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4lnJzsvHqPg?si=9KENyTOdGfsT2tTD
* 빠릿따(paritta, 보호경 혹은 보호게송)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130315_2)
이번 주에는 뭐 한다고 그랬죠? (수행자 : 빠릿따)
빠릿따(parittā) 한다고 그랬죠. 빠릿따 좀 공부해 오신 분 손 한번 들어봐. 안 했어? (뜻만 알았어요) 뜻만 알았어요? (예) 빠릿따 뜻이 뭔데요? (보호하는 경, 주문) 아, 보호하는 주문?
보통 한국에서는 그래서 '보호주, 호주'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건 잘못된 겁니다. 어떤 경우든지 부처님은 주문 외운 적이 없습니다. 삐리리리리리 하면서 이렇게 주문 외워가지고 막 착 바뀌고 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거는 번역어를 쓰더라도 보호주 이런 식으로 쓰면 안 됩니다. '보호 게송' 아니면 '보호경' 이런 식으로 써야만이 그 빠릿따의 의미에 맞게끔 됩니다. 그렇죠? 부처님이 요술 부린 적 없죠? 그리고 부처님은 비밀스럽게 뭘 한 건 없죠? 그건 이제 여러분들이 더 잘 알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어를 쓰더라도 주(呪)라는 주문(呪文)이라는 그 주(呪) 자를 쓰면 안 됩니다. 어쨌든 뜻이라도 알아왔으니 다행이다.
또 다음 주에는 또 다음 주제를 미리 얘기해 줄 건데 이게 공부 안 해 오면 스님 수업 대충대충 해버립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얼마만큼 공부하느냐에 따라서 틀려집니다. 왜 그러냐면 매주 프린트가 나가는데 프린트를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제한돼 있기 때문에.
근데 그 주제를 공부를 안 해오면 그냥 스님이 대충대충 이렇게 넘어가 버려도 여러분들이 대충 넘어가는지를 모릅니다. 그럼 질문할 거리도 없어지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이왕 공부한 거 좀 알차게 해야 될 거 아니라. 그리고 공부를 시작했으면 끝나고 나면 그래도 뭔가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책 한권 내어서 앞으로 두고두고 이제 볼 수 있는 그런 자료들이 되도록 해야 될 거 아니라. 공부를 한 사람은 그래도 그걸 보면 다시 또 새록새록 새롭게 돼나가니까 반드시 1주 전에 주제를 주면 그 주제에 대한 것은 공부를 조금 해오셔야 됩니다. 회장님 알겠죠?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스님이 1교시를 맡기로 했습니다. 2교시는 냐나로까 스님이 하고, 3교시는 빤냐완따 스님이 하고, 그렇게 이제 바뀌어집니다. 그래서 초반부터 여러분들은 그냥 콱 좀 쥐어 잡을라고.
그리고 뒤에 오늘은 어쩔 수가 없는지는 몰라도, 다음부터는 70분 강의할 동안에 이렇게 해가지고 불편해서 안 됩니다. 뒤에 뭘 하나씩 더 받쳐가지고 편안하게 자리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됩니다. 지금이라도 좌복들 더 있으면 수마나님! (네) 좌복이 있으면 좌복 하나씩 더 줘요. 엉덩이에다 받치게. 자리가 불편해갖고 이게 소리가 들어오겠어요?
초반에 스님이 얘기했듯이 참 재미없는 과목은 재미없는 과목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조금 생소한 과목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우짤끼라? 그걸 해야지.
테라와다 불교권에 있는 불제자들에게 “수행해봤습니까?” 하면 한 반 정도 손을 들어요.
그러면은 “빠릿따 해봤습니까?” 하고 손들라고 했으면 거의 100프로 다 듭니다.
그러니깐 수행보다도 빠릿따를 더 많이 한단 얘기라.
여러분 한번도 안 해봤어요? (네. 해 봤습니다.) 뭐 해 봤어요? (자애경) 자애경 독송도 해봤고, 조금 전에 삼귀의 오계도 독송할 때 했을 거고, 여러 가지들을 해 봤을 겁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아마 잘 모를 겁니다.
통계 나온 걸 한번 얘기를 할게요.
그럼 빠릿따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의식에서 하는 모든 것들은 다 해당이 된다고 보면 됩니다. 한국에서도 그런 의식도 많죠. 사람들이 돌아가셨을 때 제사 지내는 거, 생일 되면 생일 불공, 또 뭐가 있습니까? 정초되면 정초기도, 뭐 무슨 뭐 이런 식으로 다 그게 다 빠릿따 의식입니다. 근데 인제 그게 너무 많다 보면 주객이 전도돼 버리죠.
진짜 해야 될 것들, 빠릿따는 어떠한 경우든지 다른 것에 의존해가지고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는 것들이 강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자기가 스스로 복을 짓고 수행해야 되는 부분은 쏙 빠져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불교가 이게 짜뿌둥하게 되어 버리는 거라.
그런데 아까 냐나로까 스님도 얘기했지만은 수행해가지고 이 세상에서 지금 이 세상에서 닙바나에 이른다는 보장을 못 하니까 어떡할 거라? 그러니까 사람들은 빠릿따를 또 어느 정도는 찾게 됩니다. 그렇지만은 그렇다고 해서 그게 너무 많아버리면 또 안되는 거라. 이게 발란스가 맞게끔 유지를 해줘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빠릿따를 하더라도 바르게 해야 되는 것이지, 그냥 중얼중얼중얼 지 혼자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리로 할 거 같으면 그건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빠릿따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빠릿따에 대해서 잘 모르듯이 테라와다 불교 국가에 있는 사람들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리서치를 한 적이 있어요. 옛날에 스님이 태국에 살 때, 그때는 한참 2천년 뭐 이럴 때는 공부할 때기 때문에 그때는 인제는 리서치를 해옵니다. 그때 인제 해온 게 뭐냐면,
9가지 질문을 해봤어요. "빠릿따에 대해서"
첫 번째 당신은 빠릿따 의례를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믿습니까?
빠릿따가 부처님의 가르침입니까? 맞습니까?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근데 태국에서는 110명을 조사를 했는데 아니라고 부처님이 가르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사람은 14명이나 나왔어요. 그 스님들이 하는 빠릿따를 보니까 뭐 그냥 소원 들어주라는 게 거의 주종이니깐 ‘부처님이 저렇게 안 했는 것 같은데’ 하고 인제 생각을 하는 거라.
근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빠릿따도 부처님이 가르침이다." 하고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럴까? 왜 그렇게 생각할까? 우리 같으면 지금 생각해 봅시다. 뭐 ‘신묘장구 대다라니 나모라’ 이렇게 하잖아. 근데 막 의미를 모르고 이렇게 했다. 그걸 “이게 부처님이 하신 말씀입니까?” 하고 물어보면 아마 대승불교 사람들은 그렇다고 하는데, 테라와다 사람들은 아니라고 다 얘기하는 거라. 그렇죠? 왜 그럴까?
