아가지지는 못합니다. 뭐 끝이야 어떻든 간에 속으로는. 그래서 오계만을 지키는 것으로는 지혜롭게 되지 못합니다.
왜? 그런 비평을 하고 이미 '너와 나'라고 하는 개념을 가지게 되면 이미 자기자신은 불선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불선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어떤 경우도 지혜롭다고는 얘기를 안 합니다. (수행자 대답...) 예. 그렇죠.
이제 팔정도를 닦으면 당연히 지혜가 성숙이 됩니다. 근데 그걸 닦는 방법들을 인제 얘기를 할려고 하는 것들입니다.
대부분은 보면 그럽니다. 지혜를 증득하는 걸 너무 크게 이렇게 잡는 경우가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 열심히 하면 지혜가 일어나고, 아니면 팔정도를 단계적으로 닦아나가면 지혜가 일어나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맞습니다. 맞는데 스님이 봤을 때는 그것보다도 더 시급한 것이 있습니다. 적어도 (수행자 대답...) 음, 법문 듣는 것도 좋습니다.
근데 그것보다 더 시급한 거는 조화로운 것! 조화를 유지해 나가면 틀림없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남에 대한 배려심이나 아니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들 이런 것들을 가지면 적어도 자기자신이 마음이 평온한 상태가 되고 자기 자신이 기쁨으로 사는 형태들을 취하기 때문에 적어도 거기서 하는 말, 하는 행동들은 나쁜 방향들로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적어도 그것이 완전한 지혜는 아니더라도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한 구실들은 하지 않느냐 하는 그런 생각들을 해봅니다.
그래서 오계와 팔정도를 지키고 따라가더라도 그런 부분에 대한 것들을 간과를 하면 안 된다 하는 얘기입니다. 여러분들은 마찬가지로 이 법회를 시작하면서 삼보에 대한 예배를 하고, 그리고 또 5가지 오계를 스님한테서 받았습니다.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받은 겁니다.
1차적인 것은 그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내(자신) 외에 밖에서 일어나는 부분에 대한 것들은 내가 관심 가질 부분이 아니다." 하고 판단을 내리면 됩니다. 그 사람이 오계를 지키든 아니면 여기 와서 위빳사나를 안 하고 사마타 수행을 하든 아니면 화두 참구를 하든 그 사람의 일을 가지고 내가 그것으로 인해서 불선심을 일으키지는 말아라 하는 것들입니다.
자! 잠깐만 시계 하나만 좀 봐주십시오.
시계 누가 있어요? 진도를 조금 빨리 해 나가겠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이렇다니까. 여러분들 집에 가서 읽어볼 거라고 생각하고 대충대충 넘어갑니다.
1페이지에 중간 부분 밑을 보면, 사실은 부처님도 평온하게 혼자 보내는 것이 더 좋다고 했는데 그렇게 살 수는 없죠? 그리고 출가한 스님들도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든 모여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툼을 피하는 것을 보통 9가지를 일반적인 것들로써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마 적어도 이 9가지만 기억을 하고 있어도 크게 다툴 일은 아마 없을 거라고 봅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들은 스님이 그렇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대부분이 사회에서 유명한 분들이 한 얘기들을 이렇게 뽑아본 겁니다. 근데 그 대부분은 보면 현재 다툼이 있을 때 요렇게 요렇게 요렇게 해라 하는 충고입니다.
가장 좋은 거는 다툼이 안 일어나게끔 만드는 게 가장 좋습니다. 그러니까 그것보다 좋은 거는 뭐냐면 다툼이 일어날 때 안 일어나게끔 하는 것이 두 번째로 좋은 건데, 가장 좋은 것은 아예 애초부터 다툼이라는 것들을 일으키지 않게끔 원인 자체를 안 만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어느 스님한테 와서 누가 인제 얘기를 하거든요. “스님 나는 우리 남편만 보면 성질나서 죽겠어요.” 자꾸 악한 말이 나온다는 거라. 남편이 뭔 말만 하면 자꾸 부정적으로 내가 얘기를 한다는 거라. 그래서 이것을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니까, 스님이 물을 이렇게 줬어요.
