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정진/위빳사나 수행과 알아차림

오취온 관찰 ③ 인식(지각) ④ 상카라(형성, 행) ⑤ 의식

담마마-마까 2018. 3. 6. 10:48

 

③ 인식(지각)

 

                             http://cafe.daum.net/satisamadhi/8mRV/16 사띠사마디 카페

 

계속해서 오온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선명한 사띠로 오온을 관찰하면 부처님의 가르침 전체가 이것을 중심으로 설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사성제, 팔정도, 12연기, 업, 윤회 모든 것이 오온을 중심으로 설해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마하니다나경에서 “이 세상의 모든 언어, 이론, 모든 설법들이 오온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모든 물체는 두 가지에 속하게 됩니다. 우선 형태(물질)에 속하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것에 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어휘, 지식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만약에 이름이 없으면 언젠가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냅니다.

 

불교 이야기 중에 아누룻다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아누룻다는 어머니가 항상 “오냐 오냐”하면서 항상 호화롭게 키워서 “아니다”라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이 “예스”라는 말만 듣고 살았습니다. 그는 케이크가 먹고 싶으면 시종을 어머니께 보내서 가져오게 했고, 또 먹고 싶으면 또 가져오게 해서 먹었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네” 소리만 들었기 때문입니다. “케이크 가져오라.”고 시종에게 이야기하면 “네”또 가져오라고 해도 또 “네”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결국은 다 먹어서 케이크가 없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종이 어머니께 케이크 달라고 했을 때 어머니가 “내 아들에게 가서 케이크 없다고 전해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시종이 아누룻다에게 가서 케이크가 없다고 "노 케이크(No cake)"라고 하자 그러면 “노 케이크 가져 와라.”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새로운 단어 하나를 창조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떤 소년이 있었는데, 그 소년과 그의 아버지가 나를 공항에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내가 그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떤 자동차를 갖고 싶으냐?”라고 물으니 그는 “저는 중고차를 갖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떤 중고차를 원하는가?”라고 다시 물으니 “중고차 말입니다.” “어떤 종류의 중고차 말인가?” “그냥 중고차 말입니다.”라고 중고차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이 소년의 머릿속에는 중고차라는 단어가 꽉 박혀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어 다니는 어린 아이에게 테니스공을 주면 입에 넣습니다. 입에 넣고 아무리 먹으려고 해도 먹을 수가 없으면 던져봅니다. 던지면 데굴데굴 굴러서 저 쪽으로 갑니다. 그러면 아이는 그때부터 그것이 장난감인 줄 알고 장난감으로 사용합니다.

 

지금 어린아이가 공을 가지고 노는 경우와 대비해 볼 때, 처음의 공은 물질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공을 입에 넣어 볼 때 어떤 느낌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느낌입니다. 그 다음 모양이 눈 안에 들어옵니다. 이것이 바로 인식작용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자신의 인식작용을 통해서 자신의 행위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의식입니다. 그리고서 마지막으로 그 아이의 머릿속에 공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특징을 마음속에 새겨 넣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름을 만들어내는 작용입니다. 그것이 의행(意行), 행의 작용, 상카라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형태와 이름, 두 가지 중의 하나에 속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름을 잘못 설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책에 보면 나마, 이름을 “굽어지는 성품을 가진 것”이 바로 이름의 특성이라고 되어 있는데 잘못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설명입니다. 이 태양계 속의 모든 것은 무언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와 계신 여러분들이 모두 이름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름입니다.

 

어제 물질과 느낌의 특성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물질은 마치 비누 거품과 같고 느낌은 물방울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오온에서 ‘온(蘊)’은 더미, 무더기라는 뜻입니다. 몸을 색온, 물질의 무더기를 색온(色蘊)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물질은 수많은 물질의 작은 입자들이 합쳐진 하나의 무더기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느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 드렸듯이 느낌에는 108가지의 느낌이 있습니다. 이 많은 느낌들이 모여서 하나의 느낌의 무더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느낌이라고 하지 않고 느낌의 무더기, 수온(受蘊)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중간부터 세 가지, 인식, 상카라, 의식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인식인데 이는 신기루에 비유됩니다. 사막에 갔을 때 실제로 물은 없지만, 빛의 굴절작용에 의해서 마치 물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속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식이란 것은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속임수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아는 것이다.”라고 말은 하지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대보름날 아이들이 깡통 속에 불을 피워 빙빙 돌리는 쥐불놀이를 할 때 보면 마치 둥근 원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의 눈이 속는 것이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인식은 모두를 속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신기루의 작용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환등기에 의해 화이트보드에 있는 글씨를 보면 까맣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글자를 크게 확대해 보면, 글자가 아니라 수많은 작은 입자들이 모여 있는 검은 점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확대해 볼 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다만 현재 상태에서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어떤 정보만 가져올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식은 신기루에 비유됩니다.