의미를 모르고 하는 상태에서 하는 게송들, 그리고 그 의미 파악을 해보니깐 도저히 이거는 부처님이 말씀했다고 믿기 어렵다 싶을 때는 “아! 이 빠릿따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빠릿따도 부처님 가르침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거는 다 그 의미들을 안다는 거라. 빠릿따를 하는 것들이. 그 의미를 보니까 “이거는 틀림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하고 믿게끔 되고
그리고 빠릿따를 갖다가 선별한 것들이 어디서 선별하느냐 하면 빨리어 경전에서 선별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는 빨리어 경전에서! 빨리어 경전은 다들 누구든지 부처님 말씀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선별해 온 거기 때문에 “빠릿따도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하고 다들 이해를 하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빠릿따 의례 속에는 초자연적인 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힘이 있어요, 없어요? 빠릿따에는 힘이. (있습니다.) 있어요? 어떤 힘이 있어요? 우리 '만다라'나 '다라니'나 뭐 주문들 이렇게 하면 대부분 뭐라고 인제 얘기를 합니까? 다 이 다라니를 할 것 같으면 뭐라 그럽니까? “업장이 소멸되고 깨달음을 이루고 삼재를 멸하게 되고” 막 이런다고 합니다. 진짜 그럴까? 그래요? (모르겠습니다.) 아니에요? (예) 그럼 뭐 무슨 이익이 있을까? (그건 잘못 알고 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는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대부분 얘기했거든. 95명이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거든. 이 사람들이 틀린 거예요? (틀린 거예요) 틀린 거예요?
근데 왜 ‘힘이 없어진다, 틀렸다’고 얘기하는데, 힘은 있습니다!
힘은 있는데, 힘의 한계는 분명하게 있다 하는 거라.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는 힘, 그리고 들음으로 인해서,
예를 들어 봅시다 여러분들이 뜻을 모른다고 해도 스님이 "아라항 삼마- 삼붓도- 바가와" 이렇게 할 거면 기분이 좋거든. 기분이 좋아지는 역할들을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선한 마음을 일으키게는 하죠. 듣는 사람도 그렇고 하는 사람도 물론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게 됩니다.
그런 역할들은 일정 부분 하는데, 과연 그걸 가지고 무슨 초자연적인 힘이 있을까? 여기에다가 하나 더 덧붙이면 하나의 힘이 더 있습니다. 스님들이 직접 체험하는 겁니다.
탁발하러 이렇게 나가는데, 처음에 출가했을 때는 태국에서 88년도 이럴 땐데, 탁발만 나갔다고 그러면 조금 있으면 발에 뭐가 찔려가지고 들어오든지 안 그러면 심지어 뱀한테 물려가지고까지 들어오거든. 실제로 내가. 큰스님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니는 탁발 나갈 때 자비심을 가지지 않고 탁발 나가니까 그렇다."하는 거라. 자비심을 지니지 않고 탁발을 그냥 딕딕딕딕 나가니까, 그렇다고 뭐 알아차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발에 찔리고, 그다음에 동물들도 그걸 안다는 거라. 그러니깐 해코지하는 것같이 느껴지니까 콱 물어버리는 거라. 그래서 그 뒤로는 갈 때 멧따-바-와나를 하고 갑니다. 그리고 걸어가면서 멧따-바-와나를 합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니도 행복해라.’ ‘내가 해침을 받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니도 나를 해치지 마라.’ 하면서 막 마음속으로 하면서 계속 가는 거라. 그런데 발에 찔리는 건 찔려. 그런데 뭔가가 나를 물고 하는 것은 좀 없어지더라구요.
그러다가 이제 율장을 읽게 되면서 율장에서는 탁발을 나갈 때 경행을 하면서 나가라고 얘기해요. 왼발 오른발 하면서 쭉 가고, 발을 들어올릴 때의 느낌 내릴 때의 느낌 이걸 그대로 관찰하고 이렇게 가니까, 아 그 뒤부터는 발에 찔리는 것조차도 없어져 버리네. 이렇게 바뀌어지게 됩니다. 조금 전에 스님이 빠릿따를 했죠. '내가 행복하기를, 니도 행복하라' 하는 그게 다 빠릿따입니다. 이 빠릿따를 하기 전에는 뭔가에 자꾸 물려 쌌는데, 적어도 그거는 거의 없어져 버리더라는 거라. 이것도 초자연적인 힘입니다.
그래서 이걸 어떤 면에서는 "신통력이 생기기도 한다" 하고 경전에서는 얘기를 합니다. 실제로 빠릿따를 하면 신통력이 생기기도 합니다. 삼매를 통해서 신통력이 생기는 수가 있고, 빠릿따들을 통해서 신통력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신통력이 생기면 빠릿따를 통해서 신통력이 생겨버리면 그걸 이용을 할려고 그럽니다. 니가 무슨 마음 먹고 있는가 하는 걸 갖다 내가 알려고 그러고, 그걸 가지고 이용하는 거라. 나도 옛날에 많이 해봤어요. 근데 이거는 금방 없어져 버립니다.
어쨌든 초자연적인 힘이 있는 건 틀림없습니다.
근데 거기까지! 그 이상은 없다! 단언을 합니다.
업장 소멸되는 법도 없고, 여러분들이 기도하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아무리 많이 한다 해가지고 내 소원을 들어주는 법도 없고, 소원이 이루어지기는 하는데 들어준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뭐 가피를 받아가 성불한 것도 아니고 그런 것은 전혀 없다. 쉽게 말하면 마음을 안정시키고 고요하게 하고 또 그래서 선한 마음을 일으키기는 하고 또 간혹 그중에는 신통력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 이상은 없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 없다? "있긴 있는데, 그리 뭐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하고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근데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하고, 그리고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되려고 하더라도 어떤 방법이 좋아요? 빠릿따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내용을 분명하게 알고 하는 것, 그리고 내용을 분명하게 알 뿐 아니라 자비심을 가지고 하는 것,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조금 더 나는 선심이 더 많아지고 기쁨이 더 많아질 것이고, 그로 인해서 신통력이 생기더라도 조금 더 높은 신통력이 개발이 되게끔 되는 거라. 그렇지 않고 알지 못하는 구절만 가지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그 이상은 가질 못한다는 거라. 선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연속되지 못하고, 신통력이 일어나더라도 그걸 나쁜 방향으로 쓰게 되지 좋은 방향으로 쓰진 못하게 된다는 얘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빠릿따를 하더라도 반드시 내용을 알고 하라. 그리고 빠릿따를 할 때 마음을 먼저 고요하고 안정되게 해서 마음에서 자애의 마음 까루나의 마음, 멧따 까루나 자비심입니다. ‘아이고, 저놈 불쌍하다’ ‘아유, 저 사람 참 잘됐으면’ 하는 그런 마음을 일으키면서 독송을 하도록 그렇게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게 원칙입니다.
자! 그다음에 어떤 경이 읽혀지고 있는지 아는가? 반은 압니다.
그러니까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아 우리 집에 제사가 있다. 그럼 그때 읽는 경전하고 그다음 우리집에 뭐 건물을 새로 지어가지고 독경하는 거 하고, 스님들이 독경하는 내용이 틀리다는 거는 알고 있다는 거라. 여러분 그거 압니까?