“남편이 말할 때마다 그 물을 한모금 먹어라. 이거는 신비한 물이니까, 이것만 먹으면 틀림없이 성질 안 부리고 안 싸울 것이다. 그 대신에 물을 먹지 말고 머금어라. 남편이 말을 다 끝낼 때까지는 물을 삼키지 마라.”
물을 삼키지도 않고 여기에 머금고 있으라니까 말을 할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말 안 하고 있으니까 어떻게 돼요? 뭐 싸움이 안되는 거지. 그렇게 자꾸 하다가 보니깐 어느 세월에 인제는 남편이 얘기하더라도 뭐 그냥 듣게끔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내가 화를 일으키지 않게끔 된다는 거라. 화가 일어나더라도 인제 그걸 잠재우는 법을 아는 거라. 숨 한번 꼴깍 삼켜버리면, 이제는 물 안 먹고 숨만 꼴깍 삼켜버리면 그래도 말이나 행동으로 나오지는 않게 되는 거라.
그게 쉽게 말하면 싸움이 안 일어나도록 만드는 거라.
그게 오히려 더 지금 여기서 얘기한 9가지 보다도 더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러분들 다음에 싸울 일 있으면 물 딱 머금고 한번 해봐. 그러면은 절대 크게 싸우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보다도 더 좋은 것은 뭘까?
경전을 한번 찾아보니까 경전에 부처님이 한 것과 사리뿟따 존자가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여러분들에게 소개를 해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냥 넘깁시다. 왜 그러냐하면, 이걸 지금 1시간 이내에 끝내야 됩니다.
2페이지 첫 번째 보면
「만약 누군가와 다툼으로 초조함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자애(mettā, 멧따, 慈愛) 멧따를 실천합니다.」
그렇게 쭉 돼 있습니다. "자애를 실천하라" 거기에 보면
「그럼 실제의 생활 속에서 어떠한 삶의 방법을 해야 하는가? 불교에서는 자비의 삶의 방법을 말한다.」 어느 쪽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고. 그 밑에 보면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지혜가 있는 사람인가 어리석은 사람인가 하는 것은 생명에 대해 어느 정도의 자애 행위를 할까라는 것으로 측정되어진다. 동료를 어느 정도 도와주는지, 사람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편하게 해주는지, 상대방의 괴로움을 어느 정도 줄이려고 노력하는지, 이와 같이 노력하는 사람은 당연히 훌륭한 사람이고 그 사람은 지혜가 있는 사람,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만약 아라한이 되고자 생각한다면, 자애의 수행도 대단히 중요하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애수행을 수행자를 보호하는 4가지 수행의 범주에 넣어놨습니다. 항상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이고. 밤낮으로 사실은 해야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배우기 전에 사실은 자애 수행하는 법을 비롯해서 부처님을 회상하는 것, 이런 것들을 먼저 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기자신이 선한 마음으로 길들어지는 상태에서 수행에 뛰어들어야만이 순조롭습니다.
테라와다 스님들이 외국에 나가서 법을 설하면 한결같이 들어와서 하는 소리가 거기는 가면 왜 만날 위빳사나부터 바로 가르쳐주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얘기합니다. 도덕적인 행위에 대한 것들은 아예 얘기도 못하게 하고, 또 선정 수행에 대한 것도 말하지 말고, 오로지 지혜 요것만 자꾸 얘기를 하게끔 말을 합니다. 그 지혜는 저 위빳사나 수행만 해갖고 다 이루어질 수 있는 건 아닌데 왜 그것만 자꾸, 수행 방법에 대한 것만 자꾸 해주라 한다는 거라. 그래서 갔다 오고나면 아 내가 다음에는 진짜 안 가고 싶은데 중이니까 우짤끼라. 선택할 수가 없는 거지. 오라면 가야지 뭐. 가긴 가는데 항상 그 하소연을 들어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수행자를 보호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수행법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항상 여러분들이 익혀놓도록 해야 됩니다. 그중에 하나가 이 자애 수행입니다.
밑에 여러분들 쭉 읽어볼 거라 생각하고 간추려 버리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애로운 마음을 일으킬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일으킬 수 있을까?
누가 한번 얘기해 봐요. 가장 쉽게 일으킬 수 있는 방법? 어떻게 하면 돼요? 뭐 꿀먹은 벙어리가 왜 말도 안 해? 그냥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냥 “사랑합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라? 안돼요?