 

저 글자의 모양도 얼핏 보기에는 변하지 않고 있는 것 같지만, 저 글자를 구성하고 있는 이 환등기와 컴퓨터를 통해서 굉장히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몸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마치 번개의 속도, 그 정도로 빨리 변하고 있습니다. 몸 역시 몸을 현미경으로 보면 수많은 입자들이 변하고 죽고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여기 조금 전에 보신 빨간 점(포인터)도 계속 거기서 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요소들이 점을 만들기 위해서 그 점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우리의 생명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변화를 보지 못합니다. 다만 시간이 경과하여 어떤 변화가 생겼을 때 하나의 단계마다 이름을 지으면서 파악해 갑니다. 예를 들어서 아주 어린아이가 소년이 될 때, 사춘기, 청년, 노년이 될 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화를 보고, 단계 별로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변화를 확인합니다.

 

인식이라는 것은 이와 같이 속임수를 쓰면서 우리 눈앞에 나타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 인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식은 또한 변화를 하며, 인식 자체가 변화하는 것, 변화가 생기고 변화가 사라지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수행에 있어서도 우리는 수행에서 “마음을 현재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것에 집중을 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것이 현재 일어나는 현상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입니다.

 

 

 

 

④ 상카라(형성, 행)

 

상카라(行)는 바나나 나무에 비유됩니다. 한국에서는 바나나 나무가 없으니 양파에 비유하겠습니다. 양파는 영어로 “어니언(onion)”입니다. “onion”은 ?on?과 ?I?, ?on?의 합성어입니다. 이는 “‘나(I)’는 계속해서(on and on) 살아간다.”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가운데 있는 "나(I)"가 업을 만듭니다. 상카라는 내가 있으므로 계속해서 업이 생기고, 내가 있기 때문에 생각이 하나의 모양, 형태, 표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마치 양파를 계속 까도 사실 안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파라는 하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만들어 내는 “나(I)”라는 것도 안에 들어가 보면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마치 있는 것처럼 커다란 관념의 “나”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단어(onion)를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왼쪽(on)은 탐욕이라고 생각하시고 오른쪽(on)은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나”라는 것 앞에 탐욕, “나”라는 것 뒤에 어리석음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인간으로서 생명을 얻는 그 순간, 어머니와 아버지가 우리에게 인간의 몸과 생명을 주십니다. 이 때 왼쪽에 있는 어머니는 탐욕이라고 보시고, 오른쪽에 있는 아버지는 어리석음이라고 보십시오. 그렇게 탐욕과 어리석음이 나를 창조해 냅니다.

 

자, 이제 가운데 "나(I)"가 있고 왼쪽에 어머니, 오른쪽에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가 전혀 말을 안 듣고 에고가 심하고 아주 자만이 크고, 어머니가 볼 때 전혀 말을 안 들으니까 아이를 도저히 키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해결책을 알아보려고 상담소에 갔습니다. 그런데 상담소에는 성냄도 있고 화도 있고 질투 등의 컨설턴트가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컨설턴트들에게 “도저히 내가 내 아이를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하니 이 컨설턴트들은 그냥 “아이가 잘 자라고 있으니 그냥 놓아두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놓아두니 아이의 자만이 하늘 끝까지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가만히 보니, 어리석음이 가만히 보니 피곤해서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도 컨설턴트들에게 가서 물었지만 어머니와 같은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 탐욕과 어리석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계속 아이를 키우고 보호하면서 아이를 성장하게 그냥 내버려 둡니다.

 

여기서 상카라의 무더기(行蘊)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는 “양파의 집합체(union of onion)”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언하면 우리가 계속해서 이 세상을 윤회하고 가는 이 고해(苦海)는 상카라 즉 양파라는 짐을 계속 만들어서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 양파의 짐, 상카라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가 가는 고해는 끝없이 끝없이 길어집니다. 우리가 어느 날 수행을 통해서 그 짐을 내려놓고 깨달은 이가 되었을 때, 우리는 “짐을 내린 자”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렇게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짐을 내려놓을 때 마지막 목표인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엔라이튼먼트(enlightenment) 즉 깨달음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짐이 가벼워 졌다.”는 것과, “마음이 어둡지가 않고 환하다.”는 것 두 가지입니다. 전자는 우리의 모든 짐을 내리고 “나”를 파괴시킨(destroyed) 상태가 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의지 즉 상카라(mental formations)는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 네 번째 무더기(蘊)인 상카라(意行)는 좁은 의미에서는 의행(意行)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나머지 네 가지 모두를 포함합니다. 다시 말하면 상카라는 색수상행식 모두를 포함합니다. 상카라(의행)의 뜻은 하나의 존재로 일어나서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것, 다시 말해서 생성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이 상카라에 속합니다. 이것은 또한 일어나는 성품과 더불어 눈에 보이고 다시 사라지는 성품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상카라에는 세 가지가 있다. 일어남이 인식되고 사라짐이 인식되고 변화가 인식된다. 이렇게 일어남, 사라짐, 변화됨이 모두 인식되는 특성이 있다.”

 

넓은 의미에서는 이 모든 것이 상카라에 속합니다. 다만 여기 오온을 말할 때, "mental formations 혹은 volitional formations"이라고 할 때는 의도 또는 의지를 의미합니다.