자! 오늘 법회 시작하는 날이다. 오늘 시작하는 날에 스님이 여러분들 축하합니다 하면서 읽어야 되는 경전을 갖다가, 누가 사람들 돌아가셨을 때 읽는 경전을 턱 독송해버렸다. 그렇다면 초상집이 돼버립니다. 그렇죠? 오늘 해야 되는 것은 “예. 축하합니다. 오늘 참 좋은 날입니다. 여러분들 앞으로 잘하세요.” 하는 그런 경전이 돼야 되는 것이지, “누구든지 태어나면 죽는다. 니도 죽게 돼 있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라” 이런 걸 할 거 같으면 뭐 초상 분위기가 돼버리는 거라. 반드시 그 내용들은 따로 돼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그 구절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거기에 맞게끔 준비들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집에 스님들을 초청해서 빠릿따를 행할 때는 어떨 때 행합니까? 하고 물어보니깐 대부분이 보니까 한 반 정도는 새로 뭔가를 해서 지었을 때, 건물을 새로 지었다든지 아니면 오늘이 생일이라든지. 여러분들 생일날 스님 초청합니까? 잘 안 하죠. 그래서 경사스러운 날, 애가 태어났다든지 이런 날, 그리고 누가 결혼한다든지 이럴 때, 스님들은 결혼식에 가질 못해도 집에 결혼식 때 신랑 신부들이 있을 때 가서 축원은 해줍니다. 어쨌든 이런 좋은 일일 때 보통 스님들을 초청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도 좀 그렇게 돼야 됩니다. 왜 그럴까? 왜 이 좋은 일에 꼭 스님을 초청할까? 빠릿따에 무슨 뭐 큰 신통을 부리고 그걸로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건 없는데 왜 그럴까?
복짓기 좋은 때라는 거라. 인식 자체가. 이 좋은 때가 어디 있느냐는 거라. 스님이 있는데서 우리가 싸울 거야 어찌 할 어쩔 거야.
스님 오면 반드시 또 삼귀의 오계를 주니까 그 오계를 받아가지고 그날도 그거 지키려고 하게 되고, 마음은 또 선한 쪽으로 일으키고, 또 공양물 음식 드리고 할 것 같으면 그거 스님들 잡숫고 하면 그 얼마나 좋아. 이것은 복 짓기 좋은 때라는 거라. 일상생활이라 하더라도 복짓기 좋은 때를 놓치지 말아라는 거라. 그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또 한 반 정도는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나쁜 일이 있을 때! 나쁜 일이 있으면 우리는 스님들한테 안 와. 스님들한테 연락조차도 안 합니다. 어느 정도 해결되고 나면 “스님 그동안 못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스님이 뭐하러 있어? 그럴 때도 쓸라고 스님이 있는 거지. 나쁜 일이 있을 때도 반드시 스님들을 부릅니다. 집안에 우환이 있고 뭐 만날 일이 잘 안 되고 이럴 때도 스님을 초청합니다.
그래서 흐름들을 갖다가 끊어주려고 합니다. 자기들이 못하기 때문에 스님들을 초청해야 된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그 흐름 내 힘으로는 모자라. 그러니까 그냥 그 흐름대로 그냥 가는 거라. 근데 이걸 갖다가 끊어주려고 스님들을 초청한다는 거라.
나쁜 일이 있을 때, 좋은 일이 있을 때 공히 스님들을 집에 초청해서 복을 쌓는 역할들을 하고 그 흐름들을 끊어주는 역할들을 한다 하는 거라.
여담같이 들리겠지만, 스님들이 여기 올려면 거의 점심을 대충 때우고 옵니다. 근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복을 짓고 싶다, 그럴 것 같으면 강의하시는 스님이 이번 학기에 세 분이다, 그러면 세 분 잡숫는 거 뭐 그냥 비빔밥 한그릇 하면 됩니다. 쉽게 말하면 그러면 그 가격이 해봐야 한 3만 원 정도 할까, 그러면 ‘1년에 한차례 나는 이번엔 스님들 공양 한끼 대접할란다’ 하고 마음먹었다. 그러면 사무국에 딱 접수를 해 놓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는 누가 또 할려고 한다. 그렇다면 스님들은 매주 점심 끼니 걱정 안 하고 와서 밥을 먹고 법을 설할 수가 있는 거라. 공덕 쌓기 아주 좋은 기회인데도 여러분들은 생각조차도 못하고 있죠?
근데 대부분 사람들은 공덕 쌓기 좋다고 할 것 같으면 지가 다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좋은 거 맛있는 거 할려고 하게 됩니다. 절대 그럴 필요 없습니다. 무리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부산 같은 경우는 매주마다 탁발을 하니까 인제는 압니다. 무리 안 해도 충분히 그게 돌아가집니다. 여러 사람들이 할 것 같으면은 그거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도 어떤 일이든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복을 쌓는 일들에, 그리고 그 공덕을 쌓는 일들에, 그걸 갖다가 '탐본'이라고 그럽니다. ‘뿐냐’ 공덕을 쌓는 날!
그 공덕이 자꾸 쌓이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공덕 쌓는 일에 등한시하지 말아라. 보시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도 계율을 오계를 받았으면 오계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또 수행법 배웠으면 수행을 자주자주 하려고 합니다. 이게 다 공덕 쌓는 것들입니다. 그 공덕 쌓는 일들을 등한시하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절에서 하는 빠릿따들이 있습니다. 집에 초청하는 거 말고 절에서 하는 게 있습니다. 절에서 하는 게 뭐가 있어요? 저번에 우리 테라와다에서 뭐 한번 한 적 있죠? 까티나 한번 한 적이 있죠? 절에서 한거죠? 까티나 의례 의식! 또 뭐 한 게 있습니까? (개원법회)
예. 개원법회, 하동이나 이런 데서 한 적이 있고, 그리고 불상점안 법회 이런 것도 있고, 그거 말고도 많죠? 근데 여러분들은 거의 안 해봤습니다. 뭐가 더 있을까?
안거 시작하면 안거 시작한다고 해야 되고, 안거 끝나고 나서 그 참회할 것 같으면 참회하는 것도 해야 되는 거고, 그다음에 스님들 가사 올린다면 가사 올린다고 또 해야 돼고. 또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하는 것 부처님 오신 날! 부처님 오신 날도 하고, 그다음에 또 장례식이나 이런 것들을 전부 절에서 합니다. 그런 것도 하고 그거 다 절에서 하는 겁니다.
근데 한국에서는 아직 이게 테라와다 교단이 정착이 안 됐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전혀 못 본다는 거라. 근데 대승불교에서는 딱 날이 정해져 있죠? 초하루 가야 되고, 그다음에 보름 가야 되고 지장재일 관음재일, 자기는 안 가도 그날은 절에 가는 줄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 말고도 부처님 오신 날, 다음에 정초기도 뭐 백중 이럴 때는 다 불교 행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뭘 알고 있느냐는 거라? 테라와다 불교 행사 하는 거. 테라와다 불자 아니죠 아직? 빨리 여러분들이 이걸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이게 정착이 돼나갑니다.
그다음에 계속 물어봅니다.