자애 수행을 하는데 ‘내가 행복하기를,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내가 괴로움이 없기를, 모든 이들의 괴로움이 없기를’ 이렇게 게송을 하다 보면, 피상적으로 됩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 가슴이 그것으로 인해서 따뜻해지지도 않고, 그 자애수행이 뭐 밖으로 퍼져나가는지 어떻게 되는지 잘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구체적으로 좀 더 잘할 수 있을까?
그래서 자애수행 방법에 대한 것이 쭉 돼 있습니다.
자기자신부터 해가지고 나중에 전체적으로 펼쳐나가는 방법들을 씁니다.
그 방법대로 사실은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순조로워집니다. 그건 이제 뭐 기본적인 거니까, 그거 말고 조금 더 용이하게 자애 수행을 하는 방법입니다.
내 자신에 대해서 먼저 한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뭘 먼저 떠올려야 될까?
내 자신의 장점을 먼저 떠올려야 되겠죠. 내 자신의 단점을 떠올리면서 ‘내가 행복하기를’ 하면 그거 안 됩니다. 그러니까 ‘아, 나는 그래도 이런 부분은 참 잘하지’ 하는 걸 먼저 떠올려야 됩니다. 그래서 적어도 남들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안다면 ‘그래도 아! 내가 그거는 건 참 잘한다.’ 이걸 탁 떠올리면서 ‘아! 그런 것으로 인해서 내가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됩니다.
내 뿐아니라 다른 대상에 대해서도 할 경우에는 꼭 그와 같은 방식으로 합니다.
그러니까 자애를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라! 그 사람의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또 아니면 그 사람이 나한테 해준 행위가 될 수도 있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될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걸 먼저 항상 떠올려야 됩니다.
... 가지를 못하네. 그러니까 조금 하다 보면 대부분 시그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사그라지지 않고 자애를 계속 충만되게 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당연히 반복해야죠.
자애는 어떤 형식이든 계속 반복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반복을 하는데 그 자애의 마음을 갖다가 충만되게끔 하면서 반복할 수 있는 것들이 뭐가 있을까? (수행자 대답...)
그건 이제 행동하는 거고, 물론 자애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 그게 어느 정도 충만되게 되면 말을 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들로서 바뀌어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행하지 않는 것은 자애는 그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지 마음속에만 가득 담아있다, 그래서 나는 자애를 펼쳤다! 누가 증명할 건데?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밖으로 표출되는 겁니다. 그래서 말이나 행위로써 표출이 되는 것들로 가지고 증명하기 때문에 반드시 자애가 충만된 사람은 저절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도 평온하게 얘기하게 되고 행동하는 것도 남에게 해를 끼칠만한 것들은 일체 하지를 않게끔 됩니다. 그거는 당연히 그렇게 돼야 되는 건데,
우선 이제 훈련될 동안에 어떻게 하느냐는 거라. 그걸 한번 스님이 곰곰히 생각을 해봤어요.
여기에 좀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 또는 텔레비전에서 여러 가지 행복하지 못한 모습들을 많이 보여줍니다. 갑자기 쓰나미가 일어나서 죽은 모습이라든지. 아니면 뭐 여러 가지 불행한 것들이 있습니다. 내 주변뿐 아니라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갖다가 항상 머릿속에 담고 있어야 됩니다. 자애를 적어도 지속적으로 충만되게 할려고 할 것 같으면 그러한 인식들이 없으면 안 됩니다.
'아! 언제든지 나는 불행할 수가 있다. 불행하게 될 수가 있다. 내가 조금만 잘못하면 나는 나쁜 상태에 떨어질 수 있다' 하는 걸 항상 염두에 둬야 됩니다.
그래서 안 떨어지기 위해서 요걸 딱 붙잡고 있어야 돼. 자애라는 걸 딱 붙잡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나쁜 마음이나 나쁜 행위나 나쁜 말들을 하지 않게끔 딱 잡고 붙잡아야 됩니다. 여러 가지 개체들을 여러분들이 활용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게 두 번째입니다. 그거는 여러분들 주변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가 있느냐 하면 자신이 있는 게 있습니다. 자기자신이.