 

내가 지금 비유하고 있는 양파(onion)라는 영어 단어는 대충 생각해서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12연기의 의미를 파고들어서 모두 연결시켜서 하나의 단어로 만든 것이니 여러분들이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12연기에서 “무명으로 인해서 상카라가 일어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명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탐욕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명이 있고 탐욕이 있는 것에는 항상 “나(I)”라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무명, 탐욕, 나” 이 세 가지가 바로 업의 세 가지 요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있을 때 우리는 윤회하게 됩니다.

 

상카라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업을 일으키는 상카라, 두 번째는 불선업을 일으키는 상카라, 세 번째는 예를 들면 무색계 선정에 들어갔을 때 생기는 승화된 상태의 상카라(변화를 거부하는 상카라)입니다. 상카라이지만 특별히 고귀하고 승화된 상카라이므로 따로 분류합니다.

 

상카라는 또한 업(業)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 업이라는 것은 “나” 때문에 계속 업이 지어져서 계속해서(on and on and on) 윤회하게 됩니다. 그 원인은 바로 “나”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상카라에는 가운데 “나”가 있어서 상카라가 자꾸 만들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치 상카라 안에 실제로 영원한 “나”가 있고 그것이 계속해서 마치 윤회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사람들은 생각이나 어떤 의도가 일어날 때, 마치 그것에 “나”가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것은 마치 양파와 같아서 계속 파고 들어가 봐도 마지막에 안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그 생각을 파고 들어가면 거기에 “나”라고 하는 것은 관념적이고 환상적인 “나”가 들어 있을 뿐, 실제로는 영원한 어떤 실체는 없는 것입니다.

 

            

⑤ 의식

 

의식은 마술사의 요술에 비유됩니다. 요즘은 영화에서 애니메이션 등의 다양한 기술을 이용하여 실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보고 있지만 실제로는 없는 것입니다. 의식이라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마술로 만들어낼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오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은 바로 깨달음을 얻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첫 번째 법문을 듣고 첫 제자 5명 중에 꼰단냐만이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인 수다원이 되었습니다. 나머지 비구들은 부처님께서 두 번째 법문으로 오온을 설하신 다음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법문이 아낫따 락카나 경(무아경)인데, 이는 모두 오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계속 오온을 공부하고 있는데 오온을 깊이 공부하자면 한이 없고, 또 법념처의 다음 부분을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우선 마지막 정리를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마지막에 우리가 오온을 보면서 얻는 지혜, 여기에 “수행자는 법을 법들 안에서 명상하고 밖으로 명상한다.” 이 부분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하면, 오온을 우리 몸 안에서 보되, “안에서”라는 말은 자기자신 속에서 본다는 말이고, “밖”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몸이라는 뜻입니다. 나의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몸의 어떤 작은 활동이라도 일어날 때에는 오온의 다섯 가지가 모두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것은 항상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앞의 “법을 법들 안에서 본다.”라고 할 때 뒤의 법들은 “물질들이면 물질들, 느낌들이면 느낌들”이고, 그리고 앞의 법은 이 모든 법들 중에서 지금 구체적으로 우리가 보고 있는 하나의 법이라는 의미에서의 법입니다.

 

그러면 법이란 무엇인가? 법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법을 법들 안에서 본다.”라고 할 때, 앞의 법(Dhamma)은 실재(reality), 진리(truth)라는 뜻이고, 뒤의 ‘법들은(dhammas)’ ‘일어나는 현상들’을 의미합니다. ‘물질이 일어나는 것, 물질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할 때의 물질 그 자체는 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질의 일어나는 현상, 사라지는 현상을 합한 것’은 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법들은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입니다.

 

법을 법들 안에서 오온을 보되, 먼저 자기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오온을 보고, 그것으로 미루어 봐서, 유추해서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오온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안과 밖에서 동시에 봄에 의해, 나에게 보고 타인에게서 봅니다. 그렇게 보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바로 ‘오온에 관한 한 나와 타인의 오온이 다를 바 없다. 나의 오온이나 타인의 오온이나 모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 더 붙인 다면 고온(苦蘊)이나 하나 더 붙일 수 있습니다.(웃음)

 

우리가 사띠할 때에는 “이것의 일어나는 현상을 보고, 사라지는 현상을 본다.”라고 멋있게 표현했지만, 그냥 간단하게 “일어남을 보고 사라짐을 본다.”라고 아시면 됩니다.

 

그리고 “수행자는 이것을 따라가면서 지켜본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일어나는 것, 사라지는 것을 일어나지 말고 사라지지 말라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과 함께 하면서, 자연 현상과 더불어서, 지켜보며, 여러분들이 사띠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에는 “여기서 우리가 보는 오온, 마음의 대상은 어떤 다른 목표가 있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통해서 무상과 무아와 고를 보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오온은 우리가 거기에 집착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오온이란 것은 무상과 무아와 고를 발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은 “수행자는 오온에 의지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고 살아간다.” 여기서 제목이 오온이 아니고 오취온임을 잊지 마십시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지금 집착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오온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오온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와 있는 “세상의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할 때 이 세상은 소우주 바로 우리의 오온입니다. 오온 중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출처   http://cafe.daum.net/satisamadhi/8mRV/18