이렇게 절이나 집에서 의례를 하게 될 때 테라와다 불자일 것 같으면 준비해야 될 게 뭔가? 하고 물어보니까,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준비해야 될 걸 다 알고 있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지금 불상이 없으면 불상도 갖다 놔야 되는 거고, 향이 있으면 향도 켜고 촛불도 켜야 되는 거고, 스님들 마실 물도 준비해야 되는 거고, 스리랑카 같은 경우에는 스님 앉을 때 그냥 이런 데 앉도록 하질 않습니다. 흰 천을 갖다 씌워가지고 앉도록 합니다. 흰 천도 준비해야 되는 거고, 여러 가지 준비할 것들을 다 알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스님들이 가면서 이거 설명 안 해줘도 자기들이 다 준비를 해. 그래서 불편하지 않게끔 만드는 거라.
여러분들은 여기 오늘 담마스쿨 하는 스님들 오는데 불편하지 않게끔 할 수 있습니까? 아직 뭘 해야 될지 몰라서 모릅니다. 그렇죠? 그래서 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든 집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든 어떻게 하면 불편하지 않게끔 하는가? 하는 걸 갖다다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것이 테라와다 재가자의 의무입니다. 그것은 삼보를 호위하고 삼보에 대해서 존경심을 나타내고 그분들을 세속적인데 물들지 않게끔 만들어줘야 되는 겁니다.
스님은 사회생활 안 해봤어요. 대학 4학년 때 일찍이 출가를 해버려가지고. 그래서 마 누가 사회 얘기할 것 같으면 머리 아파요. 또 뭐 결혼 얘기하고 뭐 이렇게 하면 저게 뭔 소린가? 이럽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그걸 가지고 막 스님한테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인제 스님이 그걸 불교적으로 풀어내줘야 됩니다.
근데 경험해 보니까, 차라리 내가 모르는 것이 판단하기에는 쉽더라는 거라. 판단하기가. 오히려 쌩짜배기로 모르는 상태에서는 객관적으로 그걸 갖다가 볼 수가 있게 되더라는 거라.
스님들이 사회에 물들지 않게끔 하면 할수록 스님들의 역할은 불교적이 돼 버립니다.
자꾸 물들게 할 것 같으면 비불교적으로 나아가 버립니다. 스님이 돈을 만지고 경제를 할 것 같으면 법문하고 수행 지도하는 게 등한시 돼 버립니다. 또 사회에 관심을 자꾸 돌리다 보면 사회적인 일을 할려고 그러지 불교적인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은 되도록이면 스님들은 -출가자잖아. 출가는 집을 사회를 떠나는 겁니다.- 떠날 수 있게끔 만들어줘야 되는 역할들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이런 빠릿따 의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공덕은 어느 쪽이냐? 이 생이냐 아니면 다음 생이냐 어느 쪽입니까?
예 뭐라고? (둘 다예요) 둘 다? 인제 대부분 둘 다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여기에는 현세 69명, 다음 세상 25명, 양쪽 모두 10명 이렇게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세상보다는 이 세상에서 이익을 얻는다는 게 오히려 더 많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럼 왜 그럴까?
그건 앞으로 이게 빠릿따를 쭉 해나가다 보면 아 역시 다음 세상에 내가 천상에 태어나고 다음 세상에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어떤 좋은 조건이 되고, 이런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지금 지금 나에게 더 좋은 이익이 있구나 하고 알게끔 됩니다.
가끔 이제 우리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스님들을 이렇게 보면 그 스님이 나한테 아무것도 안 해줬는데도 그냥 씩 웃으면, 싹 마음이 평온해지는 걸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저 같은 경우에는 태국에 있던 내 스승님 같은 경우에는 내가 이제 지금 53인가 넘어 됐는데 아직도 가면 어린 양을 부립니다. 지금은 인제 열반하시고 없지만은, 가면 어린애가 되는 거라. 왜? 그렇게 좋거든. 어머니 같고 그분이 풍기는 것이나 이렇게 해주는 게 따뜻한 말 한마디 없어도 너무 좋은 거라. 그런 마음이 들도록 된다는 거라.
빠릿따는 누가 합니까? 대부분은 보면 스님이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는 경우도 있지만 스님들을 통해서 빠릿따는 발현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면 그 스님이 그 빠릿따를 하는 것만 해도 이미 좋아. 지 마음이 좋으면 모든 일들은 순조롭게 잘 풀려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 이상은 뭐라고 생각하냐면, ‘이생에서 지금 이생에서 내가 저 빠릿따 함으로 인해가지고 좋은 조건들이 됐다’ 하고 생각들을 하게끔 됩니다.
그런데 빠릿따 의례를 한 결과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하고 물어보니까 거의 대부분은 변화가 없었다고 얘기합니다. 오로지 14명만이 좀 변화가 있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근데 왜 그렇게 많이 할까? 별 변화도 없는데. 지금 당장 나에게 뭔가 콩고물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할까? 왜 그래요? 여러분은 왜 삼보예찬 합니까?
왜 해요? 그렇다 해가지고 "아라항 삼마- 삼붓도- 바가와- 붓당 바가완땅 아비와-데-미" 하고 절 한번 꼬빡 한다고 해가지고 부처님이 이놈 하고 예뻐해 주지도 않는데 왜 해요? 그걸. 스님이 하라니까 하는 거예요? 아니라요? (예) 왜 하는데 그러면? 이익도 없는데.
선한 마음을 그때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내가 적어도 그거 할 동안에는 공덕을 쌓고 있다고 알고들 있으니까 그거 하는 거라. 여러분들이 지금 법문을 듣고 있다. 그럼 법문을 듣고 있을 때는 나쁜 마음 일으키지 않을 거란 말이라. 그러니까 법문 들으려고 하는 거라. 법문 내용이 아무리 좋으면 뭐 할 거라? 성질내고 있을 것 같으면. 그런 거라. 그렇기 때문에 지금 변화가 없다고 다들 알고 있지만 그거 하는 거라.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발원하는 것들이, 여러분같이 내가 "이당 메- 다-낭 닙바-낫사 빳자요- 호-뚜" 그럽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뭔가 공양물을 이렇게 하나 주면서 “이와 같은 이 보시한 공덕으로 내가 깨달음에 이르는 조건이 되기를” 하고.
테라와다에서는 절대 그렇게 얘기 안 합니다. 뭐라고 얘기할까? (부유해지고, 행복해진다.) 부유해지고, 행복해진다? 그것도 맞아요. 근데 그렇게 보통 얘기하지 않고
“내가 이런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조건을 준 시간, 축원을 해준 스님들에게 고맙습니다.” 하고 먼저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잘 살고 조금 더 편안해지고, 조금 더 행복해지기를” 그래서 이 공덕이 다음 생에 간다 할 것 같으면 “내가 좀 더 좋은 조건에 태어나기를” 그러다가 결국에는 “닙바-나에 이르기를” 하고 얘기합니다.
근데 닙바나는 맨 마지막 .... 나와 그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 거라.
중요한 거는 이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것 이것은 참 나에게 좋은 조건이구나 하고, 그 조건에 대한 감사를 먼저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순수한 것 작은 것들 “내가 조금 더 건강해지고, 조금 더 행복해지고 그랬으면 좋겠다” 하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 내가 몇 시까지 해야 되죠? 4시 반이죠. 진도 나갑시다.