그러니까 성향이 좀 틀립니다. 우리 사무장 같은 경우에는 물론 자애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애심보다 연민심이 더 많아요. 그래서 남이 뭐 이렇게 하면 ‘아이고! 저거 우짜노’ 하는 마음이 더 강한 거라. 문제가 뭐냐면 ‘우짜노’ 하면서 지도 울고 있어요. 사실은 연민심에 빠지면 안 되는데, 연민심이 오히려 훨씬 강하거든. 그러면 연민심을 계속 개발시켜 나가줘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제 특히 스님들 같은 경우는 평정심이 더 강합니다.
그러면 우뻭카 부분을 더욱더 자꾸 개발시켜주어야 됩니다. 근데 사실은 4개 중에 하나만 해도 나중엔 다 복합적으로 이루어지게끔 됩니다. 자기 성향을 반드시 파악을 잘해야 돼요. 그래서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해야 됩니다. 여러분들 잘하는 것들이 뭐가 있어요?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없다.’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있게끔 돼있습니다. 왜 인간이면 적어도 여러분들이 인간의 몸을 타고 태어났으면 그 정도 복은 지녔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난 겁니다. 지금 아무리 나쁜 짓을 하고 있더라도 그 부분은 반드시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반드시 찾아내라!” 이해하겠습니까?
그다음에 네 번째가 뭐냐면 원인 결과로서 이해할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내가 미소를 씨익 지으니까 모르는 사람도 씩 미소를 짓는다. 지나가는 사람한테 “헬로우~” 하니까 저쪽에서도 “하이~” 하면서 웃는다. 이거거든요. "내가 무엇을 짓느냐에 따라서 돌아오는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이다" 하고 반드시 이해를 자꾸 해야 됩니다. 반대로 내가 나쁜 마음을 품으면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저 사람을 생각할 때 아, 저 사람의 장점을 내가 자꾸 떠올리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나에게는 좋은 결과가 오게끔 됩니다. 근데 저 사람을 생각할 때 만날 단점만 떠오른다 할 것 같으면 나쁜 결과가 오게 됩니다. 싸우게 되든 뭘 하든 간에. 그걸 반드시 명심을 해야 됩니다.
그럴 것 같으면 어떤 사람이 지한테 나쁜 결과가 오기를 바라겠어요? 그렇게 하지는 않게 됩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는 모든 것을 주변의 일들로서 귀결을 자꾸 시킬려고 한다는 겁니다.
행복하게 된 것도 내가 행복한 것이고, 불행하게 된 것, 또 나의 가족이 불행하게 된 것도 모든 것들을 자기 주변적인 것들 되도록이면 자기 자신의 문제로서 귀결시키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이런 5가지를 계속적으로 반복을 하다 보면, 자애 수행하기가 굉장히 수월해집니다.
자애 수행하는 방법은 여기에도 간략하게 써 놔놨고 여러분들이 책을 통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알겠죠?
그래서 평소에 자애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적어도 처음에는 다툼이 한 반 정도만 줄어들어도 좋을 겁니다. 그리고 크게 안 다투게 될 겁니다. 그리고 점점 더 없어지게 되고 나중에는 그런 것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행복하고 싶죠? 그럼 행복한 일을 하십시오.
두 번째 누군가와 다툼으로 초조함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연민(karuņā, 까루나-, 悲)을 실천하라.
연민심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애 수행과 우뻭카 수행은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연민심과 무디따-기쁨을 함께하는 것은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은 오히려 실제로는 자애 수행도 열심히 해야 되겠지만, 이 연민심(karuņā) 그다음에 함께 기뻐함-무디따(muditā)라고 하는 거, 까루나(karuņā)와 무디따(muditā)라고 하는 것을 더 오히려 잘해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래야만이 잘 좋은 생활들을 할 수 있게끔 됩니다. 그래서 연민심을 자꾸 한번 닦도록 해 보십시오.
연민심을 닦는 것들, 여기에 대충 적어놨습니다. 연민심을 가진 사람은 연민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에 대한 얘기를 쭉 적어놨습니다.
왜 연민심을 자꾸 길러라고 하느냐면 이걸 기르지 않으면 외로워집니다.