이제 대충 빠릿따라는 게 뭔지 알겠죠? 음, 뭔진 알 겁니다.
빠릿따를 하는데 주의할 점, 5페이지에 4가지로 써놨습니다.
장음과 단음을 분명하게 구별해서 독송하라.
장음 단음은 구분할 줄 압니까? 다음 시간에 주제입니다. '빨리어 발음하는 것', 그리고 '테라와다 불자가 되는 조건 이 2가지' 입니다. 다음 주 주제 공부해 오십시오.
어떤 사람은 BUDDHA 붓다죠? 붓다를 적어놔 놓고 어떤 사람은 붓다 '붓'에다가 '시옷'을 하는 사람도 있고 '디귿'을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붓드하' 이렇게 기록하기도 하고 합니다. 어떤 게 맞습니까?
당연히 우리 여기서 '붓' 시옷 해가지고 '붓다'라고 적어놨으니까 그게 맞겠지. 그렇죠?
이게 빨리어 발음하는 법을 몰라서 그럽니다. 장음과 단음은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자, 한번 해보겠습니다.
"요-소- 바가와- 아라항 삼마- 삼붓도-" 장음 단음 있습니까?
'요-소-' 길게 했죠. '요소바가와' 이렇게 안 했죠. 분명히 '요-소- 바가와-' '바가'는 짧은데 '와-'는 길죠. 장음 단음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빨리어는 어떤 경우든지 글자가 아니었죠. 글자로 쓰여진 게 각각의 4나라에서 써지게 됩니다. 자기 나라 말로. 싱할라 말로, 란나 타이 말로, 버마 말로, 깜포차 말로 이렇게 4나라 말로 쓰여지게 됩니다.
쓰여지기는 지더라도 자기 나라 말로써 쓰여진 것뿐인 것이지. 빨리어는 글자가 아닙니다. 말입니다. 그냥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는 말입니다.
지금 그 말은 이게 틀린지 맞는지 구분하는 것은 '장음 단음' 입니다.
'아라하-'가 돼야 되는데 '하-'가 길게 된 거하고 '아-'가 길게 되고 '아-라하-'가 되는 거하고 는 의미가 완전히 틀려져 버립니다. 그래서 빨리어를 발음할 때는 장음 단음 구분을 분명하게 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빨리어를 알려고 하는 것보다는 빨리어를 존중할 줄 알아야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물론 빨리어를 모를 경우에는 빨리어로 독송 안 해도 됩니다. 한글로 독송하면 됩니다.
"요-소- 바가와- 아라항 삼마- 삼붓도-"
"그분 존귀하신 분 모든 번뇌 떠나신 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이렇게 해도 됩니다. 빨리어 모르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럼 의미를 알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조금 더 독송할 때 마음이 선한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런데 의미를 모르는 상태일 것 같으면 그냥 "요-소- 바가와- 아라항 삼마- 삼붓도-" 이걸 계속한다 해가 선한 마음만 일어나겠어요? 악한 마음도 일어나집니다. 이 좋은 걸 하면서 왜 악한 마음을 일으키느냐는 거라. 그래서 반드시 의미를 알아라.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 국가에 스님들이 각각의 시험을 칩니다. 거의 12단계로 시험을 치룹니다. 한 급 올라오고, 한 급 올라오고, 한 급 올라가고, 이런 식으로 돼나갑니다.
한급 올라갈 때는 어떻게 하는지 알아요? 똑같이 공부합니다. '아라항' 가지고 공부해.
근데 1학년 때는 '아라항' 할 것 같으면 음, '번뇌로부터 떠나신 분' 요것만 알면 됩니다.
2학년 되면 '아라항' 할 것 같으면 이게 '아-라하'도 있고 '아라하-'도 있고 '아라한따'도 있고 이걸 또 구분해가 공부를 해야 돼.
또 3학년 되면 이걸 또 아홉 9, 구분이라 해가지고 9개로 나눠야 됩니다.
'아라하'는 언제 부처님이 얘기했고 어느 때 얘기했고, 그러니까 2년 반까지 총 동원해가지고 이렇게 공부를 해야 되는 거라. 나중에는 쭉 하다 보면 '아라항'이란 단어가 경전 어디 어디 나오는 것까지 다 알아야 돼. 나중에 되면 머리가 복잡합니다.
스님이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그 경전들을 이해하고 있어야만이, 거기에 맞게끔 발췌를 해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능력이 돼야만이 그다음부터 법을 설하게끔 자격 조건을 줍니다 사실은. 어쨌든 간에 의미들을 갖다가 여러분들은 적어도 겉핡기라도 알 수 있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냥 모르고 자꾸 하려고 하지 마라라는 거라.
여기도 다라니 하시는 분들 많죠? 신묘장구대다라니든지 아니면 뭐 춤다라니든지 뭐, 하여튼 많을 겁니다. 그것도 달달달달 외우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그거 외운다 해가지고 무슨 일이 일어나질 않습니다. 차라리 그것보다는 그 의미들을 파악을 하고, 그래서 그걸 새기고 새기고 해서 그것을 자꾸 실천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 의미들을 갖다가 파악해서 실천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참 불교는 절름발이가 돼 버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경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독송합니다. 그래서 이해를 할 것 같으면 그냥 "아라항 삼마- 삼붓도- 바가와-" 이리 하더라도 아라항의 의미를 갖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서는 더 벅차집니다.
태국 갔을 때 스님이 딱 그 게송 하나 때문에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요?
펑펑펑펑 눈믈이 납니다. 그 의미가 너무 가슴에 사무쳐가지고. 공부할 때는 그걸 몰랐는데 자꾸 곱씹고 곱씹고 하다 보니까 너무 좋은 거라. 그런데 그 소리가 옆에서 누가 탁 들린다 그러면 그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고 그 의미를 갖다 가슴에 새기게 됩니다. 그러면 더 기쁨이 일어나지고 그로 인해서 힘을 더 얻게끔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해하고 독송을 하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그다음에 경을 듣는 사람들에 대해서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독송합니다. 경전을 독송할 때는 어떤 경우든지 자비로운 마음을 지니고 독송하도록 돼 있습니다.
부처님이 출가한 스님에게 처음으로 빠릿따를 허용한 게 '칸다 빠릿따'입니다.
'칸다' '집합체, 모임'이라는 뜻이죠. 그래서 '빤짝 칸다' 할 것 같으면 '오온'이라고 그러죠. 그러니까 칸다 숫따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앙굿따라 니까야에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칸다 숫따'라고 안하고 '칸다 빠릿따'라고 얘기 합니다. 그리고 '칸다 자타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용은 똑같습니다.
부처님의 과거 전생에 빠릿따 형식으로 했던 게 칸다 자따까고, 그다음에 율장이 있는 게 이 칸다 숫따 경을 갖다가 독송할 수 있도록 부처님이 허락한 인연에 대한 얘기를 하고, 이런 것들입니다.
근데 어쨌든 그 칸다경에 보면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은 인도나 동남아시아 같은 경우에는 벌레들이나 뱀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특히 동굴에서 생활하고 숲속에서 생활하는 분들은 수시로 만나는 게 그겁니다. 어떨 때는 장의 이 대가사를 갖다가 이렇게 걸어놨는데 대가사를 입고 아침 예불을 갈려고 이렇게 대가사를 딱 집을려고 하는데 보면 저 뱀이 1마리 옆에서 이렇게 가는 게 보입니다. 진짜 그렇게 많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그랬던 모양이라. 사람들이 만날 뱀한테 물려 죽거든. 그래서 부처님한테 와서 이렇게 사람들이 또 죽었습니다 하니까 부처님 그때 뭐라고 하냐면 니들이 뭐가 없다? "니들이 자비심이 없어서 물려 죽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도 자비심이 없으면 밖에서 오는 자극에 그대로 노출돼 버립니다. 근데 자비심이 있을 것 같으면 밖에서 오는 자극들을 대부분 방어를 하게 됩니다. 한번 가져보십시오. 진짜 그런지 안 그런지. 실제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비심을 가져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이 칸다 숫따라고 하는 걸 갖다가 요렇게 요렇게 독송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보니까 그 뒤로는 뱀한테 물려 죽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뱀뿐이겠어요? 여러 가지들 많습니다. 벌레부터 해가지고 외부적으로 오는 자극들에 여러분들은 거의 노출돼 있습니다. 노출됐는데 자비심만 있을 것 같으면 이것을 방어할 수 있다.
그래서 빠릿따를 뭐라고? 보호경!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경을 독송할 때는 반드시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독송하도록 하라.
그다음에 네 번째 노래하듯이 독송하지 말아라. 요즘 그런 거 많이 나오죠. 우리 교단 홈페이지에도 보면 삼보삼창이 노래 형식으로 돼 있죠? 그리고 여러분 가장 많이 아는 멧따숫따 그것도 대만에서 만든 자비송 그것도 이렇게 노래 형식으로 돼 있죠. 아미타경도 이렇게 노래 형식들로 되고 대부분 보면 노래 형식을 이렇게 넣어요. 근데 노래 형식으로 하지 말아라는 거라. 왜 그럴까? 노래 형식으로 할 것 같으면 그거에 빠져들어 버리고, 감성적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는 거라.
불교는 어떤 경우든지 이성 쪽입니다. 감성을 자극하는 일들을 하면 안 된다 하는 거라. 그래서 경을 독송함으로 인해서 마음에 기쁨이 일어나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즐거움이 일어나서 그리고 그런 쾌락 쪽으로 빠지도록 만들 거 같으면 그건 안 된다는 거라. 경전독송 할 때는 그렇게 해야 됩니다.
물론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고요해지는 것은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부작용들도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경전독송을 그렇게 하지 말아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게 여러분들이 빠릿따를 독송할 때 주의해야 될 것들입니다.
이런 게 빠릿따인데, 그래서 앞으로는 빠릿따를 독송을 많이 시킬 겁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힘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게 필요가 없습니다. 근데 힘이 없을 때는 이것으로 인해서 힘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여러분들에게 “이 게송을 외워오시오. 이 의미를 파악해 오시오.” 하고 분명하게 얘기를 할 겁니다. ‘난 알고 있고 난 다 외우고 있는데’ 스님이 필요해서 그런 건 아니죠? 여러분들에게 필요해서 그런 것들입니다.
그 부분들은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불만 없이 외워오라면 외우고 와야 돼요. 알았죠? (예)
그래서 빠릿따를 독송할 때 그 공덕들이 있으려고 할 것 같으면 정확하게 발음을 해서, 이해한 상태에서 발음을 하고 ,또 마음에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독송하도록 하라. 그러면은 독송하는 자에게 큰 공덕이 있다.
그렇지 않고 의미도 모르고 자비심도 없이 독송할 것 같으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쪼매 밖에 없다. 그 공덕이. 그리고 그 공덕은 오래가지 못한다.
듣는 사람도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들을 때 더 좋겠죠.
그래서 의미를 듣는 사람도 의미를 이해하고 나서 들을 때는 경건하게 듣도록 하라. 그냥 감성적으로 빠져갖고 흥얼흥얼 하면서 듣지 말고 경건하게! 바르게 이해하고 경건하게 듣도록 하라. 그럴 것 같으면 그 듣는 사람도 똑같이 그런 공덕이 있다 하는 겁니다.
이해하겠습니까? (예)
그런데 빠릿따는 독송만 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죠? 그걸 따라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공덕은 거기에서 끝나버립니다. "빠-나- 띠빠-따 웨-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하고 스님이 얘기를 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따라서 “빠-나- 띠빠-따” 했다. 뭡니까? 의미가? 남을 죽이지 않고 사랑하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그 게송입니다.
빠-나- 띠빠-따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뭐가 중요한 겁니까? 남 해코지 안 하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속적으로 가지는 게 더 중요한 거죠? 실천하는 게 중요합니다.
근데 빠릿따는 그래서 뭐라요? 독송할 때도 좋지만은 그것을 지켜나가고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공덕은 계속적으로 이어지게끔 된다는 거라.
자애경 한다. 살아있는 존재든지 아니면 두 발 가진 짐승이든지 아니면 이제 태어날 사람이든지 아니면 멀리 있는 사람이든지 그 사람들이 다 자비의 마음을 가지기를 하고 독송한다.
그럼 여러분들은 독송할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멀리 있는 자든지 할 것 같으면 ‘멀리 있는 자에게 자비심이 있기를’ 하고 마음으로 염원을 하면서 그렇게 해야 됩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는 자라고 하더라도 그 존재들을 향해서 자비의 마음을 그대로 갖다가 방출을 해야 됩니다. 직접 내가 실천해야만이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래서 빠릿따는 독송만으로 끝내버리면 안 된다는 거라.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실천하라는 거라. 돈 정초 기도에 1만 원 주고 지는 가지도 안 하고 꼴라당 종쳐버리고 이렇게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는 거라. 알겠죠?
그리고 빠릿따에는 힘이 있다고 보통 얘기를 합니다. 위신력이 있다. 왜 그럴까? 왜 힘이 있다고 그럴까요? 진실하기 때문에!
만약에 내가 예를 들어서 지금 법회가 있는데, 4시 반에 끝난다고 ‘시간이 빨리 가기를’ 지루해 죽겠다. 내 소리 뭐 하는지 저 사람들 하나도 못 알아듣는다. 그래서 ‘아유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 하고 빠릿따를 하면서 한다. 진실합니까? 아닙니까? 진실할지는 몰라도, 내한테는 진실한 거지.
근데 그거는 진실하더라도 나쁜 마음으로 진실한 거죠? 그럼 이거는 나에게 공덕이 있는 거라, 없는 거라? 없는 거죠. 근데 만약에 내가 ‘아 여기 있는 사람들이 그래도 조금 더 좀 마음이 좀 너그러워지고 싸움박질 안 했으면’ 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이것도 진실한 겁니다. 근데 그거는 선한 거죠? 그럴 것 같으면 내가 그런 마음을 지니면 여러분들은 그 힘으로 인해가지고 그 보호를 받게 되는 거라. 진실된 힘은 이런 역할들을 합니다.