어떻게 보면 수행은 잘할지는 몰라도 사람이 점점 외톨이가 되어 가집니다. 그래서 적어도 외로워지지 않고, 그리고 수행한 것들 자기가 체험한 것들을 그대로 나누려고 하더라도 이 연민심을 평소에 닦지 않으면 절대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게 일상화되지 않으면 나와 지질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설혹 아라한이 되었다 하더라도 법을 설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돼버립니다.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조건하고 법을 설할 수 있는 조건하고는 틀립니다. 그래서 뭐 이 생에서 아라한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서 살아갈 수 있으면 그것으로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가끔씩 테라와다 불교권에선 "아라한이 되려고 너무 노력하지 마라"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라한이 될려고. 목표는 물론 잡아야 되죠. 근데 쉽습니까? 그렇다고 어렵진 않죠. 그렇다고 해가지고 누구나 아라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목표를 너무 그렇게 드러내 놓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지금 한발짝 한발짝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더 중요한 몫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연민심을 자꾸 기르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연민심을 기르는 방법은 다른 것 없습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뭘까? 내가 내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뭘까? 내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게 뭘까?
또 저 사람에게 저 사람이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게 내가 뭘까?
저 사람이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내가 뭘 해야 될까? 하는 걸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이 됩니다.
여기에 여러분들 법문 듣고 수행하기 위해 왔습니다. 여러분들 주변 사람에 대해서 배려하는 마음 있어 봤습니까? 적어도 그거는 있죠. 있으니까 그래도 따닥따닥 안 붙어 앉고 뭐 이렇게는 했을 겁니다. 근데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라. 조금 더. 그래서 적어도 자기 스스로가 남에 대한 배려, 남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마음들을 자꾸 가지려고 한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사실은 까루나에 대해서 많이 설명할라고 준비를 해 왔는데, 그냥 다음에 시간이 되면 더 하겠습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다툼이 없으려면 우뻭카(upekkhā, 捨) 우뻭카를 가져라.
우뻭카를 가지는 것도 한번 쭉 읽어보십시오. 중요한 거는 뭐냐면 어떤 것을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수행을 하든 뭐 어떤 집을 짓고 있든 뭐 어떻게 살아가든 크게 문제는 되지 않습니다. 근데 '나의 수행' '나의 집' '나의 것'이라는 것이 개입되면 문제가 커져 버립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문제들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나의 수행법', '나의 스승'이라는 것들을 쥐고 있습니다. 이거 버리십시오. 이거 버리지 않으면 여기 와서 귀에 안 들어올 뿐 아니라 수행이 크게 무르익질 않습니다. 그 부분만 조심을 하면 됩니다. 마음에서 집착함이 없는 상태를 자꾸 만들려고 하십시오. 넘어가겠습니다.
네 번째 다툼이 없으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사고의 대상(visaya, 위사야) 사고의 대상으로 하지 말아라.
수행에도 대상이 있으면 대상을 알아차릴 때 대처하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그놈의 대상을 갖다가 꿰뚫어지게 알아차리는 것! 이렇게 꿰뚫어지게 알아차렸는데 그냥 움직임으로 알아차릴 때가 있을 거고, 무상·고·무아로 알아차릴 때가 있을 거고, 물론 그건 틀리겠죠. 그리하더라도 그 대상을 직접적인 것으로 할 때가 있고, 또는 그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다른 것을 대상으로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순수하게 위빳사나를 하는 사람이 아니면 조그맣게 일어나는 대상들을 무시해 버리죠? 그러니까 그걸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근데 사실은 순수하게 위빳사나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으면 그걸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싸움이 있을 것 같으면 싸움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싸움은 없습니다. 예. 그렇게 판단을 하면 됩니다. 그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야 됩니다.
쉽게 말해서 도망을 치든지 아니면 어떤 방법을 택하든지 다툼이 있어가지고 이로울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걸 갖다가 반드시 인식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됩니다.
안 될 때 그렇게 하라는 얘기입니다. 정 안될 때!
그다음에 다섯 번째 깜맛사까따(kammassakatā)라고 하는 겁니다.
"생명은 자신이 자신의 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해야 됩니다. 저렇게 나하고 싸우려고 하는 저것도 지 몫이지 내 몫은 아니다" 하고 판단을 내려야 됩니다. 그것으로 해서 내가 성질냈다, 그건 내 몫입니다. 내 몫을 갖다가 좋은 거 챙겨야지 나쁜 거 챙길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업의 법칙을 반드시 기억을 하라!
그래서 이 5가지를 항상 자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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