그 진실된 게 뭐가 있어요? 부처님!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신 분! 그 이상 가는 분 없습니다. 내가 그분보다 뛰어난 사람을 발견하겠다면 나는 거기 개종합니다. 근데 개종 안 하고 있는 것은 그분이 최고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 그 이상 훌륭한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따라 합니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상가 스님들 그마만큼 청정하고 그마만큼 부처님 가르침을 부단하게 따라 할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욕심 가지지 않고.
그러니까 존경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을 믿는 힘으로 인해서 내가 마음이 좀 안정되기를, 담마를 믿는 힘으로 인해서 내가 고요해지기를, 상가를 의지하는 힘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좀 더 행복하기를, 이렇게 얘기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진실한 말을 하고 있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그 힘으로 인해서 나는 힘을 얻어서 조금 더 진실해지고, 조금 더 행복해지고, 조금 더 편안해질 수가 있는 거라. 왜? 내가 그것은 진짜인 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습니다. 진실된 말들을, 그리고 바른 말들을 빠릿따의 형식으로서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것이 여러분들을 오래도록 유지해주고 여러분들을 보호해주는 역할들을 합니다.
그러면은 빠릿따보다 좋은 게 뭐가 있을까? 말보다 좋은 게 뭐가 있어요? (행동) 행동! 그렇죠. 말보다 좋은 건 행동입니다. 그럼 행동으로 내가 행복해지는 행동하면 되는 거고 고요해지는 행동하면 됩니다. 내가 행복해지려면 내가 갖고 있는 거 넘한테 줘버리고 나면 나는 그렇게 행복해집니다. 여러분들은 그렇습니까? 아깝다 하는 생각이 들어버리면 그거는 이미 틀린 거라. 주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을 가져오는데! 모르죠? 한번 겪어 보십시요. 그리고 남에게 선한 마음을 주고 남을 도와주는 것이 얼마나 나에게 행복을 가져오는데!
테라와다 불교, 한국을 얘기합니다. 참 부족한 게 뭐냐면 대승불교들은 이런 거 참 잘합니다. 남 뭐 도와주고 아낌없이 봉사하고 노력하고 하는데, 테라와다 불교는 개뿔 아무것도 안 할려고 그래. 지 혼자 수행이 최고다 하는 거라. 수행이나 잘하고 있을 것 같으면 괜찮은데 만날 지 고집만 부리고 앉아있으면서도, 그러고 만나서 테라와다가 최고다 하고 그래요.
뭘 잘하는 게 있습니까? 남을 도와주길 잘해요? 아니면 수행을 잘해요? 뭘로 가지고 최고라고 할 거라? 진짜 반성해야 됩니다. 테라와다 불교인들은. 그러니까 남한테 욕만 먹는 거라. 찌질이들만 모여가지고 있다고. 그거 아닙니다. 그거 아닙니다.
바르게 테라와다 불교도가 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진짜 남을 도와주고 남에게 아낌없이 줬을 때 나에게 진짜 기쁨이 오고 나에게 행복이 오는 법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말보다도 이런 행동이 더 훨씬 큽니다. 이거보다 더 큰 게 뭐가 있겠어요? 마음! 하고 탁 나와야지. 마음입니다. 그런 행위 자체도 여러분들에게는 빠릿따가 되는 겁니다.
그것보다 더 큰 빠릿따는 마음! 마음으로 내가 말하고 있으면 ‘말하고 있다’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내가 보고 있으면 ‘보고있다’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걷고 있으면 ‘걷고 있다’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그 어디에도 알아차림이 유지돼 나가가지고. 선하지 않는 마음들이 일어나질 않고, 그것이 계속되어 나간다. 마라가 나에게 오더라도 내가 죽을 때가 되면 나를 못 잡아가.
그마만큼 잘 보호해주는 게 어디 있어요?
마음으로 알아차림을 계속적으로 유지해 나가는 것이 가장 큰 빠릿따입니다.
말로써만 독송하는 걸 빠릿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행하고 또 일으키는 마음들이 전부 다 여러분들에게는 빠릿따가 되는 것들입니다. 알겠죠?
뭐 하다가 이렇게 빠져버려요. 그런데 빠릿따 의례들이 각각의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그런 거 본 적 있어요? 빠릿따 할 때, 스님들이 부처님한테서 실을 매달아가지고 여기로 쭉 내려와가지고 스님들마다 이렇게 손에다가 실을 이렇게 쫙 연결해가지고, 그래가지고 맨 마지막에는 바리때를 딱 하나 놔 놓고 그 바리때 안에다가 실을 갖다 요렇게 딱 감아놔 놓고, 그러고 나서 스님들이 뭐 독송을 합니다. 어떤 독송을 하든지 거기에 맞게끔.
"자얀또- 보-디야- 물-레- 삭까야-낭 난디 왓다노"
이런 식으로 쭈욱 독송을 합니다. 독송을 다하고 나면 스님들이 그 실을 착 감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바리때에 들어 있던 물을 갖다가 여러분들에게 착착 착착 뿌려줍니다. 또는 누가 좀 필요하다 할 것 같으면 손에다 줘가지고 주면 쪽 빨아먹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또 오면 “스님! 그 실 좀 주십시요” 할 것 같으면 실을 똑 끊어가지고 여기에다가 착 감아주고, 그 혹시 본 사람 있어요? 안 봤어요? 외국에 한번도 안 나가봤어요? (봤습니다.) 봤어요? (예)
그게 대부분 빠릿따 의례에서 하는 것들입니다. 근데 각각의 나라마다 조금씩 틀리죠. 큰 행사가 있을 때는 그렇게만 하는 게 아니고, 스리랑카 같은 경우에는 이 '빠릿따 만다빠'라 해가지고 빠릿따 집을 짓습니다. 야자나무나 이런 걸 가지고 해가지고 집을 아주 멋들어지게 동그랗게 돔 형식으로 이렇게 짓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스님들이 거기 들어가서 찬팅합니다. 그 실을 붙잡고. 솔직히 난 몇 번 해봤는데 죽을 맛이라요. 밤새도록 그거 독송하는 게 쉬운 게 아니거든. 스님들이 돌아가면서 하는데, 한 사람 한 스님이 들어갈 것 같으면 보통 한 다섯 스님씩 하는데 한 3시간씩 독송을 합니다.
경전을 몰라서 독송 못하는 게 아니고 난 목이 아파 가지고 죽겠어요.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내 다음부터는 이거 하면 나 부르지마. 다른 스님들 가라. 딱 형식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게 빠릿따 의례들입니다.
그리고 또 만약에 포살당을 짓는다. 포살당을 하는 의례들이 따로 딱 정해져 있습니다. 그 형식을 그대로 지켜야 됩니다. 여러분 한 번도 안 봤죠? 그 집에 새로 건물을 지었다, 그렇다면 거기에 맞는 형식이 있습니다. 스님들이 가서 해야 되는 게. 근데 그걸 바로 알아라라는 거라. 어떤 면에서는 형식에 너무 치우치다 보면 본질을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본질을 잃지 않으려고 할 것 같은 형식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만이 본질을 잃지를 않습니다. 쥐뿔도 모르면서 ‘나는 수행이 최고다.’ 하고 그럽니다. 다른 거 알면서 수행이 최고다 할 것 같으면 내가 이해를 해. 모르면서 그런다는 거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보라고 그럽니다. 누가 수행이 최곤지 최고가 아닌 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아우르지를 못하니까 만날 수행 자기수행에만 빠져있는 거라. 남의 것은 틀리다고 그러고.
자, 어쨌든 이런 빠릿따 의례들이 있습니다. 인제는 빠릿따 이해를 했죠?
주 교재는 지금 「테라와다 불교의범」 입니다. 그래서 불교의범 이걸 스님이 맡아 있는 시간 20시간 입니다. 20시간 동안 이걸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그중에 가장 요긴하고 중요한 부분들만 좀 하고, 이것 말고 또 여러 분들이 알아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그럼 그런 부분들을 가지고 앞으로 18시간 남았죠? 18시간 동안 채워 나가도록 할 겁니다.
그래서 왜 저 스님은 수행 지도하면서 수행도 안 가르쳐주고 뭐 쓸데없이 이거 하나? 이런 생각들을 가지지 말고 배워보십시오. 배워보면 여러분들에게 크게 도움이 될겁니다. 알겠습니까? (예)
자! 그러면은 재가자들이 스님들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하면 가장 좋을까?
또는 스님이 재가자를 대할 때 어떻게 대하면 가장 좋을까?
어떻게 해주는 게 좋아요? 여러분들은 스님들은 바라는 게 뭐가 있습니까? 뭐 해줬으면 좋겠어요? 수행지도 해줬으면 좋겠죠. 법 설해 줬으면 좋겠죠.
또 바라는 게 뭐가 있습니까? 그것밖에 없어요? 없어요? 이 2가지만 하면 돼요?
(대화 나누기가 편했으면 좋겠습니다.)
음, 대화하기 편해지면, 마음이 좀 더 자비롭고 그래서 질문하면 답을 좀 다 해줬으면 좋겠다. 또 뭐 바라는 게 있어요? 없어요?
그래서 「육방예경」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친근하게 대하라. 스님들을 대할 때.
친근하게 대하라.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저 스님이 설혹 예를 들어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걸 비방할려고 하지 말고, 그걸 애석하게 여기지만은 그걸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친근하게 자꾸 대화를 하라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그 스님이 바뀌어 나간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직접적으로 스님들에게 비난을 해버리게 되고, 또 어느 스님 어느 스님은 뭐뭐 어떻다 저떻다 하고 자꾸 비방을 하게 될 것 같으면, 이게 분란이 있게 돼 버립니다. 이거는 좋은 방법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 부분은 스님들이 충분히 알고 또 자기들이 그걸 개선해 나가려고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게 느리다는 것뿐인 거고. 그렇기 때문에 재가자들이 스님들을 보러 바라볼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신구의가 친근하게 되도록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선한 말을 자꾸 할려고 하고 선한 행위를 할려고 그러고 선한 마음을 자꾸 내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먼저 되도록 하고.
그다음에 스님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뭔가 하는 것들을 보고 그것들을 자꾸 채워주려고 해야 됩니다. 지금은 스님들이 필요한 게 뭡니까? 말하는데 만약에 목이 마를 것이다 하실 것 같으면 물을 갖다주면 됩니다. 스님들이 좌복이 있는데, 저 불편하지 않을까 싶으면 생각이 들면 저 좌복 좀 잘 해서 편안하게끔 만들어주는 것들입니다.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는 것들입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경제적인 활동을 하는 부분이 없습니다. 사회를 살아가다 보면 그런 부분이 필요합니다. 그런 부분을 누가 채워줘요? 재가자들이 채워주면 되는 거라. 그렇다고 여러분들에게 돈을 갖다 많이 스님한테 주라는 게 아니고, 마음을 갖다가 그 필요한 부분들을 자꾸 채워줄려고 노력들을 해라는 거라.
그다음에 스님들에게 자꾸 법을 청하십시오. 법을 들으려고 하고 법을 청해야 되지, 법을 청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 스님이 발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법석의 자리를 잡고 마련하려고 해야 됩니다.
그리고 아까 저 마지막에 얘기하신 분, 자꾸 질문하십시오. 자꾸 질문해요. 의문나는 것이 완전하게 해결될 때까지 자꾸 질문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자기의 지식을 내세우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비방할 목적으로 질문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경우도 있는 그대로를 갖다가 밝히기 위해서 그것을 갖다가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 질문을 해야 되는 것이지, 시험해 보려고 아니면 나를 드러내려고, 그래서 그걸 가지고 그 스님이 설혹 잘못 얘기했다 하더라도 그걸 가지고 비방할려고 해서 질문해선 안 된다 하는 거라.
주의해야 될 것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들이 해야 될 몫입니다.
당연히 스님들은 여러분들에게 해야 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이 있죠.
오늘은 시간이 다 됐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스님들을 볼 때 주의해야 될 것을 1분만 더 할게요.
스님들을 개인의 스님으로 보면 안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부처님 법을 전해주는 전도사의 역할로서 볼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스님이 부처님 법을 전하기 때문에 부처님과 똑같이 봐야 됩니다.
전해주는 능력은 스님들마다 틀립니다. 어떤 스님은 잘 전해주기도 하고 쉽게 전해주기도 하고 어떤 스님은 조금 못하기도 하고 합니다. 그렇지만은 그건 능력의 차이인 것뿐인 것이지. 그 스님이 법에 맞게끔만 그 법을 전해준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그냥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래서 모든 스님들을 부처님과 같이 자꾸 생각을 해야 됩니다.
삼배 해봤어요? 스님만 보면? 이번에 불교박람회 가니까, 불교박람회에 있는 집행하는 분 중에 한 분이 눈물을 찔끔 흘려요. 왜 우느냐고 보니까, 부산에서 누가 내한테 공부를 했다가 서울에 와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스님이 올라온다 하니까 와가지고 스님이 여기 자리에 앉아있으니까 그 땅바닥에 엎드려가지고 절을 세 번 꼬박꼬박 하는 거라. 자기들은 생각을 못했다는 거라. 대부분 땅바닥이면 사람들은 그냥 서가지고 이렇게 하려고 하지 그 땅바닥에 그냥 꿇어 엎드려가지고 그렇게 절을 할려고 생각들을 못한다는 거라. 여러분들 그런 마음 내 봤어요? 어떤 스님이든.
테라와다 불교국가에 가보십시오. 인제 출가한 스님이라 하더라도 따로 이렇게 만나지면 그 진흙탕이라고 하더라도 꿇어 앉아가지고, 삼배를 먼저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왜? 그 스님이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고, 장차 부처님이 될 분이기 때문에! 부처님과 동일하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동일한 부처님이기 때문에 설하는 법들도 동일하다고 봐야 됩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시길 바랍니다. 알겠죠.
자! 삼배 한번 해봅시다. 사-두 사-두 사-두!
부처님의 진리 따라 살아가면서 항상 행복하고 또 수행 열심히 하는 불제자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짯따-로- 담마- 왓단띠, 아-유 완노- 수캉 